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
2024. 8. 25.(주일오전예배) 고린도전서 13:4-7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혹시 들어 보셨는가? 실존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이상 반복한다면 단호하게 인연을 끊어내라. 인간이 태어날 때 갖고 나온 고유한 본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결이 다른 사람과는 사사건건 부딪치기 마련이다. 얕은 관계는 맺을 수 있을지언정 깊은 관계는 맺을 수 없다. 인연을 깊게 맺을수록 훗날 내 상처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오래된 사이였다는 것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 맞지 않는 인연과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닌 인연은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 좁아지는 인간관계에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만 곁에 남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고유의 본성이 있는데, 그 본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과는 단호하게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쇼펜하우어의 이 말에 동의하는가?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의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다. 그때 많은 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헤엄을 쳐서 예수님께 나아온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갔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굽고 있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하여 떡과 생선을 준비하여 먹이신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실패한 것이 이번이 처음인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씀하였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동을 부당하다고 여겨서 따지듯이 말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행동이 얼마나 불경한가? 예수님은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되(마 17:4) 라고 하며 변화산에서 영원토록 살자고 말한다. 그때 베드로는 마치 자신이 큰 헌신을 하는 것처럼 주를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영광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는데, 베드로는 그 길을 막아 섰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고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또 17장에서 거듭하여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야단을 맞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으로 베드로는 자기의 고집을 버려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였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또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시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본성이 있기 때문에 두 번 실수한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찾으시고 용서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사람을 고쳐써야 하는가? 아니면 버려야 하는가? 장모가 3명이 사위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첫째 사위를 불러 강가를 걷다가 첫째 사위가 보는 앞에서 강에 빠졌다. 그때 큰 사위는 주저하지 않고 강으로 뛰어들어서 장모를 구하여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큰 사위 집 앞에는 고급 자가용이 세워졌고, 그 차안에 장모가 라는 글귀가 있는 쪽지가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장모는 둘째 사위를 데리고 강가로 갔다. 그리고 둘째 사위가 첫째 사위 때와 똑같이 강에 빠졌다. 그러자 둘째 사위는 첫째 사위보다 더 민첩하게 강으로 뛰어들어서 장모를 강에서 건져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둘째 사위 집에도 자가용이 서 있었고, 차 안에는 장모가 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장모는 셋째 사위를 불러 강가로 갔다. 그리고 셋째 사위가 보는 앞에서 물에 빠졌다. 그런데 셋째 사위는 장모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물로 뛰어들지 않고 돌아서 집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셋째 사위 집에는 첫째와 둘째 집에 세워진 자가용보다 훨씬 더 좋은 고급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차 안에 쪽지가 있었는데. 그 쪽지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장인이
혹시 여기 장인이 라는 쪽지를 쓰고 싶은 분이 없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먼저 본문을 읽기 바란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Love is, 또는 love isn`t 라고 하면서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면 사랑은 이것이다. 사랑은 이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에 앞에 3가지만 생각해 보기 바란다.
먼저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사랑은 고통이다 라고 해석해도 된다. 사랑은 가슴 두근거리고, 달콤한 것이다고 하지 않고 고통이다고 하였다. 그리도 사랑은 온유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은 길들어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가 알기로 얼룩말은 굉장히 힘이 좋고, 달리기도 잘한다고 한다. 그런데 얼룩말을 타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야생성이 강한 얼룩말은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함께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길들어져 있는 상태가 온유이다.
여러분은 온유함을 가지고 있는가? 제가 유튜브에서 최수종과 하희라가 방송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 최수종이 결혼한 후에 하희라의 나쁜 습관을 한가지 말하였는데, 그것이 하희라는 집에 들어가면 옷을 아무 곳에나 벗어 놓는다고 한다. 그러면 최수종은 하희라가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을 제자리에 걸어놓는다고 한다. 그때 최수종은 왜 옷을 이렇게 벗어 놓냐?고 말하지 않고, 그냥 제 자리로 정리하는 것이다. 만약 제가 최수종 같았으면 고함을 치면서 옷을 바로 걸으라고 했을텐데 최수종은 말없이 다 정리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결혼하여 3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최수종은 하희라의 옷을 말없이 정리하겠는가? 최수종은 하희라를 고치지 않고, 자기가 하희라에게 맞추고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수종은 우리는 사랑꾼이라 말한다. 사랑꾼은 배우자를 바른 것이라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랑을 온유한 사랑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랑한다는 말은 경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표현할 때 자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상대방이 이길 수 있도록 섬기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내가 승리한 것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아픈 것이고, 사랑은 함께하기 가장 좋은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랑은 경쟁하여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이기도록 배려하는 것이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바울이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고린도교회는 많은 은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자기 자랑을 일삼고 경쟁하였기에 교회는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가 하나 되려면 다양한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교회는 연합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 바울이 가르치는 이런 사랑이 있는가? 창세기 2장을 보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리고 간다. 그때 아담은 이는 뼈 주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기뻐한다. 그렇게 아담이 기뻐할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최초로 하신 명령이다. 하나님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도 연합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랑하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에서 부부로서 서로 사랑하여 연합되고, 또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연합되어 하나가 되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연합된 기쁨을 아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연합에 사랑으로 참예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부부간에 또 성도간에 사랑하여 연합의 기쁨을 맛보아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도 연합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사랑으로 연합된 가정과 교회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가? 이제 그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연합에 참예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