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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이음길 종주
서대문 이음길은 그동안 안산 자락길, 인왕산 숲길. 북한산 자락길, 백련산 산책로, 궁동산 둘레길로 각각 독립적으로 조성된 길을 하나의 길로 연결하여 순환 종주를 할 수 있도록 새롭게 조성한 명품 둘레길이다.
총 길이 20.9km로 1코스 안산 구간(5.8km), 2코스 인왕산 구간(3.3km), 3코스 북한산 구간(4.8km), 4코스 백련산 구간(3.3km) 5코스 궁동산 구간(3.7Km)으로 나뉘어 놓았지만, 둘레길 걷기가 좋아 5개 구간을 한꺼번에 순환 종주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음길의 1코스의 출발지가 서대문 구청인 것을 무시하고 자택에서 가장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녹번역 2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녹번역 2번 출구로 원점 회귀하고자 한다. 녹번역 2번 출구에 이르니 낯익은 거리가 되어서인지 왠지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녹번동의 바로 옆 동네인 응암동에 살았고 북한산을 등산하려 할 때는 언제나 녹번역에서 대림 아파트를 거쳐 멀리는 백운대에 올랐고 가까이로는 족두리봉(수리봉)까지 산행하던 들머리가 녹번역이었기 때문에 친근하고 정다운 동네로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녹번역 2번 출구에서 산골고개로 향한다. 통일로의 보도블록을 따라 산골 마음에 이르렀다. 산골 마을은 뼈가 부러지거나 뼈에 금이 간 상처에 효험이 있는 약제인 산골山骨이 많이 생산되어 마을 이름이 되었고 산골이 입방채의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기 때문에 구리로 착각하여 자연동自然銅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녹번綠樊으로 행정 동명이 되었다.
산골 마을은 어린 시절 이 땅의 어느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얕은 담장을 하고 수십 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았는 시간이 멈추고 있는 마을 같았다. 오로지 사람만이 통행할 수 있을 뿐 자치기도 공차기도 할 수 없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산골고개 생태통로에 이르렀다.
통일로가 개설되면서 응암 산골 마을과 녹번 산골 마을로 이산가족 되듯 서로 떨어졌다가 2015년 생태통로가 완공됨에 따라 다시 하나로 연결되기까지 43년이 걸리었다고 한다.
도시 재개발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와중에서도 재개발의 광풍이 비껴간 마을이지만 이웃과 소통하는 따뜻한 마음. 길고양이 돌보기 등 공동체 활동이 활발한 산골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자긍심이 넘치는 마을을 상징하는 산골고개에서 생태통로를 따라 백련산 쪽으로 갈 수도 있고 북한산 자락길 방향으로 순활할 수 있는 길목에서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결국에는 산골고개에 다시 이르는 이음길이지만 북한산 자락길로 진행 방향을 선택하였다.
북한산 자락길에 이르는 길은 계단과 야자 매트를 길에 깔아 놓아 새로이 조성된 길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일부 지점은 사람의 통행이 적은 탓인지 풀들이 무성하였지만 명품길의 명성에 흠이 될 수는 없었다.
풀이 무성하다고 탓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이음길은 북한산 자락길에 진입하였다. 2017년 처음으로 북한산 자락길을 걸으면서 외쳤던 첫마디가 “길이 열렸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걸어갈 수 있는 새길 열렸다”라고 좋아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북한산 자락길은 노인, 어린이, 육아, 임산부, 장애인 등 보행 약자도 산림욕을 즐기며 편안하게 산책할 수가 있도록 경사가 완만하게 조성된 숲길로 특히 휠체어, 유모차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무장애 숲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북한산 자락길에는 계단이 하나도 없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다.
데크길에는 오전의 시간이 되어 그런지 많은 사람이 오간다. 거칠 게 없는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는데 팔각정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산 자락길의 최고의 비경으로 일컬는 무악산, 인왕산, 북악산으로 뻗어간 장쾌한 산줄기는 보고 또 보아도 언제나 힘이 넘쳐났다.
광활하고 높은 산은 아니지만, 안산, 인왕산, 북악산으로 뻗어간 산세의 그 활발발한 기상은 직접 보지 않고서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진부한 쓰레기일 뿐이다.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라” 하였는데 또한 이곳의 풍광을 말함인가?
기운생동의 참모습을 말없이 보여주는 힘찬 산줄기를 북한산 자락길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가슴 뛰는 조망을 즐길 수가 있을까? 자락길을 걸으며 전망이 트인 곳에는 조망을 즐기고, 울창한 숲속을 거닐 때는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산새들의 노랫소리 등 자연의 향연에 몸과 마음을 함께함이 바로 자락길 걷기의 묘미였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자락길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도 있고 중장년 사람들, 나이든 노인들이 걷고 있어 길을 조성한 본래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무장애 데크길에 장애인을 보지 못한 것은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은 서너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있는 모습에서 진정한 활기를 느끼며 모두 하나 되어 걸어가는 명품길을 희열 속에 걸어가 자락길의 종착지인 옥천암에 이르렀다.
홍제천변에 자리한 옥천암의 명소는 부처 바위에 조성한 불상이다.“조선을 새로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석불에 기원했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이 소수의 병력을 매복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백불을 보고 많은 사람이 매복해 있다고 착각하여 천투를 벌이다 참패를 당하였다고 한다. 또 고종의 어머니도 여기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하였다.”<서울의 하천>
그래서일까? 불공을 드리는 불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랜만에 목탁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백불을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홍제천변을 걸어간다.
옥천 3교에 이르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이 있음을 알린다. 우리의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시정부 기념관이 이 부근에 있다면 당연히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들지만, 오늘은 이음길을 걷고자 왔기에 찾아 나서지 않고 가던 길을 그대로 진행하여 오간 대수문에 이르렀다.
오간 대수문은 오간수 다리라고도 하며 홍제천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개천을 가로질러 5개의 수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적군으로부터 몸을 숨겨 총과 활을 쏠 수 있는 여장을 둘렀다고 하였다.
오간수문을 지나서 홍지문에 이르렀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을 축조하면서 건축한 성문으로 한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을 하사하여 공식명칭으로 ‘홍지문’이 되었다.
홍지문을 바라보니 예전에 북한산 향로봉에서 성곽을 따라 홍지문에 이르러 탕춘대성 걷기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홍지문에서 북한산 자락길은 끝이 나고 인왕산 구간으로 진입할 때 옥천 3교에 아르러 길바닥에 표시된 진행 방향 화살표를 보지 못하여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홍제천변에서 인왕산 숲속으로 진행한다. 인왕산은 여태까지 대 여섯번을 오른 적은 있지만, 모두가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올랐고 인왕산 숲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다소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무계단으로 시작된 인왕산 숲길은 의외로 사람들의 발길이 한산하였고 등산로 또한 계단과 데크길이 주종을 이루었다. 계단길은 위험 등산로를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하여 주었고 데크길은 이제까지 갈 수 없었던 숲속에 파묻혀 산림욕을 즐기며 편안히 걸어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었다.
이제까지의 산림욕이 지정된 장소에 정지된 상태에서 즐겼다면 데크길은 숲속에 파묻혀 걸어가면서 신림역을 즐길 수는 인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인공 등산로였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 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네이버 백과>고 하는데 혹자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기상을 말살하고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인왕산의 임금 王자에 날일자(日)를 덧붙인 旺자로 고쳐 ‘어진 일본 천황의 산’으로 날조하였다고 하였으니 제국주의의 음모를 어떻게 분쇄하여야 할까?
인왕산의 의미를 새기면서 무악재 하늘 다리에 이르렀다. 안산과 인왕산을 하나로 연결하여 주는 하늘 다리에서 밑을 바라보니 웅비하는 우리 국력의 상징일까? 통일로를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이어 끊이지 않고 달려간다.
무악재는 많은 설화를 지니고 있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을 모아 넘어갔다 하여 ‘모악재’ 무학대사가 아 고개를 자주 넘었다 하여 ‘무학재’ 안왕산과 안산의 두 봉우리가 잘록하여 말안장 같다 하여 ‘길마재’ 로도 부른다.
조선 시대 육대 도로의 하나인 관서대로의 첫 번째 고개로써 옛날 이 길로 중국의 사신이 넘어와 우리에게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갈 때 넘어가던 고개가 되어 간직한 설화 또한 어떻게 하나로 말할 수가 있을까?
하늘 다리를 건너면 안산이다. 안산에는 그 유명한 자락길이 조성되어 있다. 북한산 자락길이 홍은동에서 시작하여 옥천암에서 끝나는 일자의 길이라면 안산의 자락길은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도록 조성된 것이 자랑이며 특징이다.
안산 자락길도 산에 오르는 오르막길의 힘든 고생을 완만한 오르막으로 오를 수 있는 무장애 숲길이다. 데크길에는 많은 사람이 오간다. 이음길은 안산 자락길을 원점 회귀하지 않고 능안정을 지나고 숲속 지대를 지나면서 데크길이 다하고 홍제천 인공폭포로 하산하는 길인데 공원을 조성하여 갈림길이 많아 다소 길 찾기에 주의를 요하였다.
인공폭포는 홍제천에서 제일가는 비경답게 많은 사람이 하늘에서 홍체천으로 내려 꽂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보기만 하여도 시원한 폭포수를 바라보면서 안산의 형세에 관한 고사를 떠올렸다.
조선 명종때 남사고는 ”서울 동쪽에 낙산이 있고, 서쪽에는 안산이 있으니 반드시 당파가 생기는데 駱자는 各馬이니 동인은 갈라지고 鞍자는 革鞍이니 서인은 혁명한 후에야 안전하게 되리라“<서울의 산. 서울 시사 편찬 위원회 간>
하였는데 그의 말대로 그대로 들어맞았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서 할까? 그렇다면 조선의 당쟁은 필연적이었더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는 의미가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온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궁동산으로 향하였다.
도로를 따라 서대문 이음길 1코스 출발지점인 서대문 구청에 이르렀다. 아직도 넘어가야 할 산이 작은 안산, 궁동산, 그리고 백련산이 남아있다. 장거리 도보는 힘든 구간은 오전에 먼저 걷는 것이 기본인데 반대로 하여 한낮의 뙤약볕 속에 넘어야 할 3개의 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다지고 작은 안산에 이르렀다. 산의 명칭이 참으로 재미있다. 작은 안산이라면 안산의 자식인가? 아니면 동생인가? 사실 이곳은 연회 1동으로 작은 안산이라기보다는 궁동산 줄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작은 안산이라 할까 ? 라는 궁금 속에 오르기 싫은 계단으로 시작되는 오르막길에 오르니 비록 100m밖에 되지 않아 작은 산으로 여겼는데 이름처럼 작은 산은 아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에서 이따금 사람도 만나면서 걸어가는 길은 숲속이 되어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연희 1동인 작은 안산(100m)을 넘어 도로를 잠시 걸어 궁동산(104m)을 넘어간다. 이곳은 연희 2동이다.
궁동산의 유래가 궁궐(연희궁)이 있는 고을의 산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면 작은 안산은 연희 1동, 궁동산은 연희2동에 속해있어 연희 1동의 작은 안산을 연희1봉, 궁동산을 연희2봉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연희산이면 어떻고, 궁동산이면 어떠한가 ? 중요한 것은 104고지로 불리는 이곳에서 6·25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한국 해병대와 미국해병대가 악전고투 끝에 공산군의 서부방어선 돌파와 서울 탈환의 기폭제가 된 전쟁터였다는 것이다.
서울 수복의 격전지에는‘해병대 104고지 전적비’가 성산회관 뒷길의 등산로에 세워져 있는데 이음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고 찾아 갈 수 있는 안내 표지도 없어 아쉽지만 지나 칠 수밖에 없었다.
궁동산 연희 2봉을 내려서 홍제천 사천교에 이르렀다. 사천교는 모래가 많은 냇가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모래내 다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사천교이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표기하였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왜 한자로 표기하여야 할까?
이것이 바로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에서 조선의 지형도(오늘날의 1/50000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명을 표기할 때 아름다운 우리말을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일제의 잔재가 오늘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말이 한자로 표기된 것은 하루빨리 우리말로 복원되어야 한다. 내 고향 대전은 한밭으로. 거주하고 있는 일산은 한뫼로, 시목치는 감나무재, 조령은 새재 등 이 땅의 한자로 표기된 산천초목 모두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복원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누가 바로 잡아야 할까 ? 우리는 고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 그대로 방관하며 행정당국에서 고쳐주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
홍제천에는 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천변을 걷고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밝고 힘차게 걸어가는데 4개의 산을 넘어온 탓인지 피로에 지쳐있어 배낭을 내리고 냉수를 마시며 피로를 달랬다.
복원된 홍제천을 바라보면서 몇 년 전 홍제천 물줄기를 따라 발원지인 북한산 평창계곡까지 걸어갔던 때를 떠올리며 홍제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본다.
누군가는 홍제의 의미가 병자호란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조선의 여인들이 돌아올 때 이곳 홍제천에서 더러워진 몸을 닦아야만 도성으로 들어와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여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고 하여 홍제弘濟의 의미를 찾고있는데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를 국시로 하는 조선 왕조에서 과연 그랬을까? 라는 의구심 속에 천변을 걷다가 백련산으로 향하였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임에도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피곤한 몸으로 오르려니 숨이 찼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할 테니 별도의 운동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급경사의 오르막에 힘들게 올라 백련산으로 진입하니 계단이 놓였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르고 또 오르면서 온몸이 땀으로 젖고 나서야 계단길이 끝이 났다.
백련산은 백련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백련사는 전설에 의하면 경복궁 서쪽에 있어서 서방 정토사라고 하였는데 어느 여름날 연못에서 갑자기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로 명칭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을 따서 산 이름도 백련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련산으로 바뀌기 전의 산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고 나니 평탄한 등산로가 계속되었고 종착지가 임박한 탓인지 발걸음 가볍게 백련산의 고스락인 응봉에 이르렀다.
응봉은 과거에 왕족들이 매를 날리어 사냥을 즐기던 매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응암동의 상징이었는데 도시화와 함께 그 흔적은 사라져지고 지금은 은평정이 자리하고 있다.
은평정에 올라 조망을 하고자 하였으나 공기가 탁하여 뿌연 흐린 날씨로 조망을 할 수 없었다. 비가 퍼부어 미세먼지를 깨끗이 씻어내리지 않으면 이제 산위에서의 조망은 이 땅 어디에서도 불가할 것 같았다.
백련산은 젊은 시절 응암동에 거주하였기에 수십 차례 오갔고 은평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백련산이 포함되어 자주 왔던 길이 되어 발 빠르게 진행하여 백련산 전망대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은평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여기저기 하늘 향해 솟아있는 아파트 건물을 보니 발전하는 도시 은평구의 활기찬 모습을 느낄 수 있었고 북한산 족두리봉에서 비봉, 문수봉, 대남문,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보면 볼수록 힘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우리의 산이었다.
전망대를 내려서니 이음길을 출발하였던 산골고개이다. 오전 09시에 출발하여 4시에 도착하였으니 7시간이 조금 지났다. 예상보다 1시간이 더 소요되었지만, 무더위 속에서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원점 회귀할 수 있어 그런지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창공을 나는 것 같았다.
은평구의 상징이 은평 둘레길 이리면 인근 동네인 서대문구의 상징은 서대문 이음길이다. 은평 둘레길과 서대문 이음길을 모두 걷고 나니 은평구와 서대문구가 거주지처럼 친근하고 다정함을 느끼며 또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인다.
그렇다. 은평 둘레길과 서대문 이음길은 한번 걸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벗이 먼 곳에 있다하여마다 하지 않고 찾아가듯 틈만 나면 걸어야 할 우리의 길이다.
● 일 시 : 2024년 9월 8일 일요일 맑음
● 동 행 : 나홀로
● 동 선
- 09시05분 : 녹번역 2번 출구
- 09시15분 : 산골고개
- 09시40분 : 팔각정
- 10시20분 : 옥천암
- 10시25분 : 홍지문
- 10시35분 ; 인왕산 입구
- 11시55분 ; 무악재 하늘다리
- 13시35분 : 홍제천 인공폭포
- 14시45분 : 홍제천 사천교
- 15시25분 : 백련산 입구
- 15시55분 : 은평정
- 16시15분 : 백련산 전망대
- 16시25분 : 산골고개
- 16시35분 : 녹번역 2번출구
● 도상거리 및 소요시간
거리 : 23.7km
소요시간 : 7시간 30분.
첫댓글 자세한 소개와 함께 멋진 길을 소개해줘 감사합니다. 걷고 싶은 서대문 이음 길과 은평 둘레길! 고금알석의 귀한 글에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