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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 가르멜 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모세수사
소화데레사 성녀는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였는가?
데레사에게서 영혼에 대해서나 영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 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리지외의 작은 수녀는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그것을 밝히고, 하느님과의 관계,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추상적인 숙고나 학문에 관심이 없으며 종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 한계는 당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개인적 성취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순수 학문은 그녀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CRG 3,6 참조).
데레사의 이상은 자신이 말했듯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식은 가치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그녀의 삶, 구체적인 활동, 심지어 가장 평범한 것까지의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궁극적인 의미를 분석하고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신을 바치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편지 85). 그러한 요구가 있는 매일의 삶은 그것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녀가 이해하는대로 삶이 하느님과의 함께 존재하거나 그분과의 자주 만남이라면, 그녀의 생애가 끝날 때 그녀는 “3 분 동안이라도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때는 없다고 생각해요”(CRG 3 , 29; 권고와 추억)고 단언한다는 사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맡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고, 하찮게 생각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거기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1) 삶의 기본적 지향
(1) 영광을 추구
데레사 마르탱은 ‘데레지타’(작은 데레사) 또는 ‘작은 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크신 분’ 이라고 부르고 또 부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의 겸손한 성취와 목표를 달성하고, 화려하고 빛나는 삶을 위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있어서는 작지만 그녀의 원의나 열망 측면에서 큽니다. 이 범위에는 한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그녀는 삶에서 큰 성녀가 되고 싶은 원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제 영광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큰 성녀가 되는 데 있다 는 것을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하였는지, 그리고 수도 생활을 일곱 해나 했는데도 늘 같은 자리인 것을 본다면 이 소원은 이 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큰 성녀’가 되 겠다는 생각을 품고 대담한 저 자신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게 아무 덕도 없으 므로, 제 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덕과 거룩함 바로 그 자체이신 하느님 께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제 약한 노력에 만족하시며 저를 당신 에게로 끌어 올리시고, 당신 공로로 덮어 주시어 성녀가 되게 하실 것입니 다.(자서전 원고 A 32 r°).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씁니다. : “전 언제나 아빠의 작은 여왕으로 남아있을 거예요. 그리고 위대한 성녀가 되어 아빠를 영예롭게 해드리겠어요.” (편지 52)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를 위해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열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단계적으로 다른 색조를 취합니다. 착복식을 준비하는 피정에서 그녀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사랑받으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해드리고 싶어요!…” (편지 74)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나 계시의 형태로, 자신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매우 높은 곳에 도달하고 명성을 얻으려는 필요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은 부드럽게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발견하고 참 영광이 있는 곳을 조금씩 이해하게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두 가지 중요한 순간들을 언급하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 견진성사와 서원 : “저는 성령강림 때 불던 세찬 바람은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엘리야 예언자가 들은 적이 있는 ‘호렙 산 위에서 솔솔 부는 그 부드러운 바람 (1열왕 19,12-13 참조)을 느꼈습니다.”(원고 A 36v°)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업적은 그 불타는 영혼에서 시끄러운 소리나 화염이 없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목표가 어디에 있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험하고 어두운 여정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미 여정을 시작했고 잘 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놀라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2) 세심증
데레사는 윤리적인 고통이 갑자기 엄습해서 ‘영혼의 고통’을 겪었고, 이는 그녀를 낙담과 우울증 상태로 이끌었다.
그녀의 삶의 위대한 계획은 근본적으로 데레사와 하느님 사이에서 발전된다. 그분은 그녀에게 동반자, 주인, 말동무, 문 열쇠를 가진 사람, 영광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 어려움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감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데레사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가족들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그 당시 시대적 환경에서 신앙인들과 그들의 종교적 사고를 통해 하느님의 상태를 인식합니다. 이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얀세니즘의 영향.
그 당시, 얀세니즘 교리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속죄와 희생자를 요구하는 정의롭고 심판관이신 하느님의 존재는 신자들에게 필멸의 죄에 빠지고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매우 쉽다고 믿었습니다. 성녀는 나중에 언니 셀리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 “셀리나 언니,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짧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 영혼들을 구해요… 눈송이처럼 힘없이 떨어지는 영혼들을.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편지 94).
Domin 신부는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위한 피정에서 “신성한 첫 영성체에 대해 얼마나 하느님을 두려워해야하는지”에 대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총 고해를 한 후 마음이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원고A 34v°).
이듬해 두 번째 영성체를 준비하는 피정 동안 같은 사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지도한 것을 성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그가 우리에게 말한 것은 끔찍했습니다. 대죄, 추함, 심판, 고해성사를 잘 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Obras Completas, 1996, p. 982).
세심증
이러한 속성을 지닌 하느님은 그녀를 겁을 주게 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에게 세심증이 엄습했습니다.
“이 수난은 직접 겪지 않고는 잘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1년 반 동안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생각과 행동이 제게는 모두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마리아 언니에게 모두 말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맞지 않는 제 생각까지도 모두 말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짐을 내려놓으면 한순간의 평화를 맛보았지만, 이 평화는 번갯불처럼 빨리 지나갔고 제 고통은 곧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A 39r°).
훨씬 나중에 가르멜 수녀원에서도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하느님의 모습을 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수녀원에서 신부들의 강론한 것이 충돌했습니다. 그녀가 깨닫고, 직관한 것과 강론 사이의 대조는 종교적 원천에 대한 고통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 “보통 강론을 듣는 피정은 혼자 하는 피정보다 무척 힘들었다.” (원고 A 80r°).
아녜스 수녀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 피정을 하는 동안 나는 그녀가 창백하고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잘 먹지도 잠도 못 잤다. 만약 그것들이 지속 되었다면 결국 병에 걸렸을 것이다.” (Procés Apostolique, p. 163)
그녀의 내면에서 자신이 느끼거나 체험한 것과 자신이 듣고 본 것 사이에서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언젠가 그녀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에 괴로워할 무렵, 즈느비에브 수녀는 그녀에게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1코린 14,33) 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원고 A 78r)
이 말은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다시는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탁월한 “보화”로써 평화를 자주 언급합니다. 그녀는 베들레헴의 장면을 기억할 때 천사들의 환호 노래에 주목하여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평화는 당신 자녀들의 풍요로움입니다.” (시 22, 2)
세심증의 우려와 의심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마술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데레사는 믿음과 신뢰를 구하고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커다란 자아포기, 잘 알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는 여정에 자신을 내어 던졌습니다. 작은 성녀는 많은 생각을 했고, 마치 자신이 어둠 속에 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녀는 이 어둠 ,이 무력감 또는 일상적인 삶의 상태를 지각하는 힘의 부족을 받아들이는 데 자신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섭리적인 만남
이러한 생각과 투쟁을 하는 동안 섭리적인 사건을 통해서 작은 성녀의 삶의 길에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몇 몇 피정 설교는 아마도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기억을 가진 것 중에 하나로써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녀를 비추었다. 서원을 한 다음 해에 그녀는 피정을 하면서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1891년 10월 7일 ~ 15일) :
그때에 저는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천국이라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으니까요). 이런 마음속의 생각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고해소에 들어가자마자, 제 마음이 활짝 개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부님에게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제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듯 저를 이해하셨습니다……. 제 마음이 저보다 신부님이 더 잘 읽으시는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파도 위로 돛을 힘껏 펴고 달리도록 밀어주셨습니다. 신부님은 “당신은 잘못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하느님께서 제 영혼을 무척 흡족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하느님을 대신해서’ 단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저는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들으며 정말 기뻤습니다. (A 80v).
이후 작은 데레사는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예수님의 고통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주장은 율법과 관련하여 결점은 그녀의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는 사랑과 관련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불신앙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한 선교사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지금은 완덕에 대한 형제님의 소망만이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답니다.” (편지 261)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정의롭다는 것은 단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 엄격함을 행하시는 것만 뜻 하는게 아니라, 올바른 지향을 알아 보시고 덕행에 보상을 해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만큼 정의도 베푸시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편지 226)
그분의 마음에 대한 합당한 이해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 십니다. 나중에 그녀는 계속해서 “어두운 계곡을 걷는다” 고했지만 적어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그녀가 고백한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매우 감수성이 강한 이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천국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녀는 또한 입맞춤과 포옹을 자주 언급합니다. 그녀는 머뭇거리거나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부드럽게 반응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저는 소녀들에게는 가장 위태로운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에제키엘이 예언 가운데에 말한 바를 제게 이루어주셨습니다. “내 곁을 지나시다가 주께서는 내가 사랑을 받을 때가 이르렀음을 보시고 나와 언약을 맺으시어 나는 그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자서전 원고 A 47r)
나중에 그녀는 자주 예수님을 ‘내 정배’ 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목마른 불쌍한 우리의 마음을 누구에게 아낌없이 주어야 할까요?… 아! 그 누가 그 마음을 받을 만큼 위대할까요?… 한 인간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그 마음을 갚아 줄 수 있을까요?… 마리 언니, ‘사랑’이라는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뿐이예요!… 예수님만이 우리가 당신께 드리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수 있으세요… (편지 109)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녀의 열망에는 한계가 없어보입니다. 그녀의 시를 들어봅시다.
내 필요로 하는 것 자애로움으로 타오르는 한 마음
영원히 의지할 수 있고, 내 안의 모든 것
나약함까지도 사랑하는 마음…
밤이고 낮이고 내 곁 떠나지 않는 마음이리.
결코 죽는 법 없이 언제나 날 사랑해 주는
피조물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었네
정녕 내 필요로 하는 분 내 본성 지니신 하느님
그분 내 형제되어
괴로움 함께 할 수 있으리! (시 23,4)
2. 데레사의 하느님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 계신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녀가 하느님을 엄하고 무자비한 재판관으로 바라보고, 대죄를 쉽게 범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 단계를 거쳐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한 동안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것은 그녀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를 형성했습니다.
그녀는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더 가까이 이해하고 친숙한 존재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족처럼 느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믿음으로 항복하는 사람을 어떻게 환대하시는지 보여주고 싶을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입니다 라고. 그래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분의 가족이예요.” (편지 130)
강생의 신비가 그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녀는 항상 ‘훌륭한’ 것보다 ‘친절한’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편지 73 참조 ; 마리아는 여왕보다 어머니이시다. 마지막 대화(UC) 20.8.14). 그녀는 관상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녀는 아녜스 원장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어머니,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큰 행복한 일입니까.
오! 그분께서 얼마나 잘하셨는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PA p.157). 그녀는 삶의 끝자락에 쓴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 “정녕 내 필요로 하는 분 내 본성 지니신 하느님 그분 내 형제되어 괴로움 함께 할 수 있으리!” (시 23).
그녀를 가장 감동시킨 복음서 본문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 11,29)(UC 15.5.3)이라고 묘사한 구절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필요로 하는 방법입니다. 멀리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매우 가깝고 매우 친숙하며 보잘 것 없는 피조물로서의 그녀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는 그것을 찾습니다. : ‘예수님은 곧 이 땅의 모든 온유 하고 겸손한 이들을 구하러 일어나실 거예요!…(편지 145).
그녀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무엇보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녀는 두 이름을 서로 바꿔서 사용하지만 분명히 두 번째 이름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각각 895회와 1616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녀를 더 가깝게, 더 친근하게, 더 친숙하게 만듭니다.
강생의 전체 신비는 유년기(아기 예수)와 수난기(성면)라는 칭호에서 간주되고 경배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그 수도명을 가진 첫 번째 수녀였습니다. 착복식을 하는 날, 그녀는 수련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서명을 합니다. ‘성면의 아기예수의 데레사.’ (편지 56). 이 두 칭호는 생애의 첫 단계에서 그녀의 헌신과 모든 영성을 나타냈습니다.
a) 아기 예수
이 칭호는 데레사에 대한 하느님의 행동에 나타난 불가해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변덕스러운’ (caprichoso) 특징을 상징하고 표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의 방법, 우리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명백한 부재와 무관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데레사는 매우 거룩하고 커다란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는 것. 그녀는 정확히 교회 직권 입장에서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녀는 긍정적인 대답을 찾기 위해 교황에게까지 달려갔지만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지만 성탄절이 오고 아기는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심오한 시험, 진지한 숙고를 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장난감’으로 삼아 달라고 예수 아기에게 저를 바쳤습니다. 어린애들이 감히 손은 대지 못하고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흡족해 하는 값진 장난감같이 저를 다루지 마시고, 아무 가치도 없는 작은 공처럼, 땅에 던지거나, 발로 차거나 ‘뚫거나’, 한구석에 처박아 두거나, 또 혹 마음이 내키면 가슴에 꼭 껴안거나, 마음대로 하시라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예수 아기를 즐겁게 하고’ , 그분을 기쁘게 하고, ‘아기 하고 싶은 대로’ 맡겨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 기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자서전 원고 A 64v)
젊은 데레사는 하느님을 예상할 필요는 없으며, 이유를 알 수 없더라도 그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그분이 아이처럼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변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신성한 변덕들’ (tus divinos caprichos) (기도 5; cfr CRG 3,2)을 위해 자아 포기로 아기 예수께 봉헌하는 기도를 작성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1887년 그 성탄절에 아기 예수께서 그녀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훌륭한 교훈입니다(원고 A 68r 참조). 그녀는 자신을 아기 예수의 장난감이자 공으로 여기는 이러한 신심을 착복식 날인 1889년 1월(편지 15, 18, 50, 51, 54, 55)까지 키웠다. 그런 다음 그녀는 언리 레오니아에게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전에 내가 나 자신을 ‘예수님의 작은 장난감’ 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지요. 지금도 나는 예수님의 작은 장난감이 되는 게 여전히 행복해요.” (편지176, 1895년 4월 28일) "또한 시 24(= 희곡 5)는 아기 예수에게 작은 장난감을 봉헌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대여, 이 세상에서 천상 아기의
장난감이 기꺼이 될 수 있겠소?…
자매여, 정녕 그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소?
그럼 그 조그만 손 안에 머무르시오.
만일 사랑스런 그 아기 그대를 어루만져 준다면
그의 높으신 사랑으로 그대에게 다가간다면
그리고 때로 그대를 돌보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을 그대의 행복으로 받아들여 주시오.
갑작스런 그의 변덕을
늘 주시해야 할 것이오. (희곡 5)
b) 성면 (거룩한 얼굴)
이 신심은 평생 동안 우리 성녀의 영성을 크게 형성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고통, 굴욕, 실패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찾는 데 필요한 빛을 발견할 것이며, 직면하게 될 시험을 용기와 평화로 견디는 격려와 힘을 찾을 것입니다.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 전부터 이러한 신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1885년 4월 26일에 그녀가 뚜르의 성면 형제단에 등록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부터 그녀는 그 신심의 기원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갈 때까지 이 신심을 심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작은 데레사가 수녀원에 입회를 했을 때에 수녀원은 성면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앞에 밤낮으로 등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젊은 데레사는 수녀원의 문을 넘을 때 이러한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착복식 날에 쓴 편지 56에는 작은 데레사의 수도명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것은 청원기 동안 그녀가 그 신심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제안하는 것의 의미를 묵상하고 심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데레사는 확실히 이 신심을 진정한 관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고통스러운 사건에 비추어 더욱 심화했습니다.
가르멜 동산에 옮겨 심어진 어린 꽃은 십자가 그늘에서 활짝 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의 눈물과 피를 단 이슬로, 눈물에 덮인 공경하올 얼굴을 태양삼아 ... 그때까지 저는 성면(聖面) 안에 감추어 있는 보배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었는데, 사랑하는 원장님께서 이 보배를 가르쳐 주셨으며, 가르멜에 우리 형제 가운데 제일 먼저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 정배의 얼굴에 감추어진 사랑의 신비를 제일 먼저 사무쳐 깨달은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저를 불러주셔서 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참된 영광’이란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남이 몰라주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기를 원하며”( 준주 성범 3편 2,3)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기를 좋아하는 것” (준주 성범 3편 159,7) 만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이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가지신 이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서전 원고 A 71r)
이 신심은 그녀가 예수님의 치욕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치욕에 적용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섭리적으로 셀리나를 통해 이사야서에서 고통받는 종을 언급한 본문을 통해 그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Cfr Ct 88).무엇보다 그녀는 병들고 굴욕을 당하는 사랑하는 성부께서 종의 형상을 보려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훌륭하게 밝혀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지나온 어둠을 확인했을 때, 어떤 빛도, 어떤 표지도 없이, 그녀는 작고 기이한 빛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를 인도하기에 충분하고 낙심하지 않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굴욕
성녀는 겟세마니와 골고타에 계신 아버지의 민감하고 위안이 되는 현존 없이 홀로 있는 자신을 보시고 육신과 무엇보다도 영혼의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 안에서 그녀를 찾습니다. 그녀는 그분께 자신의 어둠과 메마른 삶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녀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지만 그를 그 상황에 내버려둡니다. 데레사는 그분께서 그녀를 위로하러 오지 않더라도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후에 그녀는 셀리나에게 편지를 써서 예수님의 성면이 가려진 가난의 상태인 예수님의 굴욕을 상기시킵니다 (Ct 116). 나 당신을 닮게 하소서,예수님 !… (기도 11)
그녀는 일생의 거의 모든 일생을 어둠의 길을 갔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이 신심을 평생을 지켰습니다. 1897년 6월 7일에 찍은 사진에도 성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동일한 모습은 그녀의 생애 마지막 날 동안 의무실에 남아 있습니다. 자주 보게 됩니다. 그녀의 수도 생활 동안 그녀는 여러 번 동행할 것입니다. 그녀의 서원에서 그녀의 현의에 성면을 포함시킵니다.
“성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봅니다”(편지 63). “나의 셀린느 언니에게 주려고 생각했었어요. 부디 성면의 마리아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분이신 예수님의 피와 눈물을 깨끗이 닦아 드리는 또 다른 베로니카가 되시길!” (편지 98) 그녀는 "성면의 마리아"(Ct 154)라고 불릴 예정이었습니다.
종의 노래
고통의 길을 밝혀 주소서(Ct 81, 84, P 20).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설명과 본문(Ct 88). 신앙의 밤에 명료함을 주십니다(Ct 91).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가지 신심: 성면과 예수 성심(Ct 97). 예수님은 그녀에게 유년기와 수난기를 주셨습니다(Ct 100, 101). 수난의 도구들과 그의 정배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피 흘리고 비참한 예수님의 얼굴 (Ct 135).
아기예수의 데레사의 고귀한 칭호: 아기예수와 예수님의 수난(자서전 원고 A 77v)과 문장(자서전 원고 A 86). “예수님의 얼굴을 통하지 않고는 나를 보지 말라”(또는 기도 1 : 봉헌 행위).
“성면은 거룩한 인성과 동등하다”(기도 4). “베일에 가려진 당신의 시선”(기도 3: 성면께 봉헌). “오 사랑스러운 얼굴, 내 마음을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 (기도 9).
그녀는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해해 주신다고 느낍니다(P 23,4). 오, 성면에 대한 봉헌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습니까! (UC 5.8.7).
“이사야의 말씀 : 누가 우리의 말을 믿었느냐? 그 안에는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성면에 대한 나의 신심의 전체 배경, 더 좋게 말하면 나의 모든 신심의 배경을 구성했습니다. 나는 또한 아름다움이 없고 모든 피조물에게 알려지지 않은 포도주 틀에 혼자 있는 포도주를 밟고 싶었습니다.”(UC 5.8.9)
병이 났을 때 성면을 경축하는 날인 예수님 변모 축일 전날 밤에 그녀는 죽을 것을 예상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간호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성면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아, 나는 많은 믿음의 행동을 했습니다! (UC 6.4.1) 정확히 1년 전에 그녀는 자신이 작성한 봉헌 기도문(참조 기도 3)에 따라 두 명의 수련자와 함께 자신을 성면께 봉헌했습니다. 즈느비에브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면은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마음을 보는 거울이었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그분을 온전히 관상했습니다. 그녀는 수련자들에게 예수님의 성면이 사랑의 학문, 덕의 기술을 끌어낸 책이라고 지적했습니다.”(CRG 3,35)
1896년 4월의 각혈 이후 그녀는 자서전 원고 "A"와 "B"와 편지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녀의 독창성은 그 전까지는 이 신심이 죄를 치유하기 위해 양성되었지만 성녀 데레사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면은 그녀에게 롤모델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견디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녀가 아버지의 병과 영혼의 슬픔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을 때, 예수님의 고통을 보는 것은 그녀에게 어두운 길을 밝히고 고통에 지배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녀가 삽화를 그렸고,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는 짧은 기도문을 지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 “나 당신을 닮게 하소서,예수님 !… (기도 11).
첫댓글 ' [3월 월모임 강의] 소화데레사 성녀는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였는 가?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