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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김성우(부산고 53년 문. 정외과 수석입학)씨가 첫사랑을 찾아 간 글을 읽고 쓴 글이다.
김성우씨가 한국일보 편집국장 일 때 임철순은 신출 견습기자였다.
지금도 두 사람은 선후배관계로 자주 회동한다.
먼저 김성우의 "돌아 오는 배"에 나오는 "동백꽃 필 무렵"을 읽어 보세요.
-홍경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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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필 무렵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갑작스런 편지에 당황하실 줄 믿습니다.
벌써 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연화도라는 조그만 섬에 동흥 강습회라는 4년제 초등학교 과정의
간이 학교가 있었습니다.
선창가에서 십 리 골로 올라가는 중도의 산턱에 외따로 섰던,
교실이라고는 단 두 칸뿐인 오막살이 학교였습니다.
부인은 이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예쁘고 총명한 소녀였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이 학교에서 입니다.
나는 부인과 같은 반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부인과 나의 담임선생님 이었습니다.
나는 강습회의 3년 과정을 마치면서 욕지도로 이사를 갔고,
부인을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때 같은 반 학생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든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이상하게도 부인의 이름과 얼굴만은 또렷이 생각납니다.
그 후로 연화도의 그 붉던 동백꽃은 해마다 피고 졌겠지요.
그 동안 안녕 하셨는지요?
잊어버리고 있었음 어린 시절의 친구 하나가
반백의 나이가 되어 쑥스럽게도 부인의 안부를 묻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소년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부쳤다.
부인이 나를 기억 할까?
자그마한 얼굴이 가름하니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소녀였다.
가르마를 곱게 탄 머리는 길게 늘여 댕기를 매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동백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언제나 반들반들했다.
우리 집은 선창가였고 소녀는 섬에서 가장 후미진
십리골(十里谷)이라는 골짜기에 살았다.
학교는 그 중간에 있어서 등하굣길이 정반대 편이라
서로 만나는 것은 학교에서뿐이었다.
학교에서 소녀는 늘 새침하였다.
꼭 다문 입이 야물고 가늘은 눈이 빛났다.
소녀가 눈에 띈 것은 공부를 참 잘했기 때문이다.
나와 1,2등을 번갈아 했다.
그러나 소녀를 꼭 이길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소녀는 나를 시샘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이서 정답게 이야기를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학교에 와도 서로 본 듯 만 듯했고,
수업이 끝나면 소녀는 산골로 나는 갯가로 말없이 헤어지곤 했다.
어느 핸가 방학 때 소녀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혼자서 뜻밖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
광주리에는 잡곡이랑 채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 때 우리 반의 단임 선생님이어서 인사를 온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도화 (圖畵) 책을 끄집어 내놓고
우리에게 크레용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보였다.
섬에서는 생전 보지 못한 앞뒤가 똑 같은 전차 그림이었다.
그 때 나와 소녀는 이마를 맞대고 그 전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둘이 가장 가까이 앉았던 시간이었다.
3학년 말이었다.
4년제 학교라 졸업식에서 3학년 대표가 송사(送辭)를 읽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소녀와 나를 교무실로 부르더니 송사를 번갈아 읽어보라고 했다.
결국은 내가 뽑혀 졸업식 날 식단 앞에 섰다.
“사회에 나가면 많은 황파(荒波)도 있겠지요”라는 송사의 한 구절이
지금도 그 소녀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난다.
그 송사는 나의 고별사였다.
그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 학교를 떠나 이웃 큰 섬인 욕지도의 학교로 전학을 했다.
소녀와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그 섬에는 솔밭 사이사이로 동백나무가 지천이었다.
번들번들 윤기 나는 진초록 잎사귀가 내 풋 된 꿈처럼 싱싱했고,
이른 봄이면 새빨간 꽃이 공연히 어린 마음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동백꽃이 온 섬에 만개하던 무렵 새 학년을 맞으면서
나는 소녀를 두고 그 섬을 떠났다.
그 후로는 소녀를 영영 만나지 못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 대학에 진학하는 사이
나의 주소는 소녀 곁에서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 안에서 소녀가 꼭 내 나이만큼 먹으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얼굴도 생생하고 이름도 잊어지지 않았다.
나는 소녀를 기르고 있었다.
내가 청년이 되자 소녀는 처녀가 되었고,
그 처녀의 얼굴이 어제 본 듯 또렷이 그려졌다.
소녀는 늘 다소곳한 모습으로 입을 꼭 다물고 생긋이 웃고 있었다.
이제 내 머리끝이 희끗해 지니 소녀의 머리끝도 희끗해 졌다.
그 소녀는 정말 이 모양으로 늙어가고 있을까?. 아직도 섬에 있을까?
소녀와 헤어진 지 꼭 40년이 되던 해,
나는 이제는 소녀를 찾아도 괜찮은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깨어져도 허망할 것 없고,
소녀가 내 속에서 달아나더라도 서운할 것 없는 나이인 것이다,
좀더 늦으면 소녀를 영영 잃어버릴는지 모른다는 초조감이 나를 재촉도 했다.
연화도에는 같은 반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다 잊었으므로
물어볼 데가 없었다. 마침 욕지도의 초등학교 동창생 하나가
그 섬에 들어가 살고 있어서 행여나 하고 십리골 소녀의 소식을 부탁했다.
며칠 뒤 너무 쉽게도 소녀의 주소가 보내져 왔다..
섬을 이미 떠나 육지의 시골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고맙게도 이 세상 어느 구석에 살아 있었구나.
그 날로 당장 편지를 부쳤던 것이다.
나는 줄곧 소녀와 함께 있어 왔지만 소녀는 나를 기억할 것 같지 않다.
헤어질 때 우리는 열 살 안팎이었다.
소녀에게 내가 모르는 소년이라면 느닷없는 나의 편지는 철 없는 짓이 된다.
회답이 있을 것인가?.
약 일주일이 지났다. 편지가 왔다.
발신인이 분명히 그 소녀의 이름이었다. 회답이 온 것이다.
“전혀 잊고 있었던 친구가 40여 년이 넘어서 편지를 보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도 뜻밖이고 너무너무 반가워서 말입니다.”
나를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소꿉 친구의 편지를 받으니 새삼스럽게 옛날의 소녀 시절로
되돌아 가는 기분이 듭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요?.
허무합니다---.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되는지요?.
나는 쓸모 없는 여자로서 산간벽지 농촌에서 반백이 넘도록
연로하신 영감님 모시고 흙과 싸우며 살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맨 끝에는 “늙지 마세요. 건강하세요’라고 썼다.
나는 마침내 나의 소녀를 찾아냈다.
나는 갑자기 이제 세상에 아무 소원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소녀를 직접 대면한 것은 그 몇 달 뒤다.
다방에서 마주 앉았다. 옛 소녀는 인사대신 씩 웃기만 했다.
아. 그러나 나는 재주 없는 화가였던가,
내가 그려온 그림의 소녀가 아니었다.
어릴 때 모습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나
길에서 지나치면 전혀 못 알아볼 얼굴이었다.
서투른 글씨의 편지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 곱게 곱게만 채색되어온 소녀는 순진한 농부(農婦)가 되어 있었다.
들바람에 부대낀 살갗은 까칠하고 흙을 만진 손마디는 뚝뚝했다.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걸걸하니 생소했으며 가녀리고 조용하던
새침데기가 스스럼없이 서근서근한 아낙네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소녀는 내가 섬을 떠난 뒤 4년 과정의 강습회가 ‘
정규 6년제 국민학교로 되어 그 국민학교 과정을 마치자,
계집애가 공부를 더 해 무엇 하느냐고 어머니가 우겨
진학을 못했노라고 했다.
나이 차서 육지로 콧구멍이 벌렁한 남자한테 시집을 갔으나
곧 이혼한 뒤 나이 많은 농부와 재혼을 했고,
아들만 넷을 낳아 모두 장성해서 분가해 산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면서 교육을 더 받지 못한 것을 원통해 했다.
아무 자랑할 것이 없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지도 못하고,
세상에 나서 평생 한 가지도 해 놓은 것이 없으니 부끄럽다고도 했다.
그토록 영리하고 공부 잘하던 소녀가, 세상 어디 가도
평생 그렇게 또록 또록 살아가리라 믿었던 소녀가
포기한 교육 하나 때문에 이렇게 야초화(野草化)해버렸으니.
옛 소녀는 내 손을 보고 참 희다고 말했다.
나는 단지 어쩌다 교육을 좀더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다지 흴 것도 없는 내 손이 옛 소녀의 까만 손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다.
옛 소녀는 내가 어릴 때 똑똑했으니 큰사람이 되었겠지 하고
TV에 혹시 나오나 유심히 쳐다 봐 지더라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녀는 내가 섬을 떠나고 나니 공부 잘하는 아이가 없어
학교 다닐 재미가 없어지더라고 한다.
그러다가 처년 나이가 되면서 나를 찾고 있었노라고 장난처럼 말했다.
육지로 공부하러 나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찾아냈으면 어떻게 했게요?”
“결혼하자고 했겟지요.”
옛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더니 시무룩해지면서
“인제 다 지난 일이네요.” 했다. 그리고는 일어섰다.
이제 나의 소녀는 더 이상 나이를 먹을 줄 모를 것이다
상상의 얼굴대신 생면한 얼굴이 내 속에 자리 잡아 노화(老化)를 멈출 것이다.
옛 소녀는 나더러 몇 번이고 “늙지 마세요” 했다.
영원히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있고 싶은 것이다.
그 남쪽 섬 연화도에 올해도 동백꽃은 필 것이다.
나는 그 섬을 떠난 이후 그토록 순결하고 눈부시게 붉은 동백꽃을 본 적이 없다.
이상이 김 성우 (전 한국일보 주불특파원, 편집 국장, 주필, 주간 한국 사장) 님의
자전적 수필집 ‘돌아 가는 배’ 에 나오는 글이다.
알만한 분들은 그 분의 글이 ‘문장의 전범’ 이고
‘글쓰기의 교본’이라며 한국의 명문이라고 손꼽는다고 한다.
‘동백꽃 필 무렵’을 읽으면서 ‘메밀꽃 필 무렵을 떠 올렸을 것이다.
동백꽃은 NON FICTION 이고, 메밀꽃은 FICTION이다.
둘 다 고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한 쪽은 묘사에 뛰어나서 감동하고, 한쪽은 사실에 동감한다.
메밀 꽃, 동백 꽃이 우리 가슴을 가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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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뭣땀시 찾는데?
임철순
첫사랑 그녀가 잘살면 배가 아프다(아아니, 이것이 날 버리고 가더니 잘 먹고 잘살아?).
첫사랑 그녀가 못살면 가슴이 아프다(잘코사니라고 할 수야 없지만 못사는 게 당연하지. 나를 차고 가더니!).
그런데 첫사랑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함께 살자고 하면? 그때는 머리가 아프다.
그러면 첫사랑 그녀는 어떻게 돼 있어야 하나?
어디엔가 살아 있는데 알 듯 말 듯한 상태, 찾으려고 애쓰면 만날 수도 있는 궁금한 상태가 제일 좋은 걸까?
늙어서 추하진 않은 모습이라야 그녀가 나의 첫사랑일 수 있었던 ‘알리바이’가 증명되는 것일까?
첫사랑 그녀와 그남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꽤 있나 보다.
첫사랑을 찾아준다는 컨설팅 업체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한 달쯤 전에 읽었다.
그런 업체들은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년)처럼 우연을 가장해 둘을 다시 연결해준다.
업체들이 제공하는 컨설팅은 온라인 서면상담부터 직원들이 헤어진 연인에게 접근해
다시 연결해주는 서비스까지 다양하다.
서면상담에 5만∼20만 원, 실제 만남은 250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 원까지 받는다.
기사를 쓴 기자가 상담이 가능한지 문의해보니
5만 원짜리 서면상담 프로그램은 한 달 치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1시간에 20만 원인 전화상담도 1주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업체는 만나게 해달라는 의뢰가 월 평균 6건은 들어오며 성사 확률이 70∼80%라고 답했다고 한다.
잘 믿어지지 않지만 재회작전·연애작전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나 보다.
사람들은 왜 첫사랑을 찾고 싶어 할까? 우선 자신의 과거를 재확인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사랑이 마땅하고 옳았는지, 그녀나 그남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지금 이 시점에 다시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변했으면서 첫사랑은 변하지 않았기를 바라다보면 환상이 깨지고 실망하게 된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환멸을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그때야 물론 국민학교였지만)를 함께 다녔던 여학생,
공부로 늘 1, 2등을 다투었고 첫사랑인지 아닌지 아슴아슴했던 그 여학생을 쉰 살이 넘어 기어코 찾아 만났다.
그는 당시 서울의 큰 회사 중역이었지만 40여 년 만에 만난 그 여학생은
햇볕과 노동으로 찌들고 시든 무명의 시골 아낙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다방에 나오고도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을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만나 우월감과 승리를 확인하고, 나중에 발간한 책에 그 이야기를 썼다.
좀 잔인한 것 아닌가? 글을 읽은 내가 다 불쾌하고 걱정스러웠다.
유명 수필가인 어느 대학교수는 군대 갈 때 고무신 거꾸로 신었던 첫사랑을 제대한 뒤 다시 만났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그녀를 보고 배신당한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랬다고 솔직하게 썼던데, 그 글도 즐겁지 않았다.
그러니 찾지 말고 만나지 마라, 다만 환상이 깨질 뿐이다.
피천득의 ‘인연’을 다시 읽어보라.
“첫사랑은 누더기 같다. 찾지 마라”고,
생각나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말한 바 있다. <2016.01.29> [즐거운 세상]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 역임/近著: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고대 독문학과 졸/공주 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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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마차-
겨울 나그네 24곡 중 13번
길 달리는 우편마차 나팔소리 우렁차다
몹시도 요동치는 가슴, 왜 일까
내 가슴아?
우편마차가 가져다 줄 편지도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왜 두근댈까
내 가슴아?
그래, 저 우편마차는 마을에서 오는 거야
사랑했던 그님이 살고 있는 그곳
내 가슴아!
아마 너도 한번 그 마을에 되돌아가
내 사랑 잘 있느냐고 묻고 싶겠지
내 가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