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술(詩術)
- 오진 18
무심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가늘고 긴 저녁이 거리의 불빛을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바람 방향과는 무관하게 밀실의 문장은 완성되었다 소문의 행방에 따라 우울이 울분으로 급변했다 촛불을 켜 놓은 광장에서는 연민의 바람이 슬픔을 앞지르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고 명멸하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바람과 촛불, 그들은 분명 구면인데 서로가 데면데면했다
윗글을 읽고 다음 보기 중에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여 빈 칸을 채우세요 (복수 선택 가능)
<보기>
시인, 촛불, 광장, 의사, 처방, 병원
묵직한 통증이 가슴 어귀에 머물렀다
마음 한쪽을 다독여 ( )에 갔다
이름 없는 ( )들이 서로를 원망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대책 없는 ( )에서는 쓰러지지 말자
지극히 건조한 대화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서명이 초라한 ( )을 받아 간신히 데드라인을 넘는다
이러려고 ( ) 되었는가
망가진 문고리를 부여잡고 하소연 한다
백옥처럼 서늘한 ( )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필명으로 시술하는 ( )들은 두려움이 없다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다. 삭풍에 마른가지처럼 온몸이 욱신거린다. 요즘 같으면 시 한 편 소설 한 장 읽기도 버겁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진으로 가득한 세상을 몇 줄의 시술(詩術)로 엮어내는 심정이라니. 마비된 대한민국 호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분주한 텔레비전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앉아있다. 화면에는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행한 오진투성이 시술이 밑바닥까지 내려간 나의 한줄기 슬픔을 건져 올리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괴감까지.
거기에는 대한민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학의 전 현직 병원장이 나란히 서서 맹세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주치의를 포함하여 청와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다른 의사들과 함께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한 것이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증인선서를 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안타깝고 낯설었는지.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라면 심각한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함께 고민하거나 첨예한 학술적 견해 차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야할 자리여야 마땅했다. 대한민국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서도 노벨 의학상은커녕 불투명한 장래를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그런 자리라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국가 의료의 비전을 제시하는 그런 자리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본 장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비방하기에 바빴다. 누가 먼저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고 언제부터 비선 실세를 알고 있었는지, 듣기에도 민망한 대화뿐이었다. 누가 저들을 보면서 존경 받는 의사이며 대학교수이며 최고 경영자이며 대통령 주치의란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단지 죄를 짓고 허둥대는 잡범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어차피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의사의 길을 택했을 텐데 왜 저렇게 권력의 주변부를 탐하는지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올 한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검색어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이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자가 태반주사나 비타민 주사 등을 대리처방 받고, 국가 주요 인사나 정책에까지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부터다.
태반주사 백옥주사 비아그라...이어지는 청문회에서도 부끄럽고 낯익은 용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 일컫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이 여과 없이 튀어나온다. 대통령 얼굴에 남아있는 교묘한 자국에 대한 추궁까지.
증인선서를 마친 의사는 필러 자국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필러인지 보톡스인지 혹은 단순 화장자국인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것에 대한 관심도 없다. 나는 그 허접한 대화를 더 이상 듣기 민망해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줄무늬 고양이가 나를 핥고 있다
가슴털 알레르기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더니
기어이 봄날을 견디지 못하고
사정없이 얼굴을 물어뜯는다
간단히 내 마음을 빼앗았지만
고집스런 줄무늬 넥타이를 바꾸지는 않는다
차가운 가슴 털을 숨기기 위해
내 몸을 온통 줄무늬로 채색한다
사방이 훤히 뚫려있는 침대에서
내 몸을 거침없이 주무른다
사정(射精) 없이 애무한다
내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상처 난 얼굴이 벌겋게 피어오른다
고양이 줄무늬처럼 핏물이 번질 때마다
내 얼굴의 두꺼운 외피를 벗겨낸다
철판 같은 외투가 벗겨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치스런 알몸,
나는 진저리를 친다
그 중독의 냄새를 찾아 코를 킁킁거리는
저 플라스틱써전*
줄무늬 고양이
* 성형외과 의사
-졸시 「줄무늬 고양이」전문
성형수술을 풍자적으로 그려본 졸시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리라. 대통령이라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날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시시각각 가라앉는 목숨들이 구조의 메시지를 청한 그 시각이라면, 기울어가는 배를 보며 온 국민이 발을 동동 굴리던 그 시각이라면, 촌각을 다투며 구조를 지휘해야할 책임 있는 위치였다면. 그 기적 같고 황금 같은 시간은 영원한 슬픔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왔다.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되어 살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그날은 자꾸 뇌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며칠 후 텔레비전에서는 증인들만 바뀌었을 뿐 얼마 전 보았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추궁이 이어졌다, 배가 침몰하는 그 순간에 늑장대처의 이유가 무엇인지, 보고는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미용이나 성형의 의혹은 없는지... 재방송을 보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침몰하는 배를 다시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노란 표지의 시집. 그것은 한 시인이 이 년여에 걸쳐 완성한 세월호 대서사시이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기리며 304편의 연작시를 쓴 시인의 마음이라면 감히 저런 말들을 할 수 있을까.
산을 떠나며
봉우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떠가는
아침해의 눈이 붉다
이별하는 모든 것의 눈시울은 붉다
가을나무를 떠나면서
나뭇잎은 붉다
가물가물 져 가는 장명등의
얼굴은 붉다
새벽이 끝나도록 일어나지 않는
길모퉁이에 누운 그 사람 바라보는
성당 시계탑의 눈자위 붉다
오래 망설이다 헤어져야 한다며 뒤돌아가는
그 사람 숙인 목덜미가 붉다
구름을 벗어나는 저녁해의 눈이 붉다
떠나가는 사람 바라보다 번히 눈 뜬
장승이 된 나를
뒤돌아보는 서쪽하늘이
피처럼 붉다
- 나해철「붉은 것들」부분,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세월호 연작시 304편』
"시민,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할 수 있는 시로써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밝힌 창작동기이다. 한국의사시인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나해철 시인은 역사 이래로 가장 비극적인 것이고, 전 우주적인 사건이었고, 발생 후 정부의 행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그것을 표현하다 보니 100편 200 편을 넘게 되었고, 1년 가까이 되어 304편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나 기어코 탄생되고야 말았다."
슬픈 일이 되고만 이 시집의 수익금을 세월호 유가족에게 장학기금 형식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질병을 고치는 小醫,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中醫를 넘어 사회의 병까지 고치는 大醫의 반열에 들어선 게 틀림없다. 희생자 해원과 진상규명을 위한 시이니 미학적 완결성이라는 기준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속에 오히려 "지금 또 다시 우리 눈앞에 침몰해 가는 배 있다"고 절절히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녹아 있는 듯 했다.
어느덧 촛불집회가 한 달째 지속되던 지난해 말, 전국적으로 200만이 넘는 인파가 촛불 대신 횃불을 들고 울분을 토로하던 바로 그 시각에 한국의사시인회 정기총회가 인사동에서 개최되었다. 탄핵의 횃불이 타오르기 한참 전에 정해진 약속이라 그대로 진행하였지만 지방에서 참석키로 했던 회원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총회를 마치고 곧바로 이어진 시국 집담회. 아직도 울분을 삭히지 못한 몇몇 회원들마저 광화문으로 향하고 나니 다소 쓸쓸한 분위기다. 하지만 그 열기만큼은 오히려 광화문을 능가할 지경이다. 남은 회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핫 이슈인 블랙리스트에 대한 논쟁으로 소주잔이 후끈 달아오른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임기 오년을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권력이란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라 내려놓으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처럼 이제 블랙리스트는 한 장의 휴지조각만도 못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시국을 토로하고 걱정하는 소리에 주변은 시끌벅적하다. 평소 같았으면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이른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안국역 주변은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로 온통 발 디딜 틈이 없다. 한 줄로 늘어선 줄을 부여잡고 간신히 집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탔다.
그 때 만원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박근혜는~~~~"
전철 안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합창했다. "하야하라......"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텔레비전을 켰다. 거의 모든 종편에서 시위현장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마침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된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촛불에서 시작된 민심이 횃불로 변했다. 조그만 외침들이 한데 모여 하야에서 탄핵으로 역사의 물길을 바꾸었다. 이제 대통령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판단만 남겨 놓고 있다. 촛불의 민심을 외면하지 않는 결정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소시민이며 소의(小醫)이며 블랙리스트에도 끼지 못한 미천한 시인의 염원이고 바람이자 작은 소망이다.
나는 여전히 뉴스를 보고 있다. 가만히 주먹을 쥐고 명멸하는 불빛을 바라본다. 광장의 촛불들이 수런거린다. 내가 이러려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는가. 내가 이러려고 의사가 되었는가. 내가 이러려고 시인이 되었는가...
첫댓글 304명의 영혼을 하나씩 불러온 나해철 시인님을 또박또박 불러봅니다
괄호 채우기가 쏠쏠하게 씁쓸합니다.
플라스틱써전, 하나만 했으면 좋겠어요.
뭘 성형해야 하는지는 어떻게 알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