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 1851~1916)
○ 본관 平澤, 자 時中 中玉, 號 遯軒
○ 1851년(청종2) 2월 5일 父親 溶來는 羅州羅氏 부인을 맞이하였으나 아들 없이 죽었고, 松岳王氏를 맞아 늦도록 아이가 없어 炳夏(조카)를 양자로 들였으나, 병찬 13세 때 炳夏 사망. 부친 43세에 병찬을 낳음, 병찬 12세 때 모친 松岳王氏 사망. 부친은 23년 연하의 坡平尹氏를 삼취로 맞아 61세에 아들 炳大를 낳음(炳瓚의 18년 연하 이복동생)
○ 沃溝縣 西面 大寺里 南山
○ 4세 아버지 밑에서 千字文과 추구(推句)를 배웠고, 5세 개정리 宋榮淑의 私塾에 들어가 四子小學, 五言唐詩를 배우고, 6세~7세 私塾을 차리고 趙龍成을 초청하여 가르치고, 資治通鑑을 하루에 200여 줄씩 배우고 다음날 이를 모두 외우니 신동이라 칭송하였다. 8세 고을 백일장에서 장원
○ 15세 林川趙氏(5살 위, 咸悅 趙浚極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이듬해 2월에 趙氏가 死亡하고, 그해 12월 16일 16살로 泰仁 梅竹의 礪山宋氏(3살 위, 宋祥喜의 딸)와 재취장가
○ 17세(1867년) 옥구현 향리(鄕璃-禮曹 工曹 刑曹)를 지냄
○ 1882년 32세 泰仁縣 山內面 永同으로 이거, 이 때 遯軒一門 8명, 처족 宋氏가 2명이 같이 이사하였다.
○ 1886년(고종23) 전라도 大同史가 되어 全州監營에서 근무
-1885년 3월 영국 해군함대가 거문도에 무단 상륙 점령하는 사건이 있어 정부에서 영국에 항의하여 영국함대를 그해 철수시킨 일이 있어 1886년 정부에서는 전라도 巨文島에 陣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감독관을 전라감사 李憲稙에게 추천케 하여 도내 유림의 추천을 받아 遯軒을 천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 거문도 설진 감독을 성심 진력하여 조정에서 그 공을 포상하여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총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總將)을 제수하고 선대 3대를 추증하는 은전을 주었다.
▷父 溶來는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祖父 玟圭는 통정대부 승정원 죄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高祖父 慶孫은 통정대부 사복사정(通政大夫 司僕寺正)에 추증
○ 1889년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영 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 兼 順天鎭營 兵馬同僉節制使) 제수 부임
○ 1890년(고종27) 4월 群山鎭, 6월 聖堂鎭(익산 성당면), 7월 法聖浦鎭의 兼管查官을 겸하게 했다.
그해 9월에 만기되어 물러나 태인에서 학문에 전념
○ 1893년 산내면 種松里로 이사-회문산 아래 400m 고지에 공자의 사당 領昭殿과 興學齋 학당을 짓고 후학양성, 마을이 처음 7호에서 70호로 불어났다
○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을 이단으로 보고, 송두용(宋斗鏞)을 시켜 김개남을 그의 집으로 초청하고 전라도 慰撫使 李道済에게 넘겼다. 그 공으로 武南營 左營官, 任實郡守를 재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고종은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宗聖里로 고치도록 하였다.
○ 1905년 초 어머니 王氏 墓를 鍾石山으로 이장 侍墓 追喪하며 여막에서 지낼 때, 習齋 崔濟學의 주선으로 최익현을 만나고 거사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 1905년 11월 17일 乙巳勒約,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74세,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贊) 56세, “성패를 논하지 않고 거사하여 천하에 대의를 펼치겠다.”
○ 1906년 1월19일~2월9일 최제학을 통하여 면암의 편지와 돈헌의 답서가 오고 감
2월3일 장성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창평 이항선(昌平 李恒善)이 찾아와 뜻한 바를 논함.
2월30일 면암과 돈헌 첫대면, 돈헌은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렸다.
3월8일 면암 진안 최제학의 집에서 묵다
3월15일 면암 돈헌 구체적 거사논의
4월8일 면암 담양 용추사(潭陽 龍湫寺), 남도 50여맹과 동맹록 작성
6월 4일(윤4월13일)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80여명 봉기 태인현으로 나가 무기, 식량을 확보하고 향교에서 1박함
-윤4월14일 정읍관아, 內藏山
-윤4월15일 순창 복흥 龜庵寺
-윤4월16일 순창관아
-윤4월17일 곡성관아 점령
-윤4월19일 순창객사
○ 윤4월20일 최익현은 광주, 전주, 남원 진위군과는 싸울 수 없다 물러가라 하고 의병에게도 해산명령을 내리다. 「순창 12의사」 끝까지 함께 하겠다 하여 체포
○ 윤4월23일 전주 鎭衛隊 소대장 金熙鎭이 서울로 압송하라고 통보, 일본군이 이들을 모두 압송하여 전주 鎭衛營에 도착 4일후 27일 명동에 있는 일본군 사령부 도착, 29일 30일 취조하고, 6월 25일 최익현과 순창12의사를 결박해 진고개(泥峴)에 있는 사령부로 끌고 가 군율위반죄를 적용-태인의병에 대한 선고, 최익현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 대마도 감금 2년, 고석진, 최재학은 본서 감금 4개월, 양재해 이길용 임현주 김기술 문달환 조두석 조영선 유해용 나기덕은 모두 장형(杖刑) 100대에 처하고 석방방한다,
○ 7월 8일 최익현 임병찬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소재한 일본군 위무영(衛戊營)으로 압송
○ 수감 도중 최익현은 병세악화로 11월 17일 새벽 4시에 대마도에서 서거하였다.
도집례 임병찬 부집례 이칙 사서 문석환 사화 신현두 호상 노병희.
고석진 최제학은 9일 이미 부산으로 나아가 치상준비를 하였다.
○ 11월 21일 최익현의 영구가 부산 초량(草梁)에 도착. 최재학과 최익현제자 문인들이 운구(運柩)하여 부산 商務社에 안치하고 최익현의 종질 최영설(崔永卨)은 執禮를 후손 최만식(崔萬植)은 재무를 노병희는 護喪을 최재학 곽한소(郭漢紹)는 司書를 맡아 치상물품을 마련 22일 성복(成服)하고 23일 정오 무렵 발인, 장지 충남 定山, 14일의 운구행렬 12월 7일 定山 장구동(長龜洞)에 도착, 12월 17일 최재학이 제문을 올려 최익현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다.
○ 1907년 1월 14일 대한제국 황태자의(후일 純宗) 재혼 가례로 특별사면
-통고가 왔었고 15일 석방되어 18일 대마도를 출발 19일 부산에 도착하고 이후 면암의 유소(遺疏)를 고종황제에게 올림.
○ 1908년 1월 21일 전주 왜군 수비대에 구속되었다 풀려남
4월 영광군수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 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음
7월 8일 天安 일본헌병대에 붙잡혀가서 1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25일 천안으로 돌아와 10월 3일 풀려 나왔다.
-돈헌을 심문한 내용은 영광군수에 부임하지 않은 이유와 폭도(반일인사)와 서로 연락이 있었는지 등.
○ 1910년 7월 21일 한일합방
11월21일 순창헌병대에서 일황 명치의 은사금 첩지를 전하였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음
○ 1912년 9월 28일 대마도에 함께 갇혀있던 충청도 공주 유생 이칙이 고종황제의 밀서전달.
→교지와 칙령 제3호-비밀히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 종2품 가선대부 임병찬 命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巡撫大將者. 개국 521년 9월 2일
○ 1913년 1월 10일 전 참판 이인순(李寅順)이 밀칙서 전달
→12월 27일 특승(特陞) 종2품 가선대장 임병찬 命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자 칙명을 내리다.
○ 1914년 2월 4일 아들 응칠이 집에 돌아올 때 황칙(밀지)을 받아왔다.
→종2품 가선대부 임병찬 命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巡撫總將 겸 사령장관(司令長官)
3월 25일 정2품 資憲大夫 獨立義軍之師 司令總將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임병찬 밀칙
○ 1914년 2월 23일 각도(27명)와 군(302명)대표 총320명 조직선정
3월 23일 수원에서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왜경에 체포 고문 자백으로 탄로나 거사중지.
5월 29일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사내정의) 면담요청 이후
경무통감 다치바나(立花小一郞) 면담, 「한국독립」 역설 주장 주장하는 서한 전달
내각총리대신 오오쿠마(大隈重信대외중신) 면담, 「한국독립」 역설 주장하는 서한 전달
6월 3일 일본 경찰에 보안법 위반 죄명 체포-자살기도-돈헌은 목을 모두 여섯군데를 찔렀는데 한군데는 매우 깊게 찔 렀다. 일본은 서둘러 재판을 열어 1년 감금형을 선고하고 巨文島로 이송.
6월 15일 거문도 도착
-1915년 6월 3일 1년을 더해 2년으로 늘어남.
○1916년 5월 20일 병이 나고, 3일 뒤
23일 타계하니 66세였다.
6월10일 돈헌의 영구 거문도 출발
11일 목포도착
13일 흥덕 사포도착-집에서 상여를 준비하여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밤 묵고
14일 태인 고현내 도착 1박하고
15일 宗聖의 본집으로 돌아왔다.
8월 28일 회문산 정상 아래 남록 子坐原에 장례를 모시었다가
12월 15일 그 옆 乾坐原에 면례(緬禮)하였다.
○ 임병찬 순국 이후 동생 林炳大, 아들 林應喆, 손자 임수명은 3·1운동 이후 의친왕 이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시키려 했던 「대동단」에 참여하여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
○ 1992.11.17. 정읍시 칠보면 무성서원에 丙午倡義紀蹟碑가 건립되고 井邑郡守 金成淵이 비문을 지었다.
※면례(緬禮) :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례를 지냄
정리 : 서양화가, 문화관광해설사 김성실
⇨참조 : 양만정(楊萬鼎)-돈헌 임병찬과 구국운동(遯軒 林炳 瓚과 救國運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