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지난 한 세기동안 일제 식민지, 해방, 美軍政, 6.25 동족전쟁, 박정희 5.16 군사정변, 연인원 35만여명의 베트남 전쟁 참전, 초고속 경제성장,전두환 新軍部 12.12 정변, IMF 경제위기, 해방이래 최초의 두번의 진보정권 집권 등 무지막지한 사회 변동을 겪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急變한 나라로 꼽힌다.
특히 정신 세계(가치규범)의 급변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일제에 의해 역사와 전통이 짓밟히는 한편 나라 패망의 요인을 조선(봉건)국가 탓으로 돌리면서 우리 스스로도 역사와 전통을 짓밟았다. 안팎으로 자신을 부정당하며 살아왔기에 오로지 삶의 목표(살 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거나 성공(출세)하는 것이었다.
자기 역사와 전통이 부정되면 대체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 때 미국이 등장했다. 남한은 해방 직후 美軍政 지배와 더불어 미국의 6.25 전쟁 지원과 산업화 지원 등을 거치며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았다. 영어는 성공의 언어가 되었고 한 때 권력의 향방도 미국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기업은 미국에 수출해야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 유학은 출세와 성공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미국문화는 선진문명으로 인식되었고 미국 것은 모두 좋고 옳은 것으로 인정되어 따라야 하였다. 바야흐로 겉으로는 미국 것이 가치관, 세계관을 비롯해 일상적인 삶에서 한국 사회의 잣대와 표준이 되었다.
문제는 겉과 속이 다른 한국 사회의 이중성이다. 즉 겉으로는 미국식을 명분으로 내세워 놓고 쫓아 가는 듯 했으나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사회는 절차와 수단에 있어서 법치주의를 엄격히 준수하고, 사회적 관계가 연고가 아닌 합리적인 실력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또한 공정한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같이 맞물려 함께 작동하는 사회이다.
반면에 한국사회는 앞서 언급했듯이 식민지, 좌·우 대결, 전쟁, 쿠데타 등 급변의 시대를 겪으면서 오로지 「생존」에 매달려야 했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이라는 절박한 명제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즉 탈법,불법,위법,초법적인 일탈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탈행위를 불사한 물신주의와 출세(성공)지상주의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되었다. 우리나라 고교생의 56%가 '10억원을 벌 수 있으면 1년간의 감옥생활도 감수할 수 있다'는 조사(2015년)는 기가막힌 생생한 사례이다.
이로부터 정당성 유무와 상관없이 强者에겐 무조건 숙이고 弱者에겐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處身)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일종의 ‘弱肉强食’의 행태인데 이 역시 한국 사회의 생존방식의 이중성이다.
정당한 절차와 과정은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사치스러웠다. 목적(목표)만 달성하면 사후에 얼마든지 정당성을 인정받는데 뭐하러 번거롭게 절차와 수단을 지키는냐이다. 쿠데타로 정치권력을 찬탈하고, 정경유착으로 재벌이 되고, 연고와 뇌물로 자리를 차지하거나 승진하고, 표절로 학위를 받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에서 드러났듯이 각종의 일탈행위에 대해선 ‘관행’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받는 사회가 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극심했던 조선 후기 이래 일제 식민지, 미군정 지배, 분단, 전쟁, 쿠데타,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이러한 삶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생활화되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각종의 ‘갑질’ 행태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한국 사회의 이중성(强者에게 弱하고 弱者에겐 强한 : 弱肉强食)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역사와 관행이 쌓여 한국사회가 드디어는 갑질을 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마저 ‘갑질’에 나서는 사회가 되었다. 사회 공동체 유지를 위한 기초질서나 공동체 규범들을 무시하거나 짓밣는 방식이다.
비근한 예로는 주·정차를 비롯한 교통·운전문화이다. 또한 대형 마트에서 다른 사람의 통행은 아랑곳 하지 않고 카트를 제멋대로 두는 행태도 그렇다.
이들은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 또는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야!’며 항변하지만 공동체 규범 준수와 유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역시 또 다른 모습의 ‘갑질’ 행위다. 한국 사회는 온통 弱肉强食의 ‘갑질’문화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유달리 탈락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안전망이 부실한 것도 이 弱肉强食의 ‘갑질’문화가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최저임금을 비롯해 (복지)안전망 확충에 대한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낯선 것에 대한 배타적 본능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낳고, 이것이 다시 편견과 차별을 낳는다. ...(장애인) 특수학교와 관련된 님비 현상은 다시 발생하고 장애인의 상처는 반복될 것이다.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되면서 상처는 더해 간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에 대한 폭력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만하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애환에 귀 기울이고, 야만을 넘어 성숙한 공존사회로 가기 위한 로드맵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중앙일보 2017.08.10. 김기현 서울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 방문 후 “탈북학생과 기초수급가정 자녀 등 소외계층을 직접 살피겠다는 대통령의 뜻이 담겨 있다.”라는 청와대 관계자 설명을 인용한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A초교 학생 약 300명중 탈북자 가정과 기초수급가정 자녀는 200명 안팎이다. 얼마뒤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너 나온 곳이 그렇게 안 좋은 학교냐” 임대 주택 사는 애들이 다니는 학교다“는 등의 놀림과 비아냥거림이 인터넷 공간을 넘어 학생들을 향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졸업생마저 놀림감이 됐다. 학교에서 온 아이들은 울먹였다... (동아일보 2017.08.11.이지훈기자)
거듭 지적하지만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목적)를 달성하면 그것이 정당화되었던 해방 이래 한국사회의 「생존과 성공의 방정식」에서 비롯되었다. 불행히도 이는 ‘역사’면서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그 댓가는 혹독했다. 한국은 자살률 1위, 최악의 부정·부패국가, 공권력에 대한 최고의 불신 등을 비롯해 삶의 질이 전쟁 중인 나라보다도 못한 나라가 된 것이다. ‘헬(hell)조선’이라는 말이 상징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선진국 기준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과 나라의 ‘경제규모’만 크면 선진국인 줄 안다. 이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물신주의와 출세주의만을 조장시켰다. 따라서 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는 치명적인 自害행위이다.
...아마 길가는 대학생에게 '보수에 대한 생각은?'이라고 물으면 "부패·타락·갑질·무능"이라고 줄줄 나열하다가 잠깐 뜸을 들인 뒤 "불의와 결탁해 더 갖겠다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이고 한마디로 적폐 세력"이라고 답할지 모른다...
...지금 보수 정당에는 영혼과 가치는 다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허세스러운 입뿐이다. 과거에는 좌파가 실력 없이 말만 떠들어댄다고 했지만, 요즘 보수 정당이 하는 꼴은 더 목불인견이다. 보수의 체면과 품격도 없고 심지어 치졸하기까지 하다. (조선일보 2017.08.11. 최보식 선임기자)
그동안 정치권력과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 기득권층들은 입만 열면 ‘경제성장’타령을 해왔다. 경제성장을 통해 1인당 국민소득과 나라의 ‘경제규모’만 커지면 마치 선진국인 것처럼 환상을 불어 넣어왔다. 역사와 전통에 기반한 공동체 규범과 정체성이 무너지고 짓밟히는 실태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무시해 왔다. 아니 오히려 앞장서 조장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의 과실은 그들 몫이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과 댓가는 국민 몫이었다. 사회 양극화가 그것이다. 이 경제성장 과실의 수혜자로서 또다른 기득권층이 (교수)학계와 (보수) 주류 언론계 집단이다.
이들은 전문가, 지식인으로 행세하는데 사실 한국 사회의 전문가,지식인 집단은 그 말을 갖다 붙이기조차 민망하다. 전문가니 지식인입네 하면서 한국 사회문제를 공론화하거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등의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이들은 부끄러움(恥)조차 없다(외면하는지, 無知한지?).
느리고 확실한 대학의 죽음
... 대학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교수들이 무관심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자 장기적인 비전도 책임도 없는 허식적 권위만 존재하는 곳이 됐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물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학들이 매우 느리고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누구도 대학이 꿈과 지식을 새로 만들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가꾸는 자유와 고독의 공간이라는 점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은 이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중앙일보 2017.08.09.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
경제성장으로부터 충분히 자기 몫을 챙긴 이들은 매체와 지위(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기득권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들은 자기들끼리만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자신들을 ‘論客’ 또는 ‘碩學’이라고 포장한다. 이들에게 [무너진 사회 공동체 규범 회복]이나 [짓밣히고 잃어버린 정체성 재정립] 그리고 [공권력 불신과 사회적 신뢰 복원] 등의 과제는 소귀에 經읽기인가?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經言유착의 사례가 주간지 '시사 인(2017.08.09)'과 '미디어 오늘(2017.07.27~08.16)'에 보도되었다. 언론사 고위 간부들과 삼성 관계자가 장충기 사장(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책임자)에게 보낸 휴대폰 문자메시지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장충기를 수사하고 기소한 특검을 통해 공개되었다.
언론 본연의 길을 포기한 언론인의 행태도 문제지만 언론 뿐만 아니라 삼성이 한국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정당화되는' 가치관을 앞장서 조장해 왔다는 점에서 삼성의 본말 顚倒 행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