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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식의 능력. / 罪認識の力。(2023년 5월 14일 주일예배)
본문; 누가복음 5:1-11
눅 5:1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2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4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6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9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10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1. イエスがゲネサレト湖畔に立っておられると、神の言葉を聞こうとして、群衆がその周りに押し寄せて来た。2. イエスは、二そうの舟が岸にあるのを御覧になった。漁師たちは、舟から上がって網を洗っていた。3. そこで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そうであるシモンの持ち舟に乗り、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て舟から群衆に教え始められた。4. 話し終わったとき、シモンに、「沖に漕ぎ出して網を降ろし、漁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5. シモンは、「先生、わたしたちは、夜通し苦労しましたが、何もとれませんでした。しかし、お言葉ですから、網を降ろしてみましょう」と答えた。6. そして、漁師たちが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魚がかか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7. そこで、もう一そうの舟にいる仲間に合図して、来て手を貸してくれるように頼んだ。彼らは来て、二そうの舟を魚でいっぱいにしたので、舟は沈みそうになった。8. これを見たシモン․ペトロは、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主よ、わたしから離れてください。わたしは罪深い者なのです」と言った。9. とれた魚にシモンも一緒にいた者も皆驚いたからである。10. シモンの仲間、ゼベダイの子のヤコブもヨハネも同様だった。すると、イエスはシモンに言われた。「恐れることはない。今から後、あなたは人間をとる漁師になる。」11. そこで、彼らは舟を陸に引き上げ、すべて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지난 주일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상은 실력자를 원하지만, 우리는 능력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나누었지요. 실력자를 원하는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지만, 십자가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진 크리스천은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일상을 하루만큼 쌓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항상 아름다운 일상의 흔적들을 주님 앞에 쌓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메시지는 십자가의 능력을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좀 더 구체적이고 영적이며, 성경적인 관점에서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죄의 유혹인 사단의 속임에 넘어가 자기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는 하나님과 같은 권세를 가진 존재가 되기로 결단하고 지켜야 할 선을 제대로 넘어 버리게 됩니다. 창세기는 그 장면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4-6)
결국 인간은 자신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생각을 가지고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 판단의 모든 결과는 오히려 더 심각한 죄로 이어지게 되는 악순환의 길에 들어 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길을 걷는 결과가 곧 죄악과 범죄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내면의 상태나 동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가 나타난 것보다 죄를 지으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상태를 더욱 심각하게 여기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이 말씀의 가르침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0)
그러므로 죄란, 범죄를 저지르는 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내면의 사악하고 이기적인 의지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죄는 육신의 눈만으로는 도저히 감각할 수 없고 오로지 영적인 눈이 열려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악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이런 죄의 종(노예)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의 악한 행동과 말에 거리낌이 있다면 그것은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는 양심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지요.
하지만, 양심의 가능성이 열려서 자기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범죄를 멈출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또한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식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내면에 죄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은 영안이 열려야 가능한 일인데요.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장소인 게네사렛 호수, 즉 갈릴리 호수는 베드로가 돈벌이를 하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바다와 같은 호수에서 나름 물고기를 잘 잡는 실력자였습니다. 베드로와 그 형제들과 다른 어부들이 활동했던 갈릴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건물은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지고, 어부들의 배 모양도 조금 달라졌지만... 호수의 풍경은 당시나 지금이나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배에 타시고 물가의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베드로도 함께 그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쉽게 할 수 있겠지요.
말씀을 가르치시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직후 베드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두 배가 가득 찰 정도의 물고기를 잡게 되는 것인데요.
그리고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단순한 성경교사나 지식인 수준의 인물이 아닌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내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선생님(5절)”이라고 부르지만, 물고기를 끌어 올리고 나서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는 “주님(8절)”이라고 호칭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원어 성경에서도 분명히 그 차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단순한 존칭이고, 두 번째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단지 존경할 만한 인물을 뛰어넘는 ‘그리스도’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눈이 뜨이면 어떤 신비로운 현상을 혼자만 분별하고, 혹은 귀신과 같은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안목이 생겨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영안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쳐주시는 영안, 즉 영적인 시각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귀신 따위가 아니라...). 다윗이 시편을 통해 고백한 것처럼 그저 평범한 하늘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오늘 본문의 베드로도 영안이 열리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주님은 베드로의 발견과 안목을 칭찬하셨던 적이 한 번 더 있는데요.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지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로마의 우상인 ‘판’신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찾아오는 아주 번잡하고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사진 2장] 소위 사람들이 영적이라고 말하고, 영적인 파워가 풍성하다고 여기는 “파워 스팟”과 같은 그 분주한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의 소유자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때는 아직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잠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우리가 지난 주일에 십자가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을 나누었는데요. 바로 나의 죄를 대신 처벌받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볼 수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죄도 처벌받아 죽었음을 발견했을 때 진정한 영안이 열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과 자기 죄에 대한 인식... 즉 단순한 ‘죄책감’이 아닌 ‘죄인식’이 곧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느껴지고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데요.
자신이 그런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그 ‘죄인식’으로 사는 자는 능력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자기자신의 현실적인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영적인 부흥과 회복은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이들이 나타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 18세기 미국에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의 설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주일날에 에드워즈 목사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고 주일예배 때에 설교의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600년대, 1,700년대 미국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다가오는 빛 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그 죄를 그 밤에 해결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부흥은 그렇게 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람 교재 1 p.30)//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실력을 보여달라고 떼쓰는 행위인 우상숭배만 반복하게 됩니다.
그럼 ‘죄인식’의 능력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타인을 용납하며,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 태도와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 어떤 죄인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게 되는 신비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물론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과 ‘범죄’를 옳다고 방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와서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5)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 7b)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자리를 하나 둘 씩 떠납니다. 마침내 고발당한 여인만 남아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예수께서 ...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우리는 욕심을 품은 채 욕심쟁이를 욕합니다. 우리는 자기는 거짓으로 꾸미지만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비난하고 손가락질합니다. 우리는 자기도 이기적이면서 이기적인 누군가를 보면 분노하지요.
그러나 만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되면 우리는 자기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는 결국 타인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마치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우리도 타인을 정죄하는 마음의 돌을 내려놓게 될 것을 믿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롭다 여기지 않고 타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이 곧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상을 사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나, 그렇다고 다시 그가 죄를 짓도록 면죄부를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죄를 인식하고 타인의 죄를 용서한다고 해서 죄를 짓는 행위를 용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다움의 능력이 회복된 이들은 결국 죄를 이길 힘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를 인식하는 회개의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의 그 어떤 실력자가 되는 것보다 나를 더 나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동행으로 죄를 분명히 인식하며 생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일상과 일과를 든든하게 채우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성공과 실력을 덕목으로 여기는 세상은 결국 타락해 버렸습니다. 실력을 맹종하는 타락한 세상에서 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실패한 인생을 뜻합니다. 죄인 의식으로 사는 것이나, 죄를 인식하며 사는 것은 저주스럽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낙심의 인생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죄인인 것을 인정하도록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줍니다. 영안이 열리면 살아계신 주님의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곧 영생을 사는 삶의 시작입니다. 영생하는 능력이 곧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허무한 실력자가 지배하는 타락한 세상에서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사는 주님과의 동행에 분명한 결실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거룩한 삶의 궤적을 쌓는 일상을 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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