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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마름(舍音)
정의
지주 밑에서 작인(作人)들에 대한 감독과 지대 징수를 담당하던 직임.
개설
마름은 지대(地代) 수취 과정에서 지주와 협의하여 지대액을 결정하는 데 깊숙이 관여하는 등 농업경영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점은 마름이 작인(소작인) 위에 군림하면서 중간수탈을 자행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 같이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으로 지주가 해야 할 실무적인 업무를 총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지주의 권한까지 행사하는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담당 직무와 변천
마름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났다. 충청도의 대지주는 면이나 군에 1~2명의 마름을 두고 이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도 단위로 1명의 도마름(都舍音)이나 대마름(大舍音)을 두었다. 군면(郡面)의 마름을 이들과 구별하여 해마름(該舍音)·하마름(下舍音)·식주인(食主人)이라고 불렀다. 도마름은 대부분 부유하였고, 지주와 혈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마름은 부농(富農)이나 작인 가운데 유력한 사람을 임명하였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하마름을 대택인(大宅人)·농막주인·수작인(首作人)이라고도 불렀다. 어느 지역에서나 농업경영의 과정에서 마름의 권한은 매우 컸고 이 때문에 하나의 권리로 취급되어 매매되기도 하였다.
마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병작지주제(竝作地主制)의 확산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정조실록』 8년 3월 11일]. 아마도 궁방전의 도장(導掌)과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름의 임무는 주로 작인의 감독, 지대의 수납·보관·매각 등이었으며 농지의 관리와 조세의 대납 등도 담당하였다. 마름은 작인의 근태와 선악을 감독·관리하였으며 작인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는 지주와 협의하거나 자신의 판단에 의해 교체하였다.
마름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대의 징수였다. 추수 때가 되면 마름은 지주나 지주가 파견한 사람과 함께 현지를 답사하여 수확량과 지대액을 결정하였다. 부재지주(不在地主)인 경우에는 지대를 거두어 자신의 집이나 농막에 보관하였다. 보관된 지대는 지주의 요구에 따라 매각하여 작전(作錢)하기도 하였다.
마름은 업무의 대가로 지주로부터 일정한 반대급부를 받았다. 지주의 땅을 배당받아 지대를 부담하지 않고 경작하거나 낮은 수준의 지대를 내기도 하였다. 지주로부터 배당받은 땅을 다른 작인에게 대여하여 지주경영을 함으로써 중답주(中畓主)로 존재하기도 하였다. 지주로부터 위임된 권한이나 토지·보수에 비례하여 마름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마름은 작인 위에 군림하면서 중간수탈을 자행하였다[『고종실록』 31년 8월 2일]. 지주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대를 인상하거나 뇌물을 요구하고, 작인을 교체하는 등 이들의 횡포는 광범위하고도 심각하였다.
참고문헌
김용섭,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일조각, 1987.
허종호, 『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 평양 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마보(馬保)
정의
마병, 혹은 마군에게 주어진 보인.
개설
훈련도감 및 어영청·총융청 등에는 기병에 해당하는 병사인 마병(馬兵), 혹은 마군(馬軍)이 있었다. 지방의 군영에도 마군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보인이 마보(馬保)였다.
담당 직무
마군에게는 1~3명의 보인이 주어졌다. 마군은 군역의 수행과 기마를 마련하기 위한 경비로 마보를 사용하였다.
변천
1397년(태조 6)에 품관마병(品官馬兵)에게는 봉족(奉足)을 4명, 벼슬이 없는 무직마병(無職馬兵)에게는 봉족 3명을 주고 보병(步兵)에게는 봉족 2명만 배정해 주었다[『태조실록』 6년 2월 11일].
조선후기 들어 전란으로 서울과 외방의 마군이 일시에 흩어졌다. 이후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 등이 창설되면서 마군이 다시 생겼다. 그런데 훈련도감의 마군이 6,000명에 달하였음에도 말이 완비되지 못하고 있었다[『인조실록』 20년 3월 13일]. 어영청의 마군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1683년(숙종 9)에 어영대장이 1,000기(騎)를 갖추려고 하였지만 한정(閑丁)과 보인을 구하기가 어려움을 호소하였다[『숙종실록』 9년 7월 13일].
17세기 말부터 군문에서는 도망·사망·노제(老除) 등으로 빠져나간 궐액(闕額)을 충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각 군문에서 군액을 무작정 늘리는 것에 대해 중앙에서는 이를 통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677년(숙종 3)에는 총융청의 마군 1,500명 중에 단지 1,000여 명만 두고 그 보인도 감하여 정하도록 명이 내려졌다[『숙종실록』 3년 1월 18일]. 1740년(영조 16)에는 수원부사가 수원의 마군에게 말이 있는 자가 몇 명 되지 않으니 경군문(京軍門)의 예에 의거하여 홍원(洪原)·대부(大阜) 두 목장의 말을 획급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또 그것이 어려우면 정군(正軍) 1명마다 보인 2명씩 획급하여 말을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추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영조실록』 16년 8월 5일]. 그 후 수원의 마군에게는 1명의 보인을 지급하였다[『영조실록』 16년 12월 30일].
1793년(정조 17)에 장용외영친군위절목(壯勇外營親軍衛節目)에는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외영을 창설할 때에 마군에게 3명의 보인을 주도록 하는 규정이 보였다[『정조실록』 17년 9월 24일].
참고문헌
강문식, 「正祖代 華城의 防禦體制」, 『韓國學報』 第八十二輯, 1996.
손병규, 「조선후기 상주지방의 역수취체제와 그 운영」, 『역사와 현실』 38, 한국역사연구회, 2000.
모군(募軍)
정의
17세기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관서에서 주관하는 역사에 고용되었으며, 단순 작업의 비숙련노동에 종사했던 막일꾼.
개설
모집한 인부, 공사장의 잡역부 등의 뜻을 갖는 이 용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오늘날의 국어사전에서 ‘모군’은 ‘토목공사 같은 데서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사람’으로서 ‘모군(募軍)군’과 같은 뜻으로 설명한다. 또한 ‘모군·모군꾼·모꾼’은 모두 ‘공사판 같은 데서 품팔이하는 사람’이며, ‘모꾼삯’은 ‘모꾼의 품삯’으로, ‘모꾼일’이란 ‘토목공사 같은 일’, ‘모꾼서다’란 ‘모꾼이 되어 일하다’ 등으로 풀이한다.
모군에 관한 이 같은 개념은 17세기 이후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글자 그대로 ‘역군을 모집한다’는 뜻의 서술어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모집한 역군’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굳어졌다. 부역노동이 쇠퇴한 것에 반비례하여 모군을 고용하는 모립제는 확대되었다. 토목공사뿐 아니라 운송노동을 비롯한 각종 잡역 분야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오랜 부역노동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부세 체계 내에 실로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고용노동이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조성되었다.
내용
1606년(선조 39) 종묘(宗廟)·궁궐의 중건공사에서 시행된 바 있었던 결포제(結布制)는 17세기 초·중엽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한 경비 확보책으로서, 특히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군의 고가(雇價)를 조달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실시되었다. 이 같은 조치는 대동법과는 별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요역의 대납제(代納制)를 수용하는 것이 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각종 대규모 역사에서 전면적으로 모립제가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모립제의 성립 발전은 부역노동 개편의 소산이었다.
모군 가운데 경모군(京募軍)은 주로 도성 내외에 거주하는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 곧 품팔이로서 직업을 삼는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모군 중에는 다른 생업을 가지면서 여가 시간에 고용되는 부류도 있었으나, 대체로 임금노동을 생활수단으로 삼는 임노동자층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도시 빈민층이었다. 향모군(鄕募軍) 역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농한기의 계절노동에 고용되는 영세농민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촌사회의 임노동자층이었다. 후자의 비중이 차츰 높아지면서 농촌사회에서의 모립제도 발전하고 있었다.
모군들은 종래의 부역노동과는 전혀 다른 조건 하에서 각종 노역에 고용되었다. 그들은 품삯을 받고자 스스로 역사에 응모하였을 뿐이었다. 예컨대 추가적인 사역이 있을 때에는 별도의 수당을 지급받는다든지,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나 도구를 역소에서 제공받는다는 점 등이 그러하였다. 그뿐 아니라 모군들은 작업 환경을 비롯한 작업 조건의 개선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것이 용납되지 않으면 당초 응모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퇴거할 수 있었다. 때로 이 같은 양상은 집단적·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일시에 흩어져 버림으로써 작업을 전면 중단시키거나, 공역의 주관자에게 강한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이는 부역노동 하의 징발역군들이 부역기간에 자기가 먹을 식량마저 스스로 마련하여 징발되던 것과 질적으로 구별되었다.
고가를 지급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는 17세기 이후의 각종 노역에서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점차 대두되었다. 17세기 초·중엽에는 한때 부정기적인 결포의 징수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뒤에는 점차 세미(稅米)와 군포(軍布)의 수입이 모군의 고가로 충당되었다. 역사의 규모가 방대할 경우에는 그 밖의 다른 재원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특별한 사정으로 응모자가 많거나 적게 될 경우, 고가는 인하되든지 인상되었다. 고가는 작업한 날의 수에 따라 지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처음에는 미(米)와 포(布)의 현물로서 지급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점차 화폐로 지급됨이 관례화되었다.
모립제 하의 모군들은 관에 고용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예속 관계에서 현저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역사에 응모할 뿐 아니라 역시 자유롭게 퇴거할 수 있었다. 작업 조건이나 고가에 불만이 있을 경우 모군들의 반응은 집단적·조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들은 고가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만 이합집산할 뿐, 관의 통제 아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모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종류의 각종 역사에 전문적으로 고용되고자 했던 주민들이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나 형성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계층분화의 소산으로 광범위하게 배출되고 있었던 이농민의 대열이 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담당 직무
산릉역(山陵役)의 경우, 17세기 초엽 이후 부분적으로 모립제가 적용되기 시작하였고,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전면적으로 이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농민층이 광범위하게 분화되기 시작하였고, 몰락한 농민의 일부는 농촌의 농업 노동자나 도성 주변의 도시 빈민층 혹은 광산의 점군(店軍)으로서 전신하고 있었다. 산릉역 등의 각종 토목공사를 전담했던 모군은 그와 같은 사회변동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던 중세말기의 임노동자층의 한 형태에 속하였다. 그들은 산릉역 외에도 영건역(營建役)·축성역(築城役) 등을 비롯하여 제언(堤堰) 수리, 길 닦기, 개천 준설 등의 각종 토목공사에서, 또 장빙(藏氷)·주전(鑄錢) 등의 노역에서 종전의 징발역군을 대신하는 고용인부로서 동원되고 있었다. 모군들은 이처럼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잡역에서뿐 아니라, 담군(擔軍)·부지군(負持軍) 등과 같은 일상적인 운송 부문에서 혹은 민간 부문의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임노동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변천
17세기 초엽 모립제 시행 초기에는, 때때로 모군으로 고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1606년(선조 39) 병조에서, 임진왜란 중에 파괴된 궁궐을 재건하는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서 가포(價布)를 지급하고 역군을 모집하려 했으나, 응모자가 매우 적었다고 하였다. 아직은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인원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각종 공역에서 모립제가 적용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났다. 징발역군이 줄어드는 만큼 모립하는 고용인부의 비중은 늘어갔고, 18세기 이후에는 결국 토목공사장의 단순 잡역을 전담하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립제 성립의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모립할 수 있는 노동력, 곧 임노동자층 성립의 문제였다. 17세기 초엽부터 일부 몰락한 농민들이 유민으로 전락하여 도회지로 유입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직 충분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이 모군으로 고용될 수 있는 인적자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품팔이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직업인군이 도성 주민의 일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민으로 도성에 흘러 들어온 것인데, 다시 농촌의 전호(佃戶) 농민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임노동을 통해서 토지로의 반복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주민 집단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 생활수단을 발견하였다.
의의
모군은 토지로의 반복 순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노동에서 자신의 생활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던 도시와 농촌의 빈민층을 구성하였다. 임노동으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는다는 것은 관에서 고용하는 모립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민간의 생산·비생산 분야에 고용되는 것을 통해 가능하였다.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임노동자층이 형성되어 가고, 한편에서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모립(募立)
정의
관의 역사를 수행하기 위해 품삯을 주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제도.
개설
17세기 이후 부역제도는 개편되고 있었다. 군역과 요역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 징발 체계가 크게 동요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가 요구되었다. 군역과 요역 분야에서 고립제(雇立制)가 성립할 수 있었다. 부역노동이 붕괴하고 있던 시기에, 한편에서는 고립제의 발전 과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립제는 종래의 부역노동 가운데, 신역의 분야에서뿐 아니라 요역의 분야에서도 발생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요역에서의 고립은, 흔히 모립(募立)라고 불리었다.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인부를 모집해서 고립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점에서 신역의 고립제와는 다른 요역의 고립제, 곧 모립제(募立制)의 특징이 있었다. 그때그때마다 고용된 인부는 모군(募軍), 곧 날품팔이로서의 미숙련 잡역부였다. 이들은 특정의 관서에 상시(常時) 고용되지 않았으며, 임노동의 일터를 찾아 떠도는 이 시기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모립제의 성립과 발전은 두 가지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가능하였다. 하나는 부역노동의 쇠퇴에 의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품화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수반되는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에 따라 농민층이 현저하게 분화하고 있었고,) 여기에서 배출된 몰락농민·이농민들은 임노동자층으로서 대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 생활수단을 찾는, 새로운 유형의 직업인이었다. 그들에게는 관의 토목공사를 비롯한 각종 역사에서뿐 아니라, 민간의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고용의 기회가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었다. 이들은 중세말기에 형성되는 새로운 임노동자층에 속하였다.
내용 및 특징
모립제는 관에서 인부를 모집하여,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고립하는 제도였다. 모립제는 요역에서의 고립제였다. 이것은 부역노동으로서가 아니라, 고용노동으로서 노동력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모군은 자신의 식량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부역노동에 응해야 했던 징발역군과는 달리 토목공사에 응모하여 소정의 품삯을 받는 이 시기의 임노동자층인 임용위업지류에 속하였다. 모군들은 고가(雇價)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역사에 응모하는 부류였다. 고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이들의 응역이 무상의 강제노동인 부역노동과는 구별됨을 뜻하였다.
신역에서의 고립제는 고용기간이 장기적일 뿐만 아니라, 고용주인 관서에의 인신적 예속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점에서 요역에서의 고립제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요역에서의 고립제는 고용기간이 단기적이며, 고용주에 대한 예속 관계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는 부역노동을 구성하던 신역과 요역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다. 요역은 본래 특정 인신을 대상으로 부과되던 것이 아니며, 부정기·부정량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모립제, 곧 요역에서의 고립제는 군병·장인·이예(吏隷) 등을 대상으로 한 신역 일반의 고립제와는 크게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용노동의 새로운 발전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각 분야의 역사에서 급가모립(給價募立), 곧 품삯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부를 모집해서 고용하는 일은 점차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 이후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제는 점차 동요하였다. 요역의 물납세화(物納稅化) 추세는 군역에서의 포납화(布納化) 경향, 그 공식적인 군역세로의 개편 과정과 궤를 같이하였다. 17세기 초·중엽에 시행된 결포제(結布制)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한 요역노동의 징발을 대신하였다. 정기적·정량적인 성격을 띠는 공납과 관련된 요역의 종목들은 대체로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새로운 전결세에 흡수될 수 있었다. 군현 단위에서 운영되던 지방적 특성을 띠던 잡다한 지방적 요역의 분야에서는 잡역세가 마련됨으로써, 노동력 징발의 요역을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농민층이 분화되면서 농촌사회에서는 농토의 소유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소작지를 차경(借耕)할 기회도 잡지 못한 몰락농민층이 대두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임노동자로 전환되었다. 이미 부역노동을 징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던 국가권력은 이에 대한 대응의 방식으로 모립제의 고용노동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17세기 이후 전개되는 모립제는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나 잡역 등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지방관아에서 주관하는 각종 역사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경모군(京募軍)이, 후자의 경우는 향모군(鄕募軍)이 주된 고용 대상이었다.
조선후기의 임노동자층은 경영 지주나 경영형 부농과 같은 큰 경영 규모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흔히 고용될 수 있었다. 특히 수전농업에서는 농법의 전환에 따라 이앙의 시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신분제적 예속 관계가 해체되는 가운데 계급적인 모순 관계가 심각하게 개재하고 있었던 노비노동에 비해서 고용노동은 대단히 편리하며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주층이거나 자작농·소작농민·경영형 부농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들의 농업경영에 소요되는 노동력의 많은 부분은 고용노동으로써 충당해야 하였다.
고용노동은 농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적용되었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기경(起耕)·파종 등 농작업에서뿐 아니라 이엉 엮기, 멍석 맺기, 나무 베기, 역인(役人) 서기, 마철(馬鐵) 박기, 마당 쓸기, 물 긷기, 태전(馱錢) 지기 등 다양한 고용노동으로서 생계를 꾸려 간다고 묘사되었다. 이는 18세기 농촌의 빈농층·임노동자층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대목이었다. 조선후기의 임노동자층은 광업·수공업의 임노동자로 고용되거나, 조창(漕倉) 부근, 경강(京江) 주변에서 물자의 하역노동에 종사한다든지, 도성과 같은 도회 주변에 머물면서 관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토목공사 및 잡역에 고용되는 등 이 시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였던 고용노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엽 관부의 각종 토목공사에서나 운송노동을 비롯한 잡역 분야에서 모군이라 불리는 잡역부가 고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고용노동의 한 유형에 속하였다. 이전에는 무상의 강제노동으로써 징발 역군을 사역해 왔던 분야에서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가 적용되었다. 중앙 및 지방관서에서 주관하는 각조 역사의 분야에서 부역노동은 쇠퇴하고 고용노동이 성립·발전하게 된 것이다. 모립제의 고용노동이었다.
변천
모립제 하에서 고용되는 일꾼인 모군은 경모군과 향모군으로 나뉘었다. 경모군은 주로 도성 안팎에 거주하는 임노동자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부는 다른 생업을 가지면서 그 여가 시간에 고용되는 부류도 있었다. 대체로 전업적인 임노동자층이 많았다. 모립제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임노동자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갔다. 도성 주변에 자리 잡고 있던 도시 빈민층의 생활 수단이 여기에서 모색될 수 있었다. 향모군은 역시 두 부류로 나뉘고 있었다. 하나는 농한기의 계절노동에 고용되는 영세농민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촌사회의 임노동자층이었다. 역시 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높아지고 있었고, 이와 함께 농촌사회에서의 모립제도 발전하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에서 모립제가 발전하는 양상은 모군을 모집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모립제 실시 초기에는 때때로 급가책립(給價責立)의 방식, 즉 품삯을 지불하는 것을 전제로 하되, 인부를 강제로 차출하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점차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급가모립(給價募立)의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응모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인부를 고용하는 경제적 계약 관계로 확립되는 과정이었다.
의의
부세제도 변동의 중요한 계기는 국가의 신분제적 인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던 농민층의 성장과 저항에 있었는데, 이제 노동력 징발에 대신하는 물납세 부담의 증액은, 농업생산력 발전에 의한 생산물의 증가분을 흡수해 간다는 점에서 새로운 대립·갈등을 조성하기 마련이었다. 국가 재정의 운영 원리도 크게 달라졌다. 노동력 징발과 현물 징수를 대신하여 노동력과 상품의 구매를 위한 막대한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지출에서 절대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인건비였다. 중앙 및 지방에서 재정 지출의 폭발적 증대가 있게 된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재정 수입의 증대가 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데서 19세기의 위기상이 조성된 것이었다.
17세기 초엽 이후 대두하였던 임노동자층은 그 말엽에는 벌써 상당한 규모로 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농업 생산에서 고용노동을 쓰는 일은 점차 보편화되어서, 노비노동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18·19세기 이후 고용노동의 발달은 일용노동자·단기고공을 크게 늘려갔으며, 농업경영은 빈부를 막론하고 임노동제 위에서 행해지게끔 되었다. 농업생산 부문을 비롯하여 생산·비생산 분야에서 고용노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중세사회 체제의 전반적 구조 변동의 산물이었다.
참고문헌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모속(冒屬)
정의
신분에 맞지 않는 직역에 투탁하는 행위, 혹은 군역 역종마다 정해진 일정한 정원을 넘어서서 군역자를 모집하여 소속시키는 행위.
개설
상층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군역에 하층민이 투탁한다든지, 무거운 부담의 군역을 피하여 가벼운 역 부담의 역종(役種)에 불법적으로 모속(冒屬)하는 현상은 16세기부터 적지 않았다[『중종실록』 38년 6월 2일]. 17세기에는 특히 정액(正額)을 초과하는 군액(軍額)은 소속 기관이 행한 사모속(私募屬)으로 규정하고 삭감하였다. 직역(職役)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역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모속(冒屬)’이라 하고, 소속 기관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군액을 넘어서서 사사로이 군역자를 모집하는 것이므로 ‘사모속(私募屬)’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변천]
16세기부터 상층 신분의 자제들이 들어가는 군역에 하층민이 투탁한다든지 무거운 부담의 군역을 피하여 가벼운 역부담의 역종에 모속(冒屬)하는 현상이 적지 않았다. 1509년(중종 4) 함경도에 군호(軍戶)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응사(鷹師)·충순(忠順)·충찬위(忠贊衛)등 상층 신분의 자제들이 주로 들어가는 직역에 군역자의 자제들이 모속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로 인해 일반 군역의 액수를 채우기 어렵게 되어 모속자를 모두 없애자는 건의가 있었다[『중종실록』 4년 4월 29일]. 1543년(중종 38)에는 중앙관서에 소속되는 장인(匠人)과 악공(樂工)에 대해서도 정액(일정한 액수) 외에 모속된 자들을 처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6세기 말부터는 국가기관이 스스로 군역자를 모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북방 양계(兩界)의 감영과 병영에는 영속(營屬)이 설치되어 그 역종에 정족수가 있었는데, 1599년(선조 32)에는 정족수 외에 모속인이 매우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군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 중에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부담이 적은 영속에 투속(投屬)하여 군역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선조실록』 32년 9월 28일]. 그러나 무거운 군역의 부담을 피하여 가벼운 역을 찾아가는 현상은 이전부터 적지 않게 있었다.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들은 각자 군역 재원을 분산적으로 확보하였다. 특히 17세기에 전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군역자를 확보하는 활동이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도망가거나 노제(老除)로 군역에서 벗어난 군역자를 대신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웃이나 친족에게 군역 부담을 전가하는 인징(隣徵)·족징(族徵)이 행하여졌다.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자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도 자행되었다.
반면 여전히 가벼운 부담의 역종에 투속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여러 국가기관은 그러한 역종을 신설하여 규정된 액수를 넘어서서 군역자를 모집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은 정액 이외의 군액을 사모속이라 단정하고, 사모속을 군액을 채우지 못하는 역종에 새롭게 배속하여 실제로 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자들로 군액을 충당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군역 정액화 사업은 17세기 말 이후 중앙 기관의 소속 군역부터 시작하여 1730년대에는 점차 감영과 병영·수영·통영 등 지방에 소재하는 각종 군영 소속 지방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740년(영조 16)에는 지방마다 양인 군역자의 소속별·역종별 정액을 확정한 『양역실총(良役實摠)』이 공표되어 상급 기관들의 사모속 활동이 근본적으로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호적(戶籍)에는 주로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이 사용하던 직역인 유학(幼學)을 사칭하는 자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하였다. 양반 지향적인 경향이 강해지면서 19세기에 걸쳐 호적상에 유학을 기록하는 자들이 급증하여 19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호(戶)들이 70%를 넘는 지역도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양반 신분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모속한 자들로 이해되어 모칭유학(冒稱幼學)이라 불리었다[『고종실록』 12년 12월 23일].
참고문헌
『양역실총(良役實摠)』
김우철, 「균역법 시행 전후의 사모속 연구」, 『충북사학』 4, 1991.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심재우, 「조선 후기 단성현 법물야면 유학호의 분포와 성격」, 『역사와 현실』 41, 2001.
정연식, 「17·18세기 양역균일화정책의 추이」, 『한국사론』 13, 1985.
바오달([波吾達])
정의
공무로 여행하는 자를 접대하기 위해 마련한 원.
개설
바오달[波吾達]은 몽골의 역원(驛院)제도에서, 공무로 여행하는 자를 접대하기 위해 마련한 원(院)을 말하였다. 고려시기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역원이 설치되었던 지방에 마련되었다. 15·16세기에 왕이 산릉에 행차하거나, 신하와 백성들을 모아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강무(講武)를 시행할 때 바오달을 이용한 경우가 많았다. 이때 경기에서 노동력과 물자를 조달하여 바오달의 설비와 왕의 접대에 응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에 왕이 경기도의 산릉을 배알하거나, 사냥 행사에 참여할 때 바오달은 야외의 임시 숙소로 이용되었다. 바오달의 설비뿐 아니라, 이곳에 머무는 왕을 접대하기 위해 많은 물자와 비용이 소모되었다. 바오달에 바치는 음식물 등이 너무 많아서 민폐가 우려되기도 하였다.
1471년(성종 2)에 마련된 역민식(役民式)에서는 요역 징발의 기준을 토지에 둔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서울에서 얼음을 저장하는 일, 금을 캐거나 참(站)·관(館)을 수리하는 일, 목장을 조성하는 일 등의 10가지 종목은 상례조발(常例調發)에 포함시켜서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징발하게 하였다. 성을 쌓거나 미곡을 운반하는 일, 중국 사신을 위해 가마꾼을 징발하는 일, 목장을 새로 조성하는 일, 바오달을 설치하고 바오달에서 접대하는 일 등의 10가지 종목은 별례조발(別例調發)에 포함시켜서 6결당 1명의 역부를 낼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바오달 관련 업무가 별례조발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왕의 야외 임시 숙소를 조성하고 운영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1471년(성종 2) 세종 영릉(英陵)을 배알하면서 광주(廣州)의 낙생역(樂生驛) 앞들에 있는 바오달에서 머물렀다[『성종실록』 2년 10월 12일]. 다음 날 저녁은 이천의 오천역(吾川驛) 앞들 바오달, 그다음 날 저녁에는 여주 강가 바오달에 머문 뒤, 이튿날 능소에서 제사를 지냈다. 1473년(성종 4)에는 그해 농사 형편이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자, 강무를 위해 경기도 5~6곳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바오달의 설치를 정지하였다[『성종실록』 4년 7월 21일]. 경기도와 주민의 부담을 줄이는 조치였다. 성종대에는 왕이 도성을 떠나 행차하는 길에 40~50리 혹은 80~90리 간격으로 바오달을 두어 왕 일행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변천
성종은 경기도의 산릉을 찾거나 강무에 참여할 때 바오달에 머문 일이 특히 많았다. 성종대에 작성된 역민식에서, 바오달 짓는 일을 노동력을 많이 쓰는 중요 종목으로 지정한 것도 이와 같은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바오달에 관한 기록은 중종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중종실록』 31년 7월 17일]. 1674년(현종 15) 2월의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성종실록』의 산릉 기사를 접한 현종은 바오달이라는 용어가 지명을 나타내는지 물었다.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은, ‘옛날과 지금의 언어가 크게 달라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지명은 아닌 것 같다.’고 답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왕의 거둥에서 더 이상 바오달을 사용하지 않아서, 어느덧 생소한 용어로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이종하, 『우리 민중의 노동사』, 주류성, 2001.
방고(전)(防雇(錢))
정의
백성들이 요역노동을 부담하는 대신에 관에 바치는 돈.
내용
조선후기 요역제 운영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대신에 현물이나 화폐로 대납하는 방식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의 지방관들은 역사가 있을 때마다, 응역할 수 없는 민호에서 궐전(闕錢)을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처음부터 방고전(防雇錢)·방가(防價)·방역전(防役錢)·민전(民錢)이라는 이름으로 대가를 징수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의 농민층은 국가의 가혹한 노동력 수탈 체계에서 자유로워진 반면, 잡역세 등의 물납세를 새로이 부담하게 되었다.
18·19세기의 사정을 보여 주는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는 당시의 요역의 종목 중에 둑 쌓기[築堰], 도랑 파기[鑿渠], 저수지 준설[浚湖], 상여 메기[擔轝], 목재 운반[曳木], 얼음 저장 등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역 종목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일상적으로 부과되는 것은 아니고, 거의 대납제(代納制)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위의 각 분야의 요역은 실제로는 방고전의 징수, 호전(戶錢)·민전의 징수, 빙가미(氷價米)의 징수를 내용으로 하였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기적인 잡역세의 부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858년(철종 9) 경상도 동래부에서 수재를 복구하기 위해서 감영을 통하여 인근 8읍의 역정(役丁) 5,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 실제로 징발된 것은 동래부 각 면의 농민뿐이었다. 나머지 8읍의 농민은 실역(實役)에 징발되지 않는 대신 각기 2전~2전 5푼의 방고전을 바치게 하였다.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처럼 방고전은 부정기적인 잡역세로 징수되었으며, 이로써 인부를 고용하는 재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용례
正言柳復明上書 有曰 (중략) 仍及近日時弊二十餘條 其一 經理廳料辦之弊也 (중략) 貢物年條 以輕價而預爲買得 當其輕買之際 從中勒取 不無其弊 諸般債物 以甲利而遍給京外 及其督徵之時 田土文券 亦多見奪 諸道義僧 多至三百五十名 而徵以除番之錢 樓巖別將 濫捧無名之船稅 兩西喬桐 勒定紙地之防納 其他空名之帖防雇之事 或多繹騷 或涉零碎 大抵任事之輩 憑藉侵虐 雖其多辦債殖 廣占厚利 而不歸公家 半入私橐 昔之貧乏者 今則暴富 昔之無家者 今則廣室 可勝痛哉 (하략) [『숙종실록』 44년 윤8월 3일]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방군수포(放軍收布)
정의
16세기에 정군에 대해 번을 세우거나 조련하는 대신, 보인에게처럼 포를 거두는 관례적인 제도.
개설
정군(正軍)으로 복무하지 않고 대신에 포를 거두는 제도는 두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중앙 관사와 군문(軍門)에 소속된 정군의 경우에는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라고 하였다. 반면 지방 군영의 유방정병(留防正兵)의 경우에는 방군수포제라고 하여 둘을 구분하였다. 하지만 그 기본 형태와 방법은 서로 같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세기에 들어 조선초기의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붕괴되면서, 정군으로 부병하지 않고 대신 포를 바치는 대역납포(代役納布) 현상이 관례화되기 시작하였다. 방군수포는 정군의 입번(入番)을 놓아 주고 군포를 거둔다는 의미로 처음에 베의 수요가 해당 군영 수장들의 사욕을 채우는 데에 사용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거론되었다. 하지만 방군수포 시행의 핵심은 급료를 비롯한 군사 재원이 자의적으로 운용되는 점에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세기 말 각 포(浦)의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은 당번의 선군(船軍)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입번(立番)하지 않으면 월령(月令)이라 하여 매 1월당 베 3필 또는 쌀 9말씩 징수한 예가 있었다[『문종실록』 1년 5월 25일].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휘관의 사리(私利) 축적을 위해 월령을 징수하는 예가 잦아졌다. 이와 같은 불법 행위는 지방군의 경우 군사 감독권이 지휘관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으며, 특히 대역인(代役人)이 개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자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거두어들인 재화는 모두가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와 그 수하 관속들의 사적 점유물이 되었다. 그 결과 병영·수영의 거진(巨鎭)에도 실제 역에 종사하는 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형세 아래 “모 진의 장(將)은 그 가격이 얼마이고 모 보(堡)의 관(官)은 얼마이다.” 하고 공언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채수(債帥), 즉 빚쟁이 장수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하였다[『명종실록』 21년 6월 17일].
그 후 비상시의 재정 수요 발생에 대응하여, 혹은 지방관이나 장교의 사리 추구를 지탄하면서 방군수포 사례가 계속 언급되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방군수포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장교의 급료 지급이 건의되었다. 병사와 수사는 월급이 없어 방군수포를 거두지 않으면 먹을 식량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변천
18세기에 군액을 정액화(定額化)하여 군역 재원의 수입을 확정하기 전까지 방군수포는 단지 지방관이나 장교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군역자가 소속된 군영의 재정 보완책으로 활용되어 왔다. 방군수포에 대한 금지는 국가 공공기관의 재정을 통제하는 중앙집권화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방군수포는 군포를 정군에게 직접 납부하는 보인 이외에 해당 기관에 포를 납부하는 보인이 출현함으로써 확대·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시대의 군역과 균역법」, 『한국의 사회와 문화』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이태진, 「조선 전기 군역의 포납화 과정」,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69.
방역(坊役)
정의
조선시기 서울의 오부 방민에게 부과된 요역.
내용
중앙집권적 중세 국가의 왕도는 지배 집단의 집중 거주지이자 권력 유지와 소비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비농업적 기능,비생산적 기능이 집중된 곳이었다. 따라서 농촌 사회를 기준으로 한 부세제도 운영의 원칙이 왕도의 주민에게 그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 신분적·직업적 기반이 농촌 사회와 다르다는 전제 하에서 도시민에게 균부균역(均賦均役)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 방역(坊役)이었다.
방역의 요역노동이 동원된 종목은 왕궁 수리, 축성역, 차비군(差備軍)의 역, 장빙역(藏氷役), 하천 공사, 좌경역(坐更役) 등이었다. 방역의 사역 일수는 연간 6일 이내로 추정되며, 점차 줄어서 17세기 이후는 연간 1~2일 정도 단기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방역의 실무는 동임(洞任)·계임(契任)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방역은 부정기적이고 부정량적이었으며, 또 거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실정이어서 사실상 서울민 모두에게 일률적인 균역(均役)이 이루어지기 곤란하였다. 사대부(士大夫)를 칭하여 역에서 면제되는 자도 많았다. 그러나 방역이 갖는 기본 모순은 무엇보다도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는 오부 방민을 노동력 직접 징발의 요역노동에 투입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중세도시의 상품유통경제가 확대되고 종래와 다른 생산적 기능이 강화되어 갈 때 더욱 심화되었다. 도시 노동력의 무상징발이 불가능해지는 실정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부 방민의 방역은 부분적으로 금납화되었으며, 방역노동에 참여할 경우에는 대가를 지급받는 급가(給價)의 조치가 취해졌다. 나아가 방역의 여러 분야에서 전업적인 고용노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인계(貢人契)로서 방역을 전담하는 방역계(坊役契)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종래 방역으로 수행되던 하역운송업 등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역계의 형성과 방역의 금납화는 이 시기 서울의 도시적 기반이 증대한 노동력을 수용할 정도의 생산성을 확보하며 상공업 도시의 기능도 점차 증대시켜 가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용례
掌令李秞啓曰 五部坊役之不均 其來久矣 內司及諸宮家奴婢 則不差役 砲手率丁不差役 坊民之謀避坊役者 冒稱此類 中間落漏者 比比有之 現存坊民 偏受其苦 請令漢城府 從長變通 俾無不均之弊 上從之 [『현종개수실록』 5년 11월 13일]
참고문헌
김동철, 「18세기 坊役制의 변동과 馬契의 성립 및 都賈化 양상」, 『韓國文化硏究』 1, 1988.
이지원, 「17~8世紀 서울의 坊役制 운영」, 『서울학연구』 3, 1994.
백골징포(白骨徵布)
정의
죽은 사람을 군적에 유지하며 그 친척이나 이웃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불법행위.
개설
군포를 납부하는 사람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죽은 지 오래되어 백골이 된 사람까지 군적(軍籍)에서 지우지 않고 그들의 몫까지 친척이나 이웃에게 군포를 징수하던 것을 백골징포라고 하였다[『현종실록』 14년 12월 18일]. 백골징포 등 군포 징수에 대한 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지역 단위로 소속별·역종(役種)별 군액(軍額)을 고정하여 그 이상은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백골징포의 폐단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병사를 징병하거나 군보(軍保)에게 군포를 징수하여 군역 재원으로 삼는 군영과 기타 관서들은, 특히 17세기 전란의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각자 더 많은 군역자를 자기 기관에 소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본래 양인(良人) 남성은 15세부터 59세에 이르기까지 군역에 종사하고 60세가 되면 늙은 군인을 제대시키는 노제(老除)로 역(役)이 면제되었다. 노제가 되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에도 당연히 면제되었다. 그런데 각종 국가기관에서 군역자를 확보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15~59세 장정 이외의 인물로 군역 액수를 충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군역은 역종별로 일정한 정원이 있어 노제나 사망이 발생하여 군액에 결원이 생기면 새로운 양인 장정을 찾아내어 결원을 채워야 했다. 이 때문에 어린아이를 군역 명단에 넣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의 폐단이 발생하거나, 이미 죽은 자에게 군포를 부과하여 그 부모나 친척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백골징포가 빈번히 행하여졌다. 양역변통(良役變通)이 시작되는 17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첨정이나 징포를 생략하고 그냥 황구(黃口)·백골(白骨)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백골징포와 유사한 방법에는 군역 담당자들이 농간을 부려 군역을 다 마친 자의 연령을 낮추어 놓고 강년채(降年債)라는 것을 징수하는 것이 있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체납을 구실 삼아 이른바 물고채(物故債)라 하여 그 자손에게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역자를 확보하여 군포를 징수하려 할 때에 실제로는 도망가서 숨어 있으면서 마치 죽은 것처럼 꾸며서 군역 부담으로부터 제외되고자 하는 행위도 있었다. 뼈를 묻기 전에 시신을 풍화시키기 위해 만든 초분(草墳)을 가리키며 이미 저렇게 죽어 있는데 군포를 징수하려 하느냐고 울부짖는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군역 대상자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군포를 징수하게 되면 바로 백골징포를 한다고 원망하였다.
변천
불법적으로 군역을 징수한 백골징포 외에도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방법 등이 동원되어 군역의 폐단은 갈수록 심해졌다. 족징은 어떤 사람이 도망을 가거나 하여 군역 부담을 회피하는 경우 그 사람의 친척이 대신 군역을 부담하는 것을 말하며, 인징은 이웃이 대신 부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대한 개혁 방법으로, 기관별·역종별 군액을 축소·고정화하여 실제의 군역자를 확보하고 군역 파악을 현실화하려는 정책이 18세기 중엽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것과 함께 군역자를 개별적으로 일일이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방행정 구역의 리(里) 단위로 군역을 대정(代定)하는 이정법(里定法)이 제기되었다. 대정이란 기존의 군역자가 나이 들거나 사망하는 등의 이유로 군안(軍案)에서 빠질 경우,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 넣는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이정법 외에도 지역 단위로 군역을 공동 부담하는 이징법(里徵法)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개별 군역자를 확보하는 방안에 대신해서 일찍부터 호적상의 모든 호구(戶口)에게 호포(戶布)나 구포(口布) 등을 부과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군역을 호나 구에 따른 보편 징수로 전환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군역정책은 군역 부담을 반감하고 지역 단위로 소속별·역종별 군액을 고정화하여 소속 기관에서 그 이상의 징수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백골징포의 폐단도 점차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
참고문헌
『거관대요(居官大要)』
『조선민정자료(朝鮮民政資料)』 목민편(牧民篇)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김준형, 「18세기 이정법의 전개: 촌락의 기능 강화와 관련하여」, 『진단학보』 58, 1984.
번가(番價)
정의
군인들이 자기 차례의 번을 서는 대신에 내는 포나 돈.
개설
조선전기의 군역은 실제 군사 활동을 하는 정군(正軍)과 그 군사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담당하는 보인(保人)의 2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정 기간 서울로 번상(番上) 와서 중앙의 군사로, 혹은 지방이나 변경에서 유방(留防)하여 지방군으로 복무하는 정군들은 그들에게 배속된 2~4명의 보인들에게 포[保布]를 거두어 군사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였다.
비록 보포(保布)를 받는다 하여도 정군으로서는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일정 기간마다 번상하거나 유방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전쟁이 없이 평화 상태가 계속되자 군인들은 군사 활동보다는 각종 사역에 동원되었다. 이에 번상병들이 보포로 사람을 사서 자신의 번상을 대신하게 하는 편법이 생겨났다. 보통 대립제(代立制)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처음에는 번상정병과 대립인(代立人) 사이의 사적인 계약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것이 관행화되고 또 그에 따른 폐단이 나타나면서 국가가 개입하여 군인들의 번상을 면해 주고 그 대신 포를 병조(兵曹)에 납부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3년 10월 13일]. 한편 지방에서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 등 군사 지휘관들이 사리 추구의 방편으로 유방하는 군사들에게 번을 서는 대신 베나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번가(番價)는 16세기 이후 중앙과 지방의 수포제(收布制) 하에서 군인들이 번상이나 유방 등 실제로 번을 서는 대신에 바치던 포나 돈을 지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번가는 풍년·흉년에 따른 곡식의 가격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달라졌지만, 특히 중종대 후반기에는 번가가 폭증하였다. 성종대에는 3개월에 17~18필(疋) 하던 번가가, 중종 후반기에 이르면 1번(番)의 대가로 100필을 받을 정도로 증가하였다[『중종실록』 31년 1월 11일]. 대립자들은 역이 힘들다고 하면서 번가를 계속 올려 받았고, 각사의 관속들은 보병들이 직접 군역을 지려는 것을 방해하면서 번가를 받아 냈다.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번가의 폭등 속에서 군인들이 고통을 겪자 정부에서는 대립가를 정하고, 이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방식을 추진하였다. 즉 1541년(중종 36) 동지사(同知事) 양연(梁淵)의 발의로 대립가를 병조 소속의 사섬시(司贍寺)에서 관장하게 하는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이 공포되었다.
변천
중종대에 국가가 대립가를 정하는 군적수포법이 실시되었으나 이는 중앙군 중에서 보병에 한한 것이었고, 기병이나 갑사(甲士), 그리고 지방 육군과 수군은 제외되었다. 이들에게까지 번가를 거두고 귀가시킨다는 것은 국방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각급 지휘관들이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번가를 거두는 방군수포(放軍收布)라는 불법행위가 공공연히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 근세 조선 전기편』, 육군본부, 1968.
김종수, 「16세기 갑사(甲士)의 소멸과 정병(正兵) 입역의 변화」, 『국사관논총』 32, 1992.
김종수, 「17세기 군역제의 추이와 개혁론」, 『한국사론』 22, 1990.
번차(番次)
정의
입번하는 관직자나 군역자가 교대 근무하는 차례.
개설
군병이 입번(入番)하여 교대 근무하는 시기와 횟수는 군역의 역종에 따라 달랐다. 조선초기 갑사(甲士)의 경우는 3번(番)으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번상하다가, 이후 6번으로 그 번차가 늘어났다. 전부터 내려오는 갑사 3,000명과 증설한 갑사 3,000명, 도합(모두 합한) 6,000명을 나누어 6번을 만든 것이었다. 제일번(第一番) 1,000명은 첫해 11월 15일에 번상(番上)하고, 제이번(第二番) 1,000명은 다음 해 6월 15일에 번상하고, 다음 제삼번(第三番)은 당해 11월 15일에 번상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시행하였다[『세종실록』 22년 5월 11일]. 이로써 3년에 반년씩 번상하는 셈이 되었다.
그러나 번차와 관련한 폐단은 하위 관직자와 고위 군병에서 먼저 발생하였다. 참봉들이 완악하고 거만하여 15일 간격으로 번상하기를 늘 꺼렸고, 충익위가 매번 입번할 순서가 될 때마다 영리(營吏)와 짜고 잡탈(雜頉)이라고 거짓으로 기록하여 번상에서 누락시키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처벌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6번을 만들어 연(한 해) 2회 윤번하는 갑사의 번차에 대해, 병조는 별도의 상세한 개정안을 제시하였다[『세종실록』 22년 5월 11일]. 그것은 갑사를 나누어 6번을 만들고, 2월 10일과 9월 1일에 교대하게 하되, 2월에 번을 서는 자는 여름·가을에 각각 한 달씩의 녹봉을 받고, 9월에 번을 서는 자는 겨울·봄에 각각 한 달씩의 녹봉을 받으며, 그 나머지 각 번(各番)도 이에 따라 교대로 번상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봄철의 춘등(春等)에 번을 마치는 자는 교대한 뒤에 3월 그믐까지, 가을철의 추등(秋等)에 번을 마친 자는 교대한 뒤에 10월 20일까지 각각 그대로 서울에 50일을 머무르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숙직이나 순찰을 시키지 말며 마음대로 출입하게 하지 말고, 강무(講武)나 왕의 행차 혹은 사신 영접 시 군사를 쓸 때에 번을 합하여 시위(侍衛)하게 했다.
한편 위의 입번 갑사 중 봄철에 교대하여 들어오는 자는 번을 서는 기간이 6개월 20일이고, 가을철에 교대하여 들어오는 자는 번을 서는 기간이 5개월 10일이었다. 이 때문에 만일 봄·가을로 서로 바꾸지 않고 당번 때마다 처음에 정한 순서대로만 교대하면, 번서는 날수와 춥고 더운 때의 괴롭고 수월한 것이 고르지 않게 되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즉, 다음 1번으로부터 6번까지 한 차례 번상이 끝나면, 전항의 2월에 입번한 자는 9월에 입번하고, 9월 입번한 자는 2월에 입번하게 한 것이었다. 이로써 6년이 채워지면 다시 이러한 방식으로 봄·가을에 윤번하였다.
변천
이후 여러 종류의 군병에 대한 번차의 횟수가 4번으로 줄어들었다. 1470년(성종 1)에는 군역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액수를 채우기가 쉽지 않으므로, 모두 4번으로 나누어 교대하게 하였는데, 쉬는 날이 많지 않아서 점점 피폐(疲弊)하게 된다는 지적이 있었다[『성종실록』 1년 2월 30일]. 이를 계기로 번차가 조정되었는데, 가령 별시위(別侍衛)는 1,500명으로 액수를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每番)에 300명이 4개월마다 서로 교대하도록 하였고, 갑사는 10,000명이 5번으로 나누어 매번 2,000명이 4개월에 서로 교대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안이 건의되었다. 300여 년이 지난 정조 연간에 장용외영(壯勇外營)의 절목(節目)에도 13초(哨)의 군병을 5번으로 나누어 번차하도록 하고, 일수를 15일로 한정한다는 내용이 보인다[『정조실록』 17년 10월 21일].
참고문헌
『각사수교(各司受敎)』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