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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 덕 렬
권두 칼럼의 <에세이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은 우리수필계가 극복해야 할 일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간의 사정을 나름대로 짚어 보게 된다.
첫째, 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해 정확하고 체계 있는 이론 개발이 늦었다. 둘째, 수필 비평이 없다시피한 기간이 길었다. 셋째, 학교에서는 ‘붓 가는 대로’, ‘무형식의 형식’이란 애매한 수필론을 공부했다. 넷째, 수필가를 등단시키는 문예지들은 어떤 의도에선지 3회 추천제를 스스로 파기했다.
이상과 같은 일들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수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겉으로는 수필의 르네상스시대를 맞고 있다. 월간문학 1월호에 실린 회원 주소록으로 미루어보면 수필 인구는 3천 명쯤 된다. 이 숫자는 한국문인협회 회원만을 말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그 수가 훨씬 많아진다는 얘기다. 장백일의《수필 쓰는 법》(1981)의 부록에는 전국 수필가의 주소록이 나와 있다. 거기에는 105명의 명단이 있을 뿐이니, 그동안 수필 인구는 30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환영할 일이지만 여기서 수필의 질 문제가 대두되고, 수필의 문학성 문제가 늘 말썽이다.
“그는 잡지가 배달되는 즉시 봉도 안 떼고 쓰레기통에 던진다는 말을 조금치의 가책 없이 했다.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툭하면 단행본을 찍어 돌린다며 “낯 두꺼운 사람!”이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이난호, 글 쏟아질라, 2013.6.)
새로 나온 수필집에 있는 한 구절이다. 수필을 쓰는 사람의 수모가 극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실력을 쌓아가는 수밖에 뭐 딴 도리가 있겠는가.
니콜라이 고골의 수필 <말이란 무엇인가>에서 작가의 자존심을 대하게 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러시아 전통 속에서 문학은 인류에게 봉사하는데 그 거룩한 소명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언제나 민중의 교사요 예언자요 지도자로 숭앙 받았다. 러시아에서는 작가가 단순히 작가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작가는 언제나 자타가 공인하는 민중의 지도자였다.”
그렇다. 우리 수필 인구도 모두가 훌륭한 작가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하니 수필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다. 수필계가 당하는 수모를 씻어내는 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실천의 문제라는 걸 절감하게 한다.
“그러나 훌륭한 수필은 역시 고전을 삼키는 듯한 치열한 독서와 사회 현상은 물론 사물과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깊은 사색 없이는 쓸 수 없다.”(권두 칼럼의 <에세이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태동)
이상이서 언급한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계간수필 여름호에 실린 작품을 읽고,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정충영 님의 <압근이의 양지>
이 수필도 수미쌍관의 액자 구성이다. 평론가 이관희가 말하는 제3의 새로운 창작문예 수필(에세이)의 기본 작법인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 + 창조적 구성법>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압근이는 말을 못한다. 사막의 그 함묵을 떠올리는 이름도 ‘압근!’이다. 사막 생활을 잘하는 낙타는 압근이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상관물이다. 독상을 받쳐 먹는 것은 주인과는 동떨어진 신분. 머슴이 그랬고, 한동자를 시킨 과객이 그랬고, 비렁뱅이가 잔칫집에서 한 상 받을 때도 독상이었다. 압근이는 낙타 같이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작자는 압근이를 통해서 성실한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단락에서 일반화할 때 ‘나’보다는 ‘우리’로 확대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고골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한 미디 하자. 중반부쯤에, “거기에 기대어…(중략)…걸려 있었다.”는 작품을 위해선 빼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수필은 문장 문학이다. 문장과 문장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조직되어야 한다. 앞 문장과 뒤 문장은 서로 뜻이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기 이름을 열거할 때 쓴 ‘이름 모를’이란 표현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공부를 게을리 했소.’ 하는 고백일 뿐이다. “그날은 친구들과 S네 집에서 트럼프를 쳤다”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단발머리 소녀도 즐거웠다.”와는 안 어울리는 말이다. 거기서 춘님이가 모른 체한 것은 트럼프 치는 모습이 딱해서인지도 모른다. ‘춘님’이도 아버지를 닮아 낙타처럼 살 것으로 본다.
김형진 님의 <변환(變換)의 굴레>
정서의 흐름을 따라가며 쓴 수필이다. “발코니에 나와 오월의 숲을 내려다본다.”로 시작한 이 글은 ‘봄→가을→봄(싫은 이유)→가을(하늘색)→여름(하늘의 계절)→봄(나를 맡기고 싶은 충동)→봄(1)→봄(2, 숲의 변환에 눈을 빼앗김)→4계(가을․여름․겨울․봄)’로 순환한다.
수필은 사건의 줄거리가 중심이 아니고, 정서적 서술이 줄거리라 했다. 사실의 기록이 아닌 상상의 세계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번만 읽어보면 눈에 띄는 것은 접속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딱 하나 쓰인 접속부사는 ‘그런데’이다. 호기심까지 자아내게 한다. 글의 완성도를 위하여 배려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그런데’를 안 쓰고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는 데, 작품 전체에서 하나 쓴 이유는 뭘까? 변환과도 관계가 있겠다.
겨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알몸이 된 나무가 죽은 듯 겨울을 지나고’, 이 한 구절뿐이다. 이 또한 작품 전체를 탄탄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솜씨다. 사계의 숲의 변환, 사람의 삶에도 변환이 있고, 잎도 자연의 변환이듯, 기호가 변하는 것도 자연의 변환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숲은 작가로, 물아일체의 자아를 본다. 결국 변환의 굴레 안의 존재, 깨달음으로 변환의 굴레를 벗어나 큰 깨달음에 이른다. 수필은 외로운 자기의 독백이다. 좋은 수필은 독자 앞에서 자기를 말없이 부각한다는 말은 이런 수필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임혜숙 님의 <이륙하기 가장 좋은 때>
옆 집 마크 씨가 플라스틱 쓰레기통 깁는 얘기부터 시작된다. 그는 40년 약사 생활을 하고 은퇴한 분이다. 물질 풍요의 시대, 많아서 병이되고 있는 세상에 플라스틱 통을 기워 쓰는 얘기는 많은 걸 생각게 한다. 다음 삽화는 문득 선배 남편의 은퇴 얘기가 생각난 것이고, 그담은 커피 한 잔으로 한나절을 보내는 한국 할아버지들의 얘기다.
이렇게 세 개의 삽화를 소개하고는 이제는 몇 년 후 은퇴를 앞둔 필자는 노후라는 낯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결국 은퇴가 요구하는 것은 경제적인 여유인 것이다. 노년에 자존심을 살리고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되는 돈이 문제다. 나이 들어도 마음은 항상 청춘이 아닌가. 벅찬 가슴으로 앞날을 계획하는 희망을 보게 된다. 이륙은 어딘가 안착하기 위한 것, 희망과 설렘이 있다.
마무리 문장이다. “목적지로의 안전한 이륙을 위해, …(중략)…시간을 가져보자.” 여기서 잠깐 수필의 결미를 생각해 볼 일이다. ‘가져보자’는 썩 좋은 결말은 아니다. ‘-자’는 어미로 ‘해라할 자리에 쓰여, 어떤 행동을 함께 하자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이다. 이런 청유형은 의미상으로 명령문이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명령이나 훈시나, 당부로 끝맺는 결말이 아닐까. 참, 고골은 ‘작가는 민중의 지도자’라 했지. 하나라도 흠이 보여서는 곤란하다. ‘볼 멘 소리’는 ‘볼멘소리로’ 붙여써야 하고, ‘내 품으며’는 ‘내뿜으며’로 써야 맞다.
전준엽 님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위하여>
제목 자체가 몽테뉴적이다. 몽테뉴 수상록을 보면 거의 모든 제목이 ‘…에 대하여’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슬픔에 대하여>, <거짓말에 대하여>, <후회에 대하여> 등이다. 문학 작품에서는 제목 붙이는 일부터 ‘창작’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강만, 트르소) 하나를 만났다. 전문이 ‘아, 36년!’이다. 제목은 ‘토르소’였다. 토르소(torso)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 제목과 내용을 함께 생각할 때 시가 되었다. 제목 붙이기의 중요함을 말해 준다. 문학은 상상의 산물. 수필에서도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내용과 형식은 문학의 요소이다. 조연현은《개고 문학개론》(정음사, 1973)에서 “문학의 제4의 요소는 형식이다.”라 하였다. 정서(감정), 상상, 사상을 들면서 말이다. 그리고 문학의 형식과 내용은 구별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고, 그 반대의 견해도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참으로 아름답다.” 첫 단락과 첫 문장이다.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자연의 순리에서 ‘조화’를 찾아내 인류 예술의 본질로 삼은 것을 ‘하모니’라고 했다. 하모니는 서양 예술의 열쇠말. 그 전거를 황금 비율로 설명한다. 8음계에서는 다섯 번째 ‘솔’, ‘얼짱’의 각도, 하우저의 ‘물과 그릇’의 관계를 예로 들고 있다. 예술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하모니는 본연의 모습으로 제때에 제 자리에 놓여 있을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이렇게 조곤조곤 생각을 전개한다. 1970년대 형식 과잉 시대와 1980년대는 내용으로 넘쳐나는 미술이 유행하던, ‘민중’ ‘민족’이 화두이던 시대였다. 상반된 예술관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그너와 브람스의 예를 들어, 결국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주는 수필도 귀하다.
임백현 님의 <사생활의 역사>
현대문학(現代文學, 1955.1. 창간)얘기로 시작한다. 거기서 농촌 출신 신춘문예 당선자가 문학 수업을 묻는 기자에게 일기를 쓰고 현대문학을 부지런히 읽은 덕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친구들과 일기를 쓰자고 단단히 결심을 한다. 사실은 그보다 몇 해 전부터 썼던 것이, 어느덧 60년간 일기를 쓴 것이다. 이것이 생애의 기록이 되고, 사생활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들의 일상에도 역사는 흐른다.’는 상품광고 문안이 개인의 삶이 곧 역사임을 일깨워 주었다.
빌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에서 영국 어느 하녀의 일기를 들어 당시 생활상의 근거 자료가 되고 있을 것이니 “문학은 될 수 없어도 20세기를 살다간 소시민의 생활 자료는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기는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증언이다.” 그렇다. 일기로서 기록의 중요성은 이순신 장군의《난중일기》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일기를 쓴다는 것은 매일매일 자기를 반성하고 내일을 꿈꾸는 일이다. 벤야민은 “예전이 지금과 충돌해 미래라는 별자리를 만든다.”했다. 오늘 하루는 다시없는 소중한 인생의 한 장이 아니겠는가.
결말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우리 인생도 한 철의 꽃이다. 어찌 놓쳐버리고 말 것인가.” 마지막 문장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으냐, 빼는 것이 좋으냐를 두고 혼자 씨름을 한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필자라면 독자의 몫을 남겨두기 위해 빼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결론에 도달했다.
권일주 님의 <원근법>
문학은 본질적으로 비유적이다. 언어의 가동성(可動性, mobility), 즉 언어는 사물과 떨러져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정되어 있는 언어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로 여기에서 비유, 상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비유법이란 표현하려는 대상이나 내용(원관념)을 독자가 알기 쉬운 다른 대상이나 내용(보조관념)에 비겨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기법이란 건 다 아는 얘기다.
이 작품은 원근법을 빌려 자기 삶을 형상화 하고 있다. 마음의 원근법, 치맛자락, 인생의 화폭, 생각의 길, 종착역, 미완성의 그림 등은 비유적으로 쓰인 수필어(隨筆語)들이다.
잠이 달아나 버린 늦은 밤에 TV를 켜고 서양화에서 원근법이 처음 시도된 이야기를 듣는다. 마음의 원근법으로 상념이 옮아가며 가지를 쳤다. 일 처리의 어려움은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겪는다. 특히 작가는 성격상 좀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다. 멀고 가까움을 뚜렷이 하지 못한 채 어물어물 나이가 들었다. 돌이켜 보니 꽤 세월도 흘렀다. 구력 40년의 테니스를 두고도 겨우 “나 테니스 해.”라고 말할 정도로 발도 감정도 느리다고 자평한다.
어느 날 남편과 아이가 소란스럽게 무엇을 찾으면서도 작가에게는 구원 요청을 하지 않는다. 치마폭 좁고, 그것마저 한 부분 비워 두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남편이기 때문이다. 인생 화폭에 무엇을 그릴까, 여기서 원근법과 연결이 된다. 앞에 종착역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평생 멀리 있는 꿈의 인질이 되어 그 안개 속 흐릿한 윤곽에 갇혀 맴돌고 있는 사람, 나는 수인(囚人)일까?” 하고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서숙(담원) 님의 <쇼핑생활백서>
이 작품은 실험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 실험성이란 무엇인가? 수필 문학에 플롯을 도입한 것이다. 명제 세 가지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각 명제마다 또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소주제를 이끌어 낸다.
위에서 의도적이라 했는데 그것은 의욕적인 표현의 기교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것은 첫째, 영어 원문(I shop, therefore I am. -Barbara Kruger)의 제시이다.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외국인의 말을 원문으로 제시해도 될 것인가? 번역하여 제시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한 줄을 띄고 다음 단락을 시작했다. 턱, 명제 하나를 던져 본 자체가 실험성이다. 독자는 여태 못 보던 일이니 한참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뭣이지…’ 하며 일단 읽어 볼 것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둘째, 외래어의 많은 사용 문제다. 작품의 성격상 그렇겠지만 순화된 우리말로 골라 쓰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작가의 제1의적 사명은 국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이 아닐까, 해서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앞에서 말한 고골의 말이 생각나서다.
자 그러면 첫째 명제를 보자. 네 단락에 각각 ①패셔니스타 김사장→ ②재력가 박 여사→ ③중산 층 영희 씨→ ④복지사 민경 씨 등 각각 다른 형태의 장보기를 열거한다. 그리고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의 처지는 어디에 가까운가?”하고. 그리고 앞에 던져놓은 명제-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미심장함을 일깨운다. 둘째 명제도, 셋째 명제도 똑같은 구성으로 끌고 간다. 보통의 솜씨가 아니다.
둘째 명제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에서는 ‘계산대 앞의 표정에서 우리 삶의 현실감을 장보기에서 가장 실감할 수 있다’는 발견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따로 또 같이’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깨닫는다.
마지막 명제는 작가 자신의 것이다. “나는 나다, 나 과연 그럴까?” 결국, “기대면서 밀어내는 길항 속에 나는 오늘도 무엇을 선택하여 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인가, 무엇을 덜어내어 내 삶을 단출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진지하게.”라고 하고 싶었던 말로 끝을 맺는다.
플롯이란 시학의 말을 빌리면 ‘사건의 결합’이다. 이 글은 플롯의 수법을 도입한 작품으로 수필이 나아갈 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2013.9. <계간수필> 73호에서)
오덕렬(吳德烈)은 1945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모교인 광주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모교에서 근무 중에 『光高문학관』을 개관(2007.5.30.) 하였고, 개관 기념으로『光高문학상백일장』을,
문학관을 열었던 그해부터 매년 5월에 광주·전남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1983년에 『방송문학상』에 수필 당선과 1990년에 『한국수필』에서 추천 완료로 등단하였다.
수필집으로 『복만동 이야기』 『고향의 오월』 『귀향』등이 있으며, 황조근정훈장과 광주문학상,
박용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하였으며
지금은 모교와 손잡고 『光高문학관』과 『光高문학상백일장』의 운영을 주관한다.
그리고 생오지문예창작대학 수필반 강의를 맡고 있으며,
《전남방언 용례사전》 편찬과 수필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