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과 노은단
노은단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忠南 洪城郡 洪北面 魯恩里) 성삼문이 성장한 유허비(遺墟碑)가 있으며 숙종 2년(1676) 노은 서원을 세워 사육신을 봉향한 후 녹은 서원(綠雲書院)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8년(1871) 폐철되자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고 사육신 노은단을 설단(設壇)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성삼문은 어려서 고향인 파주시 천현면 금곡리(개 목동) 할아버지 성달생에 지도를 받으면서 먹글씨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많이 흘러 개물(溪墨)이라고 호칭되어 내려오며 성달생 할아버지와 자손들이 살던 생가터가 있다.
세종 20년(1438) 21세에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가 되어 많은 젊은 학사 중 가장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수십 차례 걸쳐 왕래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 연구 끝에 세종 28년(1446) 9월 29일 발포된 후에도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명나라 예겸(倪謙)을 찾아가 음운(音韻)에 대한 연구를 거듭, 한글 창제에 공훈을 세웠다.
정권을 잡기 위하여 한명회 권람 등과 계획을 세워 영의정 황보인 좌의 종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구실을 삼아 단종 1년 격살하고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 사사한 후 중신들에게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였으나 예방승지인 성삼문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네가 단종을 모신 후설 지관(喉舌之官)이 아니냐 하며 어찌하여 선왕인 세종 문종의 당부를 받았거늘 네 손으로 옥쇄를 수양에게 넘겨주고 술잔까지 받는다는 말이냐
나는 너의 절의를 믿었거늘 참으로 우리 가문에 수치로구나" 하고 호통을 치니
성삼문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아뢰기를
"죽는 것은 두렵지 않사오니 단조 임금을 누가 복위시키겠습니까.
불초 소자 목숨을 걸고 성사를 하겠다" 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뜻이 맞아 세조와 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을 처치할 날을 기다리며 단단히 준비를 하였으나 함께 모의에 가담했던 사예 김질의 밀고로 단종 복위의 거사는 불발로 끝나고 성삼문 일가를 비롯한 사육신 등 무수한 인재들이 극형과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성삼문은 세조가 고문을 할 때 나으리라고 부르자 세조는 네가 나의 녹(綠)을 먹었거늘 어찌 나으리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나는 단종의 신하일 뿐 그대의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준 녹은 한 톨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 집에 가서 보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집에 가서 보니 세조에게서 받은 곡식은 고스란히 쌓여있어 화가 난 세조가 쇠를 불에 달구어 그의 팔과 다리에 화형을 가했지만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라 하며 신숙주를 향하여 너는 세종의 당부를 잊었느냐고 꾸짖으니 세조는 신숙주를 피하게 하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시를 남기는데!
목숨 재촉하는 북 울리는구나
돌아보니 해는 지고 있는데
오늘은 누구 집에서 잘거나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되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일편단심 그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 승과 삼촌 승(勝) 아우 삼빈, 삼고, 삼성, 아들 맹첨, 맹년, 맹종 등 어린아이까지 모두 살해되어 멸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