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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생활 / 렘 23:1-6, 엡 2:11-18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많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살고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아마 막강한 힘을 믿고 세계를 위협하던 공산주의가 가을 낙엽처럼 하루아침에 맥없이 무저너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를 미워하여 자유세계를 찾아 도망가는 백성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놓았던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힘없이 무너진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히 기적이다. 아무도 예축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남북한 간의 장벽도 어느날 갑자기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막혔던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다. 국가간의 정치적인 부산물로 만들어진 장벽이 무너질 때 맛보는 그 엄청난 환희보다 더 크고 감격적인 사건, 곧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이 무너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국가간의 장벽이든 개인간이 담이든 만들기는 쉬워도 일단 만들어지면 헐어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박정희 정권 때부터 생긴 영남과 호남 사이에 계속되는 지역감정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만드는 이 무서운 담은 분노와 시기, 미움과 원한 등을 통하여 만들어지게 되며, 일단 눈에 안보이는 이 장벽이 쌓이면 우리는 막대한 정신적 육체적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얼마전 위스콘신 대학이 심리학 교수팀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원한을 품고 사는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들에 비하여 세배 더 빨리 죽는다고 한다. 성서는 온갖 정신적 육체적 질환의 원인이 되는 이 무섭고 고질적인 담을 없애기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증거한다.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기적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보아 왔다. 그러므로 주님을 본받아 사는 우리 성도들은 막힌 담을 헐어야 할 중대한 의무를 갖고 있다. 서로 반목과 불화 속에서 지낸다면 성도라고 볼 수 없다.
1. 우리는 피차에 담을 쌓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일단 장벽이 생기면 헐어버리기가 어렵다. 말을 잘못하거나 말이 잘못 전해질 때 생기는 오해 때문에 담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입술과 혀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작은 불이 많은 산림의 나무들을 태우듯이 우리의 몸에서 제일 작은 부분인 혀가 온 몸을 더럽히면서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경고하였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는 지옥불과 같은 존재라고까지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고 한탄하면서 우리의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서운 혀를 조심하지 않고 잘못 사용할 때 장벽이 만들어지게 된다.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도 마를 것이
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이와 같은 시조가 있다. 누구나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끝없이 지루한 줄 모르고 남의 말, 그 때문에 막힌 담이 얼마나 많이 생기게 되나?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듣는 사람이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하여 조심성을 보이신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다섯번이나 남편이 바뀐 생활을 하던 수가성의 여인을 만났을 때도 일언반구의 책망이나 비난을 하지 않은채 보통 여인과 같이 대하여 냉수 한그릇을 청하셨을 뿐이다. 간음을 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만났을 때에도 수치와 공포로 기가 죽은 그 여인에게 부드럽고 따스한 사랑의 음성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며 평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셨다.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세심히 보살펴 주신 것이 주님의 행적이었다. 어느날 부자 청년을 만나 천국복음을 열심히 전하셨으나, 돈이 많은 그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말았다. ‘지옥갈 놈’이니 ‘저주받을 인간’이니 하며 야단을 치는 대신 주님께서는 슬픈 기색으로 제 갈길로 가는 젊은이를 보실 뿐, 그의 면전에서는 아무런 혹평이나 저주를 하신 적이 없었다. 남에게 상처가 되거나 오해될 말은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말아야 한다.
중국 전환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서경잡기에 보면 왕소군이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후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미모의 후궁이 못생긴 추녀라는 소문이 궁중에 나돌기 시작하였다. 온 궁중에 이 잘못된 소문이 퍼졌고, 드디어 황제인 원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단 한번도 왕소군을 자기의 처소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처럼 잘 생긴 후궁은 황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버려진 여자로 슬퍼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 한나라엔 흉노족이라는 악한 부족이 살고 있었다. 한나라에서는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한나라 여자를 흉노족의 족장에게 보내 결혼을 시키는 정략 결혼이라는 이름의 화친 정책을 꾀하고 있었다. 황제는 추물로 소문난 왕소군을 아까울 것 없다고 생각하며 보내기로 작정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4대 여인은 양귀비, 서시, 초신, 왕소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혼예식에 참석했던 황제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 속에서 못된 소문을 퍼트린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 당시 후궁의 얼굴을 그려서 황제에게 바치던 화공 모연수가 왕소군이 자기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다 하여 엉터리 초상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궁중 최고의 추녀라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그 당시 수많은 후궁을 일일이 면접하는 대신 화공이 그려 보내는 초상화로 후궁을 선택하는 관습을 악용했던 것이다. 화가난 황제는 모연수와 왕소군의 경쟁자인 후궁들에게 참형을 내림으로 거짓 소문의 진원을 다스렸던 것이다. 최고의 미녀를 최고의 추녀로 만들어 오랑캐의 첩으로 보내게 한 엉터리 소문, 우리는 그것을 유언비어라고 한다.
‘유언비어(流言蜚語)’의 ‘비(蜚)’자는 본래 ‘날 비’와 동음인 ‘떡풍뎅이 비’로 아닐 비(非)자 밑에 벌레 충(虫)자를 쓴다. 떡풍뎅이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벌레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조작하여 퍼트린 말’이라는 뜻의 ‘유언비어’이다. 우리의 잘생긴 입술이 떡풍뎅이 발레같이 고약한 짓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 하나를 좋게도 만들고, 나쁜 병신으로도 만드는 재주를 가진 것이 입이다. 예수님처럼 조심함으로써 막힌 담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의 실수로 생긴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
바울은 골 1:20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하면서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건을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의 아픔과 희생이 있을 때에만 막힌 담이 무너질 수 있다. 이 고통의 십자가를 아무나 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길만큼 자존심이라고는 전혀 없으셨다. 이렇게 철저한 자기 부정이 실현되었을 때 십자가의 수난도 감수할 수 있었다. 화목은 이런 초인간적인 고난의 결과로 성립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당부하셨다. 소금은 조미료나 방부제로나 정화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소금이 제 구실을 하려면 자신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듯이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존심과 야망과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화목의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몇 년전 일간지에 게재된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각쟁애자(듣지못하는 자)가 된 52세의 수필가 반숙자 여인의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의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으리라고 본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30세에 그런 불행이 닥쳐와 교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 다음으로 사랑하던 그의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갔을 뿐만 아니라 3개월 뒤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여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득함과 그 남편을 미워하는 일로 영육이 파괴되어 감을 느끼며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방황해야만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계속 높은 미움의 담을 쌓으며 살게 되었다. 그렇게 미움 속에 살아가던 어느날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앞에서 극도의 미움으로 인한 막힌 담이 무너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용서하여라’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선혈이 낭자한 예수의 얼굴을 본 순간, 청각 상실 후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큰 미움의 마음에 용서와 사랑의 새마음을 체험하면서 어느 과수원 주인과 재혼하여 인간 세계에서보다 훨씬 많은 자연의 위로를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기사엿다. 선혈이 낭자한 예수님의 못자국을 보는 사람만이 막힌 담을 무너트리는 신비로운 위력을 체험하게 된다.
어느 잉꼬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밤중에 새벽 1시나 2시가 되어 아내가 곤히 잠든 남편을 깨우며 ‘여보, 난 목말라요’ 하면 남편은 ‘응, 그래’ 하고는 두말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가 찬 냉수 한 컵을 떠다 주면서 ‘자 마셔요. 어디 몸이 아픈 것 아닌가?’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잔다는 것이다. 아마 보통 부부들 사이에 이렇게 한번 남편을 깨운다면, ‘미쳤어? 목마르면 가서 떠 마시지, 왜 자는 사람을 깨워?’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반대쪽으로 돌아눕거나, 좀 심한 경우에는 주먹이 날라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잉꼬부부’ 말은 쉽다.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이 된 후에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하심(下心)’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돌처럼 굳어진 자아, 하늘처럼 높아지려는 자존심이나 욕심들, 이것들을 날카로운 칼로 무 자르듯이 잘라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으로 만드는 것을 이르러 득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심’으로 도를 터득했던 청담 스님은 일생 중생들의 구두를 닦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천상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듯, 계속 내려가는 하심의 생활을 한다면 담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이미 생긴 막힌 담들도 쉽게 무너지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3. 주님은 화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막힌 담을 헐며 사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렀다. 주님께서 산상에서 밀씀하신 8복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은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해나 비를 악인이나 선인에게 구별없이 주심과 같이 아무와도 충돌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하늘의 뜻을 익힌 사라람이요, 하늘이 낳은 사람이다. 그리고 바울은 빌 2장에서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하여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고 도우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속죄양의 제물로 죽은실 때 그를 높이셔서 천상천하에 제일 높은 자리를 주셔서 우주만물을 통치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이시다. 미움도 불화도 원하지 않으신다. 아무데서나 또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
13세기의 성 프란시스는 그가 가는 곳마다 말 못하는 짐승들마저 운집하여 설교를 듣고, 그의 머리 위나 어깨 위에 많은 새들이 앉아 그를 반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늘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 사용하시는 도구로 만들어 주셔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는 화해를 조성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며 살았다. 남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던 오네시모가 도망가서 사도 바울에게 오게 되었다. 그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의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화해와 용서를 간곡히 부탁한다.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잘 하였다. 성 프란시스나 사도 바울처럼 미움과 시기와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사도로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분열을 조장하며, 당을 짓는 무리를 성경은 엄중히 책망할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고전 3장에서 ‘아직도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고 있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며 분열과 당파를 조장하는 어둠의 무리 때문에 초대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기와 미움의 원한 때문에 우리의 맑고 깨끗해야 할 마음에 검은 구름이 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피해를 주는 사람들 때문에 먼 간격을 두거나, 보이지 않는 담을 조성하기가 쉽다. 주님의 넓고 크신 사랑의 마음을 본받아 그때 그때마다 미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승화시키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 자신이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신앙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는 지옥을 이루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곧 지나가버리고 말 나그네의 길이지만, 바로 이 땅 위에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사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어느농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넓은 초원에 단 두 집이 살고 있었으나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날 길잃은 송아지를 발견한 두 농부는 제각기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 둘 사이는 더 한층 악화되었다. 그래서 그중 한 농부가 두 집 사이에 넓은 개천을 파고 물이 흐르게 하여 일부러 다른 한 농부와 보이지 않는 미움의 장벽을 쌓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본 다른 한 농부도 보복할 생각으로 많은 목재를 사들인 뒤 이름난 목수를 불러다가 높은 울타리를 쳐서 피차에 볼 수 없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 농부는 종일 시내에 가서 일을 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어 그 농부는 지금쯤은 높은 울타리가 다 완성되어 그 밉살스러운 원수를 보지 않아도 되겠다며 흥겹게 집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다. 목수는 높은 울타리 대신 넓은 개천 위에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어서 그는 분노하였다. 바로 그때 원수와 같았던 건넛집 농부가 반색을 하며 다리 위로 건너와 ‘제가 그동안 여러가지로 부족하여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못된 마음으로 제가 개천을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리까지 놓으시니 뵐 면목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이쪽 농부도 처음에는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건넛집 농부의 부드러운 태도에 그만 웃음으로 두손을 꽉 쥐면서 피차 용서를 구하게 되었다. 미움으로 막힌 담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농부는 목수에게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소. 아직도 우리 집에 할 일이 많으니 며칠만 더 유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목수는 싱긋이 웃으며 내게는 아직도 다리를 놓아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며 다른 동네로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목수였다. 가정에서, 특히 부부 사이에 다리를 놓는 목수가 되어야 하겠다.
교회에서도 분열과 미움의 그늘 아래서 개천을 파는 일, 높고 넓은 장벽을 쌓아 올리는 일을 멈추고, 대신 튼튼한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그런 사람을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지금도 찾고 계신다. 막힌 담을 헐며 사는 이들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1995-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