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장강 크루즈 여행=
여행코스:부산~북경~의창공항~굴원사당~장강유람선~용진계곡~신농계곡~백제성
삼협땜~구당12봉~무협~장강도크~성도~중경 아미산~삼소사~청도~설도공원~무후사~두보초당~티벳구체구~티벳 황룡풍경구~북경~부산
여행기간 : 2014년 10월6일~16일 10박11일
동행 : 조철제부부 진재윤부부 최창규부부 남종호 서원석 남시진 외 여성2명
1일차10월6일 아침 8시 경주에서 리무진 버스로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10시40분 이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공항 면세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제마다 구입하고 12시45분 CA130편에 탑승 14시10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아 시내 관광을 하고 17시20분 CA1823편으로 의창에 도착하니 22시10분이다 공항 청사를 나가니 가이드 전무송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연사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무안 의창(宜昌)은 중국 중부지역의 중요한 교통 중추도시며 높은 산과 평원이 어우러져 있는 의창은 독특한 지리적인 환경과 위치로 특색이 짙은 음식문화를 형성하고 있단다. 의창식당에서 고량주로 반주 삼아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숙소로 직행하였다.
2일차10월7일
굴원(屈原)과 초사(楚辭) 굴원의 고향을 굴원고리(屈原故里)라고 한다 자현(秭縣 지시엔)의 시내에서 동북 쪽으로 30km 떨어진 굴평하(屈坪河)가 흐르는 굴평(屈坪)이 있는데 굴원사(屈原祠)와 굴원독서사(讀書祠)가 있다
중국 북방문학의 대표라면 시경(詩經)이 있고,. 남방문학의 대표라면 굴원의 초사를 들 수 있다. 시경 보다는 늦은 기원전 4세기경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중국의 애국시인으로 존경을 받는 굴원은 대표작으로 이소(離騷)가 있다 천문(天問),구가(九歌) 특히 구가 중에 나오는 상군과 상부인(湘君 湘夫人)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맺어지지 못하는 비련의 이야기를 곡절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소(離搔)는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정시로 270여 구와 2,400여자로 써 놓았다. 내용은 굴원 자신의 신세와 처한 어려움 그리고 초(楚)나라에 대한 장래 운명의 걱정과 관심을 피력하고 있는데 시 속에서 그는 옥룡을 타고 채색 수레를 타고 달과 바람, 태양의 신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천상에서 노닐면서 자기의 이상을 피력하였으며, 마지막은 굴원이 초나라를 떠난다
특히 굴원은 비운의 시인이기도 하다. 삼여대부로 있으면서 너무 깨끗한 나머지 부패한 관료들의 탄핵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면서 읊은 어부사는 필자가 즐겨 외우는 시며 말년에 상수에 투신 자결하고 마는 비운의 시인이다.
어부사(漁父辭)-굴원(屈原): BC 343경 중국 초나라 사람
屈原이 旣放에 游於江潭하고 行吟澤畔할새 顔色憔悴하고 形容枯槁러니
漁父 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與아 何故로至於斯오 屈原이 曰擧世-皆濁이어늘 我獨淸하고 衆人이 皆醉어늘 我獨醒이라 是以見放호라 漁父-曰聖人은 不凝滯於物하고 而能與世推移하나니 世人이 皆濁이어든 何不淈其泥而揚其波하고 衆人이
皆醉어든 何不餔其糟而歠其醨하고 何故로 深思高擧하야 自今放爲오
屈原이 曰吾는聞之호니 新沐者는 必彈冠하고 新浴者는 必振衣라 安能以身之察察
로 受物之汶汶者乎아 寧赴湘流하야 葬於江魚之腹中이언정 安能以皓皓之白으로
而蒙世俗之塵埃乎아 漁父 莞爾而笑하고 鼓枻而去하야 乃歌曰, 滄浪之水-淸兮어
든 可以濯吾纓이오, 滄浪之水-濁兮어든 可以濯吾足이로다 遂去不復與言하다.
⋆삼유동(三游洞)
의창에 소재한 삼유동 서기 819년 백거이(白居易), 백행간(白行簡), 원진(元稹) 3명은 이릉(彝陵)(현재이창)에 모여 함께 싼유둥을 유람하면서 각각 시를 지었다. 그리고 백거이의 《삼유동서(三游洞序)을 동굴 벽에 새겼다. 싼유둥이란 백거이의 시에서 얻은 명칭이라고 하여 유명해졌다. 송(宋)나라 때, 유명한 문학가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등 세 사람도 싼유둥에 와서 유람하면서 각자 시를 지어 동굴 벽에 새겼는데 후삼유(後三游)'라고 부른다. 싼유둥은 지세가 험준하다. 동굴내부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내부면적이 넓다. 길이 약 30m, 너비 약 23m, 높이 약 9m 되는 동굴은 고대의 지하수가 암석층을 따라 암석 면을 부단히 용식 하면서 내려앉아 형성된 석회암 종유동이다. 싼유둥의 지층지질 연대는 지금부터 약 5억~6억 년 전이라고 한다. 종유석 기둥 3개가 가로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동굴이 앞·뒤 2개 공간으로 나눠지게 한다. 앞부분은 환하면서도 트여 있고 벽에 시문(詩文)이 가득 새겨져 있다. 옆에는 작은 동굴이 있어 밖으로 통한다. 고대부터 의창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싼유둥을 유람했고 다양한 글씨체와 시가, 산문, 벽화, 제사 등 형식으로 경물을 찬송하고 동굴 벽에 새겨 넣었다. 지금까지도 동굴 안팎에는 송나라 구양수(歐洋修)가 남긴 글귀, 명나라 시기 다시 새겨 넣은 《삼유동서》 등 다양한 새김과 비문 40여 점 등 진귀한 고대문화 자료가 남아있다. 동굴 옆의 오솔길을 따라 산꼭대기의 [至喜亭]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장강[長江]을 볼 수 있다. 가파르고 험준한 오솔길의 난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절벽 산허리에 작은 늪이 있고 샘물이 흐른다. 이곳이 바로 의창에서 유명한 명승고적인 루유취안[陸游泉]이다. 송나라의 시인 육유(陸游)가 싼유둥을 유람하면서 이곳에 머물러 샘물에 차를 우려 마시면서 시를 지어 돌 벽에 새겼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루유취안이라고 불렀다.
夜雪(야설) 밤에 내린 눈- 白居易(백거이)
已訝衾枕冷(이아금침냉) 이부자리 차가움을 이상히 여겨,
復見窓戶明(부견창호명) 다시 바라보니 창이 환하네.
夜深知雪重(야심지설중) 깊은 밤 눈이 많이 내렸음을 알겠노라!
時聞折竹聲(시문절죽성) 이따금 부러지는 대나무 소리에.
3일차10월8일 6시50분 의창에서 유람선이 출발한다 의창~서능협(98km)~무협(45km)부당협(8km)을 거슬러 올라가다 토가족이 사는 마을 관광을 한단다.
용진계곡 삼협인가(三峽人家)는 양자강 주변의 산, 강, 계곡을 배경으로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토가족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곳이란다.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한 후 도보로 등영석(燈影石)과 석령비(石令碑) 등 수려한 기암괴석과 토가족 고성 파왕궁(巴王宮), 산상인가(山上人家), 등영동(燈影洞), 楚나라의 편종(編鍾) 공연, 용계교(龍溪橋), 수상인가(水上人家), 용진계곡(龍進溪谷)의 아름다운 황룡폭포(黃龍瀑布)와 신응폭포(神鷹瀑布), 계변인가(溪邊人家)에서는 토가족 전통 결혼식도 구경을 하였는데 60대 중반쯤 되는 사회자가 꼭 중국의 지도자였던 등소평과 빼어 닮았다. 토가족 전통 결혼식 재현을 하는데 신랑은 즉석 조달이다. 전통결혼식을 보기 위하여 무대 앞 통나무 객석에 않아 있는 관광객을 무자기로 점 찍어 신랑으로 삼아 결혼식을 하는 이색적인 광경을 보여 주어 흥미진진했다. 승선시간이 임박하여 서둘러 선착장에 가서 다시 배에 오른다
◈ 장강삼협(장지앙 산쌰)
세계에서 세 번째 긴 강인 양쯔강을 중국 사람들은 장강이라 한다. 의창에서 중경까지 배를 타고 3박5일에 걸쳐 올라가는 뱃길로 서릉협, 무협, 구당협 계곡을 장강삼협이라 한다. 특히 삼국지의 명소를 볼 수 있는 코스로 촉한의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오나라를 치러 내려가기 전 군대를 주둔시켰던 천성산, 장비묘, 유비가 마지막 숨을 거둔 백제성과 조조가 오나라와 제갈공명의 연합군에게 대패를 했던 적벽까지 볼 수 있다. 현대 인류의 역사라 하는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 댐인 산싸댐을 통과하는데 상해에서 중경까지 오르내리는 화물선이나 유람선들이 이 댐을 통과하려면 수문식 도크를 이용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가는데 5시간이나 걸린다. 유람선 관광 코스 중에 바로 땜 주변 관광이 필수다.
4일차 10월9일 신농계곡 관광을 위해 작은 배에 옮겨 타고 이동하여 신농계관에 도착하여 민속공연과 각종 볼거리를 구경하였다. 비록 염제 신농씨와 관련된 역사의 기록이 적고 상세하지도 않으며 중국의 정사(正史) 중에도 염제에게 기(紀) 혹은 전(傳)을 세우지 않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도 잠깐 언급하는데 그쳤을 뿐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경(經), 사(史), 자(子), 집(集) 중에 분산되어 나타나는 염제 신농씨에 관한 자질구레한 기록 중에서 염제 신농씨가 장강문명을 창립하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성(百濟城)
구당협을 통과하여 중경에 당도하여 백제성 관광에 나섰다. 중국 쓰촨 성[四川省] 펑제 현[奉節縣] 동쪽, 후베이 성[湖北省]의 경계 가까이, 바이디 산[白帝山] 기슭에 있는 옛 성. 왕망 때 이 땅에 있는 우물에서 흰 용이 나오는 것을 본 공손술이 한(漢)의 토덕(땅의 신비한 음덕)을 자신이 이어받게 되었다고 하며 스스로 백제라 선포한 뒤 성을 쌓기 시작했다. 삼국시대 촉의 유비는 오를 토벌하기 위해 손수 원정에 나섰다가 패해 백제성으로 퇴각한 뒤, 이곳의 이름을 영안으로 고쳤다.
유비는 이곳에서 죽었다. 가까이에 공명팔진도의 유적이 있다. 또 바로 동쪽에 양쯔 강[揚子江] 싼샤[三峽]의 서쪽 입구인 취탕샤[瞿唐峽]가 있다. 이백이 노래한 유명한 조발백제성이 있다
早發/白帝城 李白 조발백제성 -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
朝辭白帝彩雲間 : 아침 일찍 오색구름 감도는 백제성을 떠나
千里江陵一日還 : 천리길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
兩岸猿聲啼不住 :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네
輕舟已過萬重山 : 나 홀로 탄 작은 배는 이미 만 겹 산을 지나왔네
5일차10월10일 풍도귀성 (豊都鬼城)
유람선이 중경에 도착하여 선상에서 하루 밤을 숙박하고 아침을 맞았다. 날씨는 매우 화창하다 배에서 식사를 하고 풍도귀성으로 올랐다.
풍도는 장강삼협 유람선이 처음으로 정박하는 곳으로 산 위에 위치해있는 성에 도착하면 그 분위기가 오묘하여 귀성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녹명산 기슭에 위치해있으며, 중경과의 거리는 172km이며 풍도는 2,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물산이 풍요롭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걸출한 사람이 있는 고성(古城),역대명인, 시인 백거이, 이상온, 소식, 범성대, 육유 등 모두 일찍이 장강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1986년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여 1992년에 여행객이 백만을 넘었다고 한다.
해외여행객이 매년 수만 명으로서 장강삼협 풍경구가 여행코스의 하나로 되였다. 풍도에 귀신성으로 불리는 풍도귀성이 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영혼이 모이는 곳으로 사람이 살았을 때 지은 죄가 있으면 죽은 후에 죄값을 치른다는 교훈을 주는 사찰이 있다. 내부에는 지옥과 천당을 만들어 놓았다. 지옥을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오싹하다.
장강 댐으로 떠난 이주민
장강 댐을 막고 집을 떠난 이주민이 자그마치 120만이란다. 울산시 전체 인구보다 많다. 도시로 나간 주민들도 많겠지만 대부분 장강 좌우 강변 산허리에 집을 짓고 다락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산다. 참으로 정겹고 고즈넉하게 우리들 눈에 보이지만 막상 이곳 오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6일차 10월11일 유람선 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식사를 하고 07시20분에 체크 아웃을 하고 하선을 하였다. 자그마치 배에서 4박5일을 보낸 것이다.
중경에서 성도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중경 三角地流로 이동 시내를 관광한 후에 버스를 타고 중경 전철역에 가서 2시간 기다렸다가 열차를 타고 성도로 가는데 중경시는 인구가 3,500만의 거대한 도시로 예전에는 아주 못살았는데 성장 보시라이가 시정을 잘 펴서 중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성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부정부패로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낙산대불(樂山大佛)과 동방불도(東方佛都)
중국대륙 남서부 내륙(內陸)에 깊숙이 위치한 쓰촨성(四川省)은 크게 촨시고원(川西高原)과 쓰촨분지(四川盆地)로 나누어지는데 성(省) 면적이 우리나라 남한면적의 5배나 된다. 서쪽으로는 칭하이성(靑海省)과 티베트(藏族)자치구, 북쪽은 간쑤성(甘肅省)과 산시성(山西省), 남쪽과 동쪽은 윈난성(雲南省),구이저우성(貴州省)과 인접하여 있는 내륙이다. 성도(省都)는 청두(成都)이고 충칭(重慶)직할시를 포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경상남도에 부산광역시가 있는 경우와 같다. 중국의 황허(黃河)강 유역인 중원(中原)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독특한 쓰촨문명(四川文明)을 이루었으며, AD 3세기 유비(劉備)가 세웠던 촉한(蜀漢)의 근거지였던 곳으로 당시에는 익주(益州)라고 불렸다.
쓰촨성에는 관광명소로 이름난 곳이 많은데 여기서는 청두(成都) 인근의 러산시(樂山市)에 있는 낙산대불(樂山大佛)과 동방불도(東方佛都)를 소개하고자 한다.
쓰촨(四川)은 장강(揚子江), 민강(岷江), 퉈강(沱江), 자릉강(嘉陵江)의 네 개의 강이 성(省) 내로 흐른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낙산시(樂山市) 앞에는 다시 장강(揚子江)의 지류인 민강(岷江), 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가 합류하고 그곳에 깎아지른 붉은 사암절벽이 있는 능운산(凌雲山)이 우뚝 서 있다.
이 능운산(凌雲山)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세계유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크게 낙산시 쪽의 강안(江岸) 절벽에 조성된 낙산대불(樂山大佛), 반대쪽에 조성된 동방불도(東方佛都) 산 정상부근에 조성된 시인 소동파(蘇東坡)를 기념하여 조성된 동파루(東坡樓)가 있는 공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산 전체가 수많은 조각들과 사찰(寺刹)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고 보면 된다. 불자(佛子)들에게는 성지(聖地)란다. 상기 설명은 모두 가이드의 설명을 적었다.
낙산대불을 보러 오후 4시40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배에 올랐다. 한참을 가니 절벽 아래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여름철 장마 때 항상 수해가 많았던 곳으로 이곳의 참상을 본 해통선사(海通禪師)께서 수해(水害)를 막아보려 대불(大佛)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대불은 의자에 앉은 형상의 좌상(坐像)이다. 전체 높이 71m, 머리길이 14,7m, 머리넓이 10m, 어깨넓이 28m, 귀 길이 6.72m, 코 길이 5.33m, 발 하나의 넓이가 5.5m, 길이가 11m 발 위에만 100명이 설 수 있고 귓구멍 속에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고,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石佛)이라는데 조성하는데 90년이 걸렸다 하고 조성 시기는 당나라 때(8세기)란다.
절벽을 통째로 파 들어 가며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위쪽에서 불상의 측면을 보며 지그재그 식으로 내려오는 조도(鳥道)가 아슬아슬하고, 근처 바위 벽은 온통 동굴(洞窟)과 불상조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대불사(大佛寺), 오룡사(烏龍寺), 능운사(凌雲寺)등 사찰이 볼만하며 산꼭대기에는 해통선사의 골분(骨粉)을 모셨다는 영보탑(靈寶塔)이 우뚝 솟아있어 멀리서도 보이는데 13층, 35m 높이의 전탑(塼塔)으로 매우 아름답다
7일차 10월12일■ 아미산(보현보살)3,099m
아미산 관광을 위하여 버스로 이동했다. 산 입구에 도착하니 비가 추적거리고 안개가 끼어 시야가 가려 오늘 조망은 아무래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했던 것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블카 길이가 1,100m 100명이 탄다. 거대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아미산 정상에 올라가니 거대한 보현보살 부처님이 관광객들을 압도한다.
아미현에서 서남쪽으로7Km, 성도에서160km, 사천분지의 서남변두리에 우뚝 솟아 있는 아미산은 다른 하나의 불교 명산중의 하나로 산세가“가늘고 길게 굽어진 아름다운 미인의 아미와 같다고”하여 얻어진 이름이란다. 아미산에는 사원도 많고 불사가 빈번하여 최근 3년 동안 900여 회의 불사가 있었단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금정으로 해발 3,099m이고 산기슭에서 산꼭대기까지 50여㎞의 석경이 구비구비 뻗어있다. 금정에 오르면 부광, 구름바다, 해돋이, 성등 4대 기관을 구경할 수 있다.
아미산은 보현 보살이 현령, 설법하는 도량으로 유명한 사찰은 보국사, 복호사,
만년사, 청음각등이 있다. 만년사의 구리로 주조한,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상은(높이 7.3m, 무게 62톤)중국의 중요 문화재중의 하나이다. 보현은 이, 정, 행의 덕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석가모니의 右挾侍菩薩이다.
산 위에 있는 세상지는 보현보살이 타고 다니던 이빨이 6개인 흰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곳이라고 한다.
⋆복호사 : 보국사에서 서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절로 송나라 때에는‘신룡당’이라고 했다. 그 후 부근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며 해를 끼쳐 그것을 누르기 위해 복호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아미산 보현신앙을 응축한 화엄동탑은 라마탑 양식이면서 화엄경의 설법장면과 내용을 담고 있다.
높이는 5.8m로 5만 자에 달하는 화엄경문이 새겨져 있다. 원나라 때 만들어져 보국사에 있었으나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뢰음사 : 복호사와 2㎞ 떨어진 곳에 위치. 명나라 때에는‘관음당’이라 하고 청나라 초기에는 여기까지 오면 속세에서 벗어나는 곳이라 해서‘해탈음’이라 했다. 1884년부터는 뢰음사라고 불렀다.
⋆청음각 : 보국사에서 15㎞ 거리에 있다. 계곡 동쪽의 백룡강과 서쪽의 흑룡강이 청음각 아래에서 합류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단다. 합류지점에 검고 반들반들한 소의 심장처럼 생긴 돌 하나가 있는데 우심석이라 부르고, 가까운 지점에 있는 돌다리 두 개를 쌍교청이라 부른다고 한다.
⋆ 세상지(洗象池) : 해발 2,100m되는 곳에 있는 절로 명나라 때 만들었다. 절 앞에는 육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은 보현이 코끼리를 씻어준 곳이라고 한다. 특히 세상지 주변 등산로에는 원숭이가 많아서 먹을 것을 주면 무리를 이루어 몰려 드는 것이 볼만한데 핸드백이나 소지품을 어설프게 하였다가는 원숭이에게 뺏기는 수모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금정 : 해발 3.077m로 동한 때 세운 절과 금칠을 한 전당이 있었는데 모두 훼손되었다고 한다 만불정은 입산금지 지역이므로 금정이 등산로의 정상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미산 전경은 가장 멋지다 도중의 등산로에 서는 나무에 가려 거의 아미산의 경치를 볼 수가 없으나 여기서는 멋진 일출을 볼 수가 있단다. 또한 운이 좋으면 불광이라 부르는 원형의 무지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삼소사(三蘇祠)
미산시내에 있는 소동파 3부자 사당에 가니
지진으로 수리를 하고 있었다.
문을 굳게 잠그고 관광객은 받지 않았다.
우리들은 아쉽게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겉만 구경하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삼소(三蘇)는 송나라 때 문명(文名)을 떨친 소순소식·소철 3부자를 가리킨다. 소씨의 선조가 당나라 때 메이저우(眉州;메이산의 옛 명칭)의 자사(刺史)를 지내면서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단다. 삼소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훼손된 옛집을 명나라 홍무제(洪武帝) 때 사당으로 조성하였으나 이후 전란으로 훼손되었고, 현존하는 삼소사는 청나라 말기에 복구된 것이라고 한다.
부지면적은 5만 2300㎡이다. 주요 건축물인 대문·대전(大殿)·계현당(啓賢堂)·목가산당(木假山堂)은 면적 1330㎡인 연못의 남쪽으로 반도처럼 튀어나온 곳에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규모의 녹지에 운서루(雲嶼樓)·집미정(集美亭)·포월정(抱月亭)·피풍사(披風榭)·비정(碑亭) 등의 건축물과 세연지(洗硯池)가 있다고 한다. 세연지 한가운데 조성된 섬에는 서연정(瑞蓮亭)이 있다. 전체적으로 연못과 녹지의 면적이 사당의 주요 건축물 면적을 훨씬 초과한다.
정전(正殿)인 대전 앞에는 '시부시자(是父是子)' '문봉정치(文峰鼎峙)' '문장기절(文章氣節)'이라고 쓰여진 3개의 현판이 있다. 현판 아래에는 삼소의 소상(塑像)이 있고, 대전 안에는 명·청 시기에 삼소와 관련하여 제작된 예술 작품들이 보존되어 있단다. 대전 안쪽의 계현당에는 '문헌일가(文 獻一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된 삼소의 시문집과 서화 등이 있으며 계현당 옆에 있는 목가산당에는 약 1m 높이의 '산(山)' 자처럼 생긴 나무 뿌리가 보존되어 있다. 소순은 이 나무뿌리를 어떤 노인에게서 샀는데, 그들 3부자가 모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도록 한 영험 한 물건이라 여겼다고 전한다. 세연지에는 삼소가 매일 시서화(詩書畵)를 연마한 뒤 붓과 벼루를 씻어 연못의 물이 검게 변하였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여기서 '시부시자(是父是子)'는 이 아비에 이 아들. 그 아비를 닮은 그 자식. 父子(부자)가 모두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다.
필자는 소식이 지은 전,후 적벽부를 모두 외우고 또 소동파를 좋아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 일정이 너무나 길어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기꺼이 동참하였는데 정말이지 이번 여행에는 20여 차래 의 해외 여행 중에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가 있었다.
⋆前赤壁賦
壬戌之秋七月旣望에 蘇子-與客으로 泛舟遊於赤壁之下하니 淸風은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擧酒屬客하고 誦明月之詩하야 歌窈窕之章이러니 少焉에 月出於東山之上하야 徘徊於斗牛之間하니 白露는 橫江하고 水光은 接天이라 縱一葦之所如하야 凌萬頃之茫然하니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如遺世獨立하야 羽化而登仙이라 於是에 飮酒樂甚하야 扣舷而歌之하니 歌에 曰 桂棹兮蘭槳으로 擊空明兮泝流光이로다 渺渺兮余懷여 望美人兮天方이로다 客有吹洞簫者하야 倚歌而和之하니 其聲이 嗚嗚然하야 如怨如慕하며 如泣如訴하고 餘音이 嫋嫋하야 不絶如縷하니 舞幽壑之潛蛟하고 泣孤舟之嫠婦라 蘇子-愀然正襟하고 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오
客이 曰 月明星稀하고 烏鵲이 南飛는 此非曹孟德之詩乎아 西望夏口하고 東望武昌
하니 山川이 相繆하야 鬱乎蒼蒼이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아 方其破荊州-下江
陵하야 順流而東也에 舳艫千里오 旌旗蔽空이라 釃酒臨江하고 橫槊賦詩하니 固一
世之雄也러니 而今安在哉오 況吾與子로 漁樵於江渚之上하야 侶魚鰕而友糜鹿이라
駕一葉之扁舟하야 擧-匏樽以相屬하니 寄-蜉蝣於天地에 渺滄海之一粟이니 哀吾生
之須臾하고羨長江之無窮하야 挾飛仙以遨遊하고 抱明月而長終이라 知不可乎驟得일
새 託遺響於悲風하노라 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아 逝者-如斯로되 而未嘗往也며
盈虛者-如彼로되 而卒莫消長也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면 則天地로 曾不能以一瞬이
요 自其不變者而觀之면 則物與我-皆無盡也라 而又何羨乎리오 且夫天地之間에 物
各有主라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어니와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寓之而成色하야 取之無禁이오 用之不竭이니 是는 造物者之無
盡藏也요 而吾與子之所共樂이니라 客이 喜而笑하고 洗盞更酌하니 肴核이 旣盡이
오 盃盤이 狼藉(적)이라 相與枕藉乎舟中하여 不知東方之旣白이러라
⋆ 後赤壁賦
是歲十月之望에 步自雪堂하야 將歸於臨皐할새 二客이 從予라 過黃泥之坂하니 霜露旣降하고 木葉盡脫이라 人影在地어늘 仰見明月이라 顧而樂之하여 行歌相答이러니 已而요 歎曰有客無酒요 有酒無肴로다 月白風淸하니 如此良夜何오 客曰 今者薄暮에 擧網得魚하니 巨口細鱗이 狀似松江之鱸라 顧安所得酒乎아 歸而謀諸婦하니 婦曰 我有斗酒하야 藏之久矣라 以待子不時之需로라 於是에 攜酒與魚하고 復游於赤壁之下하니 江流有聲하고 斷岸千尺이라 山高月小하고 水落石出하니 曾日月之幾何완대 而江山을 不可復識矣라 予乃攝衣而上하여 履巉巖하고 披蒙茸하여 踞虎豹하고 登虯龍하야 攀栖鶻之危巢하고 俯馮夷之幽宮하니 蓋二客不能從焉이라 劃然長嘯하니 草木震動이라 山鳴谷應하고 風起水涌하니 予亦悄然而悲하고 肅然而恐하야 凜乎其不可留也라 反而登舟하야 放乎中流하야 聽其所止而休焉이러니 時夜將半에 四顧寂寥한대 適有孤鶴이 橫江東來하니 翅如車輪이요 玄裳縞衣로 戛然長鳴하야 掠予舟而西也러라 須臾에 客去하고 予亦就睡러니 夢에 一道士羽衣翩僊하야 過臨皐之下라가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아 問其姓名하니 俛而不答이라 嗚呼噫嘻라 我知之矣로라. 疇昔之夜에 飛鳴而過我者라 非子也耶아 道士顧笑하고 予亦驚悟하야 開戶視之하니 不見其處러라
8일차 10월13일설두공원망강루
당나라 때의 여류시인 설도를 기리는 유적지로 사천성 보호문화재이기도
하다. 설도는 평생 대나무의 푸르름을 사랑한 시인으로 후세 사람들은 원내에 대나무를 심어 시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망강루 주변엔 총 150여종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대나무 공원으로도 불린다. 옛날 먼 길을 떠나는 친구나 가족을 송별하는 성두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랑하는 이가 떠나가는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는데 서 망강루란 이름이 연유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공원을 둘러보고 설도 묘에 가서 최창규씨 부인이 소리 한 곡조에 나는 취객가를 답했다. 다음은 설도의 춘망사란 시다.
설도 춘망사(春望詞) 四首
(一)
花開不同賞(화개불동상):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불동비):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 (욕문상사처):묻노니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 때맞쳐 꽃들만 피고 지네
(二)
攬草結同心 (람초결동심) :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遣知音 (장이유지음) :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 봄 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 꽃은 바람에 날로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 (기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 그대와는 한마음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 부질없이 풀잎만 맺었는고
(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후사 (武侯祠)
청도는 삼국지 유비가 세운 촉 나라의 수도이다. 삼국지는 복숭아 과수원에서 의형제로 맺은 것을 말하는 도원결의 유비, 관우, 장비의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무후사는 유비무덤이 있는 곳이지만 제갈량의 호인 무향후를 따서 무후사라 명명했다 하니 제갈량의 명성을 짐작하게 하는데 명절이 되면 자기 자식들도 제갈량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데 한글 설명이 곳곳에 붙어 있어 관광에 도움을 준다.
무후사 (武侯祠)는 유비현덕(劉備玄德)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사당으로, 원래는 유비와 공명의 묘가 각각 다른 곳에 있었는데, 14세기 말엽에 합친 것이란다. 유비가 주군(主君)이었던 까닭으로 원래의 명칭은 유비의 시호 소열제에서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였지만, 제갈공명의 지혜를 높이 샀던 사람들이 그의 시호인 충무후(忠武侯)를 본떠서 일반적으로 무후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당 내부에는 촉한(蜀汉:삼국의 하나로 유비가 세움)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清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蜀汉)의 군신서열에 의하여 배치되어 있다.
이 밖에 탕뻬이[唐碑,당비]는 사당 내의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 비석에는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있으며, 명대(明代)에 이르러 '삼절비(三绝碑)'라고 불렸다.
총면적 3만 7,000㎡으로, 현존하는 건물은 1672년에 재건된 것이다. 원추형의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작은 구릉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 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寢殿)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 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 문은 너비 12m, 안 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릉(漢昭烈陵)'이라고 적힌 현판이 높이 걸려 있다.
⋆출사표 [出師表 ]
출사표란 장수가 전쟁터로 나가기 전 임금에게 그 뜻을 올리는 상주문 이다.
이중에 가장 으뜸은 제갈량이 유비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인 유선에게 올리는 출사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장수가 아니라고 한다.
(前出師表 諸葛亮)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하시고 今天下三分에 益州疲弊하니 此誠危急存亡之秋也니이다 然이나 侍衛之臣이 不解於內하고 忠志之士가 忘身於外者는 蓋追先帝之殊遇하여 欲報之於陛下也니 誠宜開張聖德하샤 以光先帝遺德하여 恢弘志士之氣요 不宜妄自菲薄하여 引喩失義하여 以塞忠諫之路也니이다
宮中府中이 俱爲一體니 陟罰臧否를 不宜異同하소서 若有作奸犯科와 及爲忠善者어든 宜付有司하여 論其刑賞하여 以昭陛下平明之理요 不宜偏私하여 使內外異法也니이다 侍中侍郞郭攸之 費褘 董允 等은 此皆良實이라 志慮忠純하니 是以로 先帝簡拔하샤 以遺陛下하시니 愚以爲宮中之事는 事無大小히 悉以咨之然後에 施行하시면 必能裨補闕漏하여 有所增益이리이다 將軍向寵은 性行淑均하고 曉暢軍事하니 試用於昔日에 先帝稱之曰 能이라하셨으니 是以로 衆議擧寵爲督하니 愚以爲營中之事는 事無大小히 悉以咨之하시면 必能使行陣和睦하고 優劣得所也리이다
親賢臣遠小人은 此先漢所以興隆也오 親小人遠賢臣은 此後漢所以傾頹也라 先帝在時에 每與臣論此事에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니 侍中尙書長史參軍은 此實貞亮死節之臣이니 願컨대 陛下親之信之하시면 則漢室之隆을 可計日而待也리이다
臣本布衣로 躬耕南陽하여 苟全性命於亂世하고 不求聞達於諸侯하니 先帝不以臣卑鄙하시고 猥自枉屈하샤 三顧於草廬之中하샤 咨臣以當世之事하시니 由是로 感激하여 遂許先帝以驅馳러니 後値傾覆하여 受任於敗軍之際하고 奉命於危難之間이 爾來二十有一年矣니이다
先帝知臣謹愼故로 臨崩에 寄臣以大事也시니 受命以來로 夙夜憂嘆하여恐託付不效하여 以傷先帝之明이라 故로 五月渡瀘하여 深入不毛하여 今南方已定하고 兵甲已足이라 當獎率三軍하여 北征中原하여 庶竭駑鈍하여 攘除姦兇하여 興復漢室하여 還于舊都가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니이다 至於斟酌損益하여 進盡忠言은 則攸 之 褘 允之任也니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하시고 不效則治臣之罪하샤 以告先帝之靈하시고 責攸之 褘 允等之咎하샤 以彰其慢하시고 陛下亦宜自謀하샤 以諮諏善道하고 察納雅言하여 深追先帝遺詔하소서 臣不勝受恩感激하여 今當遠離에 臨表涕泣하여 不知所云이로소이다
(後出師表)
先帝慮漢賊不兩立하고 王業不偏安이라 故로 託臣以討賊也하시니 以先帝之明으로 量臣之才에 固知臣伐賊이 才弱敵强也나 然不伐賊이면 王業亦亡하리니 惟坐而待亡으론 孰與伐之리오 是故로 託臣而弗疑也시니이다 臣受命之日에 寢不安席하고 食不甘味하여 思惟北征이면 宜先入南이라 故로 五月渡瀘하여 深入不毛하여 幷日而食하니 臣非不自惜也로되 顧王業不可得偏安於蜀都라 故로 冒危難하여 以奉先帝之遺意어늘 而議者謂爲非計라하니이다 今賊이 適疲於西하고 又務於東하니 兵法에 乘勞라하니 此進趨之時也라 謹陳其事如左하노이다
高帝明竝日月하시고 謀臣淵深이나 然涉險被創하여 危然後安이러니 今陛下未及高帝하시고 謀臣不如良平이어늘 而欲以長策取勝하여 坐定天下하시니 此는 臣之未解一也니이다 劉繇, 王朗은 各據州郡하여 論安言計에 動引聖人이로되 群疑滿腹하고 衆難塞胸하여 今歲不戰하고 明年不征이라가 使孫策坐大하여 遂幷江東하니 此는 臣之未解二也니이다
曹操智計殊絶於人하여 其用兵也 髣髴孫吳나 然困於南陽하고 險於烏巢하고 危於祁連하고 偪於黎陽하고 幾敗北山하고 殆死潼關하여 然後僞定一時爾어늘 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하니 此는 臣之未解三也니이다 曹操五攻昌霸不下하고 四越巢湖不成하고 任用李服而李服圖之하고 委任夏侯而夏侯敗亡하니 先帝每稱操爲能이나 猶有此失이어든 況臣駑下가 何能必勝이리오 此는 臣之未解四也니이다
自臣到漢中으로 中間朞年耳나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郃, 鄧銅等과 及曲長屯將七十餘人과 突將, 無前, 賨叟, 靑羌, 散騎, 武騎一千餘人하니 此皆數十年之內의 所糾合四方之精銳요 非一州之所有니 若復數年이면 則損三分之二也리니 當何以圖敵이리오 此는 臣之未解五也니이다 今民窮兵疲라도 而事不可息이니 事不可息이면 則住與行이 勞費正等이어늘 而不及蚤圖之하고1) 欲以一州之地로 與賊持久하니 此는 臣之未解六也니이다
夫難平者는 事也라 昔에 先帝敗軍於楚하시니 當此時하여 曹操拊手하여 謂天下已定이러니 然이나 後에 先帝東連吳越하고 西取巴蜀하며 擧兵北征에 夏侯授首하니 此操之失計요 而漢事將成也라 然이나 後에 吳更違盟하여 關羽毁敗하고 秭歸蹉跌하며 曹丕稱帝하니 凡事如是하여 難可逆見이니이다 臣鞠躬盡瘁하여 死而後已니 至於成敗利鈍하여는
非臣之明所能逆覩也로소이다
⋆두보초당
당나라 최고의 시인이었던 두보가 3년 동안 기거했던 곳. 그는 759년에 있었던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서 이곳에 3년 동안 기거했다. 원래는 북송 때 지어진 사찰인 범안사(梵安寺)였다. 약 20㏊에 이르는 면적에 조성된 초당은 두보가 머물 당시는 작은 규모였지만, 명·청나라 때의 확장공사를 거쳐서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시사당(詩史堂)이 있고, 그 옆의 진열실에는 각국의 말로 번역된 시집 번역본이 있으며, 두보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더 안쪽으로 공부사(工部祠) 등의 건물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한가로운 정원이 꾸며져 있다. 두보는 이곳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240여 편의 시를 지었다. 필자도 두보 시를 좋아하여 여러 수를 외우는데 초당에 와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초당을 구경하고 난 후에 공항 주변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라식당에 들어가서 삼겹살을 안주 삼아 고량주와 한국산 소주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얼굴이 붉게 취기가 감돈다. 오후 5시시20분 성도공항에서 비행기로 동티벳 구체구공항에 도착하니 20시다. 아까 성도에서 과음 탓으로 숙취가 심하여 티벳별미 야크불고기를 음미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웠다. 고산이라 그런지 공기도 희박하고 숙취로 머리도 아프고 설사도 나고 고산 호텔에서 괴로운 밤을 지새웠다.
필자는 두보의 시 중에 음중팔선가 한별 등 몇 수를 외우므로 여기에 싣는다.
註釋 : 안사(安史)의난 당제국 중엽인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현부터 당숙종, 당태종까지 약 10년 동안 벌어진 안녹산과 사사명의 대규모 군사반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712-770)
(知章騎馬似乘船하고): 지장이 말을 타면 배에 오른 듯 흔들리고
(眼花落井水底眠이라):눈앞이 어지러워 우물에 떨어지면 물 아래에서 잠들겠구나.
(汝陽三斗始朝天하고): 여양은 서 말 술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
(道逢麯車口流涎하며): 길에서 누룩 수레만 만나도 군침을 흘린다.
(恨不移封向酒泉이라): 주천 고을로 벼슬을 옮기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左相日興費萬錢하고): 상은 날마다 유흥비로 만 전을 쓰고
(飮如長鯨吸百川하며): 큰 고래가 백천의 물을 모두 마시듯이 술을 마시고
(銜杯樂聖稱避賢이라): 술잔을 들면 청주를 마시지 탁주는 마시지 않는다.
(宗之瀟灑美少年으로): 종지는 멋쟁이 미소년으로
(擧觴白眼望靑天하니): 술잔 들고 흰 눈동자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데
(皎如玉樹臨風前이라): 옥으로 다듬은 나무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듯 하지
(蘇晋長齋繡佛前에): 소진은 수놓은 부처 앞에서 오랫동안 정진하다가도
(醉中往往愛逃禪이라): 취하면 때때로 참선을 파하기를 즐겨 하곤 하네
(李白一斗詩百篇하고): 이백은 한 말 술에 시 백 편을 짓는데
(長安市上酒家眠이요): 취하면 장안 시장바닥 술집에서 잠을 잔다네
(天子呼來不上船하고):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이라): 자칭 "신은 술 마시는 신선입니다" 하지
(張旭三杯草聖傳하니): 장욱은 세 잔은 마셔야 초서를 쓰는데
(脫帽露頂王公前하고): 모자는 벗고 맨머리로 왕공들 앞에 나타나서
(揮毫落紙如雲煙이라): 종이 위에 붓을 휘두르면 구름 같고 연기 같다
(焦遂五斗方卓然하고): 초수는 다섯 말은 먹어야 신명이 나는데
(高談雄辯驚四筵이라): 뛰어난 말씨는 사방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恨別
洛城一別四千里하니 낙양성 이별하여 사천 리
胡騎는長驅五六年이라 오랑캐 말 몰아 오륙 년.
草木은變衰行劒外오 풀과 나무 쇠할 때 검각 밖으로 나와
兵戈는阻絶老江邊이라 병과에 막혀 강변에서 늙네.
思家步月淸宵立이오 집 생각에 달밑을 걷다 맑은 밤에 멈춰서고
憶弟看雲白日眠이라 동생을 생각하며 구름보고 한낮에 잠들었네
聞道河陽近乘勝하니 듣자니 하양에는 근래 승승장구한다더니
司徒急爲破幽燕이라 사도여 급히 유연을 물리쳐다오.
9일차 10월14일 구체구 풍경구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구체구 풍경구로 가는데 아침부터 길이 막혀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다가 급기야 내려서 걸어서 도착였다. 구체구는 원래 티벳땅인데 지금은 중국 사천성 자치구에 속한 곳으로 건쑤성 남쪽과 사천성 북쪽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티벳족 9개 마을이 있다는 뜻의 구채구다. 본래 이름은 구채골이었는데 한국에서 구체구로 부르다 보니 다 구체구로 안다고 한다. 티벳족은 아직도 모계중심 사회로 여자는 24세 전후에 21세 전후의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1처 다 부제로 한 여자가 그 집의 모든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한다. 아직도 그 풍속이 지켜져 내려오고 있고, 개인 사유재산보다는 공동으로 농사짓고 가축을 사육하여 생활한다고 한다. 티벳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89세로 죽을 때까지 허리가 꼬부라진 사람이 없고, 죽기 며칠 전까지 일하다가 이 삼일 앓다가 죽는다고 한다. 죽으면 최고 계급인 승려는 천장을 하여 독수리 밥이 되고, 일반 사람들은 암장(바위 굴에다 시신을 갖다 놓음)을 한다고 한다.
구체구 경치는 그야말로 풍경구다, 석회석 암반에 풍부한 수량으로 곳곳이 푸른 호수이고 곳곳이 크고 작은 폭포로 장관을 이룬다.
10일차 10월15일 황룡 풍경구
황룡 풍경구 관광을 위하여 아침 7시에 출발하여 고산을 오르는데 진눈깨비가 날리는 가운데 도로 좌,우변에 산야에는 야크와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구채구와 황룡은 고산준봉과 그 깊숙한 계곡에는 풍부한 수자원을 가지고 있어 크고 작은 104개의 호수와 계곡. 폭포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황산을 보지 않고 산을 논하지 말고 구채구를 안 보고서 물을 논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중국의 마지막 비경'이라 불리는 환상의 황룡과 구채구는 도저히 사진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황홀하고도 눈 부신 절경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해발 4,007 미터. 황룡과 구채구는 고산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도 2,000미터가 채 안 되는 걸 생각해보면, 쉽사리 오를 수 없는 고지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바로 고산증이죠. 황룡/구채구 여행 안내서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문구 또한 바로 이 '고산증'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장족, 강족의 자치주인 송판현 내에 있는 황룡풍경 명승구는 구채구와 인접해 있으며 황룡사(黃龍寺), 단운협(丹云峽), 설보정(雪寶頂) 등의 명소로 유명하다. 1992년에 연합국교과문단체(聯合國敎科文組織)의 <세계자연유산명록>에 올랐으며, 2000년에는 '세계생물권보호구' 와 '녹색환경지구21'에 선정되었다고 가이드는 전한다. 또한, 같은 해에 중국에서 처음 비준한 AAAA급 풍경구로 인증 받기도 했으며 민산산맥(岷山山脈)의 주봉인 5,588m 설보정 기슭의 V자형 계곡에 지상으로 노출된 석회암층과 에메랄드 빛의 물이 고여 환상적인 색의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오색채지는 계단식 밭처럼 완만하게 경사진 석회암의 연못이 이루어내는 기이한 광경에 넋이 나갈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이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고 하니 더 놀라울 수 밖에 없다. 이 연못은 총 길이가 7.5km이며 그 수는 3,400여 개나 된다. 또한 전체적으로 에메랄드 빛인 이 연못의 물은 깊이와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어울려 다양한 색깔을 낸다. 황룡 안으로 들어갈 수록 고도가 높아지는데, 숨이 차오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그 아름다움도 깊이를 더해간다. 세신하(洗身河)를 따라 영선교(迎仙橋), 옥취채지(玉翠彩池)를 지나 제일 깊이 있는 황룡사와 그 뒤에 높이 서 있는 설보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여기에 황룡사 뒤의 황룡동(黃龍洞)과 그 안의 석불삼존 등의 조각품이 이곳의 미경에 더해지고 단운협의 협곡풍경이 또 한번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한다. 또 황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설보정 안에는 사대해자(四大海子)라는 등산과 스키를 타는 곳도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는 가이드 옆에 붙어 다니면서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하였다.여행은 아는 만큼 재미가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10월15일 17시
동티벳트 구체황룡공항에 도착하였다 해발 4천 가까운 곳이 깔끔하게 지어진 최신식 공항 청사에 들어가니 관광객이 제법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국내선을 타고 22시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티벳은 평균 고도 3500~4000m다 현지인들은 불편 없이 살지만 평지에 살던 사람들은 고산병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필자고 고산증세가 있어 약을 2병이나 마셨으니 말이다.
10/16일 07시 호텔 출발
북경공항에서 8시50분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오니 오후 1시가 되었다.
11일차 10월16일 호텔에서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 06시에 버스로 북경공항에 도착하였다. 모든 탑승 수속을 마치고 08시50분 비행기가 이륙하여 약 4시간 활공 끝에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니 13시경이었다. 경주시 현곡 전복순두부 식당에서 모여 11일간의 여행을 정리하고 모두 안전하게 즐겁게 여행을 다녀온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건배를 들었다. 고맙게도 이날 식대는 서원석사장이 한턱 쏜다고 하여 너무나 고마웠다.
2014년 10월12일
記錄 竹山 陳載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