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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의 불교수용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에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그 후 170여 년간 백제는 대외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약했다. 하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 동안에도 계속 이루어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으로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의 편찬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날의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하여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뿌리 내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중에게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지지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한 국민적 계율 실천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2. 불교의 전래와 국가불교(國家佛敎)로의 발전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 명을 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전해진지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절을 짓고 백제인을 출가(出家)시키고 또 성직자까지 배출했다는 것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류왕 이전에 백제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 때에 불교가 성행(盛行)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신왕(阿莘王)이 백성들에게 "불법(佛法)을 믿어 복(福)을 구하라"라고 하교(下敎)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 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겠다.
백제에 전해진 초창기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초창기인 만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내용과 종교적(宗敎的) 신성(神性)을 강조한 신이적(神異的)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백제불교의 한 특성으로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발전을 들수 있다. 그것은 대단위 규모의 사찰을 조영(造榮)한다는 것이다. 왕흥사(王興寺)의 경우 법왕(法王) 2년(600)에 일단 준공되었다가 그 뒤 35년간이라는 세월을 걸친 증측공사 끝에 무왕(武王) 35년(634)에 완성되었다. 이 절은 무왕의 대외적인 웅략(雄略)의 웅지(雄志)가 어린 호국의 도량(道場)이었던 것이다.
3. 미륵신앙
백제때에 미륵신앙이 유행한 것은 일찍 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왕(武王)의 미륵사(彌勒寺) 창건 설화는 그것이 번성하였던 사실을 잘 알려준다.무왕이 부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연못가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출현하였다. 이에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고, 이때 왕비가 그 곳에 큰 절을 지을 것을 소원한다. 왕이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으나, 연못을 메워야 하는 큰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사자사에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의논한 바,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 한쪽을 허물어 연못을 메워 주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조영하고는 미륵사라고 이름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용화산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세 개의 건물을 세웠다는 것 또한 미륵불이 3회에 걸친 설법(說法)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사는 미륵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았다는 사자상좌(獅子床座)를 상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왕이 용화산 아래를 지나다가 미륵불의 출현을 목도하게 된 것은 전륜성왕이 미륵불의 처소에 나아가 설법을 듣는다고 한 경전의 기록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은 바로 경전에 나오는 전륜성왕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미륵사창건 설화를 통해 볼 때에 백제인들은 신앙공덕(信仰功德)으로 미륵불이 하생하고, 그래서 머지않아 미륵이상사회가 도래(到來)할 것이라고 믿어왔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보아 백제인들은 매우 현실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미타신앙
불교에서 정토(淨土)란 부처나 보살(菩薩)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수많은 정토 가운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신 곳을 미타정토(彌陀淨土)라고 부르는데, 서방정토(西方淨土) 혹은 극락(極樂)이라고도 한다. 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정토에 가서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미타신앙이 행해진 사례로, 먼저 27대 위덕왕(威德王)이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해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이를 신하들이 말리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위덕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따라 백 명의 백성들을 출가(出家)시키고 갖가지의 불사공덕(佛事功德)을 지어 그것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억울하게 전사하여 원혼(寃魂)이 된 부왕을 위해 출가 수도하고자 함은 부왕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왕생기원(往生祈願)의 신앙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미륵사지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과 창방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 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 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 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 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