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된 나무, 나무가 된 시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고규홍 (마음산책, 2014)
이 혁 (의성서문교회 목사)
1.
세상 참 시끄럽기도 하다. 말은 생명과 생명을 잇는 소통의 도구이지만, 과용되고 오용될 때에는 어마어마한 무기가 된다. 수많은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 상처를 보듬고 위로하는 따뜻한 말이 실종됐다. 상대의 치부를 드러내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살벌한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살풍경이다. 말은 많으나 가볍고 거칠다. 이런 소리에 마음은 더욱 지쳐간다. 열려야 할 입은 더욱 굳게 다물어진다. 이 땅에서 가장 독기를 품고 사는 말 많은 인간들을 나무는 그저 고요히 바라보고 있다. 관조하지만 훈수를 두지는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나무... 그는 한없이 고요하다.
작년(2018년) 4월에 경북 의성에 개척을 하게 되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사실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늘 마음에 품어왔던 시골목회 아니던가! 의성에 내려온 이후 교회를 만들어가는 기쁨이 컸다. 처음엔 교회라는 ‘장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장소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교회를 생명의 향기가 가득하고 누구라도 편안하고 쉼을 얻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꽃과 나무는 인간에게 위로와 쉼을 선물한다. 차가 쌩쌩 다니는 길옆에 위치한 교회가 갖는 한계로 인해 정원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화분에 씨를 뿌리고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나비, 벌, 사마귀, 장수풍뎅이, 꼬리박각시, 장수하늘소 등 작은 생명들이 찾아와 노닐다 가고, 새도 잠시 쉬었다 가는 자그마한 꽃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나무를 심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옆 빌라의 화단에 있는 나무는 죽어있었다. 아쉬움이 컸다. 화사한 꽃도 좋지만 든든한 나무가 친구처럼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러던 중 1층 교회도서관 앞 길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문은 활짝 젖히면 그대로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한 장의 그림이 펼쳐진다. 비록 내가 심지는 않았지만 난 그 나무가 마음에 들었다. 이 나무는 내 속에 있는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난 하루 일과 중 외부 일정이 없는 한 도서관을 지키고 있다. 내가 앉는 자리는 밖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자리인지라 고개만 들면 늘 나무와 시선이 마주친다. 봄이 되어 연한 잎들을 밀어 올릴 때에도, 여름이 되어 줄기가 실해지고 잎들이 초록 옷으로 갈아입을 때에도, 가을이 되어 퇴색한 잎들을 제 뿌리 곁에 떨굴 때에도, 겨울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놓을 때에도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그는 그런 나를 친구로 맞이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교감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렇게 나에게 시(詩)가 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무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참 변함없고 듬직한 친구이다.
2.
얼마 전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다녀왔다. 해야 할 일이 많았으나 번잡한 내 심사를 정화시키고 싶었다.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이 중에 나무만한 것이 있을까? 긴 시간 이동하여 자작나무숲에 다다랐을 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안식이 찾아왔다. 나무가 주는 은총이다. 집으로 돌아와 추억이 묻어 있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 교수의 <나무가 말하였네>는 의성에 내려오기 전 창천교회에서 만나 짧은 교제를 나누었던 집사님이 전해주셨던 선물이었다. 미국에서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을 하셨던 집사님은 나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셨다. 이 책은 답답한 심사가 몰려올 때면 짚어드는 몇 권의 책 중에 하나이다.
저자인 국문학을 전공한 고규홍 교수는 나무를 평생 찾아다니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의 숨겨진 사연과 서 있는 땅과 연관된 절절한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풀어낸다. 그렇게 나무와 함께 한 세월이 올해로 25년째... 그동안 그는 나무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 여러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그 중 <나무가 말하였네>는 그의 주관심사인 시(詩)와 나무를 함께 담아낸 아름다운 책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시는 나무, 나무는 시’라고 말한다. 저자는 불혹에 나이에 답답한 삶에 지쳐 일상을 훌훌 털고 떠나 수목원에 머무르며 챙겨간 시집을 읽다가 시에 나오는 나무들을 하나씩 찾아보면서 비로소 나무를 만났다 한다. 그를 나무에게 인도해준 것이 바로 시였다. 그러니 시는 나무, 나무는 시라고 말할 수밖에...
어느 인생이든 사연이 없는 인생이 있을까? 평생 한 자리에 무심히 서 있는 나무에겐 사연이 없을까? 모든 존재는 이유가 있는 법. 시간에 머물다 가는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한 나무 안에는 그를 심은 이의 손길, 가꾼 이의 손길, 그를 만져 본 이름 없는 손길들, 그를 바라본 수많은 눈길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무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마을 어귀에 있으면 마을의 역사를, 개인의 마당 안에 있으면 한 가족의 역사를 나무는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존재는 시의 이유가 되고, 사연은 수많은 시어들을 낳는다. 고로 나무는 시다. 인류보다 세상의 빛을 먼저 본 나무는 시인에게 수많은 영감을 선물해주었다. 많은 시인들이 나무에 기대 깊은 위로를 얻고, 삶의 지혜를 얻었다. 시인들은 이를 아름답고 깊은 시어들도 풀어내었다. 저자에게 있어 나무는 친구이자 스승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나무를 찾아다니며 교감을 나누고, 그러는 사이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배운다. “나무들 사이에는 그리움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너무 바짝 붙어 있는 나무들은 서로의 자람을 방해하고, 더 크고 힘센 나무가 홀로 동무들을 물리치고 웃자란다. 그런 나무들을 뽑거나 베어버려야 동무 나무들이 모두 잘 자랄 수 있다는 건 사람살이에서도 마찬가지겠지”(19-20).. 시인 칼릴 지브란도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 삼나무와 참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노래한 바 있다. 너무 가까워 서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나무도 인생도 매한가지이다. 나무를 통해 인생을 배우니, 나무는 단순히 인간을 위한 조경수가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이다.
<나무가 말하였네>에 등장하는 시들은 모두 나무에 관한 시들이다. 시인들은 나무를 통해 인생이 무언지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저자는 단순히 나무에 관한 시를 소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 소개된 나무를 자신이 알고 있는 나무의 사연과 접목하여 구구절절한 나무의 이야기를 나무의 입장에서 전해준다. 가령 이렇다. 정호승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에는 굽은 나무가 등장한다. 그러면 그가 만난 굽은 나무의 사진을 지면에 싣고 굽은 나무에 대한 단상을 풀어낸다. 우리의 우여곡절 많은 삶을 빼어 닮은 굽은 나무에게서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아무리 구부러져도 허허롭게 살아가는 나무처럼 우리도 그리 아웅다웅 하며 살지 말자고...
이 책에 수록된 70개의 시를 만나는 것도 황홀한 일이지만, 저자가 풀어낸 나무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말을 한다. 단 나무의 이야기는 그에게 마음을 한없이 열어둔 자에게만 들린다. 나무는 주위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하늘이며 꽃이며 강이며 나비며 새들과 깊은 교감을 하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한 종족, 인간만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외로워하고 있다. 나무가 손짓하고 있다. 수많은 잎들을 내밀어 손을 맞잡자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걸어볼 일이다. 그는 무심한 듯 서 있어도 우리가 건네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 그를 꼬옥 안아볼 일이다. 나무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그의 체온을 느껴볼 일이다. 한 세월 함께 하고 있는 나무는 아마도 숱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우린 그 속에서 위로와 용기, 도전과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무와 우리가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한 복판에서 말 없는 말로 고요히 우리 곁에 있는 나무.. 그의 무언의 말 속에는 인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넘쳐나는 소음공해에 소리 하나 보태기보다 조용히 나무에게 다가서보면 어떨까?
우린 언제쯤 나무가 건네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 마음 간절한 이 있다면 이 책 <나무가 말하였네>를 펼쳐보라 권하고 싶다. 그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 보라. 지금 눈앞에는 살랑이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 이 글은 평화목회연구소 웹진 평:상 <책, 삶, 목회>에 기고한 책 서평입니다. 아래 링크를 공유합니다.
http://peacechurch2014.creatorlink.net/forum/view/241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