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지
칠십을 전후한 늙은이는 용감했다. 매스컴에서는 태풍 ‘나크리’가 북상 중이라고 야단이다. 지난달 모임에서 오늘 포항을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일주일 전에 휴대폰 문자메시지도 받았다. “당일 여덟 시 삼십 분까지 동대구역 포항 출발 승강장 앞에 모이기 바람” 아내는 하필 태풍이 온다는데 바다 쪽으로 갈 필요가 있느냐며 걱정이다. 아침 일기로 봤을 때 ‘나크리’ 정도는 별문제 될 게 없었나 보다. 회원 십 명 중 아홉 명 참석이다. 구십 퍼센트다.
오랜만에 함께한 기차여행이다. 약속 시각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없다. 사실은 모두 벌써 와 있었다. 연락을 책임진 친구가 기차 출발 시각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잡았다. 그때까지 내가 보이지 않아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대합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일행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꽤 덥다. 연중 가장 더운 칠월 마지막 주말이 아닌가.
승강장 앞은 대합실보다 더웠다. 왜 여기서 기다리느냐. 맞이방은 의자도 편안하고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다고 했다. 승강장 앞에서 기다리라 했는데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안 된단다. 초로를 지나 중늙은이가 되니 무척 소심해졌다. 고집도 배짱도 없다. 말 잘 듣는 초등학교 저학년 같다. 호기심과 융통성마저 없다. 혹시 하는 마음에 모임 시간도 삼십 분이나 당겨 놓았고, 장소도 승강장 앞이라 하니 앉을 자리마저 불편한 그곳에 모여 있다.
여객실은 시원했다. 한참 지났으나 모두가 정해진 자리에 얌전히 앉아 옆 사람 하고만 소곤거린다. 우리뿐만 아니다. 승객 전체가 조용하다. 차창밖에는 성하의 신록이 넘실거린다. 먼 산봉우리 위로 공활한 하늘이 가을을 재촉한다. 철길 따라 이어진 밭과 논의 곡식이 열매를 익히느라 분주하다. 산자락 끝마다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농촌의 풍광이다. 벗들과 함께하니 한층 더 운치가 있다.
포항에서 유명하다는 물회를 먹기로 했다. 미리 정해진 식당도 없다. 어시장으로 유명한 ‘죽도시장’의 횟집이 모여 있는 골목을 찾아들었다. 눈치 빠른 음식점 주인들이 자기 집에 오면 잘해 주겠다고 서로 안내한다. ○○식당이란 상호 밑으로 들어갔다. 회도 술도 성질 급한 친구가 시키는 대로다. 전 같으면 음식을 정하는데도 술의 종류를 찾는 데도 의견 모으기가 힘들었다. 모두 수월하게 따르고 있다.
포항운하를 찾아 나섰다. 형산강의 물과 영일만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한때 잘살아 보겠다는 개발 우선 정책에 형산강 지류의 물길이 막히고 바닷물이 동빈내항에 갇혀 썩고 있었다. 운하를 통해 새 물길이 흘러들면서 수질 개선의 효과를 보게 되었단다. 거기에 크루즈와 관광유람선을 띄워 운행 중이다.
운하를 따라 크루즈 매표소가 있는 전망대까지 걸었다. 물길 따라 조성해 놓은 수변공원이 무척 인상적이다. 흠이라면 만든 시기가 오래되지 않아 주변에 심어 놓은 나무들이 어리고 작아 그늘을 찾을 수 없다. 전통과 역사를 가진 명소가 되기 위한 지속적인 배려가 필요하겠다. 다행스럽게도 운하 따라 설치해 둔 조각 작품들이 주위에 심어 놓은 꽃들과 어울려 눈길을 머물게 한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간 벗이 크루즈 승선권을 예매했다. 선착장에는 많은 관광객이 북적인다. 얼굴이 까맣게 탄 승무원이 챙이 큰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승선할 사람을 차례대로 부른다. 우리 차례는 약 한 시간 후에 가능하단다. 전망대 아래 그늘을 찾아 앉았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승선 확인을 간 벗이 오늘 배를 탈 수가 없단다. 아직 밀린 사람들이 많아 우리가 배를 탔다가 돌아오면 귀가할 기차를 탈 수 없단다. “그 사람 처음부터 좀 정확하게 안내해 주지 않고” 한 마디 중얼거리고는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시간을 보니 어중간하다. 약주를 한 잔 더하기로 했다. 주인이 자연산이라고 우기는 도다리·광어·우륵 등 바닷고기 회를 안주 삼아 술잔이 오고 간다. 취기가 오르니 말이 많아진다. 세월호, 유병언, 7·30 보궐선거 등 사회현안에 대한 비평과 비판이 이어진다. 한 시간이나 기다리다 배를 타지 못한 억울함도 토로한다. 크루즈 승무원의 성의 없는 대답도 성토한다. 포항운하의 가치에 대한 의견도 저마다 논리가 정연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대화가 섞갈리기 시작한다.
돌아오는 기차 속은 조용했다. 늦게 마신 술 때문인가 잠이 쏟아진다. 깜박 자고 일어나니 개운하다. 오늘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벗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이를 생각하게 한다. 몇 년 전과는 참 많이 달라졌다. 세월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생각난다. 아침에 승강장 앞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모여 있던 모습. 식당에서 성질 급한 친구가 시키는 대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크루즈 관광을 위해 한 시간 이상 지루하게 기다리고도 배를 못 탔지만 큰 불평이 없다.
내 아니라도 세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벗들도 모두 변하고 있다. 나이와 비례해 여유가 있음을 느낀다. “나이를 먹으면 체험을 통한 인식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젊을 때는 경험이 쌓이기도 전에 행동하여 실패하는 일 많다.”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 ‘탈무드’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 복잡하고 어렵게 살 필요가 없다. 앞으로 너무 급하게도 느리게도 아닌 나이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겠다.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