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줄거리> 화자(話者)는 신경이 예민해져 삼 주간 외삼촌댁에서 요양할 예정이다. 그 사이 집안일을 봐줄 여자가 집으로 면접을 보러온다. 여자의 구두가 아주 낡은 걸로 보아 사정이 딱해 보인다. 그런데도 여자의 태도는 “타인의 집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 없이 당당하다. 이런 태도가 화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화자는 여자가 그 사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하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며, 그녀를 결코 자신의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일찍 돌아온 남편 때문에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여자에 대한 자신의 우월을 확인한다. 화자는 여자를 고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여자를 보낸 다음날 아침 남편을 출근시키고 돌아와 보니 현관에 여자가 신고 왔던 낡은 구두가 그대로 놓여 있다. 여자가 화자의 신발을 신고 간 것이다.
<감상> 정체불안에 빠진 전업주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화자의 자기 정체는 중산층 가족 안에서의 위치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중산층으로서의 소비수준, 사회적 위치를 가진 남편의 아내 그리고 부양해야 할 자식들을 통해 자기를 확인해 왔다. 곧 알게 되겠지만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자기 확인은 위기에 빠졌다.
화자의 불안을 자극한 것은 여자의 태도였다. 여자는 행색으로 보아 어려운 형편임이 분명한데도 중산층의 집에 일하러 와서도 머뭇거림이 없다.
“여자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습니다.”
“여자는 거실로 들어서서 티브이를 마주보고 탁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바깥쪽에 앉았는데, 그러자 마치 그 여자가 집주인이고 제가 면접을 보러 온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자는 여자의 태도를 “여기는 이제 내 집이고, 지금부터 나는 네가 될 수 있어”라는 의미의 발화로 이해한다. 이런 심리는 화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존재의 대체 가능성임을 보여준다. 이 존재 대체 가능성은 자기를 규정하는 내용의 빈곤에서 유래한다. 소설은 화자를 전형적인 이미지, 즉 “예민한 중산층 전업주부”로 그릴 뿐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 규정하는 어떤 묘사도 하지 않는데, 이 전형성 속에는 자기가 닻을 내릴 어떤 특이성도 남아있기 어렵다.
여자는 중산층 남성의 아내라는 계층적 위치 속에서 간신히 자기 정체를 유지하는데, 화자가 여자가 신고 온 낡은 구두에 주목하고, 그것이 내는 소음에 예의 없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화자는 여자에게 중산층으로서 차상위 계층에게 상전 대접을 요구하는 것이다. 소설은 소위 ‘갑질’의 기원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새로운 신분사회로의 퇴행을 낳는다고 한다. 경제가 중요할수록, 즉 세상 모든 것을 대체 가능하게 하는 화폐물신숭배가 심화될수록 주체는 자신의 고유성을 화폐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차이 속에서 찾는다. 하지만 여자는 이 새로운 신분사회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그것이 화자를 불안하게 한다. 아이들이 여자를 따르고, 남편조차 그녀의 신분에 유의하지 않자 화자의 불안과 적의는 증폭된다.
“저는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저한테 쓰는 말투랑 똑같았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 자기 빈곤 때문에 화자의 여자에 대한 적대감은 남편의 행동에 의해 급격히 바뀐다.
“남편에게 몸을 맡기며 피곤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마음속으로는 킬킬거리고 있었지요. 여자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상대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것입니다.”
남편과의 스킨십을 통해서 남편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 그녀와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화자에게 여자의 인상은 제법 괜찮게 보인다.
“내내 몰랐는데 환하게 웃으니 보조개가 들어갔습니다.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습니다.”
소설은 화자와 여자 사이에 시선이 교환되는 두 장면을 보여준다. 하나는 초엽에 구두의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는 화자의 얼굴을 여자가 보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함께 식사하는 과정에서 화자가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식탁에서 일어설 때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다. 이 눈길의 교환은 하나의 속내가 다른 존재의 속내에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여자는 화자가 자신을 고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아마도 여자는 이 때문에 화자의 구두를 신고 갔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보이지 않은 자에 대한 용렬한 복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수 행위는 소설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갖고 도약할 잠재력을 지닌다. 여자는 어쩌면 미래에서 온 화자일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외삼촌’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남편과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는 불행을 겪었으며, 화자는 이제 외삼촌 집으로 머물러 가려 한다. 이 섬뜩한 운명의 암시는 자기 존재의 대체 가능성에 전전긍긍하는 존재가 느끼는 정체 불안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불행하지만은 않은데, 기표가 고통당할 때 주체가 깨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럼없는 여자의 태도가 그걸 보여준다.
파란 책
<줄거리> 그녀는 인테리어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딸애의 좌식 책상을 뒤집어 간이 책장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적당한 두께의 파란 색 책을 찾다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구하게 된다. 그녀는 이 책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서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색다른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그녀의 지성과 교양에 감탄”한다. 남편의 동료들을 초대해 집들이 하는 날 철학을 전공했다는 한 남자가 이 파란 책에 관심을 표하며 그녀에게 “주말 드라마에나 목을 매는 다른 여자들하곤 다르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때부터 주말드라마를 끊고 『존재와 시간』을 읽기 시작한다. 책을 이해할 수 없자 하이데거 독서 모임에 가입한다. 이 모임에서 들은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노트에 적는 정도지만, 이에 관해 남편과 대화가 불가능해진 것을 깨닫는다. 현존재가 향하고 있는 죽음의 몰교섭성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을 건너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감상> 최정화는 소비사회인 후기산업사회의 논리를 중산층 전업주부의 내면을 통해 관찰한다. 이 사회는 상품소비로 주체가 자기 정체를 확인하는 시대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기표에 대해서 주체를 대리(대표)한다.” 라캉의 기표에 관한 정의는 상품물신 사회 속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주체에 관한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들의 관계가 사회관계를 대체한다고 했지만, 이제 필요에서 해방된 상품들은 주체를 대리하는 기표가 된 게 분명하다. 그래도 라캉은 우울한 물신숭배 사회에 가는 균열을 낸다. 기표는 주체를 대리하지만 결코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품들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인테리어 잡지가 안내서다. 무엇을 소유하고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가 상품들이 대리하는 그녀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녀의 “뭐든 쉽게 물리는 성격”은 이 상품들의 관계가 쏟아져 나오는 신상들로 빠르게 재편되는 방식에 적응하고 있다. 모든 것은 바로 이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소품들일 뿐이다. 오 센티 두께의 파란 책은 바로 이 관계 속에서 요구된다. 책의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테리어 소품으로 물화(物化)된 책의 제목이나 저자 출판사라면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잃어버리는” 맞다.
문제는 그 파란 책이 ‘존재 망각’에 대해 질타하는 하이데거였을 때 발생한다. 『존재와 시간』은 ‘파란 책’으로서 소품들의 관계에 적응하면서도 다른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상품 중에서도 명품의 반열에 드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아우라는 상품들 사이의 존재적 차이가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지평에 있는 존재론적 차이에서 발생한다. 이 차이가 그녀의 일상에 균열을 낸다. 파란 책은 그녀를 일상, 즉 그녀의 존재적 지평에서 끌어낸다. 드라마를 보는 공간에서 독서하는 공간으로, 집안 인테리어를 끊임없이 변경하는 공간에서 세미나가 진행되는 홍대 앞의 카페로.
그녀를 매혹했던 철학을 전공했던 남자의 말,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은 이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얻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의 존재가 상품들의 차이 속에서 확인된다는 게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상품 관계에서 망각 된 존재의 차원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변한다. 이 차이는 존재론적 차원에 있다.
이 차이가 그녀가 자신의 삶을 문제적으로 파악하는 원인이 된다.
“남편의 긍정적인 성격을 그녀는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왜 한 번도 자기주장을 끝까지 내세우지 않고 모든 걸 수용하려고만 드는지가 불만스러웠다.”
매일 카레만 먹어도 좋아라 하는 삶, 즉 존재자들의 질서에 매몰되어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삶은 문제시 된다. 그녀는 “남편의 서재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서기로 했다.
소설이 끝나는 지점은 최정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의 소설은 기표들의 질서에서 균열된 부분을 찾는 데 민감하다. 그녀는 다른 가능성에 민감한 촉수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것이 최정화 스타일의 핵심인데, 그녀는 가볍고 일상적인 언어로 그 세계에 숨은 그림처럼 존재하는 다른 차원으로 열린 문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 너머는 독자에게 맡긴다. 이는 물론 독자의 주체적 읽기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 다른 차원의 삶, 그 다른 지평의 몰교섭성, 지독한 외로움과 혹독한 고통, 아울러 “온전한 쾌락”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문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문학이 사물들의 질서에 매몰된, 혹은 “티브이를 보면서 느끼는 쾌락”에 빠져있는 독자에게 부담이 되기를 꺼려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