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8 주일설교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마태복음 12:46~50
성경의 어떤 부분은 읽으면 바로 이해되고 은혜받을 수 있지만 어떤 본문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할 만한 본문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마치 어머니도 무시고 동생도 부정하는 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들과 불화해도 상관없다거나 기독교를 인정머리도 없고 불효막심한 종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Tota Scriptura(전체 성경) 개념으로 보면 그런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 봅시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순간을 포착해서 Teachable Moment로 삼아 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 면에서 뛰어나신 분인데 특히 이 본문이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치 친가족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순간을 이용해서 중요한 교훈을 주신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끝내 먼 길을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매정하게 돌려보냈을까요? 아마도 공식 순서가 끝나고 다정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의 가족 개념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족은 부부와 자녀 한두 명입니다. 더구나 요즘은 일인 가구가 늘어 현대인들이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만일 가족 개념을 확대한다면 가족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건강보험공단에서 규정한 직장건강보험료 피부양자의 범위는 “배우자와 직계존속, 직계비속, 형제‧자매”로 규정되어 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사촌은 같은 집에 살아도 가족이 아닙니다. 만일 할아버지가 직장건보료 가입자라면 사촌도 할아버지의 직계비손이라서 피부양자가 맞지만, 아버지가 직장건보료 가입자라면 사촌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1세기의 가족 개념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집성촌(集姓村)’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마을에 일가친척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런 마을에서는 학교에 가도 모두 같은 성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외지로 나가기까지는 세상에는 같은 성씨만 사는 줄 알죠. 1세기의 가족 개념은 이런 집성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1세기에는 전 세계 인구가 2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녀, 특히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복이었고 성공이었고 농사와 목축의 귀한 자원이었고 맹수를 물리치거나 적과의 전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여자가 16세부터 42세 사이에 자녀를 낳았는데 생존율이 높지 않아서 많으면 12명 정도 생존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보통 16세쯤에 결혼했으므로 육십 대 중반이면 증손주가 결혼할 나이가 됩니다. 그래서 4~5대가 모여 살면 한 부모의 자녀가 800~1000명이 됩니다. 그 당시의 가족은 요즘 말로 가문(家門)과 동의어인데 가문은 족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공동 생산 공동분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가족에게 속한 사람, 성씨가 다르고 가문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같이 먹고 같이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새로운 가족과 같은 개념입니다. 고대의 스승은 돈 받고 지식만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같이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라 한 스승을 따르는 문하생(門下生)입니다. 바울은 젊을 때 가브리엘 문하에 속했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향해 “내 아버지여”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은 친부모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가문을 떠나 스승을 새로운 아버지로 삼고 문하생을 새로운 형제로 삼고 살았습니다.
가정에 대한 이런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과 말하려고 밖에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밖에 서 있는 이유는 방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친과 형제들은 무슨 말을 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마가복음에 힌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3:20-21에 의하면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느라 식사하실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설득하든지 안 되면 억지로 붙들어 데려가려 했습니다(막 3:21).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 말을 전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육신의 동생과도 관계를 끊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사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소위 수가성 여인 사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수가 마을에 가서 음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예수님은 우물을 찾아온 한 여인과 대화했습니다. 여인과의 대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고 좀 있다가 여인이 떠났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식사를 권하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음식 먹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 내가 한 영혼을 구원하고 그 가문을 구한 엄청난 일이 있었고 그 감격 때문에 음식 먹을 마음조차 없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제자라면 방금 그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음식 드시라는 말보다 그 여인이 구원받는 사실을 기뻐하는 표현을 먼저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후에 “스승님, 이제는 식사도 좀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 순서라는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신 것은 진짜로 음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잠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지금 밥 먹는 것이 대수야?”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기쁠 때, 너무 슬플 때, 너무 화가 났을 때 그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도 당연히 밥을 먹습니다.
“내가 어제 너무 괴로운 일이 있었어.”라고 말하거나 “어제 완전 대박이 났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무 반응이 없이 “밥 먹자.”라고 하는 것은, AI도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 친어머니와 친동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당연히 어머니가 중요하고 동생들이 반갑겠지만 지금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이 찾아온 이 순간에 피붙이, 살붙이보다 더 중요한 공동체에 관해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며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핵심임을 다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교회는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중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은 교회란 가족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족이란 요즘 같은 핵가족이 아니라 한 명의 족장이 있고 온 마을이 다 일가친척이고 함께 일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며 다 함께 적을 물리치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 공동체는 첫째,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밑에 있는 가족은 서로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입니다. 농사할 때, 목축할 때, 사냥할 때, 특히 전쟁할 때 가족이 나를 보호하고 내가 가족을 보호합니다.
같이 사냥하고 같이 전쟁하는 가족이 서로를 속이거나 서로를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만 잘 될까요? 아니죠. 그런 가족은 절대로 살 수 없고, 공멸합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서로 보호해야 하고 서로 챙겨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족은 가장에게 절대복종해야 가정이 유지됩니다.
이런 가족 개념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의 머리에 달린 각 지체라고 설명합니다. 한 아버지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아버지에게 절대복종하면서 서로를 헌신하고 서로를 보호하듯이 한 머리에 달린 몸의 각 지체는 머리에 절대복종하며 서로를 보호합니다.
한 사람의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원리는 몸의 지체는 머리에 복종하면서 서로 챙겨주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미워하여 자기를 속이고 자기 몸을 공격한다면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굴에 살면서 돌로 자기 몸을 해쳤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교인끼리 속이고 한 신앙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공격한다면 사탄이 들린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일부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께 절대복종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인끼리 속이고 서로 공격합니다. 어떤 교회는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속이고 공격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만일 사탄이 사탄을 공격하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탄 힘을 빌려 사탄을 내쫓았다는 말은 틀렸다는 뜻입니다. 그때 바리새인이 아무 대꾸를 못 한 것은 그 말씀이 맞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탄도 사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사탄도 사탄끼리는 속이거나 공격하거나 내쫓는 일이 없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요 자매인 성도가 교인끼리, 공동체끼리 속이거나 공격한다면 그건 사탄보다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교회가,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사탄보다 못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사탄도 서로 공격하지 않는데 성도가 다른 성도, 다른 공동체를 공격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영적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서로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고 영적 부상자를 치료해야 합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몸과 마음이 힘든 것도 보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께 절대복종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