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자 안에서 / 창 26:1-5, 요일 5:16-21
금요일 아침부터 교회 종탑을 세웠다. 성도들이 나와서 땅을 파고 전신주를 세우고 조이고 자르고 땀을 줄줄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끝날 때쯤 보니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볕에 얼굴들이 익어서 검붉게 되었다. 이 날이 중복인줄 늦게서야 알았다. 그래서 일이 끝나고 땀흘려 수고했기에 보신탕이라도 한 그릇씩 사주려고 했는데, 몸도 씻어야 하고 구역모임도 있고 그래서 모두들 그냥 집으로 간다기에 저도 씻기만 하고 구역모임을 하러 갔다. 학생들이 방학을 한 것을 보니까 더운 여름철이 온 것 같다. 저도 어렸을 때 방학이 시작되면 이번 방학에는 무엇을 해야지 하고 계획을 잔뜩 세워놓고 실행하지 못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할 수 있는만큼 세워놓고 그대로 실행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교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보존시켜 나갈 수 있겠나? 성경은 이 교제가 끊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흔들림이 없지만 때때로 교제는 흔들릴 수 있다. 요 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상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 사이에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할 때 아버지는 나와 대화를 끊어버릴 수 있다. 이런 불행한 사귐의 단절, 교제의 단절을 막고 어떻게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사도 요한의 숙제이다.
1. 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단절시킨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가 들어올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이 끊어진다. 시 66:18절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벧전 3: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 사이에 좋지 못한 관계가 전개되면 기도가 막힌다. 부부관계 뿐만아니라 잘못된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대응해야 할 올바른 태도로 반응하지 못했을 때 기쁨을 상실한다. 그리고 주님과 나 사이에 사귐이 단절되는 아픔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에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로 응답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마 5장에 보면 불편한 인간관계로 형제 사이에 원망들을 만한 일들을 그대로 두고 제단에 예물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귐이 중단된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인간관계의 불화뿐만아니라 잘못한 것 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일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를 나타내지 못할 때 역시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요 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순종하여 이 교제를 지키는 것이다. 요 15: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다시 말하면 순종하라는 것이다. 반대로 불순종하면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며, 교제가 단절되며,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2. 죄를 범했을 때 속히 회복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죄를 범했을 때 즉각적으로 회복해야 할 중요성이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죄를 범할 때 신속하게 거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중대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죄를 범했을 때 신속하게 먼저 해야 할 일이 자백이다. 요일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것은 내가 할 일이다. 16절에서 말씀하는 내용이 우리 주변에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보았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랑하는 형제 가운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한 것을 보거든 달려가서 그를 위해서 도와주며 기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도와주어도 소용이 없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도대체 사망에 이르는 범죄가 무엇인가? 이 사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육체적 사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시는 범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로 이미 결정되었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니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준다. 이것은 본문과 일치하는 말씀이다. 17절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성도들이 범할 수 있는 죄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육체적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몇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1) 청지기적인 부주의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맡은 자’로서 청지기적 충성을 부탁받았으므로, 목숨관리를 잘못한 때문이라는 타당한 이유가 전제된다. 쉽게 말하면 건강에 신경쓰라는 것이다.
2) 해야 할 일이 다 끝났기 때문이다. 딤후 4: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이 바울의 마지막 서신에서 그가 죽음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다 끝났을 때 주께서 나를 데려가실 것이다.
3) 아버지 앞에 영광이 될 때이다. 요 21:18-19절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의 흥미있는 대화의 장면에서 베드로의 순교의 죽음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죽음이 아버지 앞에 영광이 될 때 주께서 그 사건, 그 현장에서 생명을 취할 수도 있다.
4) 주의 만찬을 경솔하게 대할 때 죽음이 온다. 고전 11장을 보면 주의 만찬의 초점을 알 수 있다. 주의 만찬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 곧 나를 구수속하기 위해서 흘리신 보혈과 또한 나를 위해서 제물로 드려졌던 그분의 몸의 거룩한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을 경솔하게 대하고 있다면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를 등한히 하고 있고, 주님을 존귀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징계의 양식이 고전 11: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면 약하게 하셨다가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병들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병석에 누워서 내 삶과 현재의 신앙생활,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도록 말이다. 그러나 모든 병이 다 징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병은 하나님의 징계 때문일 수도 있다. 이때에도 병석에 누워서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를 회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자게 하신다. 여기서 잔다는 것은 육체적인 사망을 말한다. 그렇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이다. 성도들이 이런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마지막 징계의 방법은 목숨을 가져가시는 것이다. 이런 사건은 성경에 얼마든지 많이 있다. 민 16장의 아간의 사건, 삼하 6장에서 법궤를 잘못 만졌다가 죽은 웃사, 레 10장에 나타난 나답과 아비후의 범죄, 이들은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다. 특별히 그 죄에 진정한 회개가 따르지 않을 때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특별히 범죄한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성경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가져가기로 결정을 하셨으면 그 다음에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다.
3. 교제의 특권을 확신하라.
18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우리 안에 새생명이 거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속에 심어진다. 이제 꼭 죄를 지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우리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필요가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죄를 범했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신하라.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여인, 남편 구타-이혼, 성도-악한 세상에 속함, 악한 자 만나 이럴 수 있다. 교회 나와 말씀을 읽다가 깨달음, 악이 하나님을 대적한다.)
참된 자를 알게 하심으로 죄를 이기게 하신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흉악한 자를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말씀이 내속에 거하나? 이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있나? 이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나? 날마다 이 말씀을 묵상하나? 이 말씀 앞에서 내 삶을 비추어 보나? 이 말씀이 나를 붙들 때 얼마든지 사탄을 이길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놀라운 교제 안에서 승리의 삶을 누리기 바란다.
4. 이 교제를 계속 지키기 위해 주는 말씀은 우상을 멀리라는 경고이다.
우상을 가장 잘 처리하려면 우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때 이 말씀에 근거해서, 또 요한일서 정신에 근거해서 우상을 정의한다면, 한마디로 우상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는 모든 것,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간에 끼어드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재룰 단절시키는 것, 그것들이 바로 우상이다. TV를 보고도 주님과 나 사이의 사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괜찮다. 그러나 TV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이 된다면 이는 우상이다. 세상 어느 것이라도(친구, 친척, 이웃, 재물, 권력, 체면 등)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을 정도라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골 3:5절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 탐심이 가득찼을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이 자리잡을 여유가 없다. 그때 내가 욕심을 내고 있는 대상, 내가 탐하고 있는 대상은 내 마음 속에서 우상으로 군림한다. 우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 내 속에 군림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거룩한 교제를 방해하는 방해물이 무엇인가? 그 우상들을 멀리 하라. 버리라. 나와 주님 사이에 이 놀랍고도 아름다운 교제가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이 시간 나의 우상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아니 내게 그런 우상이 지금은 없다해도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으라. 하나님과 나 사이의 교제를 끊을만큼 나에게 강력한 매력으로 유혹을 던지며 나를 향해서 도전해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릴 수 없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릴 수 없게 하던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돌이키기에 방해되는 모든 것, 그것을 던져버릴 때 나를 향해서 계시되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내 영혼을 사로잡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