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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시 《생일 축하해》- 감상
“인간의 진정한 적은 일반화이다” - 체스라브 밀로즈, 폴란드 시인.
1.
시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문학 작품은 공산품이 아니므로 평가의 정당성에서 항상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작품 평가자들은 본인들만의 문학관이나 취향이나 미학적인 태도에 따라 출품작에 대한 당락을 가리게 될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심사위원들만의 시를 평가하는 구체적인 기준 지표(채점표)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 작품의 경우, 이미지와 비유(은유, 함축)가 들어 있으므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엉뚱하게 잘못 읽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 시인의 의도와 평가자(독자)의 파악(느낌)이 꼭 들어맞는다는 법도 없을 것이며, 귀신같이 어쩌다가 시인의 의도를 알아챘다고 해도 그러한 점을 칭찬하는 것 또한 우스운 것이다…. 매년마다 신춘 시즌이 돌아오면 문청 들은 신춘에 대한 열망 때문에 본인의 당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나의 경우 최근 몇 년 동안 신춘에 응모하지 않았다... 여하튼 이 지면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신춘에 대한 특히 시작품에 대한 평가의 정당성에 관련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문학 작품은 작품마다 고유성 혹은 독창성이 존재한다. 문학 작품은 다른 작품과 비교 대상이 아니라, 개별 작품 스스로 빛을 내거나 붕괴된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스스로 고유한(전통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양식이란 당대 사회 역사적인 반영이다. 대략 분류해 보자면 시의 경우 산문시, 무연시, 유연시의 경우가 되겠다. 그러니까 형식 면에서의 스타일(양식)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변화와 변용(원고지 매수)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을 것이다. 또한, 문학 작품은 보편적인 미학(진선미와 감동)을 추구하면서 완결성을 향해간다. 문학 작품(텍스트)은 완결성을 향해 갈 뿐, 신의 손으로 빚지 않는 이상,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성 때문에 작품은 끊임없이 수정해 나아가게 이른다. 물론, 이러한 개별 작품은 문학적 경험과 지성을 갖춘 소위 전문가(심사위원)가 판단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문학 신인은 저명한 심사위원들의 판별력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 투고하지 않거나 혼자만의 글쓰기를 즐긴다면, 굳이 본인의 작품을 투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위임받은 심판자들은 투고된 개별 문학작품을 감별하면서 형상화가 잘 됐느냐 안 되었느냐 혹은 미학적인 면을 갖췄느냐 하는 등등을 세밀하게 따져 당락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2.
투고자는 얼마든지 심사위원에 대한 투고자만의 문학적 견해를 밝힐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심사위원을 불신하거나 항의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행위가 가능할까? 문학 신인은 여러 가지 사안들로 인해 주눅이 들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 작품이 왜 낙방했는지, 어디가 잘 못 된 것인지, 누군가가 자세히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최종 심사 평가에서는 두루뭉술하게 혹은 모호하게 추상적으로 본선 작품만을 품평해 놓은 문장만을 확인하게 이른다...
3.
나는 연초, 조선일보의 신춘시 <생일 축하해> 작품을 보고 적이 실망하여, 그 당시 심정을 댓글로 비판적으로 적어봤었다... 댓글을 달면서 문우들과 감정상의 교류는 나만의 순수하고 정당한 문학적 행위이다. 사실상,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그 댓글로 인해 나의 견해가 촉발되었음을 밝혀둔다. 우선, 먼저 <생일 축하해> 에 대한 나만의 해설을 적어 본다.
《생일 축하해》 - 해설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 작중 화자인 <나>는 길을 걷다가 시선을 튼다. 그때 문득 작중 화자인 <나>는, 작중에서의 <당신>이 생각났다는 의미가 되겠다. 어쨌든, 의연 중에 <당신>이 생각났기 때문에 <나>는 신기하다거나 방향을 틀었기 때문에 신기하다거나 하여튼 <당신>이 생각났던 것은, 낯선 골목에서 마주쳤던 당신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에 <당신>이 늘 잠복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그만큼 <나>는 <당신>을 사랑했거나 좋아한다는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벽화의 의미를 찾아보자면
“벽화는 표면이 다듬어진 돌벽, 나무벽 따위에 직접 그리기도 하지만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리는 것이 보통이다...벽화의 또 다른 특징은 공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벽화 화가는 벽에 표현하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적절한 크기로 사회적· 종교적 또는 애국적인 주제를 회화적으로 고안해내야 한다.” -다음사전
- 위의 시구에서는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라고 독백조로 내뱉는다. 그래서 신기하단다. 당연히 신기 할만하다. 벽화라니! 여기서 벽화는 <당신>의 얼굴이 거대한 벽화 그림처럼 확대되어 나타났다거나, < 내> 마음속으로 오늘따라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거나, 거대한 벽화의 이미지로 나타났다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얼굴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첨언 하자면 <나>는 정신적으로 어떤 환기나 전환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이 시행에선 앞 행과 비교했을 때 <나>의 감정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사실상 이 행은 독립된 연으로 봐야 한다. “물이 자란다”는 표현은 치환됐다. “벽화, 물, 살아있구나, 돌아갈 시간이야”에서 서술된 시어들에서는 세월호가 연상되기도 한다. < 당신>이 물속에 있으므로 물 높이가 높아졌다는 의미로 풀어 볼 수도 있겠다. “표정을 거둘거니” 라는 표현에는 현재 <나>의 마음이 안 좋다는 뜻일 것이다. < 당신>의 얼굴에서 어느 땐가 <나>를 향해 보여줬던 <당신>의 기쁜 표정이거나 좋은 인상을 보여 줬다면 <내>가 거두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한데, 현재 <나>의 마음은 속상한 상태이다. < 당신>의 표정은 어둡거나 안 좋은 표정으로 <나>의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있기에….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 이 시행도 앞 행처럼 독립돼 있다고 보여진다. 과거의 누군가가 <나>에게 편지를 가져다 줬다. 한데 <나>는 편지를 받기 전에 어떤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일종의 부고나 사망 통지서 같은 것을 전해 받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을 예견했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이 시 전체적인 시어에서 주로 나타나는 종결어미는 “신기하지, 거둘거니, 사람이었지, 시간이야, 바랄게”와 같은 대화체인데 마치 독백하듯이, 고백하듯이 바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어조를 사용하고 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 <나>는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거나, 심적으로 압박감을 느꼈거나 감정을 자제해 오다가 어느 날, 감정을 폭발했더니... 이 시행은 바로 앞 시행과 <나>의 감정선이 연결되고 있다. “선언하다”는 공적기능이 잠재된 것으로 봐야 한다. 여러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표출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그리움이 점점 자라났거나 앞에 보이는 모든 “벽”은 <나>의 감정상태가 이입됐거나 “벽”과 <당신>을 동일시한다.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 <당신>에 대한 생존의 확인이나 아니면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나>의 과도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어떤 신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리라. “눈치”는 어떤 신호이거나 <나>의 마음속의 어떤 파동으로 볼 수도 있겠다.
문장의 바깥에 서서
-번역되지 않은 언어는 “문장 바깥에” 있는 거와 같다. 마치 번역되지 않은 언어는 외국어와 같다. 외국어는 소통이 잘 안되듯이, 문장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암시한다. 이른바 소외 되는 존재들이다. 즉, 이방인이다. 국외자 혹은 소외자로서 변방에 있는 자가 된다.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사람이었다는 의미는 같은 종족으로서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어떤 유대감, 동질성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열망이 깊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 귀우귀가 혹은 반본 환원.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다. 이 시행은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소통, 관계의 정상화가 잘 되었을 때 혹은 <나>와 <당신>과의 친밀한 관계였을 때를 회상.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함께 가꾸고 싶은 행복한 시간 혹은 공동체로써의 시간. 아쉬움을 나타냄.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 이 시행에서 <나>의 감정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감지된다. 세례. 즉, 물을 이용하는 정화의식이다. 온 일상이 < 당신>을 향해 사로잡혀 있다는 심정을 나타냄.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현재 복합적인 <나>의 감정이나 내면의 상황. 이 시행 또한 <당신>에 대한 <나>의 내면적인 감정을 게워 내고 있다.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 <당신>이 투명하다는 것은, <나>는 지금 혼탁한 속세에 있는데 <당신>은 저 너머, 먼 곳, 천상이나 피안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맑은 눈동자처럼 <당신>의 눈은 때가 묻지 않았다.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_ < 나>의 감정이 수시로 <당신>을 잊거나 망각하거나 생각이 안 날 때도 있다.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현재, < 나>는 어떤 경계(마음의 등 혹은 마음의 결절) 지점에, 있거나 마음의 벽을 쌓거나 예전엔 <당신>이 등 너머로 보였는데 이젠 <당신> 생각보다는, < 나>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각이 왔다…. 서서히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흘러내리다’는 세계 내 존재들에 대한 유한성을 표상한다고 봐야 한다. 흐름을 느끼는 존재들은 언젠가는 녹거나 사라진다는 것이리라. 일종의 대조함으로써 <당신>의 존재가 더 소중해진다는 것. 그리하여 <당신>은 죽음마저 초월한 존재로 상징화되었기에 젖지 않지. 혹은 <당신>은 영원히 <나>를 무감정 상태로 변화시켜 놓았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종교는 신성을 표상. 어떤 성스러운 곳에서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기일 축하해,
- <나>의 마음속에서 부유하는 <당신>을 이제 떠나보냈다. < 나>의 마음 정리가 일단락됐다는 의미. 홀가분한 <나>의 마음 상태일 수도. 드디어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저 먼 곳, 피안으로 보냈다. 그동안 <나>의 복잡한 심사가 어느 정도 정리됐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존재를 수시 때때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날에만, 기일 때만 <당신>을 떠오르겠다는 것.
#결론.
* 이 시에 대해 좋은 점.
작중 화자인 <나>의 마음속으로 감정이 들끓으면서 유동하고 있다. 시를 수미상관 형식으로 짜 놓았다. 생일로 시작해 기일로 끝을 냈다. < 나>의 마음속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의식의 흐름과 감정의 파고(波高)는 생기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나>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 당신>을 버리는 것도 <나>이며, < 당신>을 <내> 마음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도 <나>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당신이 죽어서 나는 너무 슬프다>이다. < 나>의 감정, < 나>의 내면을 생동하게 그렸다. 수미상관 구조로써, 입구가 생일이라는 감정의 들끓음이라면 기일은 감정의 가라앉음이다.
* 이 시에 대한 비판
작중 화자인<나>의 감정선이 일관성이 없고 들쑥날쑥 종잡을 수가 없다. 시행의 배치는 조화와 화음을 줘야 한다. 예술의 덕목 중에 조화는 제1 법칙에 해당하는 중요한 법칙임을 알아야 한다. 조화는 미를 향해 가는 전제 조건이다. 비유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애달픔이며 그리움인가? 신인이라면 사회 공동체를 향한 치열한 현장성이 담겨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중 화자인 <나>의 자아는 나약하기 그지없고, 안으로만 침잠하는 <나>. 소란스럽고 웅얼웅얼거리는 <나>에게서는 뒤통수를 때리는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위의 시에서 작중 화자인 <나>는 과거에 작중 속의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는 잘 파악이 안 되지만, 작중의 <당신>하고 어렴풋이 교감을 나누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신이 죽어서 나는 너무 슬프다>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화자의 감정처리가 감상적이라는 것이다. 화자가 자기 슬픈 감정을 에둘러서(치환해) 표현하기도 하지만, 전제적으로 보면 슬픔의 정조가 강하게 드러나게 때문에 독자는 아파(감동)할 틈새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른바 감정의 객관화와 독자와의 거리 조정 실패는, 시(텍스트)와 독자의 중간지대인 소통의 교류 지점이 상실돼 버린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가 있겠다. 또한, 전체적으로 너무 많이 봐온 관습화 된 서술방식(독백체)도 식상하였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대상이나 주제 의식에 대한 인식 상의 충격을 전혀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신인으로서 갖춰야할 덕목 중에 패기, 새로움(실험), 특히 ‘새로움’이 없었다.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점에서 독자로서 아쉬움이 있다. 신춘은 그 나름대로 신춘만의 상징성이 있다. 신춘에서 만큼은 도발적인 패기와 세상을(기존의 시를, 기존 신인들의 낡은 시 세계를) 전복하거나 혁파하려는 결기와 기상을 지녀야 한다. 또한 신춘 신인이라면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독특하거나 신선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독자는 시큰거리고 슬픔이 느껴져서 좋다는 말을 하지만(존중한다), 이 작품은 상황이 슬픈 것이지, 시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없었다. 우리는 더러 마음이 나약해질 때가 많아 이유 없이 슬퍼지는 마술에 걸리기도 한다.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시 당선을 축하한다.
* < 나> - 시의 화자. < 당신> - 화자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