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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선비와 선비정신
1. 충북의 선비
1) 조선시대 충북 선비
(1) 정도전(鄭道傳, 1342∼1398)
❍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한 인물.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시호 문헌(文憲).
❍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운경(云敬).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북도 단양.
❍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수학.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
❍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태상박사(太常博士)를 역임.
❍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
❍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
❍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음.
❍ 1392년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 조선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으로 요직을 겸임하며 정권과 병권을 장악.
❍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여.
❍ 이후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고,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
❍ 1398년 9월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명으로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
❍ 조선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음.
❍ 그는 국내외로 어수선했던 청·장년의 시기에 유배·유랑 생활을 통해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이 깊어 졌으며,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
❍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 그는 여러 저술을 통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
❍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
❍ 그는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으나,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함.
❍ 그는 경세(經世)·역사(歷史)·병법(兵法)·의서(醫書)·역산(曆算)·악사(樂詞)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남겼으며, 대표 문집으로는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된 삼봉집(三峰集)이 있음.
(2) 김덕숭(金德崇, 1373∼144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수(子修), 호는 모암(慕庵). 송도(松都) 출생
❍ 판윤(判尹) 김천익(金天益)의 아들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
❍ 1392년(공양왕 4)에 고려가 멸망하자, 아버지 김천익이 송도판윤(松都判尹)의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진천군 백곡면(栢谷面) 석현리(石峴里) 추자(楸子) 마을로 낙향.
❍ 1393년(태조 2)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출사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 후 귀향하여 부모 봉양에 전력을 다함.
❍ 1426년(세종 8) 한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팔십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 달 만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부모 봉양에만 힘씀.
❍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당(堂)에 나가 산신께 기도를 올리니 꿩이 날아들어 오고, 엄동설한에 미나리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 살펴보니 싱싱한 미나리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고, 잉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자리가 녹아 생긴 구멍에서 뛰어 나왔다는 신이(神異)한 일화가 전함.
❍ 김덕숭이 62세 되던 해 어머니가 84세로 세상을 뜨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애통해하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또한 집과 묘막을 오가면서 아버지를 봉양하며 삼년상을 치름.
❍ 1444년 세종이 초정(椒井)에 거둥하셨을 때 김덕숭의 효행을 듣고 술과 고기를 직접 하사하고, 충청감사로 하여금 술과 고기·쌀 열 가마를 특별히 내리게 함.
❍ 이해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합장하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시묘.
❍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려 정각을 건립하게 하였으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효행을 기록.
❍ 묘소와 신도비가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5번지에 있으며, 1631년(인조 11) 이월면 사곡리에 효행을 기리기 위해 목조 기와 맞배지붕으로 사방 한 칸의 효자문을 세움.
(3) 김정(金淨, 1486~1521)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사람.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성족리(聲足里) 출신.
❍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윤고(尹恭)의 딸.
❍ 중종조 기묘사회 때의 기호사림의 중추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조광조․유숭조․김안국 등과 중조의 총애를 받아 왕도정치를 급진적으로 추진.
❍ 21세, 구병산 부근 고봉정사에서 최수성, 구수복 등과 성현의 뜻을 토론하며 함양.
❍ 1507년(중종 2) 22세, 별시갑과에 장원하며 출사(出仕),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
❍ 1515년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이 왕후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니 신씨를 복위시키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를 추죄(追罪)하라고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보은(報恩) 함림역(含林驛)으로 유배.
❍ 귀향살이에서 풀려나 응교, 전한에 발령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금강 상류의 주애(朱崖, 지금은 대청댐으로 수몰된 대덕군 동면 탐심리)에서 시주(詩酒)를 즐기며 후생 교육과 학문․행실 수양에 힘씀.
❍ 이후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님.
❍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이배.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
❍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
❍ 오늘날 그의 好學, 志操, 躬行의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
(4) 성운(成運, 1497~1579)
❍ 16세기에 속리산 일대를 학문의 무대로 삼으면서 처사형 사림(士林)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
❍ 자는 건숙(建叔), 호는 대곡(大谷), 본관은 창녕. 증조부 득식(得識)은 한성부우윤, 조부 충달(忠達)은 현령, 부친 세준(世俊)은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어머니 박씨는 사간 박효원의 딸
❍ 조광조의 문인으로 백악산 자락에서 은거하던 성수침(成守琛)은 그의 종형으로, 기호학파의 원류가 된 성혼(成渾, 1535~1598)은 성운의 당질(堂姪).
❍ 성씨(成氏)는 본래 서울에서 살았지만 성운은 젊을 적에 세상을 피해 살 뜻이 있어 잠시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곧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처향(妻鄕)인 충청도 보은에 거주.
❍ 30여세 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일(遺逸: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를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음.
❍ 남명 조식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으며, 그의 학풍과 사상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허목, 윤휴 등 17세기 중ㆍ후반 근기남인(近畿南人: 서울, 경기 지역의 남인) 학자들에게도 일정한 영향력을 주었음이 확인.
❍ 일생의 대부분을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활동을 했고, 조식, 성제원(成悌元), 서경덕(徐敬德), 이지함 등 당대의 처사들과 깊은 교분을 가짐.
❍ 성운이 은거하고 있었던 속리산 지역은 16세기 중반 당대의 처사형 사림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장소. 조식은 경상우도에서 이곳 속리산까지 찾아와 성운을 만났으며, 성제원은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성운과 친밀함을 유지.
❍ 성운이 추구했던 학풍적 특징은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여 실천의 밑바탕으로 삼은 것과 은둔적인 처세를 하면서 성리학 이외에 노장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지적할 수 있음.
❍ 성운은 속리산에 은거하는 처사의 삶으로 일관했지만 현실정치에 완전히 인연을 끊은 현실 은둔자는 아님. 그는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 학자로서 백성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무엇보다 수령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
❍ 성운은 또한 산림에 은거한 인재들을 제대로 등용해야만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안정되며, 어질지 못한 자를 등용하여 조정의 반열에 포진시키는 것은 헛된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행위라고 인식.
❍ 성운은 당대 및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온화하고 엄정하게 처사의 입지를 지킨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 실록(實錄)에서는 ‘대체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라 영가하였고, 16세기 당대의 인물평가서인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서는 ‘사람됨이 단중(端重)하고 온아(溫雅), 평담(平淡), 간이(簡易)하다’고 그의 인품을 평가.
❍ 성운의 학풍과 처세는 임제(林悌, 1549~1587), 허목, 윤휴(尹鑴, 1617~1680)의 학문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침.
(5) 김득신(金得臣, 1604~16840)
❍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백곡노인(栢谷老人)․백곡병부(柏谷病夫)․백곡계옹(柏谷溪翁)․백곡노수(柏谷老叟)․백곡노옹(柏谷老翁)․백옹(柏翁)․괴강노옹(槐江老翁)․구석산인(龜石山人) 등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이고,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어머니는 목첨(睦詹)의 딸인 사천목씨(泗川睦氏).
❍ 김득신의 집안은 그의 고조부 김석(金錫)이 중종 때 기묘사화에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관계로 외가인 의성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괴산 법전리로 낙향하며 충북 지역에 세거.
❍ 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어서 10세 때에야 아버지에게 사략(史略)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학문 성취가 늦었으나 아버지의 독려와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서서히 문명을 떨침.
❍ 1625년 22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1627년에 삼년상을 마치고 청운의 꿈을 품고 27세 이후로는 산사와 경향 등지를 두루 다니며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함.
❍ 그러나 중국 사신이 올 때 백의의 제술관으로 추천을 받기도 하고, 당대 한문대가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고 인정을 받아 문명(文名)을 크게 떨침.
❍ 1642년(인조 20) 39세의 나이로 식년시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였으나 그 뒤로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1662년(현종 3년) 59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병과 19위로 급제.
❍ 9품관인 성균관 학유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전적․각조좌랑․홍천현감․강원도사․성균관직강․정선군수․풍기군수․성균관사예․사헌부장령․제용감정․사복시정․군자감정․종부시정․사도시정․승문원판교․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
❍ 당시 피비린내 나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붕당싸움의 현장에서 시인 관료였던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아 홍천현감, 정선군수, 사헌부 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본직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탄핵을 받음.
❍ 이에 괴산 취묵당(醉默堂)으로 내려와 음주부시(飮酒賦詩)로 자오(自誤). 그 후 78세 때에는 세훈(世勳)으로 통정대부가 되고, 80세에는 가희대부(嘉善大夫)로 위계가 올랐으며, 안풍궁(安豊君)에 봉해짐. 1684년(숙종 10) 81세의 일기로 취묵당에서 생을 마침.
❍ 다독으로 유명한 그의 고문 읽기는 그의 문학관 형성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줌. 그가 고문 읽기를 시작한 31세 때부터로, 이후 67세까지 36년 동안 36편의 고문을 읽고서 지은 「고문삼십육수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에는 그가 읽은 고문의 목록과 독서 횟수가 기록되어 있음.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무려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기도 함.
❍ 그는 자연을 노래한 사실주의적이고 회화적인 시를 많이 썼고, 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으며, 한 자 한 자 시어를 놓을 때마다 고뇌하고 공을 들였음.
❍ 그의 저술은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柏谷集)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고,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음.
❍ 현재 그의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栗里)에 있음.
(6) 이하곤(李夏坤, 1677~1724)
❍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유학자이자 장서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이며, 호는 담헌(澹軒)·소금산초(小金山樵)·무우자(無憂子)·금산병부(金山病夫)·담옹(澹翁)·담헌거사(澹軒居士)·담암(澹庵).
❍ 할아버지는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셋째 아들인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이며, 아버지는 문형(文衡)이었던 이인엽(李寅燁). 부인은 은진송씨로 이조판서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의 딸.
❍ 21세인 1697년(숙종 23)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 1708년(숙종 34)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생원과에도 합격.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1722년(경종 2)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인 진천군 초평면으로 내려와 학문과 서화에 힘씀.
❍ 특히 책을 매우 사랑하여 어떤 사람이 책을 파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 주고라도 책을 사들여 수집한 장서(藏書)가 1만 권을 헤아렸으며, 이에 사람들이 그의 서고를 만권루(萬卷樓, 본래 명칭은 완위각(宛委閣))라고 부름.
❍ 성격이 곧아 아첨하기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녔으며,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각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님.
❍ 그는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독서와 시서화(詩書畵) 및 장서에 힘썼으며, 만권루를 중심으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과 서예·문장으로 유명한 윤순(尹淳), 화가였던 정선(鄭敾)·윤두서(尹斗緖) 등과 교유.
❍ 교유 관계는 신분과 연령에 구애됨이 없이 광범위하게 걸쳐 있어, 김창흡(金昌翕)·이병연·신정하(申靖夏)·이광사(李匡師)·윤두서·윤순·조귀명(趙龜命)·홍중성(洪重聖) 등 양반 사대부로부터 홍세태(洪世泰)·정래교(鄭來僑)·정민교(鄭敏僑)·이수장(李壽長) 등 여항인(閭巷人)까지 신분과 당색의 구별없이 문학적으로 동인적 교유를 실천.
❍ 시문집으로 두타초(頭陀草), 담헌집(澹軒集), 선세유사(先世遺事) 등이 있으며 문학 세계는 한마디로 진시(眞詩)·진문(眞文)의 세계를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7) 송시열(宋時烈, 1607∼1689)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 외가가 있는 옥천 구룡촌에서 출생.
❍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음.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
❍ 1625년(인조 3년)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하였으며,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 세상을 떠남.
❍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
❍ 1633년(인조 11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됨.
❍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으로 출사.
❍ 그는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인물로 그의 북벌론은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
❍ 1650년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음.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음.
❍ 이후 효종이 거듭해서 그에게 관직을 내렸으나 때마다 사양하다가 1658년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부임함. 그해 12월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가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감.
❍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 그는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
❍ 이후 그는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정읍에서 마주쳐 사약을 마시고 생애를 마감.
❍ 그는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고,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함.
❍ 또한 양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
❍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
❍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함.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됨.
❍ 그는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나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으며, 매우 개성적인 서체로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높았음.
❍ 그의 교우 관계는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음.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이 있음.
❍ 그러나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음.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
❍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짐.
❍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
❍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났으며, 그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
❍ 저술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經禮疑義)․심경석의(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음.
❍ 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尤菴集)이라 하였고,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명명.
(8) 권상하(權尙夏, 1641 ~ 1721년)
❍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격(格)이며, 동생은 우참찬 상유(尙游).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
❍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
❍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留任)시킬 것을 상소.
❍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자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
❍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송시열이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자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옴.
❍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
❍ 1703년 찬선, 이듬해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음.
❍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됨.
❍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
❍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임.
❍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
❍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
❍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음.
❍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을 남김.
❍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 시호는 문순(文純).
(9) 정일당강씨(靜一堂姜氏, 1772~1832)
❍ 조선 후기 때의 여류시인.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정일당(靜一堂). 아버지는 재수(在洙)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서응(瑞應)의 딸. 아명은 지덕(至德)이며, 외가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 20세에 당시 14세였던 충주의 선비 윤광연(尹光演)과 혼인. 윤광연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명직(明直), 호는 탄재(坦齋)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6세손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제자.
❍ 그녀의 친가였던 진주강씨는 10대조 강희맹(姜希孟) 이래 시와 문장으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동생인 권상명(權尙明)의 현손.
❍ 정일당 강씨의 친가와 시가는 다 같이 벼슬을 하던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증조부 이후에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
❍ 남편 윤광연은 젊은 시절에 학문을 힘쓰지 않고 생계를 위하여 상업활동을 하다가 적은 재산마저 탕진. 고향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그들은 서울 근처로 올라와 객지생활.
❍ 후에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의 약현(藥峴)[지금의 중구 중림동]에 정착. 여기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여 경제적 토대를 마련.
❍ 그녀는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 윤광연과 함께 공부. 정일당은 남편에게 벼슬을 단념시키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도록 권함.
❍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1832년(순조 32) 9월 14일 향년 만 61세로 타계. 광주군 대왕면 둔퇴리 청계산 동쪽(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안장.
❍ 정일당의 저서로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가 남아 있는데 남편 윤광연이 그녀의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남은 시와 편지 및 잡문 등을 모아 간행. 여기에는 시 38수, 서(書) 7편, 척독(尺牘: 쪽지 편지) 82편, 서 별지(別紙) 2편, 기(記) 3편, 제발(題跋) 2편, 묘지명 3편, 행장 3편, 제문 3편, 명(銘) 5편, 잡저(雜著) 2편 등이 수록.
❍ 전체적으로 보면 정일당 시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 학문에의 집념, 심성 수양, 자신과 남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 안빈낙도의 생활, 자연 속의 관조, 달관의 체험과 같은 도학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타인에 대한 사례, 칭송과 축원 등이 일부 포함. 정일당의 산문 역시 문체가 질박강건하고 도학적인 취향.
❍ 정일당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서체가 매우 강건하고 단정. 현재 남은 글씨는 문집 부록에 판각된 8자가 전부.
❍ 정일당은 학문 연원은 첫째, 남편의 스승이었던 강재 송치규와 평생을 사숙하였던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 그녀는 평생토록 천지와 사람의 이치를 탐구하였고, 성품과 천명의 근원을 연구하는 데 몰두. 이를 위하여 그녀는 젊은 시절 중용 연구에 침잠하여 주자의 오묘한 뜻을 체득하였고, 특히 계신장(戒愼章)의 분석에는 일가를 이룸.
❍ 정일당은 평생 동안 성(誠)과 경(敬)의 실천에 노력. 그녀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절대자에게 의존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으면서 의연하게 자기 성실을 다하고 남을 위로하는 정일당의 모습에서 실존주의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을 발견.
❍ 정일당의 철학이나 문학은 조선시대 여성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여성계 보급과 점증하는 여성들의 학문활동 및 의식성장을 이해할 수 있음.
❍ 그녀는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를 바 없으며,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강한 자아의식을 표방. 그녀는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수련한 드문 여성들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학자 혹은 철학자.
❍ 그녀는 성리학의 본질적 원리 안에서 남녀평등의 이념을 찾아냈고,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양하고 실천. 이들은 조선 후기 유학사나 여성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정일당 강씨는 전통시대의 많은 질곡 속에서도, 스스로 입지를 세우고 분발하여 여성들이 품성을 계발하고 자아를 완성해간 모범을 보여줌.
(10) 이상수(李象秀, 1820~1882)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인(汝人), 호는 어당(峿堂). 연주(演周)의 아들, 어머니는 윤씨.
❍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허약하였으나 매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선친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 12살에 이미 칠서(七書)를 독파하였으며 율시작법에 익숙할 만큼 재능이 뛰어남.
❍ 31세에 가족을 이끌고 파주에서 회인의 추동으로 옮겨 50세까지 20년 간 강학활동을 하며 호산 박문호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회인현에 유풍(儒風)을 진작.
❍ 추동에서의 생활이 곤궁하여 51세에 청주의 연제(蓮堤)로 거처를 옮겨 확동을 모아 교육하며 회인의 제자들을 함께 돌보며 생활.
❍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학문에 정직하여 40세가 되던 1859년(철종 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0세 이후로는 국왕의 부름을 받아 경연관을 거쳐 진선(進善), 집의(執義)를 지낸 산림학자, 교육가, 시인, 문장가.
❍ 어려운 가정환경과 계속되는 과거시험의 실패로 인해 울울한 젊은 시절을 보내던 그는 한때 산수를 유람하며 해소하기도 함. 해주의 석담(石潭), 속리산, 망월산, 금강산, 화양동, 영월, 단양 등이 그가 이때 방문했던 산수임.
❍ 그의 학통은 한원진(韓元震)을 이은 호론(湖論)에 속하며, 동문으로 민상호(閔象鎬)·성기운(成岐運)·서응순(徐應淳) 등이 있고, 임헌회(任憲晦)와도 교우. 또한 윤정현(尹定鉉)·신헌(申櫶)과 같은 노론인사들과도 친숙.
❍ 그는 젊어서부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 의 경화세족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청대 고증학을 습득.
❍ 구방심(求放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고,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함. 학문에 있어 먼저 문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갱신고(更辛苦)·순승법(循繩法)과 같은 독특한 교수법을 창안.
❍ 1880년(고종 17) 문학에 능하고 서울의 노론 고관들을 많이 알고 있던 그는 김낙현(金洛鉉) 등과 함께 경연관 겸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음.
❍ 다시 시강원진선과 사헌부집의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직.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소와 실학(實學)과 실사(實事)에 힘쓸 것을 주장하는 소를 거듭 올림.
❍ 1910년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 저서로는 어당집(峿堂集) 24권, 어당속집(峿堂續集) 8권, 남명사정강(南明史正綱)33권, 몽유(蒙牖)1권 등이 있고 가사 작품으로는 「금강별곡(金剛別曲)」, 「경화장관(京華壯觀)」 등이 전함.
❍ 현재 충북 보은군 회남면 추양사(秋陽祠)에 배향.
(11) 박문호(朴文鎬, 1846∼1918)
❍ 한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살면서 240여 권의 방대한 성리학서를 남긴 기호학파 호론의 적전(嫡傳)으로서 호서사림의 대성리학자.
❍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경모(景模), 호는 호산(壺山)‧풍산(楓山)‧노초(老樵). 아버지는 한담(閑潭) 박기성(朴基成)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
❍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1세 때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계승한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를 처음 만난 뒤 20세부터 어당 이상수에게 수학.
❍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의리심성지학(義理心性之學)에 전념. 1877년(고종 14)에는 신윤일(申允一)의 백원정사(白園精舍)에서 강학하였으며, 그 해 나라에서 인재를 구할 때 학행으로 추천.
❍ 1885년(고종 22)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해 논의하였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음.
❍ 그는 어당 이상수의 소개로 서울의 거장명공(巨匠名公)과 종유.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규정(圭庭) 서승보(徐承輔), 위당(威堂) 신헌(申櫶), 약산(約山) 김병덕(金炳德) 등 주로 문신 관료들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눔. 특히 한말 3대 문장가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매천(梅泉) 황현(黃玹),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등과 문학지교(文學之交)를 맺음.
❍ 저서로는 칠서상설(七書詳說), 대학장구상설(大學章句詳說)‧논어집주상설(論語集註詳說)‧맹자집주상설(孟子集註詳說)‧시집전상설(詩集傳詳說)‧서집전상설(書集傳詳說)‧주역본의상설(周易本義詳說)‧풍산기문록(楓山記聞錄)‧중동고금인가희유록(中東古今人家希有錄)‧여소학(女小學)‧호산집(壺山集)‧인물성고(人物性考)이 있음.
❍ 1872년 보은군 회북면에 풍림정사(楓林精舍)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주희(朱熹)‧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한원진을 봉안하여 제향. 박문호의 영정은 1921년에 추가 봉안.
❍ 그의 제자로는 일제강점기 때 입적(入籍)을 거부하다 순절한 김제환(金濟煥)을 비롯하여 변영인, 박제균 등 저서 호산집(壺山集)에 245명의 문인이 실려 있음.
2) 근대 충북 선비
(1) 신채호(申采浩, 1880∼1936)
❍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 충남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 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림.
❍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음.
❍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
❍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
❍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
❍ 1906년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
❍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등 논설과 「독사신론(讀史新論)」·「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등 역사관계 논문,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등 시론을 연재.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
❍ 이 당시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 또한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하는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음.
❍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
❍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
❍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
❍ 1914년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
❍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
❍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며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보여줌.
❍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남.
❍ 1928년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
❍ 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였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함.
❍ 그의 역사학은 우리 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
❍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그이 사당과 묘소가 소재하고 있으며 충북기념물 제90호 지정되어 있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2) 홍명희(洪命熹, 1888∼1968)
❍ 필명으로 가인(假人․可人)․백옥석(白玉石)․벽초(碧初)로 알려져 있는 소설가. 1888년 충북 괴산(槐山)에서 출생.
❍ 그의 가문은 명망있는 풍산홍씨 가문으로, 증조부 홍우길은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조부인 홍승목도 중추원 참의를 지냄. 부친 홍범식도 금산군수를 하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제일 먼저 자결할 정도로 지조 있는 인물.
❍ 일본의 다이세이[大成]중학에서 수학했는데 '조선인 수재'로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로 학업 성적이 뛰어남. 그러나 학교에서부터 늘 민족 차별의 수모를 겪음. 1910년 2월, 결국 홍명희는 공부를 겨우 한 학기만 남겨 놓은 채 귀국.
❍ 홍명희는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해외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중국 상하이, 남양 등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9년 3월 19일에는 고향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투옥.
❍ 휘문고보 교사․오산고보 교장․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 1920년대 초반에는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으로 있다가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
❍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산당정권 수립을 도우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거침.
❍ 일제하 민족운동의 지도자적 인물이던 그는 단 1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 조선 명종(明宗) 때의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데 그 특징.
❍ 그의 문학적 태도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글로는 「신흥문예(新興文藝)의 운동(運動)」(문예운동, 1926.1.)이 대표적인데, 이 글에서 계급문학운동의 의미와 그 가능성을 강조.
❍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조선문학원류약론 朝鮮文學源流略論」(청구학총, 1931. 2.)․「이조문학논의 李朝文學論議」(삼천리문학, 1938. 1.) 등의 고전문학 관계 논문과 「대 톨스토이의 인물과 작품」(조선일보, 1935. 11. 23.∼12. 4.)․「문학청년들의 갈 길」(조광, 1937. 1.)․「학창산화 學窓散話」(박문, 1938. 12.) 등의 글이 있음. 저서로는 수필집 학창산화 學窓散話(조선도서, 1926)와 장편소설 임꺽정(을유문화사, 1948)이 있음.
2. 충북의 선비정신
1) 예의바른 선비정신
❍ 충북 유학의 전통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이고, 기호유학의 핵심 사상은 예학(禮學)이라 할 수 있음.
❍ 그 때문에 충북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나 선비의 기본 지향은 ‘예(禮)’에서 기본적인 정신을 찾을 수 있는데,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권상하 등의 문인 등을 통해 예학의 지향성을 엿볼 수 있음.
❍ 실제 우암 송시열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조선왕조의 재건을 위해 심성의리론을 행동 철학인 예학으로 전환시켜 명분을 바르고 의리를 밝혔음. 그를 통해 송시열은 조선왕조을 유교 예속이 지배하는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음.
❍ 우암 송시열의 예학사상은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정명론(正名論), 전거(典據) 중심 사상이 일관되어 있음. 행례에 있어서는 시의(時宜)와 합리성을 존중하였으며 국휼(國恤)시에는 관행되어 온 단상을 반대하고 삼년상을 주장하였음. 우암 송시열은 국정의 자문을 받고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대의명분을 밝혀 의리를 보편화하고자 일생동안 노력하였음. 이 같은 사명 수행을 위하여 그가 건백한 것은 거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예론으로써 북벌론을 비롯하여 효종 세실(世室)문제, 대묘(太廟) 세실문제, 신덕왕후 부ㅁ와 정릉 복구문제, 태조에 대한 시호 추숭문제, 세자 책봉 문제 등이었음.
❍ 다만, 예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용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대에 조응하여 그 시대에 맞는 예의범절이 있는 법이니, 우암 송시열은 주자를 통해 모범을 찾았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필요한 예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실천윤리로 추진해야 함.
2) 곧음(直)과 옮음(義)의 선비정신
❍ 우암 송시열은 이학(理學)은 율곡 이이로부터 전수받았으나, 직(直) 철학은 스승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으로부터 전수받았음.
❍ 조선조에서 직의 철학은 송익필(1534~1599)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암은 공자, 맹자, 정자, 주자, 정암, 퇴계, 율곡 등의 사상을 관통할 수 있는 직 철학 하나(一)로 義理之學을 세웠음.
❍ 우암의 직 철학은 평생의 생활철학이었지만, 모든 인류를 바르고 곧고(正直) 청명하고 광명하게 문화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육문화가 꽃필 수양론이었음.
❍ 오늘날 각종 사회 병리현상이 난무하고, 윤리도덕이 훼손된 사상에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곧은 삶을 표방한 직 철학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바, 우암 송시열에 의해 집대성된 직 철학과 그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 지향은 현대적인 정신가치로 승화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
3) 청빈낙도와 근면성실한 선비정신
❍ 선비정신의 기본은 청빈낙도 속에서 근면 성실한 삶을 영위하는 것임.
❍ 이러한 청빈낙도 근면성실한 선비정신은 우암 송시열에 의해서도 실천되었을 뿐 아니라, 보은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한 성운, 평생 글 공부에만 전념한 괴산 출신 김득신, 만권의 책을 소장한 이하곤, 19세기 후반 회인지역의 학풍을 진작시킨 이상수 등에서 확인할 수 있음.
❍ 따라서 청빈낙도와 근면성실한 옛 선비정신은 오늘날 되살릴 필요성이 있을 뿐 아닐, 이를 통해 이 시대의 사회 갈등과 대립, 빈부 격차 해소 등을 지향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으로 승화시킬 필요성이 있음.
4) 실천의식에 투철한 선비정신
❍ 앞서 언급한 우암 송시열과 예학과 직 철학 등은 모두 실천 철학이었음. 사변적이거나 형이상학에 치우친 사상들이 아니었음.
❍ 실제 우암 송시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철학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던지 아니면 화양동에서 청빈낙도를 추구하였음.
❍ 이러한 실천의식과 자세는 한말 의병정신으로 이어져, 1907년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투쟁이 전개됨.
❍ 더욱이 예학과 직 철학에 뿌리를 둔 충북의 선비정신은 일제 강정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 작용해, 단채 신채호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는 정신이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