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르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23) 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그 언저리에 있는 단종의 왕비 송씨의 화려한 사릉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그 배경을 더듬어 보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광해군의 묘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비운의 임금을 상징하는 듯 초라한 모습이다.
역사인물을 오늘날의 가치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일은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당시의 가치기준 때문이기도 하고 이념의 조작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놓고 그 실상과는 다르게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 실상에 접근하고 새로운 역사경험을 음미하기 위해 광해군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조선조에서는 폭군으로 흔히 연산군과 광해군을 꼽는다. 분명 연산군은 폭군의 범주에 든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그 속사정이 사뭇 다르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의 죄목은, 첫째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이고,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정치를 혼탁하게 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이유로 다음 사실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00여 년, 의리로는 곧 군신이요, 은혜로는 부자와 같도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도다. 선왕(선조)이 어위(御位)하신 지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중국이 있는 방향) 앉으신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잊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전역(戰役, 1619년의 사르후 전투를 말함)에 참가하면서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도다. 그리하여 끝내 온 군사가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사해에 떠돌게 했도다. ······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했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 《광해군일기》 권187, 15년 3월조
바로 이 세 번째 문제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주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 대해 사대를 하지 않고 청나라에 곁붙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광해군을 오늘날 재평가하는 초점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자주 ·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가 사대파에 밀려났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을까?
원래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따라서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몸이 되었다. 후사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에서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것으로 일단 세자책봉 문제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런 마당에 1606년(선조 39) 중전인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가 태어났다. 불행의 씨앗은 바로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선조는 정비에게서 새로 태어난 영창대군을 무척 총애했다.
어느 날은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선조의 심중을 짚어 내느라 온 머리를 짜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현재의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의 교서를 내렸다. 시의에 적절한 조치였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각주 .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때에도 할은론이 제기되었는데,
정인홍이 일곱 살의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할은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처음에는 처형의 조치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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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중국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적절한 외교로 청나라의 침입을 막았고 대동법의 실시로 조세행정을 바로잡았으며 《동의보감》의 간행으로 의학서적을 정리한 업적을 남겼다. 이렇게 그는 업적을 쌓았지만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