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성 ,.. 뭔가 누구와도 싸우기만 하면 이길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거란이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칠때 서희의 담판에 의해 강동6주를 아무 이유도 없이 고려에 양도한다.
이후 사실관계를 파악한 거란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이를 되찾고자 두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다.
또 다른 소씨인 소배압이 3차 고려침입의 거란 대장을 맡았으며,이 소배압 장군은 팔자에 없는 천적 강감찬을 맞아
맞짱을 뜨게 되는데,거기가 바로 귀주이며,이를 귀주대첩이라 부른다
.이때가 1018년인데, 백여년후인 1231년에 새로운 유목민족인 몽골이 거란이 당했던 곳과 같은 동네에서 평생 맛보지
못한 고려군의 매운맛을 보게 되는것이다.
그것도 4개월의 전투내내 한번도 승리하지 못한채,..
몽골장군 살리타는 귀주성을 포기한채,자주성을 치러가는데,..
이 살리타 장군 평생을 호라즘 러시아 전장터에서 지내며,한번도 지는 싸움을 경험 하지 못했으나,귀주성에서
패배하더니, 또한번 자주성에서 패전을 경험한다.
이때의 고려장수이름이 최준명인데,이 분은 몇달후 고려조정이 몽골에 항복한 이후 아직도 꿋꿋이 버티고 있어서,
고려조정에서 두차례에 걸쳐 전쟁이 끝났으니 항복 하라 하였으나 거부하였다.
이어 두번째로 자주성으로 가서 항복을 권한 자가 대집성이었고, 이자가 후에 최준명장군을 명령불복종으로 처형
하라 주장하여,당시 최고 실권자인 최우의 허락을 받았으나,아이러니 하게 살리타가 살려준다.
"최준명은 몽골에서보면 수백번 죽이고 싶은 장수이나,고려에서 보면 훌륭한 장수 이다.
이런 훌륭한 장수가 몽골에 있었으면 이미 대영웅 칭호를 받았을 것이다.고려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거늘
왜 고려조정이 죽이려 하는가?" 라며,....
그리고 이때 최준명 장군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대집성이라는 사람으로,
몽골침입이후 처음으로 조정에서 마련한 정규군대(2군6위,별초로 구성된)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몽골을 맞아 싸운
장군이다.
초원에서의 싸움에서 당시의 몽골군울 이길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안주성을 지키던 대집성이 전군 동원령을 내리고 성울 나가서 몽골과 일전을 벌이다 대패한다.
조정에서 마련한 정예군과 안주성을 방어하는 주진군,주현군 모든 병사를 총동원 하여 "나 를따르라" 했던
그 장군인데 그는 살았고 따르던 병사는 거의 전멸당한다.
안주성이 무너지면서 몽골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개경에 다다른다.
이 안주성은 거란과의 전투에서도 함락 당하였고,먼 훗날 병자호란 당시에도 의주가 무너지고 3일만에 도착한
후금 군에게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
거란,몽골,후금에 모든 침략자에게 무너진 성으로 기록된다.
즉 귀주성은 거란, 몽골에 이겼으며,
안주성은 거란 몽골,후금에게 번번히 안주가 되었으며,
자주성은 몽골에게 고려의 자주성 과 독립심을 보여 주었다.
성 이름이 중요하다,..
전투의 순서는
1231년 8월 의주 함락--조숙창이 길잡이노릇
8월 인주성의 홍복원 항복,--후에 두구두고 고려를 괴롭힘.고려 역적 1호
8월 철주성 전멸 -- 홍복원과 몽골에 목숨바쳐 저항하며 15일을 버티며 고려의 다른성에 전쟁준비가 됨.
9월초 귀주성 -- 김경손 장군과 12명의 결사대에 의해 몽골군의 본진 작살남.
이 전투에서 활다루는 솜씨가 몽골군 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음.
먼훗날 고려장수가 원나라 방문시마다 황제 앞에서 활시합을 벌이나 번번히 이김.
귀주성 -- 정신차린 몽골군이 1만여 병력으로 귀주성을 공격하나 실패하고,이 실패를 만회코저
살리타가 합세함
9월말 동선역 전투-- 고려정규군과 몽골군의 첫대결 로 무승부
10월 안주성-- 대집성이 동선역 전투에 참여하였던 정규군과 안주성방어군 모두를 이끌고 평야전투에
에서 대패함.
10월 귀주성-- 살리타가 몽골에서 가져온 모든 투석기와 땅굴파기 두차,등의 신무기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나 실패함.
11월 평주성 전멸-- 살리타는 귀주성을 놓아둔채 남하하며 평주성 의 모든 남녀노소 와 가축을 몰살함.
11월 중순-- 살리타가 개경을 포위함. 최우가 사신을 보내 정세를 파악함.
이때 살리타는 계집을 끼고 놀면서 사신에게 한마디함.
"항복하든지 싸우든지 고려가 빨리 결정한후 통보 해 달라고 함.나는 바쁘니 빨리 돌아가라함"
다 늙은 사람이 뭐에 바쁜건지,...약탈과 겁탈에 바빴겠지.해탈해야할 나이인듯 한데,...
12월초-- 고려조종에서 회안공 왕정을 앞세워 강화 조건 논의
12월 중순 귀주성-- 귀주성에 왕정의 편지와 함께 항복하라 하였으나,박서 장군이 거부 하였고,
이에 살리타는 다시 2군을 합세시켜 귀주성을 공격하나 귀주성은 끄떡없음.
12월 29일--- 마침내 항복(강화)함.
조공 조건:말 2만필,군사 백만에 해당하는 의복,대마 만필,소마만필,수달피일만.
왕,왕자,공주,고관자제 1000명을 몽골에 보낼것.일반백성 남녀 수천명 몽골행.
다음해 2월--귀주성이 끝까지 버티자 2군을 철수시키고,1,3군으로 귀주성을 포위 공격하나
수성에 전념하던 귀주성 김경손이 다시 병사들을 몰고나와,초원전투에서도 몽골군이 전멸할
정도로 박살냄..-- 이후 귀주성이 항복하지 않으면 강화를 파기하겠다고 하자,조정은 최임수를
보내 왕명으로 설득함.
강화 이후에도,몽골군은 고려 전국을 돌아다니며,마음놓고 백성을 학살한다.광주,청주,충주 등지에서 수만이
학살당한다.
이 강화로 인해 공식적으로 몽골에 보내는 두번째 조공 행렬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고려를 감시하기 위한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겨둔다.
이들 다루가치들의 행패에 의해,민심은 들끓고,이들의 안하무인적인 약탈에 의해 조정에서는 이렇게 당하느니
최후까지 싸워보자는 자세로 강화도 천도를 결정한다.
물론 다루가치들을 처단하고 나서,....
하기는 저고여가 사신으로 왕래할 때에도 당시의 고종은 너무도 큰 모욕을 당하게 되어 이럴바에는 차라리
전쟁을 하자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저고여가 죽고난후 몽골이 쳐들어 오기전 까지 5~6년간 아무런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군대를 정비할 시스템과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 에도 이를 시행치 아니하고,약소국으로 남아있다가,,강한군대가
쳐들어 오고 학살이 자행 될때까지도,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지들끼리 남탓만 하는 형국이다.
군사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서는 ,양반들과 ,민초들의 상당수 가 병사로써의 의무를 다해야 하거늘,..
귀주성 전투에서 고려군의 투혼을 보여준 박서 장군과 김경손 장군은 어찌 되었을까?
박서장군은 몽골인들의 등살에 곧바로 고향에 내려가있다가.나중에 문화평장사라는 벼슬을 하지만, 이후에는
별 기록이 없다.
하지만 당시 실세인 최우의 사위가된 형(김약손)을 둔 금수저 김경손 장군은 대장군,전라도지휘사등의군요직을
거치며,마침내는 추밀원 부사 를 지냈다.
또한 1237년에는 백제부흥 이라는 기치를 내걸고,고려정권에 대한 반란(형식상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기위한
대민수탈에 대한 항거)을 일으킨 이연년을 죽여,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최우가 죽고,권력판도가 바뀌게 되자,김경손은 첫번째 적폐대상이 되며, 백령도에 귀향가 있다가
,이후 최항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바닷속에 던져진다.(1251년)
영웅들의 마지막이 너무 쓸쓸하다,..
몽고와 전쟁하는 바쁜 와중에도 반란이 일어나고,또 정변이 일어나 집권세력이 바뀌게 되고,바뛰자 마자
적폐청산 대상을 발굴하여 귀양 보내거나 죽여야 하고,,다시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또 싸우다가,
팔만대장경도 만들다가,...
바쁘다,... 바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