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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3)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
현재의 구시가지(Old City) 성벽은 16세기에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1세가 축조하였다. 둘레 약 4㎞의 성벽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는데,
서쪽의 자파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문(Damascus Gate), 헤롯문(Herod's Gate), 새문(New Gate),
동쪽의 사자문(Lion's Gate, 스테파노문)과 황금문(Golden Gate, 미문),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와 시온문(Zion Gate) 이다.
▲ 예루살렘 구 도시로 들어가는 다마스쿠스 성문.
높은벽으로 둘러 쌓인 예루살렘 성에는 시대별로 다양한 성벽 유적이 남아 있다.
1. 자파문 (Jaffa Gate)
자파문은 예루살렘 성문 중에서 서쪽에 위치한 유일한 성문이다. 자파 문의 명칭은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에 있는 자파 항구로 이어지는 교역로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자파문은 아랍어로는 밥 알-칼릴(Bab al-Khalil)로 불린다. 자파문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문은 십자군 문이 있던 자리에 오스만터키의 술탄 술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 재위 1520-1566)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자파문의 오른쪽은 아르메니아 지구이며, 왼쪽은 기독교 지구이다. 자파문의 바로 오른쪽 옆에는 예루살렘의 수비를 위한 요새가 있으며, 보통 ‘다윗 망대(Tower of David)’로 불린다. 이는 B.C.20년 헤롯왕이 예루살렘 서쪽 방어를 위해 지은 것으로, B.C.70년에 로마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A.D.11세기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 공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 현재의 망대는 오스만터키 술탄 술레이만 대제 때 재건된 것이다. 현재 탑 내부에는 고고학 박물관과 전망대가 있다.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에는 이 탑의 이름을 따서 자파문을 ‘다윗문’으로 불렀다.
19세기에 자파문은 예루살렘 구 시가지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입구였다. 1898년에 독일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재위 1888-1918)가 방문했을 때 술레이만 대제는 자파 문과 다윗의 탑 사이의 성벽을 헐어 크게 도로를 내었으며, 현재도 이 도로를 통해 자동차들이 드나든다. 1908년에는 문 바로 오른쪽에 세워진 시계탑을 중심으로 상업지구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계탑은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붕괴되었다. 1917년 영국의 에드문드 알렌비(Edmund Allenby) 장군은 예루살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걸어서 자파 문을 통과했다고 전해진다. 영국 행정당국은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1944년에 성벽을 따라 세워져 있는 현대식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자파문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요르단에 점령되었으며, 문 옆에 방어벽이 세워졌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귀속되고 나서 통행이 재개되었다.
자파문은 198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늘날 문 아래로는 대형 지하주차장과 버스 정류장이 있어 관광객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으며, 문 내부 오른쪽으로는 관광안내소가, 신시가지와 연결되는 외부에는 마밀라(Mamilla) 쇼핑센터가 형성되어 있다.
2. 다마스쿠스문 (Damascus Gate)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중앙의, 북쪽으로 통하는 구도로 입구에 있다. 시온산성에서 시작하여 모리아산(성전산)의 정상에 있는 황금돔 앞을 지나 북쪽 다마스쿠스 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문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다.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다메섹 : 시리아의 수도)를 향하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히브리어(語)로는 '세겜(Shechem)으로 통하는 성문'이라는 뜻으로 '사아르세겜'이라고 하고,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형기둥의 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이었고, 최근 이 성문에서 시온 문까지 이어졌던 웅장한 중심도로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자파문·시온문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성문에 속하며 적의 갑작스러운 침범 시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ㄴ자형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삼중 문이었으나 지금은 한 쌍의 문만 남아 있고, 돌출 총안(銃眼: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불·돌·열탕등을 퍼붓는 구멍)을 갖춘 2개 탑이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아랍 바자(Arab bazaar)와 시장이 시작되고, 왼쪽으로 이슬람교인 지구, 오른쪽으로 그리스도교인 지구가 위치한다.
3. 헤롯문 (Herod's Gate)
영어 명칭은 헤롯문 (Herod’s Gate)이다. 유대인들은 꽃들로 장식된 문이라고 해서 헤브라이어로 ‘아르 헤파라힘’ 즉 꽃문으로 불렀으며, 아랍인들은 초소의 문 (Bab al Shirah)로 불렀다. 헤롯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헤롯왕(헤로데스)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궁전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헤롯문 근처를 파괴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1875년부터 약 25년간 통행이 통제되다가 1879년에 예루살렘 시민들의 요구로 통행이 재개되었다. 오늘날 아랍 재래시장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으므로 아랍인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문이기도 하다.
4. 새문(New Gate)
새문(The new gate)는 예루살렘 옛시가지 성벽의 여러 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것으로,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기독교 지구(Christian quarter)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새 문은 1887년에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 허락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 재위 1876-1907) 통치 기간 중에는 하미드 문(the Gate of Hammid)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일 황제 윌리엄 2세(William II, 재위 1888-1918)가 1898년 예루살렘 방문 당시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지구를 방문했다.
오스만제국의 1948년 제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 요르단이 현재의 예루살렘 옛 시가지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출입이 통제되었다. 1967년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새 문의 통행이 다시 허가되었다.
5. 사자문(Lion's Gate, 스테파노문)
초대교회의 스테파노 성인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하여 기독교인들은 스테파노문(Stephanos Gate)라고 부르며,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자였던 슐레이만 1세(Suleiman I, 1520~1566 재위)의 지시에 따라 성문 양쪽에 한쌍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으므로 사자문(Lion Gate)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이름으로 여호사밧 계곡으로 향한다고 하여 ‘여호사밧문’이라고도 하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디 있다고 하여 ‘마리아 성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특별히 제물로 사용될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여 ‘양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요한복음에 언급된 벳자타 연못이 이 문에서 성 안쪽으로 10m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베데스다/벳자타 연못 [Pool of Bethesda, Bethzath] 베데스다 연못은 개신교 명칭이며, 천주교 명칭은 벳자타이다. 벳자타는 고대 아람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어원상으로는 '자비의 집'을 의미한다. 이곳은 기원전 8세기에는 ‘윗 저수지’로 불렸었다(이사야서 7:3, 열왕기 18:17). 또한 요한복음 5장 2절에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연못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스테파노문 안쪽에 있으며 근처에 성 안나 성당이 있다. 스테파노문이 '양문' 으로도 불리므로 벳자타 연못이 '양의 연못'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연못은 고대에 키드론 계곡에서 흘러온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직사각형의 형태로 깊이가 20m 정도 되었고, 면적은 120 x 60m 정도였다. 연못 주변에는 의학적·종교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들이 세워졌다. 특히 연못 동쪽에는 BC150년경부터 AD70년경까지 욕실과 병실 등이 지어져 대중들을 위한 치료소로 활용되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모두 다섯개의 회랑이 있었으며, 예수가 이곳에서 38년 된 중풍환자를 안식일에 치유했다고 한다. AD 134년경에 제2차 유대항쟁을 진압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벳자타 연못 위에 로마의 신들 중 ‘치료의 신’인 에스쿨라피오(Esculapio) 신전을 건축했던 것이 고고학 발굴 결과 밝혀졌다. 그러나 5세기경 신전 자리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비잔틴 대성당이 세워졌다. 오늘날 연못 북쪽의 성당 발굴터 바닥에 화려하게 장식된 십자가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비잔틴의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십자가 바닥장식을 금지한 427년 이전에 성당이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 후 십자군이 요한복음의 치유의 기적을 기념하고자 폐허 위에 작은 기념교회를 세웠다. 교회 건물의 끝은 계단으로 벳자타 연못과 이어지며, 계단 아래에는 로마시대에 지어진 저수조가 있다. 교회와 벳자타 연못은 크림전쟁 이후 1856년부터 프랑스 정부가 소유했으며 비안키 수도회가 위탁관리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1871년부터 실시되었으며,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세워진 웅장한 기둥들이 오늘날 순례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
스테파노문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위치해 있고, 이 문을 통해서 올리브산과 요르단으로 향하는 길이 연결된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성 스테파노 [Stephanos] 최초의 순교자(protomartyr, ?~35?). 성인. 축일은 12월 26일. 중세의 특히 유럽대륙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던 성인의 한 사람이다. 전승에 의하면, 최초의 부제(副祭)라고 한다. 사도행전 6:1-8:2에 그의 임명과 연설, 그리고 순교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는 디아스포라에 살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태인으로 추측되며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식량 배급을 할 7인중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사도 6:5). 또한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하였으므로(사도 6,8-9), 유태인들의 미움을 사서 산헤드린에게 고발되었다. 사도행전 7:2-53에는 박해자들 앞에서 행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연설이 실려 있는데, 이에 화가 난 유태인들은 모세법에 따라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이 때 뒤에 성 바울로가 된 사울이 있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에게 박해자들을 용서할 것을 청하며 순교하였는데, 이런 태도는 후세에 여러 순교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무덤은 415년 사제 루시안(Lucian)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축일은 4세기말부터 12월 26일로 지켜졌으며, 2년에 한 번씩 그의 유해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성 스테파노 유해발견 축일’(Inventit St. Stephani)이 8월 3일에 지켜졌다. 그러나 발견 기념일이 1955년 이후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455~460년에 에우도키아(Eudoxia) 여황제는 다마스쿠스문 성문밖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그 유적지가 1882년에 도미니코회에 의해 발견되어 새로운 그의 교회가 세워졌다. |
6. 황금문(Golden Gate, 미문)
황금문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 중앙에 위치한다. ‘황금문’ 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성문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붙여진 것으로 ‘미문(美門)’으로도 불린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문’으로도 불리는 황금문은 성전산에서 가장 가깝고, 문 바깥으로는 올리브산이 있다.
황금문에는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자비의 문’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으로 불리며, 두 문 모두 굳게 닫혀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신이 예루살렘의 동쪽 문(황금문)으로 들어간 뒤 문이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으며, 메시아가 올 때에야 문이 열린다고 한다(에제키엘, 에스겔, 44:1-3).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나며, 황금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황금문은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도 불리며, 문 주변에서부터 올리브산 기슭까지 수많은 유대인과 무슬림들의묘지가 남아있다. 이 문은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 1세(Justinian I, AD 483-565 재위) 통치 기간 중 AD 520년 경 세워졌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 되었다. 그 후우마이야조가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7세기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1541년에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Suleiman I, 1494 - 1566 재위)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염원하는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성문을 완전히 봉쇄하여 현재까지 황금문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7. 분문(糞門, Dung Gate)
분(糞)문은 예루살렘 옛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의 출입구 중 하나로, 예루살렘 성전산(Temple Mount)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대 지구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고대에 성 안의 분뇨와 쓰레기를 기드론 골짜기로 내버리기 위해 만들었으므로 분문 또는 오물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문은 또한 십자군 시대에 근방에 피혁공들이 많이 살며 자주 출입했다 하여 '무두질꾼의 문' 이라 불리기도 했다. 문 안쪽에는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벽이 있다. 구약성서 느헤미야서의 3:13-14에 샤아르 하쉬폿(Sha'ar Ha'ashpot)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유대교 예배당으로 추측되며, 오늘날 분문 안쪽의 통곡의 벽과 지리적으로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은 본래 매우 좁았으나 1952년에 확장되었다. 또한 1967년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건축가 아론슨(Shlomo Aronson)에 의해 개축되어 현재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다.
8. 시온문 (Zion Gate)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올드시티)를 감싸고 있는 성벽의 8개 문 중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구시가지의 유대인지구로 통한다. 1541년 트루코 살탄이 건립하였다. 시온산(山)과 통하는 문이라 하여 이름 붙었으며,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시온'이라고 한다. 아랍인들은 시온산에 있는 예언자 다윗왕의 무덤으로 통한다는 뜻으로 '예언자 다윗문' 또는 '바브 엔 네 비다우드'라고 부른다.
문과 기둥에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1968년 6일 전쟁 이후 보수하였다. 문 안쪽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관리하는 아르메니안지구로 비잔틴 시대의 중앙대로인 카르도, 중세시대의 회당 등이 있다. 또 부근에는 다윗왕의 묘와 마가의 다락방, 가야바의 집 등 구약성서 시대의 유적과 마리아영면교회(돌미시온교회) 등이 있어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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