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산 연가
가을 주말이면 누구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특히나 총 천연색으로 화장을 하는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부쩍 늘어나 산과 계곡이 등산복으로 알록달록 더욱 화려하게 물든다. 경주의 산들은 저마다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 무장산, 남산, 금강산, 단석산, 선도산, 오봉산 등등 하나 같이 특색 있는 풍성한 이야기 꺼리를 간직한 문화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져 발길을 유혹한다.
무장산은 가을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줄을 지어 밀려드는 단풍객들로 산이 더욱 화려하게 된다. 경주시는 아예 마을 진입로에서부터 교통을 통제하면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무장사지의 초입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2점이 있다.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아미타불조상사적비다. 특히나 아미타불조상사적비에 얽힌 이야기는 신라하대 왕위 쟁탈전을 벌였던 골육상잔의 아픔이 배어있어 애잔하다.
하산하고 풀어진 다리에 마음까지 풀어주는 삼겹살과 미나리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 즐비하다. 등산객들은 삼겹살에 막걸리로 무장산 연가를 더욱 구수하게 익힌다.
문무왕이 무기를 감추어 묻었다는 의미로 이름 지어진 무장산은 역사적 이야기보다 정상 부위에 조성된 억새밭으로 더욱 유명하다. 초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온 산을 부산하게 흔들리며 은빛을 뿌려대는 억새를 보러 등산객들이 억세게 밀려든다. 무장산으로 들면 저절로 힐링하게 되는 비밀을 하나씩 풀어본다.
◆무장산 드는 길
서울의 우이동 시인들은 ‘북한산 단풍’을 이렇게 노래한다.
산마다 물이 들어 하늘까지 젖는데/ 골짜기 능선마다 단풍이 든 사람들/ 그네들 발길따라 몸살하는 가을은/ 눈으로 만져다오 목을 뽑아 외치고/ 산도 타고 바람도 타고 사람도 타네
경주 무장산은 단풍도 단풍이지만 억새가 주는 풍경이 제격이다. 억새의 맛을 느끼려면 해발 624m 정상까지 올라야 된다. 억새는 동대봉산 무장봉의 정상에서 넓게 바다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장산은 억새군락지로 이미 전국에 널리 알려져 가을부터 봄까지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경주보문단지 끝자락에서 천북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로 접어들자 말자 암곡으로 들어가는 길을 잘 살펴야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다. 하기사 가을철에는 워낙 찾는 발길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가는대로 따라 운전하다보면 저절로 찾게 돼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그러나 주말에 무장산을 편하게 찾아보려면 아무래도 보문단지 어디쯤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셔틀버스나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좁은 길 양쪽으로 미리 온 등산객들이 길게 주차해 심각한 정체로 귀한 시간을 도로에 헌납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량이 밀리면 어떠하고, 사람들 어깨에 부딪히면 또 어떠랴. 무장산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그 어떠한 수고도 흔쾌하게 감수할 수 있다.
무장산에 드는 일은 오롯이 자연에 안기는 일이 된다. 계곡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지난해도 그랬고 그 이전 훨씬 오래전부터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휴대폰이 먹통이 된다. 복잡한 세상과 단절하게 한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이나, 시간단위로 현 위치를 보고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무장산행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된다.
무장산의 계곡은 깊고 맑다. 목장을 운영했던 곳이라 지금도 차량이 끝까지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완만한 경사로로 조성돼 있어 걷기에는 편한 등산길이다. 산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맑은 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다. 전국의 저주지가 바닥을 보이는 가뭄이었지만 무장산 계곡에는 물이 흘렀다. 지금도 손을 담그고 싶은 맑은 물에는 쉬리가 평화롭게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수가 좋으면 책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재도 보게 된다. 무장산에 들면 선경 같은 자연의 풍광으로 누구나 시인이 된다.
무장사지 삼층석탑
◆무장산의 보물
무장산은 보물산이다. 나라에서 보호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정한 문화재 2점이 등산로 초입에 돌로 박혀 있다. 보물 제126호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125호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다. 무장사지의 석탑은 웅장한 모습이다. 기단석 몸돌에 안상무늬를 두르고 있을 뿐 전체가 밋밋한 점잖은 차림이다. 옥개탑석 1층 지붕돌 일부가 조금 깨어지고 몸돌 아랫부분이 살짝 훼손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1천년 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몸돌은 완전히 박살이 나 제대로 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도 1915년에 발견된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현지에 복원된 비석에는 겨우 탐독한 일부 비문을 더듬어 복제한 돌을 세워두고 있다. 귀부와 이수는 제 것이다. 그러나 이수 3분의 1은 깨어져 달아나고 없다. 이수는 희귀하게 쌍거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거북의 머리가 모두 깨어진 상태다. 귀부의 윗부분에는 앞면과 뒷면에 4구씩, 옆면에 각 2구씩, 12지신상을 새겨 이채롭다.
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남은 모양처럼 비석이 담고 있는 사연은 더욱 안타깝다. 사적비는 신라 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소성왕은 아버지 원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1년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다행히 소성왕의 아들이 애장왕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삼촌 헌덕왕과 흥덕왕 형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형제가 조카를 죽이고 왕에 올랐던 것이다. 헌덕왕은 아들이 없어 동생 흥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어떠한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세세한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더욱 처절한 마음이 들게 한다.
피의 역사가 담긴 흔적이 보물이다. 사실 문화재적인 보물 가치를 가진 유물들을 찾아오는 공부하는 발길도 많지만 지금은 억새와 쉬리가 헤엄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찾는 단풍객들이 훨씬 많다. 무장산에 얽힌 전설도 보물이고, 아름다운 자연이 보물이다.
◆억새밭
무장산을 찾는 사람들의 이유는 십중팔구 정상에 있는 억새밭을 보고자 함이다. 누군가 억새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넓은 억새밭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 “가서 보라”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1970년대에 목장을 경영했던 곳이다.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던 초지였다. 초지에 억새가 자라 지금은 온전히 억새바다로 변해 한가롭던 목장이 등산객들의 화려한 차림으로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계곡을 따라 노래하며 억새밭에 이르면 어느새 세상의 형세조차 잊게 된다. 동서남북 방향이 머릿속에서 두서를 잃는다. 시간과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겨우 방향을 인식한다. 사방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들은 억새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질한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억새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일어나고 숙이고 다시 일어나는 춤사위의 은빛 파장이 황홀경을 연출한다.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아름다운 힘을 본다. 훨훨 날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하는 억새바다다.
억새는 갈대와 같다. 아니다 다르다. 억새와 갈대를 외형을 보고 바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억새와 갈대는 자생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편하다. 억새는 산이나 뭍에서 자란다. 산에 있는 것은 무조건 억새라고 보면 된다. 갈대는 산에서 자라지 못한다. 습지나 물가에서 자란다. 물가에서 자라는 물억새도 있으나 산에 자라는 갈대는 없기 때문이다.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을 띤다. 가끔 얼룩무늬가 있는 것도 있지만 대개가 실버다. 갈대는 갈색이나 고동색을 띠고 있다. 은빛 갈대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량으로 보아 넘겨야 한다.
억새는 대부분 키가 1m 내외로 숏다리다.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사람의 키만한 억새도 있다. 갈대는 키가 2m이상으로 훤칠하게 쑥 빼어난다.
이정도면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싶다. 한 가지 더 다른 점은 억새의 뿌리는 굵고 옆으로 퍼져나가 주변에 잡초가 자라지 못한다. 억새들이 군락을 이루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갈대는 뿌리 옆에 수염같은 잔뿌리가 많아 다른 풀들과 함께 자란다. 억새의 열매는 익어도 반쯤 고개를 숙이지만 갈대는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다.
여자를 갈대와 같다고 노래한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억새는 억센 남자 모습이다. 고집 센 할아버지라 할까.
신경림 시인은 ‘갈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삼겹살과 미나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무장산을 더욱 무장하게 하는 것은 삼겹살과 미나리다. 등산객들이 몰려드는 무장동은 입구에서부터 계곡까지 길게 마을사람들이 청정지역에서 재배한 사과, 무, 배추, 더덕 등의 특산물들을 진열하고 등산객들이 즐거이 주머니를 털게 한다.
도로변에 앉아 특산물을 판매하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보다 등산객들이 늘어나면서 규모있게 식당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삼겹살과 미나리가 무장산의 명물이 됐다. 마르지 않는 무장산 계곡의 맑은 물로 재배한 미나리가 상큼한 향을 뿜는다. 미나리 향이 삼겹살의 익은 살점을 휘휘 감아 출출한 산인들의 뱃속을 요리조리 요리한다. 덩달아 막걸리도 등산객들의 뱃속을 유린해 하산길은 갈짓자가 되기 십상이다.
무장동의 미나리는 이제 하우스재배로 사계절 맛을 볼 수 있게 됐다. 봄철 한 때 즐겨 먹던 삼겹살과 미나리는 1년 내내 가능하다. 상상도 못했던 미나리향을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도 음미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미나리로 만든 음식의 메뉴도 다양하다. 미나리전은 일단 맛을 보고나면 파전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린다. 미나리가 속을 채운 전병도 꿀맛이다. 미나리는 피를 맑게 하지만 정신도 맑게 하는 효능과 함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전문가들의 으뜸가는 추천식품이다. 이제는 무장산 아래 마을사람들의 주머니도 두둑하게 하는 효자가 됐다.
무장산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억새가 억세게 몸을 흔들어 선경을 연출하는 무장산, 무궁무진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역사 이야기가 묻혀있는 무장산,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정화해주는 미나리와 삼겹살이 유혹하는 무장산으로 힐링여행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