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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서울 나들이 (1): 신림역 사거리에서
나는 우리 동창 송년회가 있기 사흘 전(9일, 토요일)에 상경하였다. 상경하는 그 길로 서울 교대에 가서, ‘신과 인간 2: 성경재 및 도덕교육학회 공동 주체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내가 속해있는 공부 모임이다. (우리 친구들 중 진섭형이 몇 해 전에 이 모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다.) 이번 강연회에서 내 관심을 특별히 끌어당긴 것은 유학의 용어인 ‘성(誠)’이라는 것이다. 성. 우리 친구들 중에 유학이나 성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겠지만, 그런 사람이 아닌 사람 중에도 이 용어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때의 고등학교 윤리 책에 나왔다. “퇴계는 경(敬)을 강조하고 율곡은 성을 강조하였다.” 시험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뭐지? 의미는 모르는 거지.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냥 외운 거지. 그 때 윤리 선생이 어느 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도 그 의미를 모르고 계셨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렇게 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그것을 내 전공으로 삼고 있는 나도, 그리고 이 나이까지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에는 “성이 없으면 사물이 없다”(不誠無物)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인터넷에서는 이런 해석이 발견되기도 한다.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사실, 그 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 회사나 기관의 신년사에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만약 ‘일’이라는 것이 회사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나 계약을 따내는 것을 의미하고,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악착같이 하는 것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중용>의 그 구절은 완전히 오독된 것, 아니 완전히 거꾸로 해독된 것이 된다. 성은 이른바 ‘내재적 동기’에 해당한다. ‘외재적 동기’는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되, 생기는 것(상장, 합격, 진급 등) 때문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목적(상장 등)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내재적 동기는? 목적이 없는데도 움직이는 것이다. 성은 ‘정성’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그 이상의 심각한, 아마도 종교적 색채를 가미했다고 보아야 할, 심각한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영어로는 보통 sinscerity로 번역되지만, authenticity, integrity로 번역되기도 한다. <중용>에서 성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 내가 곧 하늘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있다.
강연회가 끝나고는 인근 식당으로 몰려가서 삼겹살을 먹게 되어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가서 한우 등심을 먹었다. 교대에서 멀지 않은 한티역 근처에 사신다. 그렇게 저녁 잘 먹고, 단골 카피 가게 ‘커피 볶는 곰’에 가서 아메리카노도 한잔 마시고 어머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는 것은 광명시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날은 버스를 탔다. 신림역 사거리에서 내렸다. 거기에서 광명시 가는 것으로 갈아타면 된다. 갈아타려면 신림역 지하도로 들어가 시흥 가는 쪽으로 나와야 한다. 나는 종종 걸음을 걸었다. 평소에 하던 그대로였다. 그런데, 지하도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이렇게 빠른 걸음을 걸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렇게 바삐 걸을 이유가 있는가 말이다. 물론 없다. 전혀 없다. 날씨도 푸근한 편이었고,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밥도 먹었고 커피까지 마셨으니 뱃속도 지극히 만족스럽다. 그런데 어디로 그리 바쁘게 가는가? 물론 집으로 간다. 집에 가서 특별히 할 일도 없다면서? 그렇기는 하다. 그 당시 나는 내 인생의 나머지 부분의 도입부 일부를 이 길에서 보내기보다 집에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셈이지만, 그 판단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습관이라고 할까? 성향? 심하게 말하면, 일종의 신경증 증세? 나는 젊은 시절 언젠가, 내가 항상 경미하게 화가 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것과 유사하게 나는 항상 경미하게 바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항상 경미하게 어깨에 근육이 뭉쳐 있고, 항상 경미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 항상 경미하게 신체가 굳어 있는 것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상태, 즉 그런 습관이나 성향, 증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런 반성을 하였던 것은, 다시 말해, 지하도에서 바깥으로 나오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퍼뜩 떠올렸던 것은, 그 날 낮에 ‘성’에 대한 강연을 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다가 아예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신림역 사거리도 많이 변해있었다. 내가 그곳을 자주 찾았던 것은 대학원 다닐 때였다. 그 때 우리는 그 유명한 신림동 순대타운에 자주 갔었다. 거기에서 탤런트 임현식을 본 적도 있다. 지금도 그곳이 남아있을까? 토요일 저녁이라서 그런지, 신림역 사거리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특히 순대타운에서 대각선 방향에 있는 ‘패션·문화의 거리’라는 곳이 붐볐다. 나는 사람도 구경하고 점포도 구경하였다. 마치 서울 구경을 처음 하는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렸으며, 고개를 90도로 꺾어 고층빌딩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동 모드에서 관광 모드나 산책 모드로 전향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으리으리하고 번화한 곳이건만 꾀죄죄한 포장마차와 노점상이 있었다. 그 차림새가 일본 아이들처럼 보이는 젊은이도 많았다.
발레리던가, 산문과 시의 차이는 걷는 것과 춤추는 것의 차이와 같다고 말한 사람은? 지금 나는 발레리와는 정반대로, 걷는 것과 춤추는 것의 차이에 관심이 있다. 혹은 순전히 이동을 위해 걷는 것과 산책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관심이 있다. 그 차이를 산문과 시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지만, 쉽게 말해 보자. 쉽게 말해서, 이동은 순전히 목적 달성을 위한 활동이요, 수단적 활동이다. 이동은, 목적지로 그야말로 이동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이에 대해 산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기가 일쑤이며, 정해진 곳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누구나 다 아는 그 대로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이동은 삶의 내용물이 되지 못한다. 산책만이 삶의 내용을 이룬다. 즉 목적 달성 활동, 수단적 활동은 삶을 채우는 것이 되지 못하며, 그 활동을 한 기간은 삶을 산 기간으로 기록되지 못한다. 오로지 그 자체로 목적인 활동만이 삶을 채우며, 그 활동을 수행한 기간만이 삶을 산 기간으로 인정된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게 말한 듯한데, 내 말의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내 말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이며, 또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내 주장에 대해서도 다들 찬성해 주어야 한다. 예컨대 오로지 매출을 올리거나 계약을 따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저러한 활동을 하면서 보낸 기간은 삶을 산 기간이 아니다. 그런 목적으로 악착 같이 달려든, 그런 기간, 그런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 그런 기간은 삶을 산 기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활동, 그런 기간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렇게 따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 상장도 필요하고 합격도 필요하고 진급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에 흔쾌히 동의한다. 다만, 그 활동은 삶이 아니며 그 기간은 삶을 산 것이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삶이 유예되었던 것이다. 그 기간은 삶의 유예, 삶의 연기라는 엄청나게 큰 희생을 감수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지폐 몇 장 받고 말이다.
그리고 그게 잘못이라는 사실, 즉 그 기간을 내가 잘못 보낸 것이라는 사실은, 설사 나는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몸은 알고 내 몸은 인정한다. 내 몸에 여러 가지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깨에 근육이 뭉쳐있다거나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혹은 평소에도 그냥 공연히 화가 나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 증세 중 극히 경미한 것이다. 그런 증세는 하나같이 목적 달성에 대한 압박감에서 오는 긴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목적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목적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며 심지어 자기 몸과 자기 자신도 보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용>의 “성이 없으면 사물이 없다”(不誠無物)는 말은 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 글자에 충실하게 반복하자면 이렇게 된다. 회사의 신년사에서는 그 귀절을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않으면 매출을 올릴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그 구절은 “그렇게 해서 매출을 올렸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 뜻이요, “그렇게 해서 일을 이루었다면, 일을 이룬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즉, “정성이 없었다면, 일을 이루었다고 해도, 일을 이룬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정성’ 혹은 ‘성’은, 어떤 것인가 하면, 목적(매출 신장, 상장, 진급 등)을 달성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열심히 달려드는 것을 가리킨다. 담임 선생님이 안 보시는 데도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사실,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일에 열심히 달려드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것을 보고 정성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닌가? 그 때 그 사람이 ‘정성을 다하는’ 대상은 물론 목적 혹은 목적 달성이다. 그 때 그는 목적 달성에 헌신하는 것이요, 그 목적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다. 진짜로 정성을 다해 섬겨야 할 자기의 삶을 내팽개친 채 말이다. 자기의 삶을, 자기의 몸과 자기의 정신건강과 더불어, 내팽개친 채 말이다. 자기의 삶을, 삶의 과정에서 즐길 수 있는 소소하나 소중한 여러 가지 기쁨들과 더불어, 내팽개친 채 말이다.
발레리의 장시(長詩) ‘해변의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
* 성(誠)은 물론 도덕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적, 현대적 의미의 도덕성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이른바 공적 영역만이 아니라 사적 영역도 카바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성은 남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익에 기여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이, 예컨대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이익에도 기여한다는, 그런 식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난점>의 “교육과 정신 건강”은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에서 로저스나 매슬로우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로저스 쪽의 입장에도 일말의 아름다움이 들어있다. 로저스 쪽의 입장을 키에르케고르가 아니라 목적달성주의자에게 견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그 책은, 교육은 개념상 정신 건강과 관련이 없다거나, 심지어 정신 건강상 좋지 않은 상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교육이 개념상 성(誠)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 건강과 관련이 있으며, 정신 건강상 좋은 상태와 관련이 있다.
첫댓글 이것은 내가 동창 까페에 썼던 글에 각주를 추가하여 옮겨 온 것입니다.
글을 필서 하고 싶을 정도로 참 와닿습니다. 교수님 글은 언제나 그러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