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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代 申琓의 國政運營論
目次〉
Ⅰ. 머리말
Ⅱ. 家系와 政治活動
1. 家系와 學統
2. 政治活動
Ⅲ. 國政運營論의 展開
1. 政治運營論
2. 軍政論
3. 賦稅運營論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숙종이 재위하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17세기 이래 진행된 사회적 변화로 인해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모색되었다. 즉 17세기 士林政治下정국운영 방식은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지 못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臣强之說’이 대두되는 등 왕권이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숙종대를 전후해서는 사회 변화에 적응하면서 왕권의 회복을 도모하는 蕩平論이 제기되고, 이를 근거로 蕩平政治가 모색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蕩平政局에 대한 연구 및 이를 뒷받침하였던 蕩平論者들의 國政運營論은 주목되어야 하겠으며, 본고의 관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 동안 숙종대 정치사에 대해서는 老論과 少論의 대립, 換局의 추이 및 이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세력의 동향, 山林의 기능과 역할, 書院을 중심으로 한 儒生層의 동향,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연구의 초점은 정치세력이나 환국의 실상 등에 두어졌다. 또한 숙종대를 크게 3시기로 나눌 때7) 갑술환국 이전에 그 연구가 한정됨으로써 숙종대 전시기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숙종대 중반 정국의 이해를 위해, 그 일환으로 숙종의 탕평을 뒷받침하였던 蕩平論者들의 국정운영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숙종대 전반 朴世采에게서 제기된 蕩平論은 甲戌換局이후 申琓南九萬崔錫鼎등을 통해 정치에 적용되었다. 이 가운데 朴世采는 숙종 21년 死去하였고, 南九萬崔錫鼎등은 정치적 부침을 계속한데 반해 朴世采의 문인인 申琓은 死去직전까지 평탄한 정치적 행보를 걸으면서 영의정까지 올라 이 시기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숙종의 탕평의지를 실현하는데 주력하였던 인물로서 주목된다. 따라서 申琓의 국정 운영방안에 대한 해명은 숙종과 이를 뒷받침한 탕평론자들이 추진한 정국 운영을 이해하는데 단서를 제공할 것이며 동시에 이 시기 사회 변화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 논리에 대해서도 미진하지만 해명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Ⅱ. 家系와 政治活動
1. 家系와 學統
申琓의 본관은 平山이고, 자는 公獻, 호는 絅庵이다. 인조 24년(1646)에 태어나서 숙종 33년(1707)에 死去하였으며, 사후 文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申琓의 활동에 배경이 되었던 家系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申琓은 세종의 配享功臣이며『高麗史』편찬과 貢法제정 등에 직접 참여한 申槩의 후손이다. 6대조 申鏛은 己卯士禍때 被禍된 인물로, 당시 정계에서 權橃李耔등과 함께 훈구파와 사림파를 調劑하는 완충적 기능을 행사하였던 인물이었다. 고조부는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 전투로 유명한 申砬이고, 증조부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명인 申景禛으로 靖社功臣1등과 平城君으로 봉해졌다. 조부 申俊역시 靖社3等功臣으로, 外職을 두루 거쳐 御營廳堤調刑曹判書등을 역임하고, 御營廳堤調당시에 어영청의 군영화에 주력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런 때문인지 申琓代를 전후해 이 집안은 “勳貴之家”로써 세인들에게 평가받았다. 한편 申琓의 先系에서 나타나는 武臣的인 성향은 후술하듯이 申琓이 군사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게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申琓은 本生父申汝拭과 本生母李基祚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이후 伯父申汝挺에게 出系하였으며 申汝挺의 부인은 金藎國과 李廷觀의 딸이다. 申琓은 趙遠期의 딸과 鄭相冑의 딸을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聖夏는 朴世采의 딸과, 동생인 靖夏는 兪得一의 딸과 혼인하였다.
申琓을 전후하여 인척 관계로 연결된 집안들의 특징은 經世官僚的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외가의 일족인 淸風金氏 金藎國, 韓山李氏 李基祚, 처가인 林川趙氏 趙遠期가문, 사돈간인 朴世采와 兪得一가문 등이 이에 해당된다. 金藎國은 광해군대 小北의 영수로 大北李爾瞻과 대립한 인물로서, 경세관료적인 그의 자세는 權慄에게 ‘經世濟民’의재주가 보인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정계에 등용되어 국가재정의 확보 등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李基祚는 朴世采의 從祖父인 朴東說의 문인으로, 광해군 인조 효종때 활동하였는데, 특히 효종 즉위초에는 “外應衆務內調財賦”하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에 주력하였던 인물이었다.
장인 趙遠期는 申琓을 어릴적부터 가르치면서 총애하였던 李景奭의 사위였다, 효종현종 때 활동하던 경세관료로써, 현종 초반 淸使의 접대문제로 朝臣들 사이에서 발생한 이른바 公議私議論爭에서 신하된 자는 公的義理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趙遠期에게는 평생의 업을 “活國澤民”에 두었다는 趙顯期, 후일 洛論의 宗匠으로 알려진 金昌翕金昌協에게 經濟之學을 가르쳤던 趙聖期, 현종 말과 숙종 초반에 붕당의 폐해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던 趙昌期와 숙종21년 10월 應旨上疏에서 荒政과 주전을 건의하였던 趙亨期 등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들 경세에 치중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申琓은 이상의 친인척 관계속에서 성장함으로써 명분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申琓의 학통은 李景奭과 朴世采에게 연결된다. 인조대 이래 국가의 중요 요직을 거치면서, 현실 타개에 주력한 인물인 李景奭의 경우 申琓의 소년시절 성장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당시 李景奭은 외교적으로는 實利論의 입장에서 정책을 구사하여, 정치적으로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위주의 인사정책과 새로운 인재 등용에 주력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均賦와 恤民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국가재건과 민생회복을 추진하였다. 李景奭의 이러한 성향은 당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黨人들에게 비난받아, 후일 三田渡碑문제로 그의 神道碑가 땅에 파묻히기까지 하였다. 李景奭의 이같은 정치적 성향은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성장한 申琓이 후일 현실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토양이 되었다고 하겠다. 李景奭과 함께 申琓이 蕩平論者로서 활동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은 朴世采라 하겠다. 申琓에게 朴世采는 ‘自少慕仰’ 하던 인물로, 申琓은 성장 후 박세채 문하에 출입하면서 朴世采의 탕평론을 비롯한 여러 사상을 접하였을 것이다. 朴世采는 西人이 노소론으로 분립될 때 이를 중재하다가 ‘抑强扶弱’을 위해 소론의 당색을 갖게 되었으나, 숙종 14년 이후에는 노소론의 調劑保合에 주력하면서 皇極蕩平論을 주창하여 탕평론자로써 활동하였다.
朴世采가 皇極蕩平論을 주장하게 된데에는 政爭이 격화되는 당시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가 처한 정치적 현실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주지하듯이 朴世采는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립시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소론의 당색을 가지고서 노론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己巳換局이후 南人에 의해 宋時烈이 賜死되었을 때 스승의 예로써 素帶3개월의 心喪을 하여 소론 尹拯과의 사이가 벌어졌으며, 甲戌換局이후 조정에 출사해서는 張希載처벌 문제를 놓고 역시 소론 南九萬등과 대립하였다. 이같이 朴世采는 전일에는 노론과, 후에는 소론과 대립하게 됨으로써 노소론을 자처하기보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전까지의 신료중심적인 붕당론보다는 君主中心의 皇極蕩平論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 후 부국강병을 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역설하였다.29) 그러나 朴世采의 이러한 군주중심의 정국 안정 노력은 숙종 21년 2월에 死去함으로써 문인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으며, 申琓은 이를 계승하여 정국에 적용하였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朴世采문인으로써 甲戌換局이후에 申琓과 함께 정치적 행동을 같이한 인물로는 金構兪集一兪得一등이 있다. 이들은 대개 노소론 분립시 少論으로 분류되던 인물이었으나 甲戌換局이후에는 스승의 뜻에 따라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인 탕평론자로 활동하면서 정국 안정에 주력하는 한편 민생 현안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金構兪集一兪得一등은 君主中心的이거나 時務에 밝았다고 평가되었다. 이외에도 이 시기 申琓을 도와 정국안정에 주력한 인물로는 申琓의 추천으로 병조판서 및 禁衛營提調 등을 역임한 李濡나, 申琓의 親客이라 묘사된 趙泰采, 申琓과 동서지간인 소론의 李寅燁 등이 있다. 이들은 사안에 따라서 일부 이견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申琓과 함께 정국안정 및 민생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추진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특히 李濡는 申琓의 사후, 申琓의 정치적 입장을 계승해 숙종의 정치를 보좌하였던 대표적 인물가운데 한명이었다. 요컨대 신완은 “勳貴之家”에서 성장하였으며, 그를 둘러싼 친인척관계를 통해 명분보다는 현실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학통은 李景奭과 朴世采로 이어짐으로써, 숙종 21년 朴世采의 사거후에는, 同門인 김구나 유집일 등과 함께 스승 박세채가 주장한 황극탕평론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던 노론과 소론의 중도적인 탕평론자로써 활동하게 되었다.
2. 政治活動
申琓은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正言持平獻納校理承旨大司憲大司成등 다양한 淸要職을 역임하였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애의 전반부는 西人으로, 老少論분립 이후에는 少論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현종 15년 申琓은 持平으로 재직하면서 南人인 刑曹參議趙石星을 ‘地望素卑’하다고 하여 削職을 요구하였다. 숙종 즉위 직후 宋時烈의 誤禮를 지적한 郭世楗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는 西人의 年小輩로서 곽세건의 鞫問을 요구하였다. 경신환국 직후에는 柳尙運崔後尙등과 함께 權大運閔熙許穆을 탄핵하였고, 현종 廟庭에 배향된 趙絅의 삭출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남인과 대립하였다. 이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에 申琓은 척신들이 보여준 偵探政治에 대한 비판적 자세에서 申範華(金錫冑의 外從弟)李師命등의 功勳不可를 주장하여 金錫冑와 대립하였으며, 이후 노소론이 분립될 때 소론으로 당색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지적한데로 申琓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적인 탕평론자라 할 수 있으나, 이 시기 申琓이 소론으로 당색을 갖게 되는데는 스승 朴世采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숙종대 초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할 때 스승 朴世采역시 “抑强扶弱”의 취지로 소론 당색을 갖게 된 것을 보면, 申琓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숙종 14년 7월에는 朴世采가 東平君沆을 惠民堤調에 제수한 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을 진언하여 숙종을 진노케 하였을 때 이를 옹호하다가 朴世采・南九萬崔錫鼎徐文裕등과 함께 護黨罪의 죄목으로 削職되었으나 얼마 후 경기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생애의 후반부는 숙종 20년 甲戌換局이후부터 숙종 33년 사망할 때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는 신완이 탕평론자로써 활동하던 시기이다.
甲戌換局이후 숙종은 南九萬을 영의정으로 등용44)하면서 소론에게 정국운영을 담당케 하였다. 甲戌換局직후 소론이 정국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노론은 己巳換局으로 원로세력들이 死去한데도 원인이 있겠으나 숙종의 입장에서는 정국 안정을 위해 명분상 하자도 있을 뿐 아니라 남인에 대한 강경세력인 노론을 등용하기 보다는 소론에게 정국 운영을 일임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폐비시켰던 閔氏를 복위시키고, 己巳換局이후 삭탈관직된 노론계 중심인물인 宋時烈, 金壽興, 金錫冑, 金益勳 등을 복관시켰으며, 남인정권하에서 黜享되었던 李珥와 成渾을 문묘에 復享시키는 등 조치를 취하였다. 숙종의 이러한 조치들은 노론에게도 출사의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소론 중심에 노론이 참여하는 정국을 구성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정국 구상에 대한 숙종의 의도는 탕평의 추진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 것으로, 이는 朴世采가 지어 올린 탕평 교서를 반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때 朴世采등 탕평론자들은 노소의 중도적 입장을 표방하면서 정국에 참여하였다.
甲戌換局직후 申琓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申琓이 대사간에 재직하고 있던 시기에는 남인睦來善이나 閔黯및 이들과 연결된 張希載등 민비의 廢位에 관련된 ‘名義罪人’에 대한 疏決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南九萬은 閔黯은 대신을 역임하였다고 하여 형신을 중지하고 증거로써 定罪하자고 하였고 張希載에 대해서는 議親을 내세우면서 관대하게 처벌하자고 하였다. 이때 申琓은 동료들과 함께 연명상소를 올려 남인 소결에 동의하는 동시에 노론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金春澤의 治罪를 주장하고 있어 탕평론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남인 소결에 대해서는 노론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노론측 金春澤의 치죄를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소론측의 입장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이후 정국은 業同獄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보합세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시기인 숙종 24년 7월 申琓은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본격적으로 숙종이 추진하는 탕평을 주도하는 위치에 이른다. 이 시기는 숙종의 탕평 의지가 재천명되는 때였다. 즉 숙종은 24년 1월 備忘記의 형태로 탕평 의지를 표명하였는데, 여기서 숙종은 당시 第一事인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朝廷內調停과 保合을 강조하는 한편 名義罪人이외의 인물에 대해서는 保合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시기 申琓의 이조판서 제수는 “務主調劑” 하는 그의 성향과 숙종의 탕평의도가 일치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이즈음 이조에는 金構와 趙泰采가 함께 재직하였는데, 소론계 史臣은 이들을 申琓의 親客이라 하면서 金構를 兼判書, 趙泰采를 假郎廳이라 비난하였다. 동문인 金構뿐 아니고 후일 경종조에 金昌集李頤命등과 함께 피화되었을 정도로 老論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趙泰采의 경우, 숙종대 중반에는 申琓과 밀착되어 그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였다.
숙종 26년 5월에 申琓은 몇 차례 加卜을 통해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숙종 27년 9월에는 숙빈 최씨의 고변에 의해 이른바 辛巳獄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노소론의 입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소론의 경우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張禧嬪에 대한 全恩論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노론의 경우 장희빈의 사사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 申琓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장희빈을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장희빈은 노론의 주장대로 賜死되었으며, 장희빈 賜死당시 崔錫鼎이 全恩論을 주장하여 中途付處64)되는 등 소론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나, 換局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申琓趙泰采등 탕평론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辛巳獄이후 노론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자 전일 甲戌換局직후 南九萬을 비롯한 소론측에서 보여준 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등 다시 정국이 경색될 조짐이 보였다. 심지어는 노론측은 “巫蠱事”를 告廟하자고 하여 마치 討逆政局을 방불케하였다. 이럴 즈음 숙종은 宰臣을 차정하여 양역변통을 추진하라는 하교를 내리면서 양역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이 하교는 아마도 노론의 정치적 공세로 인한 정쟁을 최소화시키면서 당시 현안인 민생문제로 당인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숙종의 정국 안정 노력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申琓은 이전에 자신을 아첨꾼으로 비난하다가 지방에 전출된 李世謹의 돈소를 요청하는 한편 자신의 경륜을 피력한 八條萬言封事를 제출하였다. 숙종 28년 8월에 제출된 八條萬言封事는 立治本得人才袪朋黨恤民隱定軍制均身役修城池正經界등의 8조로 구성된 申琓의 정치적 경륜이 표출된 것이었다.
주된 내용은 정치와 민생의 안정 및 국방 문제에 대한 견해들로써, 張禧嬪賜死등으로 인해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政爭을 지양하면서 민생 정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노력은 주효하여 申琓이 제기한 양역변통문제에 대한 논의는 결과적으로 양역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여 숙종 29년 9월에는 良役釐正廳이 설치되었다. 이때 釐正廳에 참여한 인물들은 李濡閔 鎭厚 兪集一 金構 李寅燁등 이었다. 숙종 29년 8월 申琓은 영의정에 제수되어 右議政에 제수된 金構와 함께 양역변통을 후원하여 숙종 30년 12월 이후 균역법의 단초를 열었다고 평가되는「양역변통절목」의 강정을 성사시켰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 申琓은 노소론을 불문하고 李世白 崔錫鼎 李畬 崔奎瑞 趙泰采 金鎭圭등을 옹호하거나 敦召를 요청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자세는 당시 노소론측 대표적인 山林인 權尙夏와 尹拯을 동시에 徵召하자는 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숙종 31년 1월 南九萬과 柳尙運등이 서용되었으며, 申琓은 숙종 31년 2월에 체직되고 4월에는 申琓에 대신하여 崔錫鼎이 영의정에 등용되었다. 이 시기 申琓의 체직과 崔錫鼎의 등용은 申琓이 官妓率畜事나 사복시제조로서 사복시 소속 牧場에서 발생한 대민작폐 등으로 정치적 운신의 폭이 줄어들면서 이 문제로 인한 정국 경색을 우려 스스로 해면요청을 하여 체직되기에 이르렀다. 체직후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申琓은 숙종 32년 林溥와 李潛을 통해 辛巳獄당시 “東宮謀害”라는 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밝히지 않았다는 고변이 제출되자 정계에서 물러나 생활하다가 1년여 후에 사망하였다. 요컨대 숙종대 중반 申琓의 활동은 “務主調劑”로 표현된 그의 성향에서 알 수 있듯이 노소의 중도적 입장을 가진 탕평론자로서 숙종에 의해 중용되어서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 주력하였다. 동시에 양역변통사에 보이는 그의 경향에서도 확인되듯이 이를 통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확보를 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國政運營論의 展開
1. 政局運營論
17세기 士林政治는 君子小人論중심의 붕당론과 世道를 우선하는 논리를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었으며, 정국운영의 주도권은 君主가 아닌 군자라 불리는 신료세력에게로 귀속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군주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君主聖學論과 같은 이론체계를 통해 군주를 견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신료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군주권이 약화되었으며, 심지어 숙종 즉위초반 청나라 사신의 입에서는 “臣强”이라는 표현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에 숙종은 즉위 후 換局을 통해 정치세력을 재편함과 함께 당대 대표적인 山林인 宋時烈과 尹鑴등을 제거하는 등 왕권의 회복에 주력하였다. 이럴즈음 朴世采에 의해서 皇極蕩平論이 제기되었다. 朴世采에 의한 皇極蕩平論의 제기로, 종전의 君子小人論과는 달리 用人을 군주의 황극에 귀속시키는 등 군주 중심적인 정치운영를 마련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정작 皇極蕩平論을 제기한 朴世采가 이를 현실정치에 구현할 위치에 이르렀던 甲戌換局직후인 숙종 21년 2월에 死去함으로써 그 책임은 後人들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당시 蕩平論은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오히려 정국운영 논리로는 17세기 이래의 君子小人論이 주도하였다. 일례로 宋時烈의 문인인 鄭澔는 탕평론자들의 조제보합을 이른바 “兩平”으로 표현하면서, 이 방법은 표면적으로 화평한 것 같으나 결과적으로는 朝臣들이 국왕의 뜻에 영합하여 방자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鄭澔는 그것보다는 공론에 입각해 시비를 가리자고 하였으며, 激濁揚淸을 통한 명확한 시비분별을 주장하였다.
鄭澔의 이같은 是非分別論은 17세기 사림정치하에서 제기된 朋黨肯定論의 연장선상이며, 宋時烈의 제자인 鄭澔의 입장에서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동시에 자파세력 활동의 이론적 뒷받침을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군자소인론이 중심적인 정국운영론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탕평론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확산되던 와중이었던 甲戌換局이후 숙종은 朴世采의 蕩平論을 지지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등 탕평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일부세력을 중용하여 이를 정착시키고,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중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申琓이라 생각되며, 특히 申琓은 탕평론을 이론적으로 마련한 朴世采와 師弟간이면서 인척으로 연결되기에 이를 현실에 구현하기에 적임자라 여겼다고 하겠다.
申琓은 먼저 당시의 정국은 同寅協恭을 바랄 수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인들의 黨論추종에서 구하였다. 黨論의 추종은 결과적으로 激濁揚淸으로 나타나며, 이는 國亡으로 이어질 것임을 申琓은 前史를 들어 경계하였다. 즉 중국 漢代이후의 黨禍를 설명하면서, 黨禍의 원인을 “不顧時勢徒以激揚爲任”이나 “徒以一時之好惡相爲傾軋” 등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申琓의 이같은 인식은 이미 朴世采가 송의 멸망을 신구법당의 調和寅協하지 못한데서 구하고 있는 점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어서 申琓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즉 당시 붕당은 모두 士類들이기에 色目으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하고, 붕당내에서 是非와 邪正을 가려 黜陟과 用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만약 먼저 色目을 기준으로 하면 마침 내는 亡國으로 이를 것임을 경고하였다. 黜陟과 用捨의 권리행사는 물론 당인들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군주에 의한 것이었다. 申琓의 이 같은 주장은 비록 각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고는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正人君子만으로서 이루어진 붕당을 만들며, 군자끼리 寅協하게 되므로 붕당이란 조직이나 명칭이 저절로 필요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朴世采가 주창한 탕평론은 申琓에 의해서 지지되었으며 동문인 金構이외에도, 李濡, 少論側南九萬. 崔錫鼎. 尹趾完 등에게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그렇다면 朴世采의 蕩平論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표명한 申琓의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이론적인 체계로만 그쳤던 朴世采의 蕩平論을 현실 정치에 접목시켰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申琓이 李世白 李畬 金鎭圭(이상 노론)崔錫鼎 崔奎瑞(이상 소론) 등 노소를 불문하고 옹호하거나 敦召를 요청하는 등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의 등용을 요청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숙종 30년에 설치된 良役釐正廳의 당상 구성은 주목된다. 良役釐正廳의 당상 구성에 申琓이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1703년(숙종 29) 9월 정식 설치된 이정청의 당상에는 李濡閔 鎭厚李寅燁 尹世紀 兪集一등이 참여하였다. 이정청 당상으로 선임된 인물 가운데 李濡閔 鎭厚 尹世紀등은 노론이고, 李寅燁은 소론이며, 兪集一은 이들 사이의 중도적인 탕평론자였다. 붕당별로 보면 노론측의 절대적 우위이다. 그러나 노론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경세관료적인 성향이 두드러진다. 申琓과 줄곧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였던 李濡는 그의 卒記에서 노론과 소론은 각각 “마음이 和夷하여 각박하게 의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든가 “강개하여 時務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李濡의 성향을 가름케하는 것으로, 그는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기보다는 현실문제에 주력하면서 조제보합을 주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세기 역시 이유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인물이었다.
민진후의 경우도 仁顯王后민씨와 형제간으로 숙종의 처남이 되는 인물로서, 일반신료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특히 이유와 민진후는 경종 廟庭에 배향95)된 親景宗인물이었다. 위에서 보듯이 당상으로 선임된 인물들은 명분에 의한 당론에 치우치기보다는 현실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던 경세관료적 성향을 보인다고 하겠다. 결국 양역이정청 당상에는 노소론을 모두 포진시켜 구성함으로써 외형적으로 어느 한 당파에 치중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인물의 면면을 보면 경세관료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점은, 申琓이 이 과정에 관여하여 얻어낸 결과라 하겠다. 申琓의 조제보합 노력이 돋보이는 사례이다. 朴世采의 탕평론에서나 이를 계승한 申琓의 그것에서 보았듯이 人事의 최종 주체는 군주이며, 조제보합은 그 방법의 하나였다. 이점은 앞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이와 관련하여 申琓은 신료들에게 公的義理를 강조하였다. 숙종 26년 이조판서에 제수된 李畬가 先戒를 내세워 출사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李畬가 내세운 先戒란 이여에게 曾祖가 되는 李安性이 선조 후반 당쟁을 보고서 후손들에게 登朝후 名士와 교유하여 세인들의 지목을 받지 말 것이며, 入朝하여서는 典籍에, 외직으로 縣令에 만족하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후손들이 黨禍에 다친 것을 우려한데 나온 것이었다.
이때 申琓은 신하된 자는 공적 의리를 우선하여 출사할 것을 권하였다. 숙종 29년 5월 先親의 遺戒를 들어 이조판서에 제수되고도 출사하지 않는 金昌集에 대해서도 申琓은 같은 입장을 내세우면서 출사를 권하였다. 申琓이 강조한 公的義理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점을 이해하고자 할때 현종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여 주목된다. 이른바 현종 5년에 발생한公義私義논쟁이 그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현종 4년 11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慕華館으로 親幸하는 왕의 陪從을 회피한 金萬均이 사직하려는데서 비롯되었다. 金萬均이 陪從을 회피한 것은 祖母인 連山徐氏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에, 원수의 접대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일은 金萬均개인사로 그치지 않고 이후 朝臣들간의 논쟁으로 확대되면서, 峻論과 緩論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峻論이란 宋時烈을 중심으로 그 문인과 추종세력들로써, 이들은 大倫과 名分을 위해서는 私的이기는 하지만 원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게 해주어야 한다고 하여 私義를 중시하였다. 이에 대해 緩論은 徐必遠을 중심으로 한 일부세력들로써, 人臣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어디까지나 臣者된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여 公義를 강조하였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 金萬均개인사의 처리문제에 대한 것으로 보이나, 거기에는 명분과 신료중심의 世道를 우선하느냐, 아니면 현실과 尊君論을 위주로 할 것이냐는 현실적 입장이 내포된 논쟁이었다.
논쟁의 추이나 여파가 차이는 있지만 申琓과 李畬金昌集의 경우도 역시 이와 유사한 경우라 생각된다. 즉 申琓이 강조한 公的義理란 결국 현종대의 公義論에서 나타난 臣者된 도리를 다하는 公義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하된 입장에서는 공적의리가 우선되어야지, 결코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국정에 임하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는 당시의 붕당적 이해나 입장보다는 공적의리를 강조함으로써 군주중심의 정치운영을 추구하였던 申琓의 사고를 반영한 것이었다. 申琓의 군주중심적 정국운영에 대한 입장은 그의 역사인식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申琓은 영의정 재직시 예문관제조를 겸하면서 洪萬宗에게『東國歷代總目』편찬을 권유, 이 책이 완성된후 교서관에서 소량을 인쇄하였다. 『東國歷代總目』의 저자 홍만종은 “詳近而略遠”이라는 찬술원칙을 따라 고조선부터 당대인 조선시대의 역사까지 서술하면서, 상대적으로 당대사에 비중을 두고 있으며, 내용에서는 군주의 치적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은 역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같은 서술방식은 大臣의 역할을 강조하였던 西人兪棨의『麗史提綱』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東國歷代總目』에 나타난 이같은 역사인식은 申琓의 의식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申琓은 무슨 이유로 이같은 내용의 역사서 편찬을 권유하였을까? 洪萬宗은「東國歷代總目識」에서 申琓이 중국의『歷代總目』을 우연히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중국의『歷代總目』은 시기적으로 명나라 희종때까지 서술하면서, 그 내용이 군주의 世系와 재위시기, 치적 등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역사서였다. 따라서 申琓은 홍만종을 통해서 군주중심적인 내용의 역사서를 편찬하려던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탕평 추진을 위한 새로운 군주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정국운영의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아닐까 한다. 이러한 점이 당시 붕당세력들에게 용인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숙종33년 7월 金始煥은 이 책을 僭越하고 無嚴하다고 하여 傳布를 금지하고 편자인 洪萬宗의 정배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2. 軍政論
임진왜란 당시 훈련도감을 필두로 이후 어영청수어청총융청 등이 순차적으로 설립되면 조선전기 군제인 五衛를 대신해갔다. 그러나 이들 군영은 명목상으로는 왕에게 통수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각 군영대장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왕권을 유지하고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公兵’이기보다는 ‘家兵’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숙종이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기반인 군사력 문제를 재고해야만 하였다. 즉 위 초부터 군사력 강화에 부심하였던 숙종이 동왕 8년 金錫冑를 전면에 내세워 금위영을 창설한 것은 이러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왕권의 회복을 통한 군주중심적인 정국운영을 구상하였던 申琓군사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申琓을 비롯한 탕평론자들은 숙종 29년 良役變通의 일환으로 禁衛營이 혁파되었을 때 “宿衛의 單弱”을 이유로 복설을 주장하면서 이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아래에서는 申琓의 군제개편 구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申琓은 먼저 당시 오군영은 이미 愚民들의 避役處역할만 할 뿐이라 비판하였다.
申琓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당시의 각 지역별, 군영별 군액을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제시하였다(〈부록-2〉참조).〈부록-2〉에서 申琓이 제시한 당시 군액의 실상은, 영조 19년에 편찬된 『良役實總』에 앞서는 것이어서 군제에 대한 申琓의 전문가적 식견을 확인케 한다. 申琓이 이같이 구체적으로 당시 군액의 실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앞서 지적한 先系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며, 나아가 당대에만도 같은 집안출신으로 군영대장과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申汝哲등이 현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申琓이 지적한〈부록-2>에 따르면 당시의 총 군사 수는 약 100만 정도로 이 가운데 약 50만이 납포자인 保人이고, 50만 정도는 戰卒이었다. 물론 50만의 戰卒도 실군사수라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상당수가 納布給代하는 자들이거나 虛數일 가능성이 높다. 군제가 이렇게 까지 虛疎化된 이유에 대해서 申琓은 중앙군영이나 지방의 감영병영 등에서 임의로 군사를 모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直定과 募軍에 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양역폐단이 심각해지고, 나아가 군제의 허약성까지 노정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祖宗兵制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조선전기 오위제로의 복귀였다. 오위제복구론에 대한 주장은 申琓에 앞서 17세기 전반 柳馨遠을 비롯해 당대에만도 朴世采나 李濡 등에 의해서 거론된 것이었다. 申琓의 오위제복구론은 朴世采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朴世采는 숙종 9년에 제출한 「陳時務萬言疏」제12조 修軍政條의 小目인 定軍制項에서 오위제복구를 주장하면서, 이를 시행하면 사족과 양민이 모두 예속될 것이라 주장한 적이 있었다. 申琓은 朴世采의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조선전기 오위제 그대로 당시에 재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士族(양반)들의 충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在朝官僚적인 자세라 하겠다. 그럼에도 오위의 유제인 ‘部衛之法’을 살리면서 변통론을 마련하였다. 申琓은 오위제복구를 위해 먼저 군액을 정비하자고 하였다. 당시 100여만명에 이르는 군액이 모두 虛簿가 되었으니, 이를 백지화한 상태에서 수십 만 명을 선발하여 精兵化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수십만의 병사는 鎭管體制에 의거하여 束伍法으로 단속하면 오위제의 복구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束伍法이란 것이 衛는 部를 통솔하고 部는 旗를, 旗는 隊를 隊는 伍를 통솔하는 법으로 군대의 통제가 용이하고 계통이 확립되는 장점이 있었다. 이점을 申琓은 “有統精兵”120)이라는 표현으로써 대신하였다. 이렇게 선발된 군사는 지역에 따라 개월수와 인원을 달리하여 번상시켜, 1朔番軍數가 약 9,400명이 되도록 하고, 이들을 각각 訓鍊都監과 御營廳에 분속시켜 관장하도록 하였다. 형태상 漢代의 漢代南北軍體制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申琓은 각도 보인의 경우도 오위의 법에 따라 각 군영에 분속시키자고 하였다. 일례로 해주의 보인은 금위군에 소속시키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한 후 양역을 고르게 하고, 나머지 인원은 면제시킴으로써 군제의 정비와 함께 양역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되도록 구상하였던 것이다.
조선전기 오위제는 중앙군을 망라하면서 동시에 大閱에 대비하여 전국의 번상군사를 거주지의 진관별로 파악하여 오위에 분속시키는 체제이다. 이는 조선전기에 지향했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에 상당하는 군제이거니와, 申琓이 이의 복구를 구상하였던 것 역시 왕권을 정점으로 군사계통을 새롭게 정비하려는 의지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본다면 비록 군령권이나 관장부서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申琓의 오위제복구론은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통일적인 군사체계의 정비라는 커다란목표가 내재되었다 하겠다. 申琓은 이상과 같이 오위제 복구를 통한 군제의 정비와 함께 방어시설의 정비도 아울러 착수하였다. 군사력 정비를 토대로 이를 재배치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내용은 전국적인 관방시설의 정비와 함께 북한산성 축성론을 제시하여 주목된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수도방위는 인조 4년에 축성된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래 지속된 서울의 변화와 동시에 사회적 불안 요인의 급증 등으로 인해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한 도성민들이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욕구가 표출되었다. 여기에 정치적으로 왕권의 회복 등이 추진되면서 국왕이 머물고 있는 도성수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런 속에서 申琓은 군제의 정비와 함께 북한산성축성론을 제기하였다.
申琓이 축성의 최적지로써 주목한 곳은 彰義門밖의 蕩春臺터로써, 申琓이 파악하기에 이곳은 하늘이 내려준 “戰守之地”였다. 申琓에 의해서 제기된 蕩春臺築城論은 그것이 북한산성 외성 축성이지만, 창의문 밖은 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에 그 논의는 자연스럽게 북한산성에 축성하자는 논의로 변화되어 나타났다. 申琓이 주장한 북한산성축성론은 이전 시기인 임진왜란 직후 李德馨이 제기하였고, 이후에는 효종대127)와 숙종대 남인정권에서 몇 차례 제기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전에는 일회적인 논의에 그친데 비해서 申琓의 논의는 축성 실현의 전단계로써 의미를 갖는다. 축성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숙종 28년 9월 李世白에 의해 재론되면서 부터였다.129) 이후 축성을 둘러싸고 찬반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군비 강화를 추진하던 숙종의 지지를 받아 축성을 위한 준비들이 조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찬반론이 대립하다가, 노소론 붕당세력의 반대로 축성은 중지되고, 도성수축으로 선회하였다. 이때 김구유득일유집일이유 등과 숙종을 비롯해 洪受疇尹就商李思永등이 申琓을 지지하였다. 이들이 축성을 지지한 이유는 첫째, 종래 보장처인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지리적 여건이나 현실적인 면에서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 도성이 지나치게 광대하여 수비에 곤란하다는 도성수비 불가론이다.
반면 노소론 붕당세력이 제시한 반대 이유는 첫째, 도성을 폐기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며, 둘째로, 이른바 “修根本論”으로,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반대이다. 이외에도 북한산성의 자연적, 인문적 지리여건이 축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 청나라와의 약조설, 풍수지리적으로 來龍之脈이 파괴된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상의 찬반론은 申琓을 중심으로 한 탕평론자와 노소당인들의 대립이며, 여기에 정치적 역학관계가 내포된 것은 물론이다. 북한산성 축성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반대하였던 閔鎭厚나 李畬, 金昌集등 다수 노론들이 숙종 36년에 북한산성 축성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그러한 가능성이 충분하다. 申琓을 비롯해 북한산성 축성을 지지하였던 김구나 유득일 등이 탕평론자임은 앞서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臣權이 강한 당시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탕평론을 지지하면서 군주권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申琓의 경우 군주중심의 정국운영을 추진하였으며, 군사적으로 오위제복구론을 주장하여 군제의 정비를 통해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음은 앞서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申琓이 추구한 정국운영 방향과 북한산성 축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 까? 북한산성 축성론이 당시 사회적 변화속에서 제기된 것임은 물론이지만, 거기에는 이를 추진한 정치세력들의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아마도 기존 정치세력이 뿌리내리고 있는 도성과 별도의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여 왕실의 안녕 및 종사의 번영을 이루기 위한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며, 나아가 탕평론자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대해 노론의 경우 표면적으로 전란시 북한산성 중심으로 방위가 치중될 경우 도성의 페기가 불가피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여기에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었음은 물론으로, 숙종을 비롯해 탕평론자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산성을 축성, 이를 왕권중심으로 움직인다면 결과적으로는 노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임은 당연하였다. 노론들은 이를 간파하고 탕평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노론측이 제시하는 “修根本論”으로, 이들은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외면적인 강병책은 砂上樓閣에 불과하므로, 이 보다는 피폐된 민생 회복이 급선무이며, 양병책은 추후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이 시기 당인들의 이같은 입장은 世道政治論과 연관되면서 왕권 강화를 제약하는 논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18세기 전반 북한산성 축성에 반대하는 노론측의 입장은 17세기 이래 제기되었던 양민우선 원칙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왕권에 대한 제약 내지는 견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노론측의 이러한 입장에 반해 소론 역시 도성폐기의 불가라든지, 민생 우선의 원칙 등을 제시하면서 반대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의도는 노론과는 다르게 생각된다. 노론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열세에 있는 소론에게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사족들과 일반 민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役事의 강행은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감만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노론과 소론의 반대에 따라 북한산성 축성론은 申琓이 제기한 당대에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申琓이 제기한 북한산성 축성론의 의의가 적은 것은 아니다. 이 시기 북한산성 축성론은 숙종 37년 실제로 옮겨져 축성된다는 사실이나, 도성민이나 지배층의 안위 욕구를 반영하여 제기된 수도방위 논의를 증폭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나아가 왕권의 군사적 기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 또한 적지 않다.
3. 賦稅運營論
신완이 활동하던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는 동시에 지주제가 확대되면서, 지주들에 의한 토지집적 현상이 심화되었다. 특히 지주들은 국가의 개간정책에 편승하여 일반민들보다 우세한 자본력과 노동력을 이용한 개간을 통해 토지를 집적하였다. 지주제의 심화는 사회적으로 富益富貧益貧의 심화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17세기 후반에 계속된 각종 재해는 민을 토지로부터 유리시키기에 충분하였으며, 나아가 국가재정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이런 속에서 당시 조선의 조세체계는 租庸調중에서 調에 해당되는 공물 부담의 경우 대동법으로 대체되어가던 시기이기에 이를 제외한 租庸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따라서 在朝官僚였던 申琓에게 民의 安集은 급선무의 과제였다. 먼저 그가 庸에 해당되는 양역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살펴보겠다. 앞서 군제문제를 다루면서 조선전기 군제의 붕괴는 군사문제의 허실화를 초래하였고 동시에 양역문제를 파생시켰음을 지적하였다. 그 결과 申琓의 지적에 따르면 15세기 후반 내지는 16세기 초 오위 및 진관체제가 붕괴된 후부터 문제가 파생되어 申琓당대에는 양민 대부분이 군역에 충당되는 폐단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서 당시의 양역에 대한 문란상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①부담의 불균과 ② 役名의 貴賤으로 파악하였다.
① 부담의 불균의 경우 最重者인 漕軍水軍과 最歇者인 각색 군관이나 호련대유청위 등의 사이에 부담의 차이는 9 : 1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申琓이 파악하기에 당시 양역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요인은 부담의 불균이라는 점보다는 ② 役名의 貴賤이었다. 役名良者는 부담이 무겁더라도 이를 피하지않는 반면에 役名賤者는 부담이 헐하여도 모두가 도피하는 양상이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발생한 양역 폐단은 민의 유망 등으로 이어져 조선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동요시킬 것으로 판단, 당시 국정 책임자였던 申琓은 이에 대한 대책론으로 口錢論을 제시하였다. 한편 그는 구전론을 피력하기에 앞서 종전부터 논의되었던 양역변통론인 軍籍과 戶布論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申琓은 小變通論을 지칭하는 의미로 軍籍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소변통론의 일종인 軍籍가운데 특히 校生考講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고강이 인재 등용에 목적을 두지않고 군병 抄定에 목적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考講때문에 신분상의 혼란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이는 납포에 대한 어려움만이아니며 근본적으로는 군역이라는 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숙종 3년 김석주가 제시한 戶布論에 대해 비판하였다. 호포론은 金錫冑이후에도 李師命144) 등에 의해서 거론된 대표적인 대변통론의 한 유형이었다. 사실 호포론은 士族收布不可論이나 民心動搖說, 時期不適切論등을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申琓의 경우도 실제적인 운영과정에서 파생되는 문제인 호구나 호적 파악의 어려움을 제시하는 동시에 민심의 원망 심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종전까지의 양역 변통론에 대해 비판한 申琓이 제시한 양역변통론은 計口收錢하는 구전론이었다. 즉 일년에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필요한 군포를 계산해서 이를 호구에게 균등하게 나누되 귀천을 논하지 말고 인구수를 헤아려서 돈을 거두어 군포에 대신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전법을 시행하면 양반들이 싫어하는 軍保의 칭호가 붙지 않아 양반이나 豪富者도 또한 군역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으로 번상병에 대한 우대를 하면 군제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申琓은 구전법을 실시함으로써 군역부담에서 제외된 양반들을 擔稅層으로 확보하여 감손분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국가재정, 특히 군사재정의 안정화와 동시에 民役의 균등화를 이루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구전법을 통해 申琓은 궁극적으로 군역제의 기본목표인 “有身則有庸”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民役의 균등과 국가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申琓이 양역변통론을 통해서 표명한 民役의 균등과 국가재정의 안정화라는 목표는 양전문제에 대한 구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量田은 토지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어서 당시 지주층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부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개혁이 제기되었는데, 柳馨遠은 ‘균전의 토지분배방식과 井田의 공동부담방식을 통한 토지개혁’148)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在朝官僚를 포함해 대부분의 정치세력은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는 申琓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井田限田之制非末俗之可行者”라든가 균전제는 예부터 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를 부정하였다.
토지제도 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申琓이었지만 국정운영을 담당하는 그로써 현실을 좌시할 수 만은 없었다. 그 결과 제시한 것이 양전제도의 개선이었다. 申琓이 이를 주장하게 된 데에는 기존 양전제도의 한계 때문이었다. 즉 申琓은 임란 이후 그나마 양전시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하는 經界의 不正과 吏胥들의 작폐를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국가 세입은 줄고 오히려 토호들의 이익은 증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를 해결하기에는 종래 양전방법은 부적절하였다. 주지하듯이 申琓당대까지도 시행되던 양전방법은 6등田品과 結負法을 기본으로 5가지의 田形(方田直田句股田梯田圭田)으로 타량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양전을 시행할 경우, 5가지 전형으로 타량하므로 토지 經界가 일정하지 않은 한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토지의 등급에 주관적인 판단의 개입소지가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방전법의 시행을 제시하였다.
방전법이란 5가지 형태로 타량하던데서 방전의 형태로만 타량하는 양전 방법이었다. 신완은 이것을 정전법의 유제라 인식하였다. 申琓이 기존 양전법의 대안으로 제시한 방전법은 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다. 이것은 兪集一에 의해서 창안되고 개발된 방법이었다. 앞서 지적한바 兪集一은 신완과는 동문이면서 동시에 姻戚이었다. 그는 평소 재능을 자임하면서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탕평론자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입장은 申琓과는 불가분의 관계라 하겠다. 이런 그가 신완이 봉사를 제출하기 전에 이미 황해도의 은진강령은율 등 3개 지역에서 방전법을 이용해 양전을 시행하였는데, 申琓은 이 성과를 확인하고서 전국적 시행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兪集一의 방전법에 대해서는 신완 이전에 金構가 시행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崔錫鼎등은 兪集一과 함께 방전법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申琓兪集一등은 무슨 이유로 방전법의 시행을 주장하였는가?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의 토지지배력 강화라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兪集一이 제시한 방전법은 방전을 통한 타량과 함께 돌과 흙을 이용하여 높이와 넓이가 각각 2척인 墩臺를 설치하고서는 360步인 1里를 1方으로 하여 1정으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약 이 법으로 양전을 행한다면, 양전법이 간편해지고, 檢田이 편하며, 토지의 중간 누락 폐단도 없다고 하였다.156) 기존 양전시에 나타나는 폐단인 수령의 隱結이라든지 지주층의 토지 누락 등도 다소나마 제거될 수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토지 지배가 이전의 양전에 비해서 용이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방전법을 통해 양전하면 民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즉 숙종 27년 9월 양전 시행후 전세부과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申琓은 “소민들은 비록 편하다고 하나 호활지배들은 隱卜이 탈로날까를 두려워하여 怨言을 일으키니” 라고 하여 방전법의 시행을 둘러싼 계층간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여기서 반대하는 호활지배들은 아마도 종전에 시행되던 양전에서 이익을 챙기던 계층일 것으로, 申琓의 지적에 나타나는 지방의 이서배들과 토호들이라 하겠다. 결국 이 법을 처음으로 제창한 유집일이나 이의 전국적 실시를 주장하였던 김구, 신완, 최석정 등은 이의 실시를 통해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일반 소민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이를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탕평론자들의 부세관 파악을 가능하게 하거니와, 국가재정의 일방적인 증가를 추진하기보다는 종래 탈세층인 지주층들을 대거 조세원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을 보충하는 동시에, 일반 소민들의 부담도 경감시키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에 시행에 부정적이었던 신완의 경우 方田法으로 해서4읍을 실시한 결과, 啓本과 圖帳이 호조로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서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상에서 살펴본 申琓의 부세운영론은 양역변통론에서는 구전법의 시행을, 양전제도에서는 방전법의 실시 등을 제시하였음을 보았다. 이들 변통론에 내재한 목표는 다름아닌 民役의 균등화와 국가재정의 안정화라는 사실이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숙종대 중반 정국을 주도하였던 탕평논자인 申琓의 국정운영론을 살펴보았다. 申琓이 활동하던 시기는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이후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화되면서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申琓은 노소 분당 이전에는 서인으로 남인과 대립하였으며, 노소론 분당을 전후한 시기에는 훈척신의 비리에 대한 공격을 가하면서 소론 당색을 갖게되었다. 그러나 甲戌換局이후에는 스승인 박세채를 중심으로 유집일, 김구 등과 함께 탕평론자로써 활동하면서 숙종의 치세를 지원하였다. 이런 정치적 입장에 있던 申琓은 정치적으로 조제보합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군주중심으로 정국운영을 추진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 오위제복구론을 주장하여 통일적인 군사체계를 정비하고, 이렇게 갖추어진 인적기반을 재배치하기 위해 북한산성 축성론을 주장하였다. 부세운영면에서는 양역변통론으로 구전론을, 양전제도의 개선에서 방전법의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民役의 균등화와 국가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특히 부세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종래 擔稅層에서 제외되었던 양반들을 적극적으로 색출함으로써 이들에게 부세를 부과하고, 이를 통해서 확보된 재원으로 민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 申琓의 이같은 국정운영론은 궁극적으로 君主중심의 정치체제와 부국강병 논리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왕권강화를 추진하던 숙종의 의도와도 일치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는 순탄한 정치적 행보를걸을 수 있었다.
숙종대 중반 신완을 중심으로 하는 이같은 탕평론자들의 존재는 17세기 이래 전개되던 사림정치하의 정치명분이 서서히 극복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숙종대 중반에는 이들 탕평론자들의 정치적 규합이나 또는 특정의 정치세력으로써 그 결속이 강고하지 못함으로써, 방전법이나 구전론 등이 논의로만 그치고 말았다. 이 점은 후일에 완성을 보게되는 북한산성 축성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탕평론자들의 한계로써 신완이나 김구 등이 점차 연로해지거나 死去하면서 숙종대 후반은 노론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숙종 자신도 이같은 정국 흐름을 반영하듯이 이른바『가례원류』시비에서 보듯이 노론측의 사상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들의 동조와 지원을 받으면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이를 통해 李頤命의 丁酉獨對나, 후일 경종이 되는 세자의 대리청정 등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