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보법(步法)이라는 다섯 가지<정완영>
-박헌오 편집-
첫째, 정형을 지키는 것이다.
시조의 정형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다듬어 놓은 것이어서 정제된 우리말이면 무엇이거나 다 담고도 남음이 있다.
“ 흐름(流)이 있고, 굽(曲)이 있고, 마디(節)가 있고, 풀림(解)이 있다.
할머니의 물레질, 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 세 번째는 어깨 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 넘겨 두루룩 꼬투리에 힘껏 감아주던(종장) 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초, 중, 종장의 3장으로 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다.”
조 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 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 이 작품은 1960년대 초 시조를 폄하하고 외면하던 시기에 백수 정완영이 10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한 시조로 ‘시조도 이렇게 훌륭하게 쓸 수 있구나’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작품이다. 청각을 시각으로 버무리며 슬픈 조국에 대한 큰 사랑을 가야금으로 환치시켜 정연하게 표현하였다. <편집자 주>
두 번째, 가락이 있어야 되겠다.
시조에는 우리 일상생활의 음률 그 내재율이 무리 없이 다 담겨야 한다.
<한국적 가락-고향생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울고 간 극락산(極樂山) 위 / 지금도 등 뒤에 실려 사윌 줄을 모르네 //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 줄이 피가 감겨/ 청산(靑山)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빙그르르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 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머문다. -「고향생각」첫째수, 다섯째 수, 일곱째 수.
세 번째, 시조는 쉬워야 한다.
그 까닭은 시조가 국민 시이기 때문이다. 쓸 적에는 깊이 오뇌하고 무겁게 사량(思量)하고 곰곰 성찰하되 다 구워 낸 작품은 쉬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언단의장(言短意長)하라는 이야기다.
父子像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듯 한 어린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날 그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네 번째는 근맥(根脈)이 닿은 시조다.
즉 희(喜), 비(悲), 애(哀), 락(樂), 묘(妙), 현(玄), 허(虛) 그 밖의 어디엔가 뿌리가 닿은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을숙도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메고 질펀하게 누워 있데.
그래서 목로주점엔 대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낙일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老사공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金海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초봄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을 닦아낸다
네일은 목력꽃 찾아와 구름밭을 닦으리ㄲ
끝으로 시조는 격조가 높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비속어, 천속어가 난무하고 제 몰골도 수습 못할 지경에 이르면 이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천불동 운해(千佛洞 雲海)
바위가 바위를 업고
산에 올라 부처 되고
부처가 부처를 업고
골에 들어 바위 됐네
천불동 일만 봉우리
입었다가 벗는 구름
동시조집을 내면서
“여기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꿈 조각들을 주워 모아 동시조집을 엮어 내는 뜻은, 어여쁘고 자랑스러운 우리 어린이들에게 이 꿈을 조금이라도 심어주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분이네 살구나무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백수 정완영의 시조를 위한 어록 중에서 골라 적음.
“시조 한 수에 담지 못할 세계가 없다.”
“시조는 모국어로 빚어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 그릇이다.”
“족보는 안 갖고 다녀도 퇴고할 작품은 갖고 다닌다.”
“아무리 별빛이 빛난다 해도 엄마 목소리만큼 찬란할 수는 없고,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해도 엄마 목소리만큼 사무칠 수는 없다.”
“ 직장의 좋은 자리를 스스로 물러나 자나 깨나 오늘날까지 시조에 매달렸어. 근 50년을 하루에 열 시간씩을 시조에 매달린 거야.”
“시조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행간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이다.”
“시조는 한국의 표정입니다. 한국문학에서 시조를 빼내 버리면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시조는 향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 13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가요를 거쳐 그릇이 완성되었는데, 중요한 건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 시조는 우리의 맥박이고 내재율이고 표정인 것입니다.”
中庵 가는 길
사람은 늙었는데 봄은 늘상 어린 걸까
오십 년 세월 건너 중암으로 가는 길엔
춘삼월 바람 한 끝에 初經처럼 떨군 철쭉
*중암은 대전광역시 중구 정생동 묘각골에 있는 작은 암자이다. 임진왜란에 승병을 일으켜 칠백의총 전투에 나아가 장렬히 산화한 역사와 영규대사가 칠백의총 전투에서 중한 부상을 당하여 이곳으로 와서 갑옷을 벗어놓고 잠시 쉬었다가 갑사로 가서 열반하였고 나중에 이곳에 보관했던 유품들도 갑사로 옮겨갔다고 전한다. 백수선생께서 이작은 암자를 다녀가셨음에 발췌하여 적어둔다.
시조의 세계를 향한 상상여행
-상상을 그리다. 상상을 요리하다. 상상을 맛보다.-
시조 = 상상(발상) + 구조화 + 표현
상상(발상) = 체험, 느낌, 비교, 정서적 의지,
구조화 = 시상을 그림, 시어를 선택, 시조 형식으로 꾸밈,
표현 = 비유법으로 엮다.< 은유와 상징 >
시조의 구조
형태구조 : 외연적 언어, = 정형의 운문적 공간
전통적 법칙,= 3장 6구 12소절
절묘한 연결,= 체언과 용언,<교착어>
의미구조 : 내연적 언어 = 상상의 정서적 함축
의미의 흐름 = 기, 승, 전, 결,
표현의 방법 = 비유(은유와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