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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삼물음」 이항복
[ 三物吟 李恒福 ]
「鼠(서)」
廁鼠數驚社鼠疑(측서수경사서의) 측간 쥐는 자주 놀라고 사당 쥐는 의심이 많아
安身未若官倉嬉(안신미약관창희) 안전하긴 관아의 창고에서 즐겁게 노닒만 못하리
志須滿腹更無事(지수만복갱무사) 뜻은 배불리 먹고 또 무사하길 바라지만
地塌天傾身始危(지탑천경신시위) 땅 꺼지고 하늘 기울면 제 몸도 위태로워진다네
〈감상〉
이 시는 올빼미·쥐·매미를 읊은 시 가운데 쥐를 노래한 것으로, 세태를 풍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더러운 변소에 사는 쥐는 사람 때문에 자주 놀라고 깨끗한 사당에 사는 쥐는 의심이 많아서 불안하기는 똑같다. 이들에 비해 몸을 안전히 하기는 관아의 창고에서 즐겁게 노닒만 못하다. 관아 창고에 있는 쥐의 마음은 배불리 먹고 또 무사하길 바라지만, 땅이 꺼지고 하늘이 기울면, 즉 관아의 창고가 무너지면 제 몸도 위태로워진다.
변소에 사는 쥐는 초야(草野)에 은거한 사람으로, 사당에 사는 쥐는 임금 곁에서 아첨하는 신하로, 관청 창고에 사는 쥐는 벼슬살이하는 사람으로 의인화(擬人化)했다고 본다면, 초야에 은거하거나 임금 곁에서 아첨하기보다는 벼슬살이 하는 것이 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이 완전한 곳은 아니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그곳도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일 것이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으로 말하면,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에서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물며 한 몸에 겸하였음에랴. 세상에 전하는 우스개들이 꼭 모두 백사의 일은 아니겠지만, 나라 안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아끼고 사모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宣祖)가 파천(播遷)하던 날 밤 궁궐을 지키는 위사(衛士)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혼자서 손수 횃불을 들고 앞에서 상을 내전으로 인도하였고, 내부(內附)의 의논이 결정되자 개연히 호종(扈從)하겠다고 자청한 사람은 공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데 ‘나라가 전복되는 위기에서 참된 신하를 안다.’는 말은 백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는가.
「철령가(鐵嶺歌)」 중에서, ‘누가 고신(孤臣)의 원통한 눈물을 가져다가 구중궁궐에 뿌려 줄까?’라고 한 구절은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게 한다. 참으로 충의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백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李白沙德望事功文章節槩(이백사덕망사공문장절개) 得其一而猶可爲賢宰相(득기일이유가위현재상) 又况以一人而兼有之乎(우황이일인이겸유지호) 世所傳諧調之談(세소전해조지담) 未必盡是白沙之事(미필진시백사지사)
而都人士女之至今愛慕(이도인사녀지지금애모) 有足以想像也(유족이상상야) 去邠之夕(거빈지석) 衛士盡散(위사진산) 而獨自執燭(이독자집촉) 前導內殿(전도내전) 及夫內附之議決(급부내부지의결) 而慨然請從(이개연청종) 亦此一人耳(역차일인이) 當時之事(당시지사) 思之於邑(사지어읍) 而板蕩識誠臣者(이판탕식성신자) 非白沙之謂歟(비백사지위여) 如鐵嶺歌中(여철령가중) 誰將孤臣怨淚(수장고신원루) 灑入九重宮闕云云(쇄입구중궁궐운운) 聽來不覺潸然(청래불각산연) 苟非忠義之卓越(구비충의지탁월) 何能感人於百載之下也(하능감인어백재지하야)).”
〈주석〉
〖廁〗 뒷간 측, 〖社鼠(사서)〗 사당에 사는 쥐는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없으므로, 전하여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신(姦臣)을 비유함. 〖倉〗 곳집 창, 〖嬉〗 즐거워하다 희, 〖須〗 바라다 수, 〖塌〗 무너지다 탑
「鴟(치)」
側頭伺隙掠人飛(측두사극략인비) 머리 돌려 틈을 엿보다가 사람을 약탈하여 날아가고
飽滿盤天誰識汝(포만반천수식여) 배부르면 하늘을 빙빙 도니 누가 너를 알리오
時同鸞鵠恣遊嬉(시동란곡자유희) 때로는 난새나 고니와도 방자히 유희하지만
只是中心在腐鼠(지시중심재부서) 오로지 속마음에는 썩은 쥐만 있다오
〈감상〉
이 시는 올빼미를 간신(奸臣)에 비유하여, 간신의 무리들을 풍자한 것이다.
올빼미는 머리를 돌려 틈을 엿보다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약탈하여 날아간다. 약탈한 것으로 배가 부르면 하늘을 빙빙 돌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니, 누가 너의 그런 약탈 행위를 알겠는가? 때로는 영조(靈鳥)인 난새나 고니와도 방자히 유희하면서 그들의 무리인 것처럼 꾸미지만(난새와 고니는 간신에 대비되는 충신형(忠信形) 인물을 비유), 오로지 속마음에는 썩은 쥐만 생각한다(썩은 쥐는 간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물임).
〈주석〉
〖鴟〗 올빼미 치, 〖伺〗 엿보다 사, 〖掠〗 노략질하다 략, 〖盤〗 돌다 반, 〖鸞〗 난새(봉황(鳳凰)의 일종) 란,
〖恣〗 방자하다 자, 〖只是(지시)〗 단지.
「蟬(선)」
只向涼霄飮秋露(향량소음추) 단지 서늘한 하늘에서 가을 이슬만 마시고
不同群鳥競高枝(부동군조경고지) 뭇 새들과 함께 높은 가지 다투지 않는구나
傳語螳蜋莫追捕(전어당랑막추포) 말 전하노니, 사마귀야 매미를 잡지 말라
人間何物不眞癡(인간하물부진치) 인간의 그 무엇보다 진짜 바보가 아니더냐
〈감상〉
이 시는 매미를 노래한 것이다.
매미는 단지 서늘한 하늘에서 가을 이슬만 마시면서 먹이를 다투지 않고, 뭇 새들과 함께 높은 가지에 자리를 잡고자 다투지도 않는다. 그러니 사마귀야 매미를 잡지 마라(매미는 선량한 관리를 의인화했다면, 사마귀는 선량한 관리를 괴롭히는 악독한 관리를 의인화한 것임). 인간세상의 그 무엇보다 진짜 바보가 아니더냐?
〈주석〉
〖蟬〗 매미 선, 〖霄〗 하늘 소, 〖螳螂(당랑)〗 사마귀. 〖螳螂捕蟬(당랑포선)〗 사마귀가 매미를 잡는다는 것으로, 한(漢)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정간(正諫)』에, “園中有樹(원중유수) 其上有蟬(기상유선) 蟬高居悲鳴飮露(선고거비명음로) 不知螳螂在其後也(부지당랑재기후야) 螳螂委身曲附欲取蟬(당랑위신곡부욕취선) 而不知黃雀在其傍也(이부지황작재기방)”라는 말이 보임. 〖癡〗 어리석다 치
각주
1 이항복(李恒福, 1556, 명종 11~1618, 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상을 당한 후라 병약했기 때문에 낙태하려고 독극물을 먹었으나 무사히 태어났고, 8세에 당시(唐詩) 절구(絶句)를 이해하여 부친에게 시를 지어 드렸다고 한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 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 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成渾)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북인(北人)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살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곡구김화상구우양주지산중 인일모류숙 천명출산」 권필
[ 哭具金化喪柩于楊州之山中 因日暮留宿 天明出山 權韠 ]
幽明相接杳無因(유명상접묘무인)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도 아득해 만날 길이 없더니
一夢殷勤未是眞(일몽은근미시진) 꿈속에서 은근히 만났지만 진실이 아니겠지
掩淚出山尋去路(엄루출산심거로) 눈물 닦으며 산을 나와 갈 길을 찾으니
曉鶯啼送獨歸人(효앵제송독귀인) 새벽 꾀꼬리 울며 홀로 가는 사람 전송하네
〈감상〉
이 시는 양주의 산속에서 구김화의 관 앞에 통곡하고 날이 저물어 머물러 잔 뒤 다음 날 아침에 산을 나서며 지은 시이다.
김화현감으로 있던 벗인 구용이 죽자, 권필이 양주의 장지까지 따라갔다가 날이 저물어 유숙(留宿)하게 되었다. 우정이 돈독해 저승으로 간 친구를 만나고 싶지만 통할 길이 없더니, 그날 밤 꿈에 구용이 나타났는데, 실물은 아니겠지? 눈물을 흘리며 산을 내려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새벽 꾀꼬리가 구용의 넋이라도 되는 것처럼 홀로 가는 권필을 전송해 주고 있다.
〈주석〉
〖具金化(구김화)〗 구용(具容, 1569~1601)으로, 자는 대수(大受)이고 호는 죽창(竹窓)·죽수(竹樹)·저도(楮島)이며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금화현감에 부임하였으므로 이렇게 불렀음. 시를 잘 지어 명성이 높았으며, 권필(權韠), 이안눌(李安訥)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1598년(선조 31) 김화현감에 부임하였는데, 3년 후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음.
〖柩〗 널 구, 〖杳〗 아득하다 묘,
〖曉鶯啼送獨歸人〗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 베는 소리 쩡쩡 울리거늘, 새 우는 소리 꾀꼴꾀꼴 들리도다. ······꾀꼴꾀꼴 꾀꼬리 울음이여, 벗을 찾는 소리로다. 저 새를 보건대 오히려 벗을 찾아 우는데, 하물며 사람이 벗을 찾지 않는단 말인가〖伐木丁丁(벌목정정) 鳥鳴嚶嚶(조명앵앵) ······嚶其鳴矣(앵기명의) 求其友聲(구기우성) 相彼鳥矣(상피조의) 猶求友聲(유구우성) 矧伊人矣(신이인의) 不求友生(불구우생)〗.” 하였음.
각주
1 권필(權韠, 1569, 선조 2~1612, 광해군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대대로 문한(文翰)을 업으로 삼아 온 전형적인 문인 집안(9대조가 권부(權溥), 6대조가 권근(權近), 부친은 권벽(權擘))에 태어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다.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江華)에 있을 때 명성을 듣고 몰려온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나라의 대문장가 고천준(顧天俊)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쳤다. 광해군(光海君)의 비(妃) 유씨(柳氏)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는데,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가 지었다는 문장이 나와 친국(親鞠)받은 뒤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다다랐을 때 행인들이 주는 동정술을 폭음하고 그 다음 날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전한다.
「채련곡」 허난설헌
[ 采蓮曲 許蘭雪軒 ]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란주)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네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련자) 임을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 동안 부끄러웠네
〈감상〉
이 시는 연밥을 따며 부른 노래로, 애정의 표현이 파격적(破格的)이면서도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가을날 호수가 얼마나 깨끗한지 푸른 옥이 흐르는 듯하다. 호수 중에서 연꽃이 많이 핀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고 남자 친구를 만나려고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진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발각되어 낯이 뜨거워 어쩔 줄 모른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허난설헌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訥齋祥(이박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주석〉
〖蘭舟(란주)〗 목란주(木蘭舟)로 작은 배의 미칭(美稱). 〖遙〗 멀다 요
각주
1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 18~1589, 선조 22):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여동생이며, 균(筠)의 누나이다.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 한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집안과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배 속의 아이마저 유산했다.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許筠)도 귀양 가 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 213수가 전하며, 그중 신선시(神仙詩)가 128수이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神仙詩)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후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시를 보여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갈역잡영」 백칠십륙수 김창흡
[ 葛驛雜詠 百七十六首 金昌翕 ]
其一(기일)
尋常飯後出荊扉(심상반후출형비) 늘 밥 먹은 뒤 사립문을 나서면
輒有相隨粉蝶飛(첩유상수분접비) 그때마다 날아 나를 따르는 나비가 있네
穿過麻田迤麥壠(천과마전이맥롱) 삼밭을 뚫고 보리밭 둑 꼬불꼬불 걸어가니
草花芒刺易罥衣(초화망자역견의) 풀과 꽃의 가시가 쉽게 옷에 걸리네
〈주석〉
〖尋常(심상)〗 평시, 보통. 〖荊扉(형비)〗 사립문. 〖粉蝶(분접)〗 =호접(蝴蝶): 나비의 일종. 〖穿〗 뚫다 천,
〖迤〗 굽다 이, 〖壟〗 언덕 롱, 〖芒〗 까끄라기 망, 〖刺〗 가시 자, 〖罥〗 옭다 견
其百五十五(기백오십오)
風鞭電屐略靑丘(풍편전극략청구) 바람 채찍과 우레 신발로 조선을 둘러보아
北走南翔鵬路周(북주남상붕로주) 북쪽으로 달리고 남쪽으로 날아 두루 구만 리를 다녔네
收得衰軀歸掩戶(수득쇠구귀엄호) 쇠잔한 몸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으니
不知何物在心頭(부지하물재심두) 무엇이 마음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
〈주석〉
〖鞭〗 채찍 편, 〖屐〗 나막신 극, 〖略〗 둘러보다 략, 〖靑丘(청구)〗 우리나라. 〖翔〗 날다 상, 〖鵬路(붕로)〗 붕새는 한 번 날면 구만 리를 난다고 함(『장자(莊子)·소요유(逍遙游)』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摶扶搖而上者九萬里”). 〖掩〗 닫다 엄, 〖心頭(심두)〗 마음.
〈감상〉
이 시는 김창흡이 설악산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64세 때 다시 함경도로 여행을 나섰는데, 그때 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갈역잡영」으로, 위의 시는 그중의 일부분이다.
늘 하는 일로 밥을 먹고 사립문을 나서면, 나비가 날아와 자신을 따라서 난다. 삼밭을 뚫고서 지나가고 꼬불꼬불 이어진 보리밭 둑을 걸어서 가다 보니, 온갖 풀들에 돋은 가시가 옷에 자꾸만 달라붙는다.
바람을 채찍으로 삼고 우레를 신발로 삼아 조선을 돌아다녀, 북쪽으로 달리고 남쪽으로 날아 붕(鵬)이 구만 리를 날아오르듯 천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제 쇠잔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닫아거니, 마음에 남은 미련이 하나도 없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삼연지시(三淵之詩) 불단근고무차격(不但近古無此格) 수측중국명가(雖廁中國名家) 상혹무괴(想或無媿)).” “농암(農巖)의 시문(詩文)은 고아하면서도 깨끗하고, 삼연(三淵)의 시문은 맑으면서도 고고(枯槁)하니, 삼연이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끝내 초야에서 생을 마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農巖之詩文(농암지시문) 雅而潔(아이결) 三淵之詩文(삼연지시문) 淸而枯(청이고) 三淵以富貴家子弟(삼연이부귀가자제) 終身於林麓者(종신어림록자) 良有所以(양유소이)).”라 극찬(極讚)하면서 동시에, “근세에 시를 말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고(故)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을 꼽는데, 나는 그의 시가 치세(治世)의 음(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순전히 침울해하고 고뇌하는 뜻을 담은 시여서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빈천한 처지의 사람과 같은 작품을 짓되 본디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한 점이 있었으니, 후생 소년들은 절대로 본받거나 배우지 말아야 한다(近世言詩者(근세언시자) 輒推故處士金昌翕(첩추고처사김창흡) 而予則以爲非治世之音(이여칙이위비치세지음) 其所謂膾炙人口者(기소위회자인구자) 純是沈鬱牢騷意態(순시침울뢰소의태) 絶無沖和平淡氣象(절무충화평담기상) 以鐘鼎子弟(이종정자제) 作窮廬口氣(작궁려구기) 固若有不期然而然(고약유불기연이연) 而後生少年(이후생소년) 切不宜倣學(절불의방학)).”라 하여, 치세(治世)의 음(音)이 아니라고 비평하고 있다.
각주
1 김창흡(金昌翕, 1653, 효종 4~1722, 경종 2):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도(道)를 행하는 데 힘썼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죽었다.
「패강가」 십수 임제
[ 浿江歌 十首 林悌 ]
其六(기륙)
浿江兒女踏春陽(패강아녀답춘양) 대동강의 계집아이 봄볕에 거니노라니
江上垂楊政斷腸(강상수양정단장) 강 위에 드리운 버들에 정말 애간장이 끊어지네
無限煙絲若可織(무한연사약가직) “한없는 가는 버들가지로 만약 베를 짤 수 있다면
爲君裁作舞衣裳(위군재작무의상) 임을 위해 춤출 옷을 짓고 싶네요”
〈감상〉
이 시는 16세기 후반의 시단(詩壇)을 풍미했던 임제(林悌)가 1583년 평안도 도사였을 때 대동강에 나가 놀면서 지은 시이다.
봄이라 대동강에 처녀들이 봄나들이를 나와 대동강을 따라 거닐고 있자니, 대동강물 위로 드리운 버들에 춘심(春心)이 녹아 애간장이 끊어지고 있다. 이때 처녀들은 남자들을 유혹하려는 듯이 “만약 저 끝없이 펼쳐진 가는 버들가지로 베를 짤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임을 위해 춤출 옷을 짓고 싶어요.”라고 노래하고 있다.
신흠(申欽)은 『청창연담』에서 이 시에 대해 “자순 임제는 호기(豪氣)가 있고 시에 능하다. 일찍이 「패강곡」 10수를 지었는데, 그 한 수에서 이르기를, ······라 하였다. 시어가 매우 곱고 화려한데, 이것은 아마 두목(杜牧)에게서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林悌子順(임제자순) 有豪氣(유호기) 能詩(능시) 嘗著浿江曲十首(상저패강곡십수) 其一曰(기일왈) ······語甚艶麗(어심염려) 蓋學樊川者也(개학번천자야)).”라 평하고 있다. 양경우(梁慶遇)도 『제호시화(霽湖詩話)』에서 “정랑 임제는 시를 지을 때 두목(杜牧)을 배워 명성이 한 시대에 떨쳤다(林正郞白湖悌(임정랑백호제) 爲詩學樊川(위시학번천) 名重一世(명중일세)).”라 하여, 두목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두목(杜牧)은 젊은 시절 검속하지 않은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 염정시(艶情詩)를 많이 지었다.
신흠(申欽)은 『상촌집(象村集)』 「백호시집발(白湖詩集跋)」에서, “내가 백사공과 더불어 백호를 논한 적이 자주 있었는데, 매양 그를 기남자라고 칭하였다. 시로 말하면 일찍이 훨씬 뛰어남을 인정치 않은 적이 없었다. 문단(文壇)의 맹주가 될 만한 자로 말하면 백호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뛰어난 재주가 중도에서 막혔으니,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欽與白沙公論白湖者數矣(흠여백사공론백호자수의) 每稱其奇男子(매칭기기남자) 如詩(여시) 則未嘗不退三舍而讓之(칙미상불퇴삼사이양지) 若建櫜登壇(약건고등단) 狎主夏盟(압주하맹) 則白湖其人(칙백호기인) 而惜薾雲之跡(이석이운지적) 中途而閼云(중도이알운) 玆不可不識(자불가불식)).”라 하여, 임제의 시재(詩才)를 칭탄(稱歎)하고 있다.
〈주석〉
〖浿江(패강)〗 대동강. 〖煙絲(연사)〗 가늘고 긴 버들가지.
각주
1 임제(林悌, 1549, 명종 4~1587, 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謙齋).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린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인 이이(李珥)·허균(許筠)·양사언(楊士彦)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 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적(肉談的)인 시를 지어 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朴彭年)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漢詩)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敍情詩)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