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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
▶ 193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 전주 사범, 단국대 사학과,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 1963년 시집 [阿斯女] 간행
▶ 1967년 서사시 [錦江] 발표
▶ 1969년 간암으로 별세
▶ [금강], 창작과 비평 중에서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가난한 초가에서 생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전처 소생의 아들은 죽고, 후처인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기 때문에). 때문에 네 이복 누이들은 가난 속에서 신동엽의 희생양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신동엽의 유년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수탈정책을 극도로 강화하여 헐벗고 굶주림이 지배하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다.
부여초등학교 시절에 신동엽은 과묵하고 내향적 성격이었다. 곧잘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고, 6년간 내리 우등상을 탈 정도로 두뇌가 명석했다. 6학년 때 '내지성지참배단'의 그 학교 대표로 뽑혀 보름간 일본을 다녀 오기도 했다(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아들을 통한 신분 상승의 의지를 갖게 된다).
1943년 입학. 그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가난한 수재들이 열망하는,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사범학교다(학비가 훨씬 적게 들고 의무적이지만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기 때문에). 신동엽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문학,종교,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다. 일제의 무리한 근로봉사와 굶주림으로 건강을 잃어가던 이 시기가 비로소 민족의식에 눈뜬 시기라고 추정해 봄직하다. → 재학 중의 8·15해방 :그 당시 그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그 후, 1948년 남한 총선을 반대한 동맹 휴학 가담으로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또, 그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 학생들에게도 끌려가 심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좌·우익에게는 '중립'으로 여겨지는 그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중 자체가 더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범적인 식민지 학생이나 혼자만의 문학세계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다른 내면의 변화을 나타낸다.
1949년 사학과 입학.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한 민족주의가 좌절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恨)의 서정으로 표현한 <나의 나>를 쓴 것이 이 때이다.(발표는 1962년 6월)
6.25 전쟁은 신동엽의 정신과 육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 시기이다. 7월부터 9월까지 부여에서 인민군의 강제부역을 함으로써 수복 후 부산으로 도피, 12월 방위군으로 징집됨. 군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이듬해 2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귀향한다.
오랜 요양을 필요로 한 이 귀향길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민물의 날게를 생으로 잡아 먹는 바람에 뒷날 간디스토마로 고생하다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다.
→백제 사적과 갑오농민전쟁 전적지 답사 : 대전 전시연합대학 재적 중. 이는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이 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봉건·반외세의 갑오농민전쟁에서 그는 '적'을 인식하게 되는 확실한 역사의식을 가진다.
1953년 졸업 후 서울에서 친구의 헌책방 일을 하며 자취를 했다. 여기서 소설가 현재훈과 아내 인병선을 만난다.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부여에서 신혼집을 차렸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아내의 양장점 개업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자 구상회 등 문학지망생들과 어울려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그 후 보령농고에 취직하였으나 디스토마가 발병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서 가족과 헤어져 본가에서 요양한다(폐결핵으로 오인하여). 이때 시쓰기에 몰두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를 썼고(1959년 조선일보에 20여행이 삭제되어 실림),
이 시로 인해 시인 박봉우와 만나 참여시인으로서 둘도 없는 지기가 되었다.
교육평론사 재직,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삶의 시작. 1960년 [교육평론]에 <싱싱한 瞳子를 위하여>를 발표, 미래 지향적 태도를 보인다.
4.19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대표적 참여시인이 되게 했다. <학생혁명시집>엮어 4.19의 정신을 자유와 정의로 읽고, 승리와 그 감격을 노래했다. 그러나 미완의 혁명은 쓰라린 좌절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 : 1961년. 이로써 사망할 때까지 8년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혁명의 좌절로 인한 정신주의에 몰두한 시기로 정신사적 시론 <時人精神論>을 발표(1961.2), 무정부주의·동양적 정신주의·민족주의를 나타낸 시관을 보여준다.
4.19의 좌절로 더욱 정신주의에 침잠한다. 정지척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1962년 건국대학원에 입학, 정신주의로 도피해 버티고자 한다. 이 때 쓴 시는 참여시 성격이 강한 작품에도동양적 형이상학으로서의 정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시집<阿欺女>).
그 후 <주린 땅의 指導原理>(1963.11)에서야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정신주의 우세로부터 돌아와, 현실 참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게 된다.
1964년 굴욕적 외교인 한일회담 일정합의와 정보기관의 학원사찰로 인한 학생 시위. 그러나 계엄 선포와 많은 학생들,정치인,언론인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고 좌절한다.
→이로써 신동엽은 정신주의의 안주에서 현실로 뛰쳐나오게 된다.(한일 협정 비준반대 서명참여).적극적 현실 참여로 나온 <발>,<4월은 갈아엎는 달>등이 발표된다.
【 60년대 후반, 】
도봉산 등산길에서 -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인 신동엽은 자주 등산을 했고,
집 안에서도 물구나무 서기나
요가 같은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술은 멀리하지 못했다
1967-1968. 개인 시사에서의 절정기.
→1967년 : 참여시의 극점인 <껍데기는 가라>(1월), 대작 <錦江>(12월)을 발표,
1960년대 참여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게된다
→1968년 : 시인으로서의 삶이 절정에 이른 시기.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의 한 해 동안 가장 왕성하게 창작을 했다. <봄은>(2월), 오페레타<석가탑>,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6월), <여름고개>(8월), <散文詩1>(11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 많은 유작이 창작되었다.
이 해 그를 확고한 참여시인으로 평가했던 김수영의 죽음을 체험한다.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사망. 3월 간암 진단을 받은 후, 퇴원하여 한약으로 버티면서 신체가 망가지고 혼수상태의 사경을 헤메며 투병하다 문병 온 남정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는 부여읍 사거리에서
백마강 쪽으로 가다 백제대교 못 미쳐 왼쪽으로
KBS송신소 가는 길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 사이에 그의 시비가 단촐하게 서 있다.
시비에는 그의 시 중 가장 서정적인 시
「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
山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시집 아사녀, 1963년>
【 신동엽의 생가는 부여읍 사거리에서
백마강 쪽으로 가며 오른쪽 첫 번째
골목길로 돌아 내려가다 보면
보훈회관이 있고, 바로 그 왼쪽에
옛집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래는 이엉을 얹은 전통 농가였는데
관리 문제로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
신동엽의 탄탄한 시정신과 민중적 서정성
신동엽은 4·19당시에 신인이었으나, 문단에 나온 직후인 59년에 이미 「진달래 산천」, 「새로 열리는 땅」등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는 김수영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담담하게 4·19를 노래했다.
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마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 비찬는 앙가슴과 물구비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 「아사녀」, 제6연 )
이 연의 앞에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아니면 조국의 기폭을 소았나?/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처럼 비수 같은 일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읊다가도 민족사의 시원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3·1운동으로 더듬어 내려와 4·19를 짚는 유장한 호흡은 앞날에 그의 시가 나갈 방향을 예시하고 있다.
신동엽도 61년부터 얼마 동안은 "순수하게 서정적인" 가락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탄력있는 노래를 되찾아 "...코리아의 주인은 우리가 될 거야요. 미워할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들끼리 실컷 미워하면 되는 거야요. 아사녀와 아사달은 사랑하고 있었어요. 무슨 터도 무슨 보루도 소제해 버리세요. 창칼은 구워서 호미나 만들고요. 담은 헐어서 토비로나 뿌리세요"라고 읊는다.
분단시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민족문학에 대한 이론정립이 시도된 70년대 후반보다 10여년이나 앞서 그가 이런 시를 썼음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이와 같은 역사의식, 민족의식에 바탕한 그의 탄탄한 시정신은 67년의 「껍데기는 가라」에서 절창(절창)을 낳는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혁명을 배반한 자들 또는 허위의 문화를 껍데기로, 진정한 민족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을 향그러운 흙가슴으로, 전쟁과 폭력과 압제를 쇠붙이로 은유한 이 작품은 17행 속에 민족문화의 진수를 압축하고 있다. 그 어떤 사회과학자의 명쾌한 논문도 이 시의 선명한 메시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신동엽의 장점은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 또는 그 살핀 바를 야무지게 표현하는 시정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 여러 곳에는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민중적 서정성>( 이 용어는 『마당』1982년 4월호에 신경림이 <민중적 서정성>을 쓴 것을 보고 크게 공감하여 필자의 취향에 따라 고쳐 쓴 것이다)이 감돈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종로 5가」, 1,2,3,연)
이 시의 다음 연들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그의 누나"일지도 모르는 "부은 한쪽 눈의 창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 "자갈지게 등짐지던 노동자", "끝나지 않은" "이조 5백년",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서 "비에 젖"는 "도시락 보자기"로 발전한다. 살던 땅을 떠나 서울거리를 헤매는 소년을 산업화시대에 이농해서 날품팔이가 된 농민의 아들로 전형화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주며, 마지막에서 시인과 그를 일체화시키는 이 시야말로 <민중적 서정성>의 극치를 보인다 하겠다.
60년대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제대로 소화도 못한 외국의 문예사조를 흉내내며 자기도 이해못할 시를 쓰거나 감상적인 영탄이나 음풍농월을 일삼고 있던 때에 신동엽이 이렇게 푸근한 ,공동체적 사랑>을 노래했다는 것은 경이를 일으킨다.
( 김종철 : 1982년 4월 22일 『외대학보』에 게재되었던 글임 )
4 ·19 이후의 민족문학과 신동엽
4월도 알맹이만 남고.......
1970년대의 중턱에 선 우리는 4·19혁명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문학적 과업이 바로 오늘 우리의 과제라는 인식이 뚜렷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3년간 그 어느 때보다 혹독했던 시련에도 불구하고 머지 않아 이 과제가 일단의 완수를 보리라는 확신에 차게 되었다. 따라서 현단계 민족문학의 사명은 이러한 과업완수를 위해 스스로를 점검하고, 당면한 시련을 이겨낼 저력과 미래에 대한 비젼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점검작업이자 우리 시대의 문학에 대한 구체적 비평작업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의 문학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의 과제가 60년대의 한 시작품을 통해 어떻게 제시되었던가를 살펴보자.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이것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의 첫 연인 바, 이 한마디야말로 민족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과 표현력으로써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 과제는 또 민족의식의 올바른 전통을 가려내는 작업을 요구하기도 한다.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의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제2연)
그런데 우리가 찾아 간직하려는 <4월의 알맹이>나 <동학년의 아우성>은 그 시절의 어떤 특정구호 특정행위가 아니다. 각성한 민중이 보여준 인간본연의 부르짖음이요 알몸 그대로의 드러남이다. 따라서 진정한 민족문학과 민족의식의 당면과업도, 4월혁명때처럼 학생데모가 있겠느냐느니 동학혁명에서와 같은 농민봉기가 바람직하냐느니 하는 식의 계산보다도 먼저 인간의 양심을 되찾고 이 벌거벗은 인간본연의 모습에 신뢰와 축복을 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제3연)
김수영은 이 대목을 두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 울리는 죽음의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말하며 "참여시에 있어서 사상(事象)이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획득하는 기술이 여기 있다"고 격찬한 바 있거니와(「참여시의 정리」, 『창작과 비평』1967년 겨울호), 1 ∼ 2연에서 제시된 과업의 달성이 결코 어떤 피상적인 정치행위로 충족될 수 없고 인간본성 자체에서 솟아난, 그리고 김수영이 즐겨 쓰던 표현대로 확실한 <죽음의 보증>을 통과한 행동이어야 함을 못박는다.
3연은 또 1 ∼2연의 외침이 <구호>가 아닌 <시>였다는 직관이 확인된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립>이란 단어도 한정된 국제정치학적 개념이 아님은 조태일씨가 지적한 대로이다. 『창작과 비평』1973년 가을호 「신동엽론」 참조.)
이렇게 첫 연에서 4·19 이후의 과업을 제시하고 2연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재확인하며 3연에서는 모든 시와 역사의 근원인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 자체에 든든히 기대어 선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드디어 분단시대 최대의 목표이자 민족의 변함없는 소망을 발원(發願)하기에 이른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흔히 말하는 조국의 자주평화통일은 여기서 한갓 정치적 구호가 아닌 드높은 시의 경지, 보편적 인간옹호의 경지에 다다른다. 사람을 죽이고 누르는 통일, 살벌한 쇠붙이의 지배를 위한 통일이 아니라 알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과 강토의 "향그러운 흙가슴"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남북통일은, 분단된 한국민족의 염원인 동시에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계시(啓示)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19에서 바롯된 민족문학의 현단계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인류적 차원의 비젼으로까지 이어져야 하겠다는 의식이 60년대의 우리 문학에서 이미 작품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백낙청 : 「민족문학의 현단계」(『 창작과 비평』 1975년 봄호)에서 신동엽에 관계된 부분만 발췌한 것임.)
▒ 작품 경향 ▒
1950년대의 우리 시단은 모더니즘의 물결과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의 조류로 크게 나뉘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진정한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모든 시인이 일치하는 형국을 드러내었는데, 신동엽은 이런 풍조를 철저히 배격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의 시세계를 출발시켰다. 당대 시단의 양대 주류를 거부한 채 처음부터 민중적 지식인으로 시를 익히고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50년대에 신동엽은 생애 가운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해방후의 갈등이 6·25와 남북 분단, 전후의 폐허로 이어지며 그가 겪게 된 허무와 상실감은 매우 컸다. 그의 의식은 민족사의 비극인 6·25를 체험하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된다.
이로 인해 민족의 정신적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동학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되었고, 이것이 서사시 「금강」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폐허에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데, 아픔을 딛고 시쓰기에 몰두하여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여행이 삭제되어 발표되고, 「진달래 산천」으로 불온성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60년 4·19혁명은 그의 의식세계의 충격을 주었다. 50년대 후반, 전후의 좌절감과 허무감, 허탈감 같은 것으로 거의 모든 시들이 패배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던 상황에서 발발한 4·19혁명은 시대적 흐름에 대하여 방향 감각을 상실한 시인들에게 신선하고 강력한 충격으로 작용해 새로운 세계를 발을 내딛게 한다. 이렇듯 4·19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는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고조되었다.
그는 4·19혁명을 찬양하는 시 「아사녀」를 쓰고 7월에는 『학생혁명시집』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62년 무렵부터 그의 시세계는 비교적 안정을 찾아 정신지향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당시 4·19에서 5·16으로의 반전은 시인들에게 희망에서 절망으로 심정 변화를 유도했고, 또 다른 좌절을 맛보게 하였다. 따라서 그 고통을 정신 지향적 자세로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에 그가 쓴 시들이 1963년에 첫 시집 『아사녀』로 간행되었다.
그 후 65년 초까지 신동엽은 거의 침묵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새로운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4·19에 대한 추상적인 기대와 희망이 무산된 뒤, 정신 지향적 세계에 머물던 신동엽은 그것이 갖는 현실 대응의 한계를 딛고 구체적으로 현실에 부딪쳐 나간다. 이 시기에 이르러 신동엽의 초기의 대지는 한반도로, 원초적 생명력의 그리움은 민족 주체성의 추구로, 과거 역사에의 관심은 구체적인 현실인식으로 전이되었다.
1965년에 시 「삼월」의 발표를 기점으로 '민중적 자기 긍정'에 도달한다. 그는 「발」, 「4월은 갈아 엎는 달」 등을 썼고 이어서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였다. 「껍데기는 가라」에 대한 조동일과 김수영의 평가를 시작으로 그는 문단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1967년에는 4800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문학의 결정판이 되었고, 그 결과로 신동엽은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이 때의 작품들은 대개 민족적 동일성을 훼손시키는 모든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기조를 이루며, 민중에 대한 자기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 시어 ▒
신동엽의 시어는 고유어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그의 시 소재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는 민족의 순수성 및 동일성 회복을 위하여 시적 표현으로 우리말의 순수성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고유어는 자연을 표상하는 시어가 많고,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노동이나 민속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또한 다수의 한자어를 사용하였는데, 한자는 관념적인 제목이나 추상적인 어구 혹은 강조하고자 하는 시어와 고유 명사, 특히 자연물, 문명, 인칭 등에서 높은 빈도를 보인다.
그리고 외래어의 사용은 대개 지명, 인명, 문명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경우에 국한하였고, 무질서하게 외래어를 쓰지는 않았다.
그는 시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상징적 의미를 형성하고, 단일 시편 속에서 반복됨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나타낸다. 아울러 그의 시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시어가 많이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시어는 감탄적 성향을 다분하게 드러냄으로써 시어의 '자기 표출성'이 강하다. 이 점은 시에 긴장감이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약화시킴으로서 시적 묘미를 절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소재 ▒
·原數性의 소재 : 숲속, 대지, 달밤, 원무 등 → 생명력이 넘쳐나는 대지,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세계 형상화
·次數性의 세계 : 현대 문명, 세계 전쟁, 모래밭, 고드름, 구름, 사막 등 →우리 민족의 역사적 모순, 현대 문명과 전쟁, 민중들의 삶
·歸數性의 세계 : 전경인, 대지를 갈아 엎고 씨뿌리는 행위, 강, 불, 눈동자 등 →대개 역동적인 힘을 동반한 소재, 수직 상승이나 수평 이동의 움직임을 통해서 현실 극복 의지를 보여 주며 순수성과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음
▒ 어조 ▒
강하고 뚜렷한 남성적 어조와 여리고 자기 고백적인 여성적 어조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어조의 혼용 양상은 그의 시에 흐르는 저항과 거부, 연민과 비애의 정서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여성적 어조는 한국 전통 시가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남성적 어조는 직설적이고도 능동적 측면을 보여준다.
그의 시가 직접적인 발언의 저항시로 파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정적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비극적 정서와 여성주의는 한국 시문학의 정서적 원형질로서 신동엽도 여기에 맥을 잇는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항시 민족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점이 전통적인 측면과는 다르다.
▒ 율격 ▒
그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 율격은 민요적 성격이 강하며 한의 정서를 표출한다. 짧고 간결한 행의 운율과 여성적 어조는 한을 드러내는 민요의 전통적 분위기로 이해된다.
그의 시 기본 율격은 민요의 율격인 3음보격과 4음보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율격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다양한 변용까지를 수용하여 현대적 감각을 살리고 있다.
▒ 문학사적 의의 - 참여시, 전통성 계승 ▒
그는 1950년대의 혼미한 문단에 발을 딛고, 1960년대의 이 땅 현대 시사에 현실 대응의 한 문학적 전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문학적 가치의 한 측면은 현대의 문명과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70, 80년대로 이어지는 민족문학, 민중문학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시는 전통적 요소의 시적 수용과 현실 대응이라는 문제를 잘 결합시켜 놓았다. 이 점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시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의 시는 여성적 어조의 문제, 민요의 율격과 고유어 및 토속어의 활용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한을 형상화하였는데, 그 이전의 시들이 대개 개인의 고백적 양상을 보여 주었던 점을 뛰어넘어, 그의 시는 민족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간 점을 가치 있게 들 수 있다.
▒ 시세계 ▒
50년대 전후 문인인 신동엽은 전후 시인들이 답습했던 '1950년대 모더니즘'을 향유하지 않았다. 농촌 정서를 바탕으로 민족의 토착적인 서정성을 구사하여, 역사의식을 담은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특히 그는 장시의 이야기를 담화함에 있어 과거 역사의 사실을 현재화하는 원근 조명법을 써 살아있는 현재로 역사가 복원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신동엽은 시를 개인적 즐거움보다는 '민족 공동체의 노래'로서의 시에 의미를 두었던 만큼 이념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시를 이념의 대행물이나 종속물 또는 도구화로 만들지 않았다.
그의 시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하늘, 눈동자, 껍데기, 알맹이, 4월, 동학, 아사달과 아사녀, 중립, 흙가슴, 쇠붙이' 등은 신비롭거나 원시적이며 상고 시대의 동양적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적인 즐거움과 함께 이념을 보다 순수하게 승화시키고 있다.
▒ 신동엽 시의 문학사적 위치 ▒
신동엽이 문단에 등단한 1950년대 말은 자유당 독재 정부에 의해 반공 이념만이 허용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진달래 산천'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의 아픔과 분단이라는 사오항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4 19와 5 16을 겪으면서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그 예가 장편 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단시이다. 이러한 시를 통하여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민중의 정서에 따른 시적 형상을 창조한다.
즉, 그는 민족의 현실이 여러 불합리한 상황들에 의하여 왜곡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기에 이른다. 이런 측면에서 1960년대는 김수영의 시와 더불어 참여시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 신동엽의 평론 ▣
시인정신론
- 신 동 엽
1
한 사람의 인체에 백여명의 의사가 엉겨 붙어 제가끔 전문적인 한 가지씩만 분해해 가지고 달아나 버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손톱·발톱미장 전문연구의가 새로 나왔다 해도 결코 놀랄 세상은 이미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씨부렁거리며 현대사의 피부면(皮膚面)을 겉으로 더듬어 갔다. 그것은 마치 벌집처럼 구멍난 포대자루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들의 몸으로 안간힘 쓰며 덮어 가려는 늙은 역사의 발자취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열부족으로 위축되어 가는 피부를 피부약으로 고칠 순 없다. 흡사 발사된 산탄(散彈)과 같이 공중으로 흩뿌려진 현대의 문명파편 어느 곳을 뒤따라 가 봐도 그곳엔 침 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지금 현대를 진단하려 한다.
피와 정력과 인생으로 투쟁하고 계발하고 독을 마시어 간 아테네 철인의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 한갓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을 뿐이며, 도시마다에 우뚝 솟은 사변(思辨)철학의 크고 작은 상아탑에서는 두개골만이 남아 있는 정신기술자들의 반인정적인 창백한 정력에 의하여 말라 비틀어진 사유의 형해(形骸)와 피 없는 허구로서의 언어적 체계 건축작업만이 직업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법조문, 대헌장, 정치원리, 왕봉학(王蜂學) 등등의 제품소에서는 노련한 맹목기술자(盲目技術者)들에 의해 수천년래 반복되어 온, 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왕도원리(王道原理)가 오색 칠색으로 장식 개증되어 각 지방 수혜국으로부터 모여 오는 교활하고 호전적인 두목 상인들에게 넘겨지고 있다. 그들 일단의 정치전문기술자들에게 인민이나 인생이란 이름의 구제현황이 무슨 소용으로 실감될 리가 있겠는가.
교황곡의 맴도는 신비탑은 허공 속에 다만 솟아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통째로 혈관 속에 흡수하여 자양분으로 소화시키려는 사람은 없다. 전문적으로 화장되고 광적으로 기교화된 현대예술의 단단한 기구성(機構性)과 조직성 속에서 사람들은 여남은 개의 음계부호를 뜯어 내어 오는 것으로 종생(終生) 만족하고 살아간다.
유럽의 고층건물 어느 화실 속에는 20여억 인구 중 단 두 사람의 준(準)이해자를 얻어 ○○파 속으로 들어가 버린 회화예술가가 있었다고 우리는 듣는다.
성서는 문법 연구가들의 문법 연구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며 성가(聖歌)는 성악가가 전임하고, 설교는 목사가, 예배는 신자가 각각 전임한다.
원자핵 연구소의 천만길 솟은 밀실 속에서는 가정도 세계도 자기 인생의 귀로마저도 말살당한 맹목기능자들의 발광적인 활약에 의하여 또 하나의 더 무더운 맹목기능자,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방사능의 집단을 분출시키고 있다.
문학이라고 불리는 단자가 직업명사화한 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며 그것은 다시 더 영업적인 아들에 의하여 분주히 분가되어 나가고 있다. 이발사, 구두수선공, 영문타자수 등 한 줄에 꿰 매달린 직업명패 가운데서 시업가, 소설업가, 평론업가 등 동류품적 명패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결코 난처한 일이 아닌 현대가 되어 버렸다. 신문은 다시 또 심리전문, 행동전문, 애욕전문, 계율전문 등 영업적 전문점포로 분가를 거듭해 나가고.
오늘날 철학, 예술, 과학, 경제학, 정치, 종교, 문학 등은 인생에의 구심력을 상실한 채 제각기 천 만개의 맹목기능자로 화하여 사방팔방 목적 없는 허공 속을 흩어져 달아나고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 어떻게 말하면 우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대지 위에는 우리가 나오기 전 이미 한 그루의 고목이 서 있었다. 썩은 고목의 둘러리엔 행복한 갑충(甲蟲)들의 행렬이 늘어붙어 오랜날부터 이어받아 온 관습적인 언어들을 적청(赤靑)으로 물들여 가며 기계적으로 뽑아 늘여 놓고 있었다. 순조롭고 합리적인 공동작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반맹목(反盲目)의 만인은 그 그늘로 기어 올라갔다.
우리들의 시대는 들떠 있다. 그 무엇인가 미래에 가리워진 운명적인 힘에 끌려 인류의 거품들은 성급히 들끓어 오르고 있다.
황하기(黃河期)를 벗어나 중세, 근대, 현대에 걸친 인류의 노력은 이상한 괴물 같은 거대한 축대 위에 선업(先業)을 이어 받아가며 거의 맹목적 관습적 동작으로 돌을 쌓아 올리는 일로 집중되어 오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과학적 발전, 정치이론의 진보, 언어수사학의 개화 등은 모두 이 축대 위에서 피어났다.
이 축대는 그 체계 밑에서 일하고 있는 만인의 눈에 한편 구석에서 있는 한 그루 고목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자체, 말하자면 절대적 전일자(全一者), 바로 그것으로 인식되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유물(唯物)과 유리(唯理),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실존과 이상 등 동일한 고목 위에 피어난 이들 버섯은 불행히도 자기들 스스로가 세계적 조화를 이루는 데 불가결한 절대적 성립자, 다시 말해서 뿌리를 달리하고 있는 자립적 나무들이라고 착각되어 왔던 것이다.
실은 광막한 대지 한 구석에 피어난 고목 속에서 시험되고 있는 잡다한 벌레들의 코러스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의 난립이········
이미 쌓여져 가고 있는 축대 위에 돌멩이 하나 보태 주고 간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고목 위에 따라 올라가 많은 동료들과 함께 귀뚜라미의 노래에 협주해 본다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순리로운 일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우리 이야기를 새로운 대지 위에 뿌리박고 새로운 우리의 생각을, 새로운 우리의 사상을, 새로운 우리의 수목을 가꿔가려 할 때 세상에 즐비한 잡담들의 살림은, 그리고 생경한 낯선 토양은 우리의 작업을 기계적으로 방해할 것이다.
황량한 대지 위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우리의 우리스런 정신을 영위하기 위해선 모든 이미 이루어진 왕궁, 성주, 문명탑 등의 쏘아 붓는 습속적인 화살밭을 벗어나 우리의 어제까지의 의상, 선입견, 인습을 훌훌히 벗어 던진 새빨간 알몸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잔잔한 해변을 원수성세게(原數性世界)라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세계(次數性世界)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세계(歸數性世界)이고.
땅에 누워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 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 세계이다.
봄, 여름, 가을이 있고 유년, 장년, 노년이 있듯이 인종에게도 태허(太虛) 다음 봄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의 무성이 있었을 것이고, 가을의 귀의가 있을 것이다.
시도와 기교를 모르던 우리들의 원수세계가 있었고 좌충우돌, 아래로 위로 날뛰면서 번식 번성하여 극성부린던 차수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바람 잠자는 석양의 노정(老情) 귀수세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교양으로 회고할 수 있는 한, 유사 이후의 문명 역사 전체가 다름 아닌 인종계의 여름철 즉 차수성 세계 속의 연륜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하늬바람을 눈 앞에 둔 변절기가 아니면 이미 가랑잎 물들기 시작한 이른 가을철, 우리들의 발언은 천 만길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기 위한 미미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두치 앞의 모이만을 보고 일평생 쪼아 다니는 닭의 정신을 가리켜 소원(小圓)이라 한다. 눈과 모이와의 두 치 간격을 직경으로 하여 한 바퀴 돌려 그린 원이 즉 그 닭의 정신의 크기이다.
문명에 관습되어 온 소위 현대식 지성인이라고 불리워지는 소시민들의 정신적 둥근 원은 고층건물과 고층건물 사이의 거리를, 숙소와 직장과 오락장과의 사이를 또는 서명(書名)과 인명(人名)과 개념과 개념과의 정신적 거리를 직경으로 하여 돌려 그린 원의 크기와 동일하다.
가령 불전저술가(佛典著述家)가 던지고 간 정신직경의 넓이는 그 어느 현상학적 체계가들이 던지고 간 그것보다 훨씬 멀고 멀었다.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한평생 길게 누워 졸다가 죽어 돌아간 사람이 있었다면, 나뭇잎에 고여 오른 이슬알이나 풍우에 밀려다니는 말 없는 모래알과 함께 그들의 정신적 환원의 크기란 부재(不在)이면서 최대재(最大在)인 우주환(宇宙環)의 기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엇인가 이야기하려 의욕하는 우리들의 처지와 지혜란 어중뜨기이다. 우리는 차수성세계 속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범지어진 속에서나마 최대재의 원을 지향하여 신명을 다스려 가고 있는 게 우리 인간수도의 서글픈 역사가 아니었던가.
3
인류의 봄철, 인종의 씨가 갓 뿌려져 움만이 트였을 세월, 기어다니는 짐승들에겐 산과 들과 열매만이 유일한 의지요 고향이었으며, 어머니 유방에 매어달린 갓난 아기와 같이 그들과 대지와의 음양적 밀착관계 외엔 어느 무엇의 개재도 그 사이에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에덴의 동산, 곧 나의 언어로 원수성 세계이어서 그곳에 차수성 세계 건축 같은 것을 기획하려는 기운을 아직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유구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물성(物性)은, 태양과 봄바람과 지열(地熱)은 언제까지나 그 씨앗으로 하여 씨앗으로만 덮어 있게 가만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떡잎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지 위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재주부리는 재미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들 인간들은 대지에 소속된 생명일 것을 그만 두고 대지와 그들과의 사이에 새로 생긴 떡잎 위에, 즉 인위적 건축 위에 작소(作巢)되어진 차수성적 생명이 되었다. 하여 인간은 교활하고 극성스런 어중띤 존재자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등록이 되었다.
오늘 인구의 수효보다도 많은 문명계층의 실내마다 범람하고 있는 불안, 공포, 전제, 부도덕, 파멸, 이런 말거리들은 과연 조급한 신경을 가진 소원군(小圓群)들이 단정하고 있듯이 불과 몇 십년적 현대의 시대적 특징에 그치는 현상일 것인가.
과연 인간의 감정이란 하루 이틀 바람볕에 용이하게 개조 변질될 수 있는 특질의 것인가. 우리를 분한케 하고 우리 운명을 불행 속으로 몰아 넣으려는 인류공동의 적, 우리가 싸워 무찔러야 할 공동의 적은 과연 현대의 구름낀 그늘, 수다하게 출연한 지엽적 현상들 가운데 그 전신이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천만에다. 우리 문명된 시대의 도시 하늘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 부조리, 광기성 등은 다름아닌 나무 끝 최첨단에 기어오른 뜨물들의 숙명적 심정인 것이다, 차수적 세계성의 오천년 현란(眩亂), 환언하면 인류의 장구한 여름철이 성과한 정신적 무성, 그 가운데서 우리는 될 대로 펴 우거진 오뉴월의 둥구나무를 보듯 오만가지로 발휘되고 요구되고 천하에 폭로된 바 인간의 지상적 운명과 능력과 그것의 한계를 관망할 수가 있다.
잠시, 인간의 천태만상한 성과와 역사를 한 몸에 시현하고 있는 거대한 둥구나무, 인류수(人類樹)를 그려 보자,
가지와 가지, 초단(梢端)과 초단, 잎과 잎, 교착과 거리, 낙조(落照)쪽으로 뻗어나간 황하계(黃河系)의 간지(幹枝), 그것들의 횡적 간격, 사찰·교회들의 뻗든 가지, 왕궁의 역사, 봉건영주의 말라붙은 이파리들, 사변철학의 가지, 첨단에 자리한 몇 사람들의 고치집, 바로 밑에 미처 분가를 못한 채 늘어붙어 농성(籠城)이룬 신유리철학(新唯理哲學)의 발아시도들, 위세당당히 기어올라간 연구실 물리학의 정점, 그것에 자리한 전자분열학의 아직 생존해 있는 티눈, 휘어져 올라간 자연과학, 거기서 또 다시 갈라지고 갈라져서 삭정이 이룬 인체맹장전문의의 계보, 손톱 미용학의 소(巢), 정치학 문학 총살법연구학.
이 숱한 가지들마다 나뭇잎마다 열린 가녀린 새 집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문화를 계속하고 생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20세기경의 허공중에 현란한 잔치를 베풀고 있는 수만 지엽간의 어느 첨단에도 우리의 소굴(巢窟)은 정좌되어 있었단 말인가.
문명인의 고향은 대지가 아니다. 그들의 출생은 허공 속에서 시종(始終)했다. 전복 등에 소라가 붙고, 소라 등엔 더 작은 조개가 붙어, 모르는 동안 행복하게 살아가듯, 그들의 호적은 7천년 축적된 조형문화적 부피와 인간상호관계의 허구스런 언어계층 위에 기록되어 오고 있다.
우리 인류문명의 오늘이 있은 것은 오직 분업문화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뿐 그것은 다만 이 다음에 있을 방대한 종합과 발췌를위해서만유용할 뿐이다. 분업문화를 이룩한 기구 가운데 <인(人)>은 없었던 것이다. 분업문화에 참여한 선단적 기술자들은 이 다음에 올 <종합인(綜合人)>을 위해서 눈물겹게 희생되어져 가는 수족적 실험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경인(全耕人)>의 개념은 오늘 문명인들의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편인(片人)들의 맹목기능자적 집단발효에 의하여서만 자재로이 개미집은 이루어지고 개미집은 부서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거품 무리와 같은 것이다. 하여 그들이 집단작업으로 받들어 이룩한 축조물이란 다름아닌 차수세계적이요, 강집적(强集的)인 현상 건축인 바 그 하나가 언어문화요 또 하나가 조형문화이다.
출발에 있어선 한갓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부대물(附帶物)로서 인간관계의 이기(利器)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 조형성·언어성은 마침내 그의 내부 발전을 거듭함에 이르러 방대한 연대관계 위에 총과 조직을 형성하여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오늘 인간의 대지를 덮었다.
흔히, 국가, 정의, 원수(元首), 진리 등 절대자적 이름 아래 강요되는 조형적 내지 언어적 건축은 그 스스로가 5천년 길들여 온 완고한 관습적 조직과 생명과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현대 인구 거의 전부가 이 일에 종사하면서 이곳으로부터 빵을 얻어먹고 생의 근거를 배급받으며 다시 이것을 모셔 받들어 살찌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대지에 발 벗고 늘어붙어 자급자족하는 준(準)전경인적 개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구가 조직되고 맹종되고 전통화된 차수성적 공중기구 속에서 생의 정신적 및 물질적 근거를 급여받고 있다.
시야 가득히 즐비하게 솟은 이러한 조직과 체제와 산봉우리들은 제각기 특유한 생리와 특유한 수단방법으로써 자체 생명의 이익을 확충시켜 가면서, 허약한 공분모 위에 뿌리박아 마치 부식작용하는 곰팡이의 집단처럼 번식해 가고 있다.
하여 분자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한정된 어머니 즉 일정한 대지로부터 양식을 빨아들이는 그들 공중기구는 기근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며 영양실조에 빠지게 될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생존경쟁의 광기성에 휘몰려 맹목적인 상쇄(相殺)로써 불경기를 타개하려고 발악하고 좌충우돌하기에 이를 것이다.
무수한 기생탑의 층계 아래 장과 절과 구의 마디마디 들어붙어 꿈틀거리는 부분품으로서 물리적 기능을 행위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이들 맹목기능자는 항상 동업자들끼리의 경쟁에서 도태될 위태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한 영업입지를 닦기 위하여 외눈 곰배팔이를 다시 더 사상(捨像)하고 바늘끝만한 시점에다 전 역량을 집중하여 특수 특종한 기능을 뽑아 들이는 일에로 기형적 분지(分枝)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의 예술, 종교, 정치, 문학, 철학 등의 분업스런 이상 경향은 다만 이러한 역사적 필연 현상으로서만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품화해가고 있다. 이러한 광기성은 시공의 경과와 함께 배가 득세(倍加 得勢)하여 세계를 대대적으로 변혁시킬 것이다.
세계는 맹목기능자의 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눈도 코도 귀도 없이 이들 맹목기능자는 인정과 주인과 자신을 때려눕혔고 핸들없는 자동차같이 앞뒤로 쏘아 다니며 부수고 살라 먹고 눈깔 땡깜을 하고 있다. 하다 지치면 뚱딴지같이 의미없는 물건을 만들어도 보고 울고불고 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탑(寄生塔)과 국가학과 지구는 스스로 길러 내놓은 이들 병신자식들의 비칠거리는 발길에 채이고 받치고 파괴되면서 있다.
현대문명에 비관론적 해석을 부여한 몇몇 동서 지성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유력한 증언의 하나가 되어 줄 것이다.
오늘날 인구는 맹목기능자들의 모임인 누상(樓上)회의에서 계수기(計數器)에 의해 집단으로 거래처분되고 있다. 백만명짜리 천만명짜리가 한꺼번에 한 다발로 묶이어 조변석개(朝變夕改) 이리저리로 흥정된다.
정치전문 맹목기능자들은 그 흙 묻은 발로 우리 백성들의 머리 위를 밟고 돌아다니면서 구익은 호령, 졸음 오는 연설들을 하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제까지 그들에게 우리 신상에 관련된 모든 처분권을 완전히 위임하고 살아가는 우리도 똑같은 맹목기능자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일개 유원인(類猿人)이 던진 성냥갑만한 화약에 의하여 순식간에 50만의 시민이 죽으면서도 거기 항거하여 단 한 마디 입 벌릴 장사(壯士)는 없었던 시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인류 분업문화의 빛나는 성과로서 하늘 높이 찬양됐던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공장기구는 죽은 백성의 형제와 그들의 지능과 손과 발과 가정과 표정과를 시장에서 매상(買上)하여 흡수 흡연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수천 수만의 목숨과 일생이 늘어붙어 말라빠진 문명탑의 어둠침침한 왕궁의 바닥에선 발췌 주조된 귀동왕자 50만단위의 권력자를 모셔내 오게 했던 것이다.
문명인은 대지를 이탈하였다.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차수성세계 속의 문명수(文明樹) 나뭇가지 위에 기어 올라 궁극에 가서는 아무도 아닌 그들 스스로의 육혼(肉魂)들에게 향하여 어제도 오늘도 끌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실은 공중풍선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올려 하늘 높이 달아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아마도 지구를 벗어날 것이며 지구의 파괴를 기억할 것이며 인조 두뇌를 만들어 자동시작(自動詩作)을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모든 생물의 물질적 능력엔 동물로서의 한계가 숙명지워져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서구적인 무서운 노력으로 하늘끝에 이르기 위해 벽돌을 쌓아 올려 본다 하더라도 그 하늘 끝은 나타나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흡사 긇는 찌개 남비 속에 일어나고 있는 분자들의 운동현상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물이 끓으면 물방울들은 증기화하여 공중 높이 날아갈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남비 속은 텅텅 비어 버릴 게 아닌가. 그러면 찌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나 남비 속을 벗어난 수분은 이미 찌개는 아니다. 찌개의 역사는 남비 속에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모든 나무의 열매는 토실히 여물어 스스로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들 인류수도 그 이상 지엽(枝葉)을 뻗칠 수 없을 곳까지 이르러 열매와 열매를 두루뭉쳐 가지고 말없이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 차수성세계 속의 문명수 위에서 귀수성세계의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씨앗이란 그러면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가(家), ××가라 함은 연구실과 기구와 문명과 점포에 각각 흩어져 모체계의 부분품으로서 자기의 생존 근거와 자기의 가능성을 못박고 있는 눈 먼 기능자를 의미한다.
주산가는 사무용 탁상에 앉아서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계산표만 하루 종일 검산해 내는 눈 먼 기능자이다. 그에게 은행기구나 국가기구나 세계인식이란 애당초 시점 밖의 이야기다. 즉 그는 소원적(小圓的) 부분품에 지나지 못한다.
사실 전경인적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전경인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전경인이란 우리 세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들은 백만인을 주워 모아야 한 사람의 전경인적으로 세계를 표현하며 전경인적인 실천생활을 대지와 태양 아래서 버젓이 영위하는 전경인, 밭갈고 길쌈하고 아들 딸 낳고, 육체의 중량에 합당한 양(量)의 발언, 세계의 철인적·시인적·종합적 인식, 온건한 대지에의 향수적 귀의, 이러한 실천생활의 통일을 조화적으로 이루었던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경인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귀수성세계 속의 인간, 아울러 원수성세계 속의 체험과 겹쳐지는 인간이었으리라.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꽃이다. 긴긴 여름 동안 허공 속으로 푸르게 성장하기만 한다. 그러나 이따금 그 세계 속에서 예외를 발견한다. 세상이 모두 푸르기만한 무성한 여름날 한 송이의 꽃이 빠알갛게 피었다.
쏟아져 간 여름날의 코스모스를 보고 초록 동산의 동료 나무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가을이 와 하늬바람이 불면 자기들도 자기 후손들을 시켜 언젠가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 간 그 코스모스와 똑같이 발화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여름철 지구 이곳저곳에선 이들 코스모스꽃이 불완전하게나마 몇 송이 피어났다. 그들은 세상을 알았고 인생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기 위치에서 가을로 돌아갔다. 불경 저술인, 천언(千言)의 오발언인(五發言人), 성서(聖書)저술인, 이들은 무더운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 돌아간 철이른 꽃들이었다.
그들은 직업가도 전문가도 기술자도 맹목기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수세계 문명수 나뭇가지 위에 붙어 산 뜨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 자기대로의 목숨과 정신과 운명을 생활하다 돌아간 의젓한 전경인적인 육혼의 체득자, 시의·철(哲)의 <인(人)>들이었다. 세계정신의 원초적이며 종말적인 인식 위에 개안했던 그들은 그 정신을 우주와 세계와 인생에게 발산하고 돌아간 위대한 대지의 철인이요, 시인들이었다.
성서나 오천언(五千言)은 과거가 남겨 놓은 인류 유산 중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경인 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거대한 시편들이다. 2천년 문명사에 기록되어 온 수없이 많은 군소 사상가들, 군소 시인들은 이 불경이나 성서의 거대한 둥구나무 밑에 피어난 자질구레한 잡초들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던가.
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헐리웃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 놓듯, 시업가들은 언어를 화구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차수성세계의 톱니 쓸린 광풍 속에서 시인스런 소성(素性)을 가진 정신인들은 자기의 거점을 대지에 뿌리박기 전 주위세계의 현란한 분위기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정신분석학, 경제이윤론, 인구론, 응용미학 등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각분과 과학의 빛나는 성과를 다퉈 뽐내며 영화·녹음기·텔레비가 등장하여 인생의 위악적 욕구를 보다 많이 충족시켜 주게 됨에 이르러 그들 시인스런 사람들은 사회의 한편 구석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미학(單字美學)이나 어구나열법에 하염없는 신경을 쏟고 있었다. 치차와 동력이 세계를 압도하여 시인의 주위에까지 밀려 들어갔을 때 시인은 모든 털구멍을 닫아 아랫목에서 단어를 뜯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비평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내어 맡기고 자기들은 언어세공만을 전업(專業)으로 맡고 있다.
고답파(高踏派)의 대변자는 말한다. 시인의 임무는 언어의 순화에 있을 뿐이다. 미의 세계는 열등한 지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계라고.
발레리는 기하학을 전업하고 있었다. 다다는 로마문자 26개를 나열해 놓고 세기적 권태에 하품치고 있는 관중들을 불렀다.
입체파는 건축을 지면위에 시도했다. 모더니즘은 교수들로 조직된 신사단, 신묵시파는 댄스홀 옆 골목에다 간판을 내걸고 빈약한 개업 파티를 열었다.
이러한 운동은 물론 구라파를 중심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이틀도 못가서 눈치빠른 각국의 문화 도매상인들은 구색들을 갖춰 가지고 바다를 건너갔다. 소위 후진국이라고 불리어지는 반 식민지적 수도마다에선 최신식 수입품 선전광고가 푸짐히 나붙고.
무슨 파, 무슨 주의자 등 근대적인 명칭으로 불리우는 모든 지식분자들을 한묶음하면 <밀려난 특종계급>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특수층의 수형적 정신현상인 것이다. 그들이 역사상에 놀은 역할은 눈꼽에 불과하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약한 병자의 노래가 아니면 대학 연구실 속에서의 언어연금술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독존적 귀족문화만이 우리 시대의 시인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전문가들끼리의 특수문화가 되어 버렸다. 백성과 그들과의 아무런 연분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들대로 만백성의 살림마을인 대지를 이탈하여 마치 무리떼 지은 하루살이의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달아나고 있다.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의 시가 논의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이야기해 놓은 그 시인의 인간정신도와 시인혼이 문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철학, 과학, 종교, 예술, 정치, 농사 등 현대에 와서 극분업화된 이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전체적으로 한 몸에 구현한 하나의 생명이 있어, 그의 생명으로 털어 놓는 정신어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히 우리시대 최고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의 원초적, 귀수성적(歸數性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시는 궁극에 가서 종교가 될 것이라고. 철학, 종교, 시는 궁극에 가서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자연과학의 성과, 인문과학의 성과, 우주탐험의 실천 등은 시인에게 다만 풍성한 자양으로 섭취될 것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케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그는 태허(太虛)를 인식하고 대지를 인식하고 인생을 인식할 뿐이며,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난만히 피어난 차수세계성 공중건축(空中建築) 같은 것은 그 시인의 발밑에 다만 기름진 토비로서 썩혀질 뿐일 것이다.
차수성세계가 건축해 놓은 기성관념을 철저히 파괴하는 정신혁명을 수행해 놓지 않고서는 그의 이야기와 그의 정신이 대지 위에 깊숙이 기록될 순 없을 것이다.
지상에 얽혀 있는 모든 국경선은 그의 주위에서 걷혀져 나갈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원초적 가능성과 귀수적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닌 전경인임으로 해서 고도에 외로이 흘러 떨어져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명기구 속의 부속품처럼 곤경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철의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우리 인류, 차수성세계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피어난 난만한 백화를 충분히 거름으로 썩히울 수 있는 우리 가을철의 지성은 우리대로의 인생인식과 사회인식과 우주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 내야 할 것이다.
산간과 들녘과 도시와 중세와 고대와 문명과 연구실 속에 흩어져 저대로의 실험을 체득했던 뭇 기능, 정치, 과학, 철학, 예술, 전쟁 등, 이 인류의 손과 발들이었던 분과들을 우리들은 우리의 정신 속으로 불러들여 하나의 전경인적인 귀수적인 지성으로서 합일시켜야 한다.
거두어 들일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거두어 들여 하나의 열매로 뭉쳐 놓을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인류는 5천년간 99억의 인종들을 구사하고 시험하여 산간과 들녘에 백화만초로 피어 있게 흩어 놓았던 것이다. 백화만곡의 흐드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유구하고 찬란한 내일의 꽃은 피어날 것이다.
전경인의 출현을 세기는 다만 대기하고 있다. 암흑, 절망, 심연을 외치고 있는 현대의 인류는 전경인 정신의 체득에 의해서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수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뭇 나뭇잎들을 한 씨알로 모아 가지고 우리들은 땅으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이른 가을철의 선지자(先知者)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지 위에 다시 전경인의 모습은 돌아와 있을 것이고 인류정신의 창문을 우주 밖으로 열어 두는 서사시는 인종의 가을철에 의하여 결실되어 남겨질 것이며 그 정신은 몇 만년 다음 겨울의 대지 위에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바람과 같이 우주지(宇宙知)의 정신, 이(理)의 정신, 물성(物性)의 정신으로서 살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곧 귀수성세계 속의 씨알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자유문학』 1961년 2월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시인』 1969년 8월호에 재수록되었음.
역사의식과 순수언어
- 신동엽의 시에 대해서 -
70년대의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신동엽을 드는 데는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향은 비단 시단에뿐 아니라 전체 지식인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더욱 컸다. 웬만큼 교양이 있는 지식인이나 문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치고 신동엽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시에 있어서의 민족의식·역사의식이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확대 해석된 나머지 그는 목소리만 높은, 관념을 앙상하게 노출시키는 재미없는 시인으로 이미지가 굳어 버린 느낌이 없지 않다.
그가 지향하는 길은 타당하되, 따라서 그의 시는 시적 재미가 덜하다고 미리 점찍어 버리는 독자도 적지 않은 것을 본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그를 위험시하여, 아예 한국시의 영역에서 추방해버리는 현상마저 빚어졌다.
그의 시가 전체적으로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과 민족적 동질성의 확인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라든가, “말해 볼까요. 걷어 치우는 거야요. 우리들의 포동한 흰 알살을 덮은 두드러기며, 딱지며, 면사포며, 낙지발들을 면도질해 버리는 거야요, 땅을 갈라놓고 색칠하고 있은 건 전혀 그 흡반족(吸盤族)들뿐의 탓이에요. 면도질해 버리는 거야요. 하고 제주에서 두만까질 땅과 백성의 웃음으로 채워버리면 되요.”(「주린 땅의 지도 원리」) 등 그의 시 어디서나 아무렇게나 뽑아 보아도, 그의 시가 이 땅에 사는 이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 앞날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안목에 바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민족의식·역사의식이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연역되거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라, 시적 실천의 결과로 얻어진 것임을 깨닫는다는 것이 신동엽 시 이해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의 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비로소 가능하고, 그의 시에 깔린 민족의식·역사의식의 본질이 무엇인가 올바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보면 지난 우리의 역사의 현장, 역사적 사건 또는 역사적 한 시점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몇 예를 들어보자.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진달래 산천」에서) 역사의식과 순수언어
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공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
(「아사녀에서」)
황진이 마당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렷땅, 놋거울 속을 아침 저녁 드나들었을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의.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에서)
삼한ㅅ적
맑은 대가리.
(「원추리」에서)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
(「보리밭」에서)
햇빛 퍼붓는 목화밭, 서해가의 무논에서
젖이 흐르는 주먹 팔 봄 포도밭에서
손 고운 흰 허리를 잃어버렸을 때
후삼국의 유민은 역사를 건너 뛸 것이다.
(「만지의 음악」에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들.
(「불바다」에서)
이러한 말, 이러한 구절은 그의 시에서 얼마든지 찾아질 수 있다. 이것들은 적어도 그가 역사적 과거의 한 삶의 모습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나간 한 시절의 삶에 대해서 그리움을 느끼고 있다고도 말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신동엽의 시에 복고주의적 일면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구슬처럼 흘러가는 내ㅅ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향아」)는 것이 어쩌면 그의 시가 전달하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리워하는 것이 옛날의 질서나 체제가 아님은 그의 시를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 보면 이내 알 수 있다.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옛날의 그 순수함, 잡스러움에 더럽혀지지 않은 그 순수함이라고 단정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 돌아가고 싶은 곳은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전”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향아」)이요, “늘메미 울음같은/아사녀의 봄”(「3월」)이지,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 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그 “변한 것은 없”는 “이조 오백년”(「종로5가」)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워하고 돌아가자는 것은 옛날의 그 삶 속에서 안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가 돌아가자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몸에서 우리의 주위에서 순수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털어버리자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읽힌다. 그의 복고주의는 과거의 질서 또는 과거의 풍습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민족적 비극을, 밖으로는 불순한 것의 개입과 안으로는 순수성의 상실이라는 두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또 나는 안다
지금은 낯선 얼굴들이
얕보는 휘파람으로 왔다갔다 하지만
그 근처 양지바른 언덕은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토기몰이하던 아우성으로
씨름놀이하던 함성으로
밤낮을 모르던 박첨지네 동산이다.
(「왜쏘아」에서)
등에서는 우리의 비극적 현실이 불순한 것의 개입에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살덩이」에서)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
(「서울」에서)
등에서는 그 비극이 우리들 자신의 순수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비극적 현실의 극복은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그의 시적 출발점이 되고 있다.
옛날의 우리는 우리끼리 행복했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채 순수했다는 그의 시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들이 이에서 그쳤다면 그다지 뚜렷한 견해도 독창적인 사고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이 민족적 순수성, 옛날의 순수한 삶에 의해서 회복되어야 할 민족적 순수성의 표현을 1894년의 동학혁명과 1960년의 4·19혁명에서 찾아내고 있고, 여기에 그의 시적 역사인식의 탁월함이 있다. 서사시「금강」이 1894년의 동학혁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모티프는 1960년의 4월 혁명이라는 사실은 그가 지향하고 있는 민족적 순수성 및 동질성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동엽의 이 시적 내용은 당연히 그의 시에 독특한 표현양식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시적 표현양식의 특징은 순수언어의 채용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적 순수성·동질성의 회복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둔 그의 시적 내용은 표현에 있어 역시 우리말의 순수성의 회복에 액센트를 두고 있는바, 그의 시에 역사적 사실이 많이 나오는 것 거꾸로 그가 채용하고 있는 표현에 따른 것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피히테는 독일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원시적·원초적 언어가 파생적이고 혼성된 언어보다 우월하다고 말했지만, 신동엽이 채용하고 있는 언어가 교육이나 교양 따위 비순수한 것에 의해 더럽혀지고 때묻은 것이 아닌 우리 말의 원시적·원초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투철한 민족의식, 뚜렷한 역사인식에 바탕한 그의 시들이 결코 목청만 높은 관념시로 떨어지지 않고 맑은 감성, 고운 언어, 여린 가락의 서정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신동엽의 시가 채용하고 있는 원시적·원초적 성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이라는 그의 시적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좀더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시인 신경림 )
- 비화
◈ 헌책방에서 반려자를 만난 시인 신동엽
신동엽은 1970년대 이후의 참여 시인들에게는 한용운 임화를 비롯한 카프 계열의 시인들과 이육사의 맥을 잇는 하나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민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의 1남 4녀중 맏아들로 태어난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학비를 줄이려는 마음에서 관비가 지원되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고 단국대 사학과를 마친다.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은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헌책방을 차린다. 이 시기에 신동엽은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열정은 이따금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킨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는데 내가 <타임>이나 <뉴스위크>와 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보아두었던 것 같았어요.
자연히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목까지 여민 군인 잠바에 큰 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과 시가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농촌 경제학의 권위자로서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납북된 인정식(印貞植)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던 인병선의 말이다. 인병선은 그의 책방을 자주 찾았다. 두 사람은 이런 인연으로 1957년에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