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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찾아라
2013. 9. 1(주일낮예배) 하박국 3:17-18
요즘 사회는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말한 감정노동이라는 말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의 시장은 기업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시장은 소비자의 감정을 맞추기 위하여 노동자의 감정을 억누르게 되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신이 기분 나쁘고 그 감정을 다 표현하지 않는다. 자기 속에는 화가 치밀어 올라도 겉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는 것처럼 활짝 웃고 예 손님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감정노동자 중에 최고의 고통을 받는 직업이 항공기 객실 승무원이라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몸은 지치고 피곤한데도 사람을 만났을 때는 늘 웃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물건을 파는 점원도 감정노동자이다. 옷가게에 수십벌을 입어보고는 사지않고 옷에 대하여 불평을 해도 고객에 대하여 찡그린 얼굴을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도 감정노동자처럼 할 때가 있다. 멀리 볼 것이 아니라, 제가 신앙의 감정노동자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저는 부교역자 때 찬양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찬양을 인도할 때 기쁜 노래를 부르면 활짝 웃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찬양을 한다. 그러다가 천천히 예수님을 묵상하는 찬양을 부르게 되면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또 한 손은 높이 들고 눈을 감고 찬양을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찬양을 인도하고 나면 사람들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찬양에 은혜받았습니다. 목사님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 찬양할 때 더 은혜로운 얼굴을 하고 찬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정말 가사에 은혜를 받아서 가슴이 뭉클하여 찬양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고함을 치고 찬양을 해도 감동이 없는 날도 있다. 그러나 제 속에 감동이 없어도 여전히 저는 두 손을 들고 눈을 지긋이 감고 찬양을 하는 것이다.
제 감정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찬양할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성도들을 만나 상담을 할 때도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나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성도들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때때로 속에서는 불이 나고 있는데 환히 웃으면서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신앙의 감정노동자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가?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최초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가셨다가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듣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잔치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유대인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결혼식에 신랑 신부는 없어도 포도주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단순히 목이 말라서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쁨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104편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잔치를 벌여놓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기쁨이 사라져 난감해 하고 있을 때 그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예수님께서 가나혼인잔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었는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할 때 아귀까지 채우고, 또 그 물을 연회장에 가져다 주라고 서슴치 않고 순종하여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요한복음 2장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전부라면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병들어 힘들어 하는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를 떠 놓고 정성을 다하여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때 하얗게 수염을 키운 할아버지가 연근을 삶아서 먹으라고 하여 그렇게 했더니 아들이 낳았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 순종하는 것과 샤머니즘을 믿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종교학을 공부하면 샤머니즘은 하등종교라고 하고, 기독교는 고등종교라고 한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하등종교과 고등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어령교수는 고등종교의 특징은 자기부정이라고 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하등종교는 자기의 필요를 구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리성도 떨어지고, 굉장히 이기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고등종교는 자기의 필요가 아니라, 신의 뜻에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장을 포도주가 없었는데 순종하여 포도주를 얻었다는 것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등종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가나혼인잔치를 통하여 정말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겠는가? 요한복음 2장의 핵심사항은 물이 포도주가 되어서 기쁨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문제가 해결되고 기쁨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사건이 이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은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그 기적을 예수님이 그의 영광을 나타낸 것으로 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그 사건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믿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되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보이시고, 결국 그 예수님을 알게 하므로 믿음을 가지도록 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기쁨이 없는 잔치집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기쁨이 회복되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참된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한동안 유튜브에 개그우먼 박지선씨가 개그맨이 된 동기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박지선씨는 주입식 교육의 노예였다고 고백을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시키면 그것을 하는 것을 좋아했던 박지선은 누가 시키면 늘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수능점수에 맞추어서 사범대 교육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대학에서 박지선은 멘붕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가 선택한 과목을 따라서 자신도 수강신청을 하여 들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공부하는데로 따라서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이 노량진에 있는 임용고시 학원에 있는 것이었다. 200-300명이 좁은 교실에 가득히 앉아서 선생님의 강의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뭐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을 한 박지선씨는 학교 다닐 때 3-4명의 친구들 앞에서 그들을 웃길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박지선씨는 고시원을 나와서 개그맨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내 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을 향하여 선택한 용기를 응원합니다. 나의 롤모델이 되어주세요.
사람들은 박지선씨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또 그 길을 걷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존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박지선씨에게 부러움의 반응을 강하게 보이는 이유는 결국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아니겠는가?
물론 유튜브에 올라온 이 글은 박지선씨가 쓴 것도 아니고, 박지선씨의 삶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할꺼야!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기쁨을 가지기 위해서는 삶의 조건이 충족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미국사람의 연봉을 받고, 독일사람들처럼 일하고, 영국집에서 살면서, 프랑스 요리를 먹고, 일본여자를 아내로 맞아 사는 인생이다. 반대로 가장 불행한 삶은 북한 월급을 받고, 한국사람처럼 일하고, 일본집에 살면서, 영국음식먹고, 한국남자를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다.
사람들은 좋은 조건 속에서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적 전통을 가진 한국남자와 살면서 북한월급을 받고 살면 불행하고, 반대로 늘 무릎을 꿇고 남편을 대접하는 일본여자와 살면서 미국월급을 받고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주간에 브레넌 매닝이 쓴 신뢰라는 책을 읽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한참을 믿음과 신뢰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였다. 그리고 중반부분이 넘어가서야 정답을 알 수가 있었다.
매닝은 믿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고 또 아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신뢰는 믿음에 소망을 더한 것이다고 매닝은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매닝의 말에 의하면 믿음은 예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신뢰는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단편적이다는 것이다.
빌게이츠는 컴퓨터 천재, 루퍼트 머독은 권력에 미친 억만장자, 테레사 수녀는 성녀, 빌클리턴은 방탕아, 우리 사장은 구닥다리, 우리 목사는 덜 떨어진 사람, 노숙자는 건달, 타이거 우즈는 비범한 천재,
이렇게 우리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고 할 때 아주 단편적인 지식으로 정의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여러분은 공범식목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광채나는 사람. 조명이 필요없는 사람 이다. 이 말은 제가 이마가 넓다는 의미도 있지만, 언제나 밝고 명랑한 사람이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예민하고, 또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만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고 생각보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제가 혼자서 조용히 있으면 목사님답지 않게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런 분들은 저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아는 지식에 저의 모든 것을 다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진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도 이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을 단편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의 실패이야기가 나온다.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요 6:1-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갔을 때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이 사람들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도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서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삼기 위하여 밤새 주님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님 앞에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지금 이 모습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꾸짖는 장면이다. 왜 예수님이 이들을 꾸짖었겠는가? 그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단편적인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배고픔의 문제없이 살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밤을 새우며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고 있는가?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식 안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담으려 했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늘 은혜가 풍성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삶에 늘 은혜를 베풀어 주기만을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죄를 용납지 아니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만 알고 기도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할 때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하면서 간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듣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또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며 간구할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크심을 알면서도 단편적인 지식 안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단편적인 지식 안에 다 넣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한번 보시기 바란다. 하박국은 BC 600년에 사역한 유다선지자이다. 매어 달리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멸망하는 유다를 보면서 아픈 가슴으로 사역을 한 선지자이다. 그 당시 유다는 악인이 득세하여 율법이 해이해지는 상황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을 토로하였다. 왜 하나님은 율법이 해이해 지는데 침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지금 하박국의 불평은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시다는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하박국은 이제 갈대안인의 침공에 유다가 무너진다는 사실 앞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에게 무너질 수 있느냐?는 불평을 한다. 이 불평은 하나님은 자기백성마저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분이시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불평이 많았던 하박국이 마지막에는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어떻게 하박국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는가? 나라는 망하고, 자신의 삶에 아무런 수확이 없어도 하박국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을 침공하여도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알았다. 그런데 하박국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고 결국 구원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참된 기쁨은 내가 가진 단편적인 지식 안에 하나님을 맞추어 갈 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단편적인 지식을 부수고 크신 하나님을 알아갈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하여 나의 단편적인 지식을 부수고 하나님을 배워가고 닮아갈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한웅재 목사님은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사진작가이고, 또 작곡가이고, 또 꿈이 있는 자유라는 찬양팀의 찬양사역자이기도 한 분이시다. 저도 한웅재 목사님이 작곡한 많은 노래를 알고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찬양도 있다. 소원이라는 찬양이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 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런데 한웅재 목사님이 5년만에 2집 음반을 내었다. 그 주제가 일상, 위로이다. 지난 5년동안 한웅재목사님이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위로였다. 그리고 그 위로를 주제로 곡을 쓰려고 하였는데 곡이 잘 쓰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노트에 곡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다 어느날 노트 위에 아주 익숙한 단어 예수라는 글자를 써 놓았다. 그랬더니 노트가 가득차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주제를 위로는 예수라고 하였다.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세월에 참 의미 됨을 이제 알 것같아요
나의 일상들과 헛된 묵상 속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소서
십자가의 사랑만이 나의 다져진 길같은 마음 부드럽게 하시니
거친 미움들과 허영은 내려 두고 주님 더 아는 마음 주소서
주를 믿고 늘 생각함이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됨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내게 보여 주시는 그 좋은 길을 걸을 용기와 힘을 주소서
위로는 예수 십자가의 예수
위로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
위로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웅재목사님은 삶에 있어서 참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참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참된 기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참된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의 여러 현상과 사역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므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을 회복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