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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39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野人 第一
끙 ..." 하고 임오근이가 또 한번 신음소리를 틀어냈다.
동창이 이미 훤했다.
여느날 같으면 이미 병사를 한 바퀴 돌아보며 몇 사람 남아 있는 병자들의 용태를 간심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목침을 세웠다 뉘었다 하며 자리에 누운 채였다.
'허준 ...'
자기의 소임이 아님에도 으레 새벽같이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병자들도 이젠 자기나 도지보다 허준에게 신뢰의 정을 보이는 것을 임오근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병자의 간밤의 병세를 묻고 그 대화중에도 병자의 등을 쓸어주는 따위 '수작'은 않았다.
허준이 약재창고로부터 병사의 근무를 명 받고부터 시작된 그 풍경을 보고 임오근은 아차 했다.
병자에 대한 그 작은 성의는 기실 병자에 대한 인심을 얻는다기보담 유의태의 눈에 들 첩경이라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
하나 그걸 깨달은 뒤에도 임오근은 허준의 흉내를 내지 않았다. 허준의 그런 행동을 임오근은 동료 선배들을 젖혀놓고 저 혼자 유의태의 눈에 들고자 일부러 꾸미는 간기처럼 보았다.
그러나 허준이 병부를 적는 솜씨며 때로 드러나는 지력이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허준의 존재는 그에게 조석으로 불편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상이 어젯밤 기어이 눈앞에 나타
나고 만 것이다.
자기가 허준에 비해 8년 선배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허준보다 8년을 더 보고 배워왔다는 그 자신감이 여지없이 무너진 하루였다.
그의 소망--
그의 절절한 소망--
영남 일대에 관향을 둔 내노라 하는 명문거족들로부터 보내오는 사인교를 타고 유유히 불려다니는 유의태와 같은 도도한 명의까지는 못 되더라도 제 고향 김해 그 부내에서는 임오근이란 이름 하나로 존경받는 의원이 되리라는 오직 그 소원만으로 유의태의 문하에서 14년을 버텨온 터였다.
그리고 내심 유의태의 의발을 전수받을 사람은 스승의 아들인 도지 이외에는 자기뿐이노라 믿고 있었는데 그의 자부심과 소망은 끝장난 것이다.
도지의 방에 의원이 되려는 자가 기필코 보아야 할 그 요긴한 서책들이 쌓여 있는 건 너나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읽고 쓰는 데 자신이 없는 영달이나 꺽새 같은 자들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고 허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책을 빌려보는 건 부산포와 자기뿐이었었다.
그러나 그 부산포는 유의태의 독서량이기도 한 그 도지의 방대한 책을 다 뒤적일 의지는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그는 그까짓 것 모두 꿰어봤자 잡병 따위로 분주하기만 할 뿐이라며 돈이 벌리는 부인병과 소아병 쪽을 주로 뒤적이고 필요한 대목들만 베끼는 쪽이었다. 하나 그 부산포가 장쇠들과 작당, 병자의 가족들에게 잔돈푼을 뜯어쓰는 꼴을 보자 임오근은 일찌감치 부산포는 자기의 경쟁대열에서 제해에 놨었다.
"한데, 저 허준."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그 허준이 어젯밤 스승 유의태의 벼락치기 질문의 대목대목에 대답해간 내용들은 내가 후계자노라 여기던 임오근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뜨린 완벽한 대답들이었다.
'허준이 저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어!'
임오근은 신음 대신 어금니를 악물었다. 허준에 대한 오기로 꼬박 밤을 지샌 그 임오근의 핏발 선 눈에 파란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의안군?" 하고 아침상을 물린 뒤부터 주안상을 명해 들인 방에서 유의태가 안광익에게 물었다.
"금상전하의 셋째아들이지. 저경궁 인빈 김씨의 소생이시고."
"한데?"
"벗님 같으면 어쩌겠소? 농액(고름)이 골수에 스미고 있는데 환부를 째지 않고 어찌해."
"그래서?"
"한데 환자의 지체가 금지옥엽인 왕자이고 보니 송학규 이자가 차일피일 미루고 감춘 게지."
"왕자의 병을 감추어?"
"왕자의 병을 떠맡는다 함이 어찌 아무에게나 좀처럼 있는 기횐가. 다행히 병을 낫우면 정하고 제 이름이 드러날 기횐데 그래서 아직 덜 곪았다 아직 덜 곪았다 하며 늦춘 게야."
"좀 알겠구먼 ... 한데 그 송학규란 뉜가?"
"양예수의 졸개지."
"졸개라? 하긴 전조 때부터 어의를 맡아 내려오는 양예수가 제 사람 곳곳에 박아놨음직하지.
핫핫, 그래서?"
"하루 불려갔어."
"송학규란 자에게?"
"그잔 나보다 후학일세. 양예수가 부른다기에 갔어."
"양예수와는 사이가 그만하던가?"
"웬걸, 그자와 나하곤 또 얘기가 있지. 그 얘기부터 할까? 핫핫, 언젠가 정명공주(선조의 첫째딸)가 미령(병환이라는 뜻)할 제 저희가 받아온 처방이 내 눈에는 아니야. 그렇다고 이의를 달다가는 어의 양예수의 권위를 내리 깎는 꼴이라 말없이 받아들고 와서 내 나름대로의 약재를 섞었네."
"내의원에서 의정한 이외의 약재를 쓰는 게 발각되면 목이 다섯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나도 내 의술이 있는데 남이 지시하는 방법대로 하긴 싫었어. 그래서 내 고집대로 했어. 마침 약국(왕실 전용 약재 출납소)에 나와 친한 인물이 있어서 다른 약을 타냈네."
" ..."
"해서 공주의 병을 낫웠는데 약재를 변동한 사실이 양예수의 귀에 들어가 다리가 이 꼴로 병신이 됐었지."
"그 짓을 들키고도 다리병신 된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로군."
"일이 밖으로 새나가 시끄러워지거나 내의원 제조(내의원을 총관리하는 명예직으로 좌의정이나 우의정 등이 겸임)의 귀에 들어가면 터져야 할 내의원 치부가 한둘인가? 그래서 쉬쉬 내의원 입들을 봉해 놓고는 내 다리에다가 실컷 분풀이를 하더구만. 헛헛."
"한데 처음 얘기한 왕자의 농부는 어찌 됐고?"
"쨌네."
"터뜨리지 않고 쨌단 말인가."
"터뜨리는 구멍으로야 뼈까지 볼 수 없으니."
"그렇기로 왕실에서 왕자의 몸에 칼을 대게 할 리는 만무일 터인데?"
"잘 아는구먼. 핫핫 ..."
방안의 얘기를 들으며 방밖에 서 있는 허준의 등줄기에 또 한번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방안에서 유의태가 탄식 같기도 하고 감동 같기도 한 한숨과 함께 다시 묻는 소리가 났다.
"겨우 돌 지난 핏덩이에게 칼을 대 ..."
"난 빨리 낫는 법을 택했어. 하여 독한 고름을 다 짜내고 뼈에 침식한 사기를 긁어냈지. 한데 누구의
기별을 들었는지 양예수들이 벼락같이 닥치더구먼, 송학규 등 나부랭이 서너 명을 달고서."
"흠."
"알고 보니 내 약함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던 부봉사(내의원 정9품직) 녀석도 나를 감시하는 양예수의 눈이고 귀였던 걸 몰랐던 거지. 해서 그 길로 오라에 묶어 금부로 넘기더구먼. 의국에서 의정하지 않은 방법인데 자의로 왕자의 몸에 칼을 댄 대역부도라는 거지."
"대역부도?"
"나도 그동안 인물이 컸던 게지. 제법 내 성명 위에 대역부도의 죄목도 써보고. 깔깔깔 ..."
허준의 입속에 침이 마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안광익의 웃음소리가 계속 났다.
유의태의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안광익에 대한 애정인 듯했다.
"그래, 금부에까지 끌려간 사람이 어찌 빠져나왔나?"
"금부에 가둬둔 이틀 후에 꺼내주더구만. 왕자의 환부가 씻은 듯이 나은 덕분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그 태독으로 인해 내내 눕지도 앉지도 못하던 생명이 말일세."
유의태가 안광익이 비운 잔에 술을 쳤다.
"하나 내의원에 돌아온즉 송학규 그자가 기어이 내 시술을 문제삼고 시끄럽게 구니 왕자의 보모로 있던 저 여자도 책임을 추궁받게 됐지. 밤이나 낮이나 왕자의 안부를 책임지는 것이 저 여자의 소임이었거든."
"보모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저 여잔 내 시술을 믿고 눈감았던 걸세. 그 이전에 사사로이 저 여자의 생가 조모의 위급한 병을 낫게 해준 일이 있는데 그 이후론 저 여잔 내 시술을 믿는 여자가 돼 있었네."
"그래서 그 뒤?"
"그러나 대궐이란 데는 말이 많은 데거든. 병을 낫운 공은 가상하나 칼을 쓴 행동은 용서가 안된다는 거지. 특히 저 여자는 내 의술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오로지 왕자를 보호할 의무만 있는데 임의로 광인의 칼 앞에 왕자를 내놓은 죄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세. 결국 저 여잔 약을 먹었어. 제 목숨 끊어 죽음으로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 ..."
"하나 서로 인연이 되려는 건지 약국 한직으로 내쫓긴 내 귀에 저 여자의 소문이 들렸어. 해서 그길로 달려가 저승길 절반이나 갔던 여잘 살린 후 그 밤으로 업고 나온 걸세."
"마치 남의 말 하듯 하는군."
"팔자에 없는 대궐 안에 살면서 느낀 게 있었지. 대궐에는 사람 수에 비해서 의원이 너무 많다는 걸, 그리고 탕약이나 지시하고 침이나 놓는 술보다 부술에 뜻이 있는 나 같은 존잰 대궐 안에 있어 봤자다 싶고. 하나 나오고 보니 내 몸 의탁할 데라곤 그대밖에 없다 싶었네."
"그건 잘했네. 하나 앞으로 저 여자와는 어쩔 셈인가? 궁실에 속했던 여잘 마음놓고 데리고 살도록 세상이 너그럽진 않을 터인데."
"여기 술이 다했는걸."
친구 유의태의 걱정을 남의 말처럼 흘려넘기고 안광익은 자기 잔에 기울이던 빈 술병을 흔들었다.
"밖에 뉜고."
유의태가 문득 드리워진 발 너머로 누구의 기척을 느낀 듯 물었다.
발 너머로 나타난 허준이 허리를 굽혔다.
허준이 안채에서 술을 받아 사랑으로 돌아오자 유의태와 안광익의 화제는 허준이 처음 듣는 낯선 인물들의 근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어의 누구누구니 당상의원이니 또 내의원이니 하는 허준의 흥미를 돋우는 소리가 섞여나오고 있었다.
허준이 다시 마루 끝으로 다가가 섰다.
병사 쪽에서는 밤새 몰려왔을 병자들이 유의태의 회진을 기다릴 시각이었고 허준도 나가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하나 허준은 안광익의 화제에 막힘없이 대꾸하고 있는 유의태 가 오늘 따라 또 궁금했다.
안광익이 나타나면서 부쩍 내의원에 관한 화제가 오르내렸고. 안광익은 그곳에 몸을 담다 온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도대체 이 벽지의 유의태는 그 내의원의 우두머리들인 어의며 당상의원 들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름 아래 존칭 하나 붙임이 없이 함부로 이름들을 내뱉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御醫(어의)라면 누군가.
임금의 侍湯(시탕)을 책임진 사람이요 내의원에서도 의술에 정통함과 그 권능에 있어 최고의 인물일 터이다.
또 내의원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위로는 임금과 그에 딸린 왕족들의 건강을 지키고 심병을 맡은 막중한 소임의 관청일뿐 더러 그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 또한 뉜가.
나라 안에서 저마다 내노라 하는 의원들이 다시 수백 대 일의 경쟁 을 거쳐 발탁된 응시분야(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에서는 나라 안 최고의 솜씨를 지닌 인물들의 집단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조차 유의태의 말투는 싸늘했다.
방안의 두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갔고 잠시 허준의 뇌리에 도지에게 들은 내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팔도의 젊은 의원들이 너나없이 한번쯤 꿈을 꾸어보는 내의원 취재시험. 그 경쟁의 수에서 그리고 치열함의 양상에서 반가의 자제들의 과거에의 등방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과거란 나라 안 양반 가문들로 하여금 출세 의욕 을 북돋워주고 국정에 참여할 새 인재를 끊임없이 발탁한다는 그런 정책적인 배려가 깔려 있는 것이나 중인계급과 상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원 취재란 그런 정책적인 배려와는 거리가 멀다.
왕가의 시탕을 전담하는게 목적인 만큼 도대체 많은 인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내의원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각 1명씩 임명하고 있으나 부제조는 승지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소임)가 자동적으로 맡는 것이고 도제조 니 제조도 대신 속에서 명예직 으로 겸하는 것이요, 그 밑에 실무직인 첨정(종4품), 판관 (종5품), 주부(종6품)를 1명씩 두었고 어의라 해도 대개 이 정도의 품계를 받는데, 그것도 천출들에게 오품 이상의 관직이 주어질 적마다 조정은 으레 무엄한 관직이라고 반대가 시끄럽기 마련이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의술로 뽑힌 실무자로서의 3명이고 그 아래로 직장(종7품) 3명, 봉사(종8품) 2명, 부봉사(정7품) 2명, 그리고 벼슬의 최말단직인 참봉(종9품) 1명 등 8명, 도합 11명에다 따로 혜민서(특히 가난한 백성들의 질병을 돌보는 곳으로 요즘의 국립의료원 같은 곳)에 배치하는 인원이 직장, 봉사, 의학훈도 (정9품) 각 1명씩과 참봉 4명 등 7명, 모두 합해 18명에 여의라 불리우는 의녀들 22명이 궐내의 상궁, 나인 들을 대상으로 가벼운 침 정도를 놓고 혹은 간병의 소임을 맡아 적시에 배치되는 것이 내의원의 인적 구성인 것이다.
그러니 의녀들을 제한 18명의 내의원 직속 의원들은 그 자리에 버티고 끈질기기가 호두알 같고 칡뿌리 같아서 임금이나 왕족이 죽어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는 때나 나라 안에 돌림병이 크게 번져 의원들이 산지사방으로 불려다니며 동분서주할 적이 아니고서는 좀체 충원이 없다.
하나 그 하늘의 별따기처럼이나 어려운 내의원 의원에 취재 끝에 발탁이 되면 그건 곧 미천한 출신들로서는 꿈도 못 꾸어볼 입신출세의 보장이기도 했으니, 양반의 큰갓만 보면 눈 내리깔고 허리부터 휘어야 하는 미천한 신분인 의원들에게 취재에 합격했다는 첩지만 거머쥐는 날이면 평생을 두고 팔도 어디를 가도 성궁 임금을 시탕했다는 의술의 높은 경지를 인정받아 가난한 병자 따위 상대 않고 명문거족들에게 불려다니는 영화와 명예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그 내의원을 우습게 보는 투의 유의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의술의 본 모습이란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닌데 시속은 의업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알거나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로세."
안광익의 목소리에 조소가 어렸다.
"의원의 본 모습이 그런 것이거든 그대는 왜 자식에게는 내의원에 보내는 공부를 시키고 있나?"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하던가?
안 봐도 알지. 어줍잖이 양반 자제 네 말투 흉내내는 것하며 제 태어난 출신도 모르고 먹물깨나 먹고 나면 공연스레 한양 쪽을 향해 발돋움하는 것, 가업을 잇겠다는 그런 정성스러운 아이 같진 않네."
"잘 봤군."
유의태의 말이 남의 얘기하듯 퉁명스러웠다.
술잔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안광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왜 자식의 고삐를 휘어잡지 않나? 혹 재주가 있다 보거든 병들어도 아픈 체 못하고 끙끙거리는 불쌍한 것들을 보라 하게."
허준이 귀를 기울였으나 유의태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술잔 채우는 소리만 났다. 안광익의 목소리 가 다시 들렸다.
난 애초 내의원 따윈 목표하지 않았네. 내가 한번 그 취재에 응한 건 시하 의술의 경지가 어느 정돈지 내 재주로 부딪쳐보고 싶었고 더 큰 소원은 혹 관의 위광을 업으면 옥사에서 죽어나가는 송장들이나 헤쳐볼 그런 특권을 누릴까 해서였어."
유의태의 침묵이 길었다.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은 걸 안 후 진작 뛰쳐나오려고 하고 있었지.
내가 정진하고자 하는 건 부술 인데 그걸 써먹지 못할 바에야 게딱지 같은 내의원의 의원이란 명예에
연연하여 허송세월하기 싫었거든. 차라리 민간에 돌아다니며 수의 노릇이나 하는 것이 백 번 낫지.
하나 그건 나이 먹은 우리들의 경지지 젊은 아이들의 안목은 아닐세.
" ..."
"아마 내 집이 의업을 가업으로 하는 건 내 대에서 끝나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자식이 제법 재주는 있네, 총기도 있고. 하나 심지가 모자라."
당당한 유의태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나는 걸 허준이 긴장을 느끼며 듣고 있었다.
그건 밤새워 아들의 공부를 손잡아주던 유의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오뇌를 지닌 유의태의 진짜 모습 같았다.
"내가 바라는 그릇은 아니야. 그리고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작은 재주거든 작은 재주대로 다듬어주는 게지. 백성들이야 작은 재주일지라도 감지덕지 의지해 마지않지만 대궐에는 손재주 많은 자들이 많아. 굳이 자네 자식까지 보내지 않아도."
"그 말도 했네. 내의원의 됨됨이에 관해서도 일러줬고. "
양예수와의 관계도 얘기해줬던가
"그건 왜?"
양예수란 어의라는 직위와 함께 처음부터 화제의 중심에 오르 내린 이름이었다.
그건 나와 양예수와의 관계지 자식에까지 일러줄 이윤 없어.
"어째서."
이미 아득한 옛날 얘길세. 20년 전 ..."
그댄 그렇게 치부하나 몰라도 양예수는 그댈 잊지 않았어. 어떻게 잊을 수 있나. 그때도 그는 명종대왕의 어의였었네. 내의원에 취재 있을 적마다 시관을 도맡아하는 것도 요즘과 마찬가지. 한데 그댄 그 양예수를 어쨌나? 더구나 만인 환시중에."
유의태의 대답이 없었다.
만인 환시중은 아닐지라도 차라리 만인 환시중보다 더한 장소였지. 그의 수하 관원들 모두 보는 앞에서 닭의 몸통 속에 아홉 개 침을 박아가는 재주 겨루기를 하며 양예수를 어쨌나."
"소소한 일은 잊었어."
"그댄 양예수의 입을 열게 하고자 앙다문 어의의 입을 부젓가락으로 지졌지."
"부젓가락은 있지도 않았어."
"그럼 그건 비수였나!"
"젊은 날의 객기였을 뿐."
"그때 그대는 양예수를 죽였던 걸세. 아홉 개의 침으로 닭을 죽였듯이 그가 지금 살아남아 있는 건 겉껍데기일 뿐."
허준의 목구멍에 뜨거운 침이 넘어갔다.
그가 처음 듣는 스승 유의태의 과거가 쏟아 져나오고 있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