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일) 아침5시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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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기온9도. Grand Palace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지점인 신주꾸 도쿄도청에 이르니 벌써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버스에서 내려 탈의실을 찾으려했으나 건물들뿐이다. 하야트호텔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어 그곳에서 일행들과 옷차림을 점검하고 스트레칭을 가볍게 한 후 서울에서 가져온 1회용비닐우의를 두르다.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다시 군중들틈을 비집고 지정출발구역을 찾아야했다.
동아서울국제마라톤 광화문광장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동호인들의 스트레칭하는 모습 따위는 아예 찾아 볼 수도 없고 배동성씨의 구령에
따라 하는 워밍업스트레칭도 없다. 사람들이 모이면 줄을 세워 앞사람과 뒷사람의 어깨를 번갈아가며 주물러주는
이벤트는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64년 동경올림픽주경기장으로 사용된 요요기국립경기장이 출발장소였다면 사정은 조금더 나아지지 않았을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해본다.
올림픽개최도시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는 마라톤 못지않게 의미가 크지 않나 싶다. 이시하라 신따로 동경도지사는 동경시민이 주체가 된 국제수준의 마라톤축제를 꿈꾸었고 이제 4회째를 맞고 있지만 그 꿈은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축제를 마쓰리라고 한다. 마쓰리축제에는 지지미처럼 밀집된 군중이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걸친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즉 머리에 맨 하치마키(머리띠), 어깨에 두른 다스키(소매띠), 가랑이에 찬(훈도시)가 그것이다.
하치마키, 다스키, 훈도시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세가지 신기(神器)라고 이어령씨는 그의 저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지적한다.
꽉찬 군중속에서 나도 하치마키에 해당하는 러닝모를 쓰고 다스키에 걸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태극기와 휘마동
이름을 달고 훈도시격의 러닝팬츠를 입은 것이 흡사 일본의 전통마쓰라축제의 대열에 참가한 기분이다.
실제로 동경마라톤주로의 출발점부터 결승점까지 근5시간동안 42km구간의 동경주로는 러너들과 응원나온
관중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어령씨의 글을 또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은 개인을 집단이라는 틀속에
‘쓰메루’해서 그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쓰메루’는 꽉 죄어서 채운다’라는 일본말이다.
‘국화와 칼’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긴 루스 베네딕트는 그의 책에서 “일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쳤지만 그 어떤 변혁에도 결코 사회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 없이 한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온 나라”
임을 지적했다.
뿐만아니라 일본인들의 몸에 밴 예의범절은 ‘시츠케’라는 사회문화적 훈련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메이와쿠(弊)’정신과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온(恩)의 정신이
그 중심에 서 있고 일본의 전통처럼 내려온다고 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휘마동유니폼에는 김선기원장이 건네준 태극기휘장과 휘마동이라는 세글자외에 내 이름
석자가 크게 쓰여져 있다.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라면 나는 대한민국과 휘마동의 이름으로 뛰는 것이지 내 이름
석자를 내걸고 뛰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와(和),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신앙인 신도(神道), 일본인의 정신세계 선(禪)을 꿰뚫듯
갈파한 베네딕트의 글을 읽으며 한참 혼돈에 빠졌던 기억을 되살려본다. 일제식민통치와 한국전쟁으로 갈라지고
풍지박산난 우리의 도덕률이 홍익인간의 중심인 인본(人本)의 품안에 품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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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마라톤에서 처음으로 나를 충격에 몰아넣은 것은 뛰는 와중에서도 러너들이 소변을 보기위해 화장실 앞에서 길다라게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지난대회 때 임시화장실 역할을 했다고
전해들은 터널벽은 방호라인이 설치돼 아예 소변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10km쯤지나자 히비야공원의 솔밭을 지나는데
어느 누구도 설치된 줄을 넘어가 녹지에 소변을 보지 않았다.
펜스 줄은 코스전역에 설치된 듯싶었다.
그러나 의문이 뒤 따랐다. 대회주최측이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간이화장실을 왜 설치해 놓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사람들은 동경마라톤에 대해 참가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기에 선(禪)을 수행하듯 그 고통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히비야공원에서 남쪽으로 시나가와(品川)까지 15km지점. 비는 주룩주룩 그칠 기미가 없다. 러닝화속의 양말이 흠뻑 젖은 것이 느낌이 별로다. 급수대시설과 음료들은 러너들의 편의를 충족
시키기에 충분했고 종이컾과 찌꺼기 수거용 비닐통 말고도 봉사
요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받아 처리해주는데 젊은 봉사요원 못지
않게 나이든 어르신들이 웃으며 봉사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본인 특유의 친절과 호의로 동경올림픽이 스마일
올림피아드라는 호칭을 얻게 된 이유가 쉽게 수긍이 간다.
20km구간을 지나니 빗줄기도 가늘어진다. 우의를 벗어 봉사요원에 건넸다. 혹시 많이 퍼부을지도 모를 빗줄기가 염려되었으나 일단 벗어던지니 홀가분하다. 감바레, 화이토를 외쳐대는 응원나온 시민들사이로 격려의 글씨들…樂走. 樂런, 激走, 스마일 등이 씌어진 피켓과 플라카드들이 보인다. 격주는 말처럼 힘차게 뛰라는 격려의 메시지인가보다.
어느 순간인지 오른쪽 엄지발가락에서 물집이 고였으니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제 겨우 반환점을 조금
지났는데 물집과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는가 보다. 한참을 지나는데 왠 사람이 어르신이라 부르며 인사를 건넨다.
한국인 울트라마라토너다. 한 손에 깃발을 들고 있는데 반전구호가 씌여 있다. 서울 중구청에 근무한다며 작년에
도 뛰었다고 한다. 물집이야기를 하니 운동화끈 윗부문이 느슨하다며 끈을 조여 매준다. 2-3km를 자연스레
동반주하는 과정에서 내 숨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즐기시며 뛰라는 말을 몇 번 건넨다. 激走 대신 樂走라지만
초반에 뒤쳐진 시간을 만회해야 한다.
달리는 내내 격려가 되었던 것은 출발지점부터 연도에는 많은 사람들의 응원이었다. 30km지점을 지나니
연도에 서 있는 분들이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러 가지 먹거리들, 사탕들과 오꼬시들,
차와 음료수들이다. 동경마라톤이라는 이름의 마쓰리축제가 절정에 무르익은 기분이다.
35km지점을 지났는데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천이 계속 뛰는 것이 마라톤을 즐기는 듯싶다.
어느 통계조사에 보면 세계에서 제일 빠른 국민이 일본사람이라고 한다. 일본인 중에 1위는 오사카시민으로
초속1.67미터, 2위가 도쿄시민으로 1.56미터이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파리시민들이 빠른데 1.46미터에
불과하단다. 쫒아가서 앞지르려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어딘지 마라톤과 닮은 것 같아 보인다.
결승점가까이에서 내 도착장면을 기념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카메라위치를 살폈으나 결승점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 물결에 개인촬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완주자들을 주최측에서 소개 이동시키지 않아
피니시라인부근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물품보관소에서 배낭을 찾아 탈의실로 들어가니 남녀구분 없는 거대한 강당같은 홀이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기념품으로 하나씩 받은 큰 수건의 가치가 이 홀에서 빛을 발한다. 젖은 속옷을 벗고 마른 속옷을
입기위해 수건을 허리에 둘러차야 했는데 동경마라톤에서 만큼은 이 수건이야말로 일본인들의 3가지
신기(神器)에서 추가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일본이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나라이듯 동경마라톤은 2박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나에게는 긴 시간이 되었다. 일본문화를 너무나 몰랐기에 뛰는 연습 말고도 빈 머리에 무언가를 ‘고메루’처럼 쑤셔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에서 문자수신음이 들려 내 기록인가 싶어 꺼내보니 외무부에서 보낸 일본해안지역의 해일발생
경보 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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