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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 구
부산대 명예교수
수필춘추(2015 봄호)추천
대경상록수필창작교실회원
초여름을 자리 돔과 함께.
초여름이다. 화사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던 꽃들이 모습을 감춘지도 오래되었고 나뭇잎이 싱싱하고 검푸르게 변해간다. 키가 큰 나무들의 위세가 등등하고 작열하는 해살이 가득 내려 쬐니 열기가 뜨겁게 느껴진다. 온 누리가 에너지로 충만한 것 같다. 넘쳐나는 에너지가 기세좋게 사방으로 뻗혀나가니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려보고 싶은 계절이다.
때마침 동향인들 모임에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하여 그곳에 참석하였다. 해마다 봄철이면 대구지역에 거주하는 제주도민들이 갖는 정기모임행사였다. 금년은 시기가 다소 늦어져 초여름에 치르게 되었다. 반야월 금호강변 체육공원에 모두 모였다. 젊은이 들이 운동장에서 경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나는 더위를 피하여 나무 그늘에 앉아서 동향인들과 담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었다. 더위 때문에 체육행사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점심식사 때가 되자 시원한 자리 돔 회가 제공되었다. 국물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으니 새큼하고 시원한 맛에 가슴속이 후련했다. 건더기를 한술 떠서 입속에서 자근자근 씹었다. 제주산 자리 돔의 고소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그날 행사를 위하여 제주도에서 항공화물로 공수해 왔다고 했다. 아무리 편리한 시대라 하지만 한 끼 식사를 위하여 비행기까지 동원했다고 하니 열의가 대단했다. 행사를 준비한 주최 측에 감사하였다. 고향에 가서나 먹어볼 수 있었던 향토 음식 맛을 대하고 나니 초여름 더위가 저만치 물러서는 것 같았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리 돔은 제주 근해에서 잘 잡히는 어종이다. 제철이 보통 5월서부터 8월 사이이다. 이 때가되면 우리 마을 앞바다에는 자리 돔을 잡기 위하여 자리 태우라는 뗏목들이 떠돌았다. 태우는 통나무를 너 댓개 이어놓은 직사각형의 뗏목이다. 한쪽에는 노를 달아 앞으로 저어가게 하였고, 반대편에는 커다랗고 둥근 테두리를 달고 그 곳에 그물을 설치하였다. 그물을 바닷물 속에 잠기게 하고 자리 돔이 모이는 곳에 접근하여 그물을 들어 올리면 자리 돔이 수북하게 그물 속에 갇혀 올라왔다. 자리 돔을 실은 태우가 포구에 닿으면 기다리던 아낙네들이 자리 돔을 짊어지고 팔러 나섰다. “자리 사세요! 자리 사세요!” 하는 외침이 온 동내를 요란하게 했다.
초여름이면 한창 보리가 익는 철이다. 이때부터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시골학교에서는 보리방학이라 하여 일주일 정도 휴가를 주었다. 당시에 우리의 주식은 보리밥이었다. 따라서 뉘 집이 보리 몇 석을 생산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시골에서는 보리 수확량이 그 집의 부를 판단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도 보리를 꽤 많이 수확하는 편이었다. 그 대신 우리는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보리를 베고 묶어서 집으로 운반하고, 이삭을 훑어내서 타작 했다. 뙤약볕 밑에서 보리 베는 일이 참으로 고되었다. 운반하는 것도 힘들었고, 보릿단을 마당에 쌓아놓고 “홀태”라는 기구에서 보리이삭을 분리해 내는 일은 지루한 작업이었다.
보리 수확하는 철이 자리 돔을 잡는 시기와 일치하였다. 보리수확에 여념이 없을 때 “자리 사세요!” 하는 외침소리가 들리면 얼른 나가서 자리 돔 한 되박을 사서 자리회를 만들었다. 우선 자리 돔을 대바구니에 넣고 바다로 갔다. 여기에서 조약돌 몇 개를 골라 바구니에 같이 넣어 바닷물 속에서 흔들어 댄다. 그러면 자리 돔의 비늘이 벗겨지고 내장까지도 말끔히 제거된다. 바닷물로 깨끗하게 씻어내면 훌륭한 횟감이 되었다. 이것을 듬성듬성 썰어서 된장에 찍어 먹으면 강회가 되었고, 짤게 썰어 양념과 함께 물을 추가하면 물회가 되었다. 시원한 우물물을 떠다가 물회를 만들어 한 그릇 씩 돌리면 더위와 피로가 달아났다.
자리 돔의 용도는 회 거리만이 아니었다. 자리 돔 조림 또한 잊을 수 없는 맛을 지니고 있다. 자리 돔은 가시를 발라먹으면 안 된다. 가시에 신경 쓰다 보면 고유의 맛을 음미해 볼 수 없다. 회를 쳐서 먹던 조려서 먹던 가시 채 씹어 먹어야 제 맛이다. 나의 어머니는 자리 조림 할 때면 생콩을 한 움큼 넣었다. 콩이 완전히 익을 때가지 불을 지피고 나면 조려진 자리 돔이 가시까지도 폭삭폭삭 입속에서 녹아났다.
다음은 자리 돔 구이이다. 자리 돔 중 굵고 알이 밴 것들은 소금을 했다가 구워 먹었다. 여름 철 어린이들이 식욕이 없고 아픈 기색이라도 하면 자리를 구워 주었다. 왕소금 방울이 더덕더덕 붙은 자리 구이 한 접시에 보리밥 한 사발을 듬뿍 먹고 나면 아픈 것이 말끔히 낳았다. 밥이 보약이란 말을 되 뇌일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다. 자리젓의 구수함도 일미였다. 새파란 콩잎을 따다가 자리젓에 찍어먹는 맛도 잊을 수 없다. 이처럼 자리 돔은 여름철 별식으로 제주 인들의 추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리 돔은 제주 근해 어디서나 잡히지만 바다의 위치에 따라 종류와 용도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서귀포 보목 항과 제주시 도두 항 자리 돔이 뼈가 부드럽고 맛이 고소해서 물 회에 좋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의 자리 돔도 횟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모슬포 근해의 자리 돔은 다른 곳의 것과 달리 굵고 뼈가 억세어서 횟감으로는 부적합하였다. 또 한림 비양도 연안의 자리 돔은 크기가 작아서 젓갈 담그기에 알맞다. 이러한 차이는 바다 물살의 세기와 먹이가 되는 프랑크톤의 차이에서 유래된다. 모슬포 앞바다는 마라도를 감싸 흐르는 물살이 세어서 이곳에서 서식하는 자리 돔들은 뼈대가 거칠다.
자리 돔에 대한 얘기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자리돔구이가 배달되었다. 굵고 뼈대가 거센 것으로 보아 모슬포 산인 모양이었다. 자리 돔 한 개를 들어내어 살만 골라먹고 가시를 버렸더니 수북하게 쌓였다. 옆에 있던 동향인 한 사람이 자리구이를 먹을 줄 모른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리 돔 한 마리를 들더니 머리에서 시작하여 꼬리까지 다 먹어 치웠다. 서둘지 않고 뼈까지 자근자근 씹는 모습에서 경륜가의 탁월한 자세를 배우는 것 같았다.
자리 돔! 그것은 제주 인들의 삶의 애환 속에서 먹는 즐거움과 활력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고향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지금 쯤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수확을 기다릴 시기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습이 아련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앞 바다를 누비던 자리 태우의 모습도 흔적을 감추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래도 자리 돔들은 바다를 유영하며 지나간 추억의 끈들을 이어주고 있다. 더위도 잊은 채 고향과 자리 돔에 얽힌 얘기들로 꽃을 피웠다. 이제 초여름 무더위도 한풀 꺾인 것 같았다. 금호강 강바람이 상큼하게 불어왔다.
시화호에 뜬 달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신명나는 달 타령소리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달은 우리민족의의 정서 속에 빼 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흥을 돋우거나 한을 토해 내기도하고 희망을 빌어 보기도 한다. 교교히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지향 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달은 축복의 대명사다. 밤이 내리는 적막 속에 모든 것을 용서하는 마음을 심어준다.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고픈 심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달이 가져다주는 정화된 감정들이 우리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 속에 깃들여져 내려왔다.
달 중에 유난히 크고 밝은 달이 한가위의 보름달이다. 음력 팔월 보름날이면 지구와 달 사이 거리가 가장 가까워지기 때문이란다. 농업을 중시했던 우리 조상들은 한가위를 맞이하여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하늘에 감사드렸다. 여기에 효도하는 마음이 가미되어 선조들에게 다례를 올리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추석이라는 명절로 굳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라시대 궁중 아낙네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길쌈을 하고 팔월 보름날 결과를 심사하여 진 쪽이 이긴 쪽을 대접하면서 한가위행사가 시작되었다. 한가위 행사가 고려시대에 와서 추석 명절로 변화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설과 단오와 함께 대명절로 정해졌다.
금년도 추석은 큰애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명절 때마다 겪는 교통대란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 부부가 아이들이 사는 곳으로 갔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부모님 중심으로 명절을 지냈다. 그 때는 가족모두가 제주로 이동하느라 부산을 떨었었다. 부모님 돌아가시면서 형제간에 명절을 분담했다. 나는 설 명절을, 동생은 추석을 맡았다. 제사도 아버지 제사는 내가 맡고, 어머니 제사는 동생이 맡았다.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기 위해서는 동생집이 있는 제주로 가야하지만 이제 시류에 맞추어 명절은 각자 가족 중심으로 지내기로 했다.
큰애가 직장을 잡고 정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 인근이다. 수원은 내게 무척 친숙한 곳이다. 나의 첫 직장인 농촌진흥청이 수원에 있어서 이곳에서 오래 동안 생활하였다. 아이들도 어린 시절 생활하며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농업의 본산인 농촌진흥청이 이제 전북으로 이전해버렸고 도회지의 모습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였다. 인근의 모든 산업시설들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까지 변하였다. 그래도 추석을 맞이하여 그런지 옛 고향에 온 것 처럼 마음이 푸근하였다.
군 생활 하는 둘째 애를 일찍 보내고 남은 가족들이 서해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수원을 떠난 이후 서해안을 가볼 기회가 없었다. 옛날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가서 서해안의 제부도 앞바다에서 아이들과 함께 갯벌을 밟으며 게를 잡던 시절이 있었다. 그동안 변화된 서해안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대부도로 가보기로 했다.
대부도로 가는 길은 시화호 방조제를 건너야했다. 사차선으로 조성된 시화호 방조제는 시흥시 군자면과 화성시 대부면 사이 바다를 가로질러 연결하는 긴 방조제이다. 이 방조제를 쌓으면서 시화호가 만들어 졌다. 중동건설 경기가 침체되자 그곳에 사용하던 중장비를 가져다가 간척사업을 벌렸다. 당시의 우리나라 여건으로 보아 어마어마하게 큰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시화호는 농업용지를 조성하고 산업단지를 만들려고 담수호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공장오폐수와 생활하수가 유입되어 시화호의 수질이 악화되었다. 그 후 시화호는 해수호로 전환하여 방조제 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조력발전소를 건설하여 해수를 유입시켜 수질을 개선하였다.
시화호의 수질이 개선되자 생태서식환경이 복원되고 시화호를 떠났던 생물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현재에는 세계의 희귀한 새들과 물새 떼가 서식하고 갯지렁이 같은 연체동물이 서식하는 생태계 보고로 변하였다한다. 아울러 시화호에는 사람들이 찾아들어 수변에서의 레저생활을 즐기는 친수․수변공원으로의 변하였다.
대부도로 가는 길은 차량으로 북적거렸다. 추석절의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도회지 사람들이 시화호 주변으로 몰려드는가 보였다. 시화호 방조제가 대부도를 육지로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대부도에 이르러보니 한적한 섬 분위기라곤 느껴볼 수 없었다. 옛날 갯벌을 밟던 서해안의 모습은 없었다. 도시 자본이 유입되어 위락시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잘 정비된 해안가 길을 걸으며 바다 내음을 맡았다. 해솔 길이라는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바다너머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낙조의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기위하여 여기로 오는가보다.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여유를 가졌다. 잘 가꾸어진 자연환경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대부도를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산하였다. 시화호 방조제를 달리며 차창으로 내다보니 시화호위에 달이 둥실 떠 있다. 밝은 달이 온 누리를 비치고 있었다. 서해안 바다가는 몰라보게 변했지만 둥근달이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많은 옛 이야기를 간직한 듯 시화호의 적막한 분위기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추석은 보름달과 함께 하는 명절이다. 한가위 보름달은 모든 곳에 축복을 내리는 듯하였다. 생태계의 복원된 생물들도 오늘 밤을 축복 속에 보낼 것을 염원해본다. 시화호를 개발함으로서 삶의 터전을 잃고 시름에 젖은 사람에게도 위안이 되기를 빌었다. 가족들 모두가 밝은 달을 보면서 마음이 기쁜 모양이었다.
보름달을 쳐다보노라니 문득 나의 고향집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지금은 빈 집이 되어 있을 내 집이다. 오늘밤도 집 앞뜰에는 저 달빛이 비추고 있을 터인데! 추석 날 밤 동내 애들과 어울려 놀던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부모형제가 다 모여 북적거리던 시절이 연상되었다. 역시 추석은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게 제격인 것 같았다. 잇따라 독일에 있을 때 유학 온 한 여학생이 달을 보며 하염없이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추석이 되자 고국에 있는 가족들이 더 그리웠을 것이다. 고향을 멀리 두고 가족이 그리운 사람들에게는 추석은 외로운 날이기도 하다.
달빛이 흐르는 밤길을 도와 집으로 돌아왔다. 시화호에 뜬 달이 열심히 우리들에게 밤길을 비춰주었다. 그렇건만 큰애는 자동차 라이트 불빛에 의지하여 운전하기에 바쁘다. 다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차속이 모두 조용하다. 달빛을 받아들이고 상념에 잠긴 것은 나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고사리의 맛과 향
고사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로 시작하는 성삼문의 시 한수이다. 중국의 상나라가 망하자 백이와 숙제가 망국의 한을 품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들에게 양식이 되어주었던 고사리의 존재가 사뭇 정답게 느껴진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관리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백이숙제의 묘를 지나게 될 때면 한 끼 식사는 반드시 고사리를 찬으로 삼아 먹었다고 했으니 충의를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의 얼을 되새겨 보게 한다.
고사리는 산야에 널리 자생하는 식물이다. 홀씨로 번식하고 자생력이 강하여 주변에 널리 산재해 있어서 일찍부터 식재료로 개발하여 이용하여왔다. 중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산채로서 가장 친숙한 식물이이 아닌가 생각한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가 아니더라도 산 속 휴양지에서 산채비빔밥을 시켜서 먹다보면 고사리에 대하여 정갈스러움과 남모를 정취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고사리를 많이 먹었다. 북한지방에서는 “고사리는 귀신도 좋아 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고사리를 많이 애용했다는 뜻이리라. 추운지방일수록 고사리를 말려서 저장해 두면 그 효용가치가 더 컸을 것이다. 때문에 고사리는 조상의 제사상에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으로 정착 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면 향을 피워 조상의 혼령을 불러들인 후 모사접시에 얹은 고사리에 술을 부어 지하의 혼백에게 알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러한 예법이 고사리를 상용했던 습관에서 유래 되었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고사리를 꺾으러 산야를 누볐다. 학교에서 야외수업삼아 단체로 고사리를 꺾으러 가기도 하였다. 배고프고 춥던 시절이라 점심을 굶는 학생들에게 고사리라도 꺾어다가 식량에 보태라는 처사였는지 모르겠다. 제주도의 한라산 중산간지 산야에는 온통 고사리 군락지였다. 마대 하나씩 울러 메고 고사리 밭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고사리 꺾는 날은 날씨가 포근하여 야외소풍이나 마찬가지였다. 밟히는 것이 고사리지만은 먹을 수 있는 고사리는 눈여겨보아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사리가 커서 잎이 펼쳐져 버리면 세어서 먹을 수 없다. 아직 덜 세어서 먹을 수 있는 부분만 채취해야하니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찾아 헤매었다.
고사리를 한 포대 짊어지고 집에 와서 펼쳐 놓으면 대청마루가 그득하였다. 비가 내려서 밖에 내다널지 못하면 집안 전체가 고사리로 이불을 펴놓은 듯하였다. 이 때 고사리반찬을 참 많이 먹었다. 말리기 전 푸른색의 고사리를 삶으면 아주 부드러워진다. 색깔도 푸른빛을 띄우고 있어 매우 정갈하게 보인다. 이것을 나물로 무쳐 먹으면 맛이 별미였다.
이 때 고사리 범벅이란 것을 먹어보았다. 범벅이란 가루로 풀죽을 쑤어서 거기에 야채를 넣어 비빈 것이다. 제주 아낙네들이 밭에서 종일 일하고 와서 저녁 늦게 저녁밥을 준비하려니 힘들고 피곤하였다. 그래서 단시간 내에 요기할 수 있도록 개발한 음식이다. 보통 보릿가루를 이용하였으며 때로는 메밀가루를 사용하여 된 죽을 만들었다. 여기에 뭉근히 삶은 고사리를 섞어 넣어 비비면 고사리 범벅이 되었다. 맛은 별로여서 가난했던 시절에 먹었던 별미정도로 기억될 뿐이다.
내가 대학생시절이었다. 소의 고사리 중독에 대하여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접한 일이 있었다. 소가 고사리를 먹고 사고를 당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그 후 고사리에 독성이 있어서 생으로 섭취하면 빈혈증을 일으켜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야생동물은 독성이 있는 식물을 기피하는 예지능력이 있다. 신토불이의 개념은 사람보다 동물세계에 더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토종 한우들도 이러한 예지능력이 있어서 고사리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에서 도입한 소들이 고사리를 먹고 탈을 일으켰다.
겨울철이 지나면 봄비가 촉촉이 내려 대지를 적셔준다. 그 중 가장 먼저 내리는 비가 고사리마라 했다. 비 내린 후 가장 먼저 돋아나는 것이 고사리 순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 탄 자리에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고사리의 새 순은 그 모습이 어린애의 여린 손과 비슷하다. 이른 봄 방목지에서 풀이 모자라 허기진 소들은 이 어린 순을 뜯어먹고 사고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고사리는 독성을 제거하고 먹어야한다. 고사리를 푹 삶아 줌으로써 이러한 독성들이 파괴되고 쓴맛이 빠져나간다. 이러한 지혜를 우리 선친들이 일찍 터득했으니 이 또한 감탄할 일이다.
고사리는 그 독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한방에서는 성질이 차가운 음식으로 분류하였다. 찬 음식은 양기를 빼앗는다. 그래서 고사리를 먹으면 정력이 감퇴된다는 속설이 있다. 「본초습유」라는 고서에서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양기가 사라지고, 백이와 숙제는고사리를 먹고 요절하였다”라고 적고 있으니 빈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절집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고사리가 안성맞춤인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요새는 고사리가 강장식품으로 등장하였다. 내재한 영양소가 소개되고 각종 요리법이 개발되었다. 또한 고사리를 인위적으로 재배하여 생산하고 판매한다. 고사리는 좀 더 가까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한라산 기슭에는 고사리가 산재해있어 아낙내들이 고사리를 꺾으러 간다고 들었다. 봄나물은 처녀들이 나서서 캐어야 제 맛이 나는지 모르지만 한라산 고사리는 할머니들이 손을 거쳐야 진가가 나타난다. 고사리를 삶고 말려서 정성으로 잘 다듬어 두었다가 조상님 제사상에 올리라고 도시에 사는 자녀들에게 전해준다. 나의 어머니도 살아계셨을 때 그랬다. 요새는 연로하신 장모님이 말린 고사리를 보내준다. 말린 고사리를 물에 불리면 열배정도는 부풀어 오른다. 받을 때는 하찮게 보이지만 먹을 때 더 큰 고마움을 갖게 해준다.
얼마 전 고향집을 방문하였다. 이웃 할머니가 말린 고사리를 한 움큼 비닐에 싸서 주었다. 귀한 선물이었다. 사실 고사리에 특별한 맛이나 독특한 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고향의 맛과 인정의 향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옛날에는 충과 의가 담겨 있은 상징물이었고 지금은 효와 정이 보태어졌으니 그 맛과 향이 더 그윽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첫댓글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