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감리회 조선연회와 보아즈 감독
남감리회가 조선에 선교의 발을 내디딘 지 24년이 되는 1921년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 분포된 조선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둔 의미 있는 해였다. 이를 위하여 남다르게 헌신의 수고를 아기지 않았던 램버스 감독은 조선 땅 내국인만이 아니라 조선 밖의 조선인들에게도 복음의 지평을 펼쳤으니 그는 오래 동안 기억할 인물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별세하는 순간까지 주의 일을 했으니 그의 수고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겠지만 한국 감리교 역사 가운데서 그 후손들이 오래 동안 기억해야 할 귀한 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제2회 조선연회는 램버스 감독의 별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크램 선교사가 맡았지만 제3회 조선연회는 감독이 내한하여 주재했다. 그가 바로 보아즈 감독이다. 보아즈(보애시, Hiram Abiff Boaz) 감독은 1866년 12월 18일 켄터키 주 머레이에서 피터 보아즈(Peter Maddox Boaz)와 루이사 라이언(Louisa Ann yan) 사이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1887년에 샘휴스턴 일반연구원(Sam Houston Normal Institute) 졸업하고 1893년 사우스웨스턴 대학교에서 B.S 학위를, 1894년에는 M.A. 학위를 받았다. 보아즈는 샘휴스턴 일반학교(Sam Houston Normal School)에 다니면서 만난 캐리 브라운(Caroline Odalie Browne)과 1894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캐리는 감리교 설교 목사의 딸이었다. 보아즈는 카파 알파 교단(Kappa Alpha Order)의 회원이었다. 그는 감리교 목사가 되었고 포트워스, 애빌린, 더블린에서 목회했다.
1902년부터 1911년까지 폴리테크닉 칼리지의 총장을 지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매우 짧은 시간에 남감리교 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했으나 곧바로 1912년 폴리테크닉 대학(후에 택사스여자대학) 총장으로 복귀하여 5년을 더 일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켄터키 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감리회 교회확장 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보아즈 목사는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남감리교 대학교 총장으로 두 번째 부임하여 재직했다. 1922년 5월에 아칸소 핫스프링스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어 4년 동안 극동 아시아 지역 담당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극동 아시아 지역은 조선과 일본, 만주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보아즈 감독은 조선연회, 시베리아만주 선교회, 일본선교연회를 담당했다. 경성에 주택을 마련한 첫 번째 주재(駐在) 감독이었다.
보아즈 감독은 1922년 9월 12일~15일까지 개성 송도보통고등학교에서 개최된 제3회 남감리회 조선연회를 주재했다; 이 연회에서 교회진흥방침 위원회를 조직하여 전도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그해 10월 10일~12일까지 해삼위(海蔘威, 블라딕보스토크) 신축 예배당에서 개최된 제2회 남감리회 시베리아․만주 선교회를 주관하였다. 1922년 11월에 윤치호를 송도보통고등학교 교장으로 임명했고 1923년 5월에는 양주삼 목사를 시베리아 선교회 관리자로 임명했다. 그 후 보아즈 감독은 조선연회를 담당하는 책임 감독으로 재임했던 1925년까지 이렇게 두 개의 연회를 주관했다. 1923년 8월 30일~ 9월 3일까지 경성 수표교교회에서 개최된 제6회 조선연회, 그보다 먼저 1923년 7월 31일~8월 1일까지 북간도 용정에서 개최된 제3회 시베리아 만주 선교회를 주관했다. 제6회 조선연회에서는 1918년부터 추진했던 선교백주년기념사업을 전도국으로 넘기도록 결의했다. 1924년부터는 남북 감리회의 진흥방침위원들 중심으로 선교연합과 남부감리교회의 합동 운동을 추진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다. 또한 1924년 9월 5일~9일까지 개성중아교회에서 개최된 제7회 조선연회를 주재하며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양주삼 목사를 장로사로 임명하여 철원지방을 맡겼다. 1924년 9월 20일~22일까지 할얼빈시(哈彌濱市)에 있는 철령가(鐵嶺街) 선교사 주택에서 제4회 시베리아 만주 선교회가 개최하고 주관하였다.
1925년 4월 남감리회 조선선교 30주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고 9월 3일~8일까지 경성 종교교회에서 제8회 조선연회를 주재했다. 이 연회에서는 이수만, 한석원, 이호빈, 김종만, 노형근, 이기연, 전진규, 이경중, 홍병선, 남천우, 이관운에게 집사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다. 보아즈 감독이 조선연회 관리감독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목사 총 28명에게 안수례를 거행했다. 1925년 9월 22일~23일까지 만주 할얼빈에서 제5회 시베리아 만주 선교회를 주관했다. 보아즈 감독이 조선연회 관리 감독으로 4년 동안 있으면서 시베리아 만주선교를 추진한 것과 남북감리교회의 합동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6년 후를 이루도록 기반을 닦은 것이 감ㅈ독으로서 조선선교에 남긴 큰 업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남북 감리교회 합동의 협성신학교나 협성여자신하교를 적극 후원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보아즈 감독은 조선에서의 감독의 직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알칸사스(Arkansas), 오크라호마(Oklahoma), 텍사스(Texas)와 뉴멕시코(New Mexico) 주에서 감독직을 계속 이어갔다. 1938년 그이 나이 72세에 은퇴하고 남감리교 대학교와 남서부대학교의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프리매이슨이었다. 나중에 그는 힐크레스트 로지(Hillcrest Lodge)를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시켰다. 그는 그 당시 남감리교 대학교(SMU)의 길 건너편 힐크레스트가(Hillcrest Avenue)에 살았다. 보아즈 감독은 1962년 1월 2일 향년 96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스파크먼 힐크레스트(Sparkman Hillcrest)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서를 남겼다.
① Fundamentals of Success: Or, Making the Most of Life (1923)
② The Essentials of an Effective Ministry (1937)
③ The Thomas Boaz Family in American with Related Families.(1949)
④ Eighty-four Golden Years (1951)
말년의 보아즈 감독
원산을 방문한 보아스 감독 일행과 원산교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