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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재공(省齋公) 휘 봉(崶)은 자는 흥서(興瑞)요, 본관은 안동권씨로 선조25년 임진년 1592년 5월 13일 영천현 노항리 용화산 임란의 피난지에서 동봉선생 휘 극립(克立)과 숙인 오천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처음 아명(兒名)을 산동(山童)이라 이름하고, 자라서 묏산 山자가 들어있는 글자를 취하여 崶자로 작명 하였다고 한다,
성재선생을 여문십철(旅門十哲)의 한분으로 9번째 분이라고 한다,성재선생의 소상 때 입암서원 유생들이 지어올린 제문에 의하면 여헌선생 문하에서는 십철이라 일컬었고 고을에서는 관작 연령 학덕으로 추앙 하였답니다,
영가세고 4권 성재공 일고에 여헌선생 문하 십현록에 아흡 번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이 기록은 선생의 5대손 제행공이 신난재 선생 본손가에서 고문적을 열람하다가 발견하여 적어온 것이라 전한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에 성재선생은 여헌선생 문도 에서도 아주 우수한 제자로 손꼽았다는 것을 상징 하게 합니다, 성재선생은 어려서부터 입암을 왕래하는 여헌으로 부터 특별한 지도를 받았던 것은 본인의 자질도 있지마는 부친 동봉선생이 장여헌과 사귀면서 어떠한 대접을 주고 받았는냐를 잘 살펴 볼 수가 있는 것으로 성재선생이 약관의 나이 19세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입암의 살림을 맡아 살면서 때때로 입암을 왕래하는 장여헌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기 때문에 여헌선생이 교우이신 동봉선생이 없는 와중에도 장기간 입암에 체류하며 죽을 때 까지도 입암에 편하게 있었다 할 것이다, 또한 성재선생은 부친의 지우들과 문인들의 방문에도 소홀함이 없게 하였으므로 입암의 문인 분들도 흡족한 마음으로 왕래 하였다는 돌봅이다,
그리고 정축년 1637년에 여헌선생이 선영에 하직을 고하고 입암에서 여생을 마칠 굳은 결심을 하고 입암에 와서는 성재 문생에게 말하기를 "내 장차 입암과 함께 하려하니 너는 너의 선공 동봉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와 같이 할 수 있겠는냐? 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하고 여기에 성재선생은 답언 대신하여 반가이 여겨서 웃으며, 이날부터 더욱더 성심껏 모시면서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을 써
장여헌을 모시며 그 몇달후 여헌선생은 끝내 입암 만욱재(晩勖齋)에서 운명 하였다,
성재선생응 여러 동문들과 함께 스승의 임종을 지켰고 그 많은 조문객의 접응을 전담하여 유감됨이 없게 하였다, 그래서 공문(孔門)의 자공(子貢)으로 일컬었다 라고 한다,
자공은 공문십철의 한 분으로 살림이 매우 요부(饒富)했으므로 공자가 가난 하면서도 큰 어려움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자공이 경제적으로 뒷받침 했기에 가능 하였으며, 또 공자가 죽자 초상 범절의 모든 것을 자공이 독담 했다, 그리고 여러 제자들은 심상삼년(心喪三年)의 복을 마치고 모두 돌아갔으나 자공은 3년을 더 머물면서 공자의 어린 손자 자사(子思)를 볼보았다고 한다,
성재선생을 자공의 행담을 따라 다아 했다하여, 모두가 성재선생을 두고 자공,이라 칭송했다 전한다,
{허허~ 옛날 야사를 길게 하므로 머리가 아프 십니까, 내가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한놈 있는데, 또 하필이면 안동권씨 인데, 그놈의 고향은 안개 이지요, 이놈을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 만난 친구라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면, 그 녀석이 날 보고, 세월이 어떤 세월인데 그리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는냐, 하면 내가 웃으며, 내는 돌 상놈이라 배우고 읽을 꺼리라고는 옛 성현들의 행록 이라 한답니다,ㅋㅋ 권씨가 안개 사람이라 집성촌은 아닌듯 하여, 피익 웃으며, 이러한 농담을 하며 쇠주 잔을 짠 치면서, 에이~ 나 다음에 돌상놈아 하며, 가끔 머리도 한방 치며, 논답니다,
그 놈은 서울에서 살고 나는 대구에서 살면서 서로 큰일에 만나 보지만, 내가 그놈을 서울 사무소에
정근 권유하여 보냈 거던요, 그놈에 별명이 곰발바닦,이라 불렀어요, 미련하게 술을 많이 마시니 그렇게 부른답니다,}
다시 ㅜ성재선생의 이야기를 해야 겠지요,
성재선생은 과거에는 뜻이 없었고 오르지 학문에만 집중 하였다지요, 그래서 여헌선생을 직접 모시면서 스승의 일거일동을 예의 주시하며 자신의 덕성을 함양했던 샘이요, 입암정사에서 여러 동문들과 함께 강론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스승을 모시고 마을앞 시냇가를 소요(消遶)하고 승경(勝景)을 즐기시며 기우(氣宇)를 확고히 하고 독서로서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으며, 입암은 유수(幽邃)한 산골로서 산천 경관이 수려하고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심신을 정양(靜養)하고 학문에 道를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라 하겠습니다,
동봉선생 연보에 살펴보면 여헌선생이 선조29년 여름에 입암을 처음 방문하고 이듬해에 장여헌 가족을 거느리고와서 수년간 살다가 나간후 수시로 입암에 와서 여러 날을 기거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와서 한달이 넘게 공부하며 있었다고 적어 두었다, 그럴때 마다 동봉선생은 친구 여헌의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 불펀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동봉선생이 서거한 후에는 그의 아들 성재공이 부친의 했던 역활을 하였다. 省齋는 선생의 자호이다, 東峯은 성재선생의 부친의 자호이며, 동봉선생은 임란 전시가 점차 격화되고 왜놈이 조선양민들에게 핍박이 심해지자 좀 더 안전한 입암을 택하여 손윤암과 함께 들어왔다고 적었다, 그 후에 동봉선생이 장여헌을 불러들여 함께 공부하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니 마을을 이루고 험한 산기슭을 일구어 농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자 피난처로 찾은 사람들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동봉선생은 이곳의 경치와 맑은 공기에 마음에 들어 혼자 눌러앉아 살았기에 동봉선생이 입암의 입향조가 되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재선생 19세 때에 아버지 동봉공부군이 서거하시니 4대 독자로 위로는 누님이 3분이요, 아래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하여 부친의 유산을 세 누님에게 분재하면서 셋째 자형이 불만스러운 뜻을 비추었다고 선생의 문도의 한분의 유고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동봉공의 첫째 사위는 이숙(李塾)이요, 둘째는 나의13대조고 어모장군 정안번,이요, 셌째가 생원 황중신,이요, 넷째 사위가 인동이 고향인 찰방 김경장,이다,
성재선생의 연보에 부친상 때에 혈혈단신으로 상례와 제사를 힘들게 지냈다고 하나, 내가 알기로는 둘째 누님 숙인권씨는 당시 노항에서 영천북 10리 대전리에 이거하여 살면서 신랑이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에는 영덕항에서 임기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신랑이 처가의 재력을 보태어 돌보게 하였다고 전한다, 친정에서 받은 재산은 이거하면서 모두 동생에게 주었고, 시아버지 호수선생은
노항에서 기거하였으므로 자주 왕래하며 친정에 들려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시동생이 강능포에 근무하여 어린 시조카 집에도 여종들을 보내어 살림살이를 돌보게 하였고, 어모장군은 어린조카들을 글을 가리켜 우리3형제는 중부의 훈육에 글을 깨웃쳤다는 명계문집에 적어 두었는 것으로 보아 문무를 겸비한 어모장군의 행적과 도덕이 넘치시는 숙인권씨께서 돌보았다는 여러 경향을 살펴보아 내가 아는것이 알짜라 보여지지만 여튼, 성재선생의 부친사후의 유사만 살필까 합니다,
셋째 자형의 불편한 심기에도 성재선생은 내색을 하지않고 원만히 처리하여 인정을 상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이렇게 재리(財利)를 탐하지 않고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한평생 규율로서 몸을 다스림이 엄격하였고 절도에 어긋나는 언행은 하지 않으셨고, 조상의 제삿날은 말할 것도 없으니와 혹 남의 초상에도 고기를 먹지 않으며 비록 하천한 아랫사람의 궂은 일에도 이러하시는 올궂은 선비의 길을 걸으며 남들에게 모범을 보여 칭송을 받았다 한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여 의관을 정제하여 단정히 앉아 성현의 글을 탐독하면서 몸과 마음을 닦아 흐트러짐이 없었고, 임종시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운명 하시니 선생의 조행과 안으로 쌓은 정력(定力)을 가히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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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생의 유문(遺文)
성재선생의 유문은 만사 5수, 편지글 3편, 제문 1편 사문기문록(師門記聞錄) 1편으로 총 10편을 남기셨다, 이러한 선생의 자료와 부친 동봉선생의 유문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그 많은 글을 선생의 손자 휘 목(穆)께서 보관하고 계시다가 집에 불이나서 모두 불속에 재가 되었다고 전하니, 사유는 이 때 손자 목은 내간상을 입고 있었는데, 불이 나자 빈소로 뛰어들어가 신주를 안고 엎드려 돌아가셨는데, 화재를 진압하고 보니 목의 시신은 까맣게 불탔으나, 신주 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즉 손자 목 께서 신주를 품에 감싸안고 보존케 하였던 것이라, 이 사실을 나라에서 알고 효자 정문(孝子旌門)이 내려졌다,
동봉선생 부자분의 글쓰는 능력은 뛰어났다,짧은 편지나 작은 첩자(帖子)에 있어서도 한 번 쓰시면 다시 쓰거나 고치는 일이 없었다 하니, 그 작문 능려과 글쓰는 정성이 가히 짐작할 만 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재선생은 스승으로부터 함부로 붓을 들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받고 항상 가슴에 새겨 삼가 했으니,스승의 교훈이 부친의 평소 교훈을 스승에게 전수 받았다고 능히 알수 있는 부분이다,
1) 만사(輓詞)
輓 張晩悔堂 慶遇 장만회당 경우에게 만사하다,
老夫何敢恃蒼天,노부하감시창천, 내 어찌 푸른 하늘을 믿으리오
懷古傷今悌自運.회고상금제자운, 옛날일 생각나니 눈물이 저절로 흐르네
吾道己窮丁丑淚.오도기궁기축루, 우리 道가 궁색해서 정축년에 눈물 흘렸는데
故人胡遽丙申捐.고인호거병신연, 병신년에 고인은 급히 가셨구려
崎頭一別成千古.기두일별성천고, 책상 머리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고
門下相從隔九泉.문하상종격구천. 스승의 문하에서 사뀌다가 저승으로 가셨네
爲善方須飾慶在.위선방수식경재. 적선을 했음에 끊임없는 경사가 있을지니
諸孫䀌是一時賢.제손진시일시현. 여러 자손 하나같이 어질리니 여한은 없고져,
주,
정축년의 눈물.... 장선생 상때에 흘린 눈물을 말함,
병신년 1656년에 만회당 장경우께 드린 만사,
다음의 만사는 부자가 여헌문생으로 죽은 벗에게 한 만사다,
輓 崔月潭 汝崑 만 최월담 여곤에게,
人死孰非慟.인사숙비통. 사람이 죽으면 누가 슬프하지 않으리
惟公齒德高.뮤공치덕고, 오직 공은 나이와 덕이 높으셨다
幾㱍三玉拠.기란삼옥거. 세번 옥을 바치다가 발 베이는 형벌을 탄식했는데
終閼一鹏豪.종알일붕호. 마침내 붕새의 한 깃털에 그치고 말았구려
半面許肝膽.반면허간담. 언듯 한 번 보고 진심을 하여하고
片言解粕糟.편언해박조, 짤막한 말로 가난을 해결하였는데
尻輪今忍遽.고륜금인거, 엉덩이로 수레 삼아 갑자기 떠나시니
凄驚月荒皐.처경월황고, 황량한 언덕에 비친 달빛 쓸쓸하기 만 합니다,
註,
1, 최여곤은 본관이 영천최씨로 호가 월담이다, 아버지는 임란 경주 서천전투 영천17현사의 한분으로 생원 망정 최인제,이고 아들은 자인현감 최우직,이다,이 분의 生은 대충잡아 1576년 쯤 되어 진다
아들 우직,이 1600년 生이니, 최여곤공은 인조 병자호란 때 영천의병 군영인 의병장 양계 정호인의 군영에 동봉공의 셋째사위 황중신과 함께 참여 하였다는 정호인 의병군영에 이름이 영천군지에 보인다,
2,반면허간담... 성재공이 한번보고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보고 깊이 사귀였다는 말,
3,기란삼옥거....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변화(卞和)가 玉의 원석을 얻어 여왕에게 바쳤으나 가짜라고 오인해 왕을 속인 죄로 왼발 발꿈치를 잘렸고,얼마 후 무왕에게 바치나 역시 옥을 알아보지 못한 왕이 오른 발꿈치를 잘려 옥을 안고 울었다는 고사성어를 인용하여 성재공이 월담공도 변화처럼 불우하여 끝내 붕새가 되지 못 하고 깃털이 되고 말았다고 아쉬워 하는 선생의 마음을 담아 지은 깊은 우정을 작별한 만사이다,
4,고륜,이란.... 고륜신마(尻輪神馬)의 준말,로 고륜 정신은 神馬이 되어 유유히 노닌다는 뜻,
다음은 최여곤의 아들 최우직에게 만사 한 것이다,
輓 崔慈仁 友稷 舜輔
少年才藝選吾鄕.소년재예선오향, 젊어서 재능으로 우리 고을에서 뽑혔고
容易天門近耿光.용이천문근경광, 용이하게 대궐에 나아가는 영광이 있었네
淨道官楗如拾芥.정도관건여습개, 경쟁하는 관계를 지푸라기 줄듯 했는데
那知䢢海遽㝖桑.나지창해거의상, 갑자기 창해가 상전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後生從此無憑倚.후생종차무빙의. 이제부터 자손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니
古宅如今執主張.고택여금집주장, 옛 집을 누가 주장하랴
最是人門沈通處.최시인문침통처, 이것이 사람사는 집에 가장 침통한 것인데
凄然鶴髮泣萱堂.처연학발읍훤당,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슬피 울어 곡을 하시네,
註
1,崔友稷 1600~1657년 본관은 영천최씨 자는 순보 호는 유춘정.으로 조부는 임란창의 순절사 생원 망정 최인제,이며 아버지는 최여곤이며,어머님은 성주이씨 주부 이수인의 따님이고, 공은 1600년에 출생하여 1624년에 생원하고 1627녅에 문과급제하여 통훈대부가 되어 홍문관 수찬,자인현감,을 지냈으나 이분이 정양계가 1655년에 서거하여 제문과 만사를 지어 곡했는데, 2년 뒤 1657년에 본인이 죽어 성재공의 만사를 받으니 나이 58세 이다,
영천 노항 용산리 골방산에 장사 했다,
2. 萱堂은.... 옛날에는 북당 안채 화단에 원추리꽃을 많이 가꾸었는데, 그로인해 선비들이 詩를 지을때 지우의 고택의 어머님을 북당, 또는 훤당 이라고 불렀으며, 타향에서 어머님을 표현하는 시구에 어머님 으로 표현하는 고사어로 인용 하였다, 성재선생님도 여기에서 최우직의 문상하니 안방에서 어머님이 슬피 우시니, 훤당으로 표현 하셨네요, 이씨 부인이 남편의 상을 당하고 곧이어 아들까지 죽으니 그 심정이야 능히 알겠고, 성재공 역시 몇해 사이에 입암의 벗 부자분의 喪에 곡을 하였으니 아픈가슴을 안고 북당의 부인의 울음에 찌져지는 심정 이었으리라 판단된다,
만약 친구의 부인이 우신다면 자당,이라고 표현한다,
輓 鄭四溟에게 애도 함,
十世典刑循.십세전형순, 열살 짜리가 법도를 지켰고
一心孝友因.일심효우인, 일편 단심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가지고
虛負聖明辰.허부성명진, 헛되이 임금의 은총 내릴 때를 기다렸구나
燥履窮黨見.조리궁당견, 바른 조행은 곤궁해도 드러났고
心朝老益新.심조노익신, 사귀는 마음은 늙을수록 새로워졌는데
如何先我逝,여하선아서, 어찌 나보다 먼저 가셨는고
執紼淚迠巾.집불루첩건. 상여줄을 잡으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 수건을 적시는구려,
주
1,정사명...1591~1625년 자는 회일,호는 무정,으로 오천정씨 경주에서 거주한 정삼고의 둘째아들로 곤봉 정사물의 재종제이다,16121년에 생원 1618년에 증광문과 하여 용인현감,무장현령을 지내고 호조정랑을 제수받고 임소에서 별세하였다, 이분도 우헌 정사진과는 종제 사이니 성재선생의 외가집 외4촌간이 된다, 생원 정거의 작은아들의 子이니 곧 손자이다,
조부의 명으로 모두 입암의 고모부에게 가서 공부하여 생원과 문과하였으니 조부의 마음이 흡족했다고 한다, 그러니 성재선생께서도 특벌히 존경하던 형이 되니 직접 상례 때 까지 상여를 잡고 곡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2. 그다음은 이정(李晶)이라는 분에게 만사 한 것이 성재공이 만사를 쓴 5통 이나, 이정에게 하신 글은 생략합니다, 어떤분이신지 아직 찾지 못했고, 머리도 아픔니다,
2) 서신(書信) + 편지의 글이다,
편지의 글은 원문은 생략합니다,
편지서신은 2부로 다음에 올려 보겠습니다, 눈도 아프고 머리가 아파요,~~
첫댓글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은 영천 입암(入岩)에서 향년 84세로 별세하기까지 한 시대의 사표로서 당대를 풍미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산림(山林)으로 일국의 추앙을 받았다. 또한 동봉(東峯) 할배는 정사진·정사상(鄭四象)·손우남(孫宇男)과 함께 立巖四友의 한분으로 여헌 선생이 영천 입암에 입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평생을 도의로서 사귀었는데 아들 省齋公과 손자 晉敏 형제 모두 여헌의 문하에 입문하여 영천지역 여헌학맥의 핵심을 이루었고 동봉,성재부자와 자주 편지로 안부를 묻고 근황도 전함. 행정구역의 변동으로 현재 포항시에 편입돼 있다. 여헌이 사망한지 5년째 되던 1642년에 입암서원에 五賢 위패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