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의 이인 고청 서기
[출처] 작성자 풀꽃내음
○ 공암굴에서 잉태되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마을 부근 국도변을 지나다 보면 고청봉 건너편 산자락에 공암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이곳에는 조선시대 중기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이인인 서기(호는 고청)와 관련된 탄생전설이 깃들여 있다.
고청 서기는 중종18년(1523)부터 선조24년(1591) 임진왜란 전년까지 생존해 온 인물로서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학자로 이름을 드날린 선비이다.
고청의 어미는 노비로서 어느 날 비를 피해 공암굴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소금장수를 만나서 정을 통하였고, 그 소금장수는 성씨만 알려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고청은 이때 잉태가 되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태어난 후 3년동안 계룡산 정상에 꽃이 피질않았는데, 이는 서기가 계룡산의 정기를 모두 빨아먹었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암굴은 오랫동안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인기가 높았으나 지금은 산의 주인이 기독교 제단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안가봐서 확인이 필요함다. ^^)
○ 총명함으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다.
고청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화헌파수록』에 따르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3일간 종달새의 나는 모양을 관찰하다가 나무를 못해 온 것을 주인이 알고 노비 신분을 면하게 하고 공부를 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어려서 서당을 다니는데 서당이 낡아 허물어질 것 같아 문을 닫게 될 게 같자, 고청은 훈장선생한테 “有書堂長勿毁, 傳我學聖賢之句 서당이여 오래도록 무너지지 말아다오, 내가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자 한다.” 라는 시를 지어 올리자 스승은 고청의 범상함에 놀랐다고 한다.
효종때 노론의 영수이자 송자로 일컬어진 송시열의 『우암집』에 따르면 ‘공은 심충겸이 하사받은 종이었는데, 서기가 행실이 독실하여 면하여 놓아주었을 뿐 아니라 부를 때에는 반드시 처사라고 일컬어 “종이 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어진 것이 더욱 가상하다.” 라고 했다.
또한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의『성호사설』에는 ‘계룡산(鷄龍山)고청봉(孤靑峯)아래 살아서 호(自號)를 고청(孤靑)이라고 하였는데, 집이 미천하였다. 세상에서는 본래 정승 심열(沈悅)의 집 종이었다고 하며, 배우는 이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그가 심열의 집을 방문했을 때 천한 옷차림으로 나아갔는데, 장안[都中]의 대부들이 잇달아 찾아오게 되자 서기가 곧 주인에게, “천한 옷차림으로는 높고 귀한 이들을 접견할 수 없으니, 원컨대 의관(衣冠)을 빌어 달라.”고 하자, 심열이 의복을 갖추어 주고 매우 예(禮)로 대우하였다.
그 뒤 유림(儒林)에서 조두(俎豆)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권귀(權貴)들의 추향(追享)할 자가 많아지자, 그의 주벽(主壁) 자리를 강등시켰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지금은 따로 사당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매옹한록≫에 따르면 고청이 심씨 집(沈忠謙)의 사노(私奴)로 되어 있는데, ‘심상(沈相)의 모부인이 과부로 살면서 심상을 키웠는데, 서고청을 한 번 매질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갈도성(喝導聲 : 지체 높은 이의 행차 때, 길 인도하는 下隷가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 행인을 비키게 하는 소리)이 요란해 물어보니, 사대부들이 고청이 죄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방문하는 소리라고 하였다.
이에 부인은 고청을 불러 문자를 아는지 확인하고 아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청이 늘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서 아들을 가르치자 부인은 뒤에 고청에게 양인이 될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청은 분수를 범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고청은 송익필(宋翼弼)·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삼노(三奴)의 명인(名人)으로 일컬어 진다 한다.
이처럼 각종 문헌에 따르면 고청은 어려서부터 그 재기가 남달랐고 그로 인해 양인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호풍환우로 동학사의 불을 끄다.
조선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조선중반까지의 명신에 대해 기록한『명신록』에 따르면 고청은 어려서 제자백가류를 섭렵하고 禪學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에 고청이 풍운조화를 부렸다는 애기가 있는데, 어느 날 주인댁 말 채찍을 가지고 도랑물을 묻혀 동학사 절쪽을 향해 세 번이나 물을 뿌리는 행동을 하자, 주인이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고청은 "지금 동학사 법당이 불이 났는데 다타게 생겼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래서 주인은 "니가 미쳤느냐? 너가 여기서 채찍에 물을 뿌려서 그러면 그게 꺼지는고?" 되묻자, 고청은 '아마 조금 있으면 꺼질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후 나중에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듣기를 동학사에 불이 났는데, 날씨가 화창하엿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검은 구름 세 덩어리가 몰려오더니 소나기로 비가 막 퍼부어 금방 꺼졌다는 것이었다.
○ 토정 이지함을 만난 가르침을 받고 함께 산천을 유람하다.
고청은 나이 20여세에 6살 위인 토정 이지함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을 본으로 삼게 되었으며 토정과 함께 전국 심산유곡을 유람하고 다녔는데, 남명 조식의 집에도 들려 똥칠하고 나온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또한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에도 올라가 남극노인성을 관찰하고 돌아오는 등 당시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등의 처사류의 선비들처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유명한 숨은 선비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 서기로 인해 충청도에서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오다.
산천 유람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마을에서 풍속을 잡기위해 여씨향약을 행하려고 강신당을 세우기도 했으나 몹쓸 젊은이들에 의해 불태워지자 가족을 데리고 지리산 홍운동에 들어가 은거하며 수도 및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 때 토정은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과 함께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을 유람한 뒤 홍운동을 방문하여 강학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이 50세가 넘어서 홍운동을 나와 계룡산의 고청봉 아래 공암마을에 공암정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서당이름을 蓮亭이라 부른다. 선조 10년(1577) 4월 연못 뒤에 서당 세칸을 지어 가운데 것을 박약제라 하고 왼쪽의 것은 진수제(進修齊)라 하고, 오른쪽 것은 踐履齊라 한 후 後學을 가르쳤는데 그는 鄕約에 기초를 둔 [德業相勸] (덕을 권하는 것) [過失相規] (잘못을 고치는 것) [禮俗相交] (예를 지키도록 한 것)
[患難相恤] (서로 물질적 협조) 네 가지 조목을 지키는 학문의 길을 가르쳤다. 천민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고청의 학문의 고명함으로 인하여 충청도에서 많은 선비들이 몰려와 학문을 배웠으며 그 후부터 충청도에서 과거 급제자가 본격적으로 배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청은 중국에서 직접 가서 가져온 주자의 영정을 걸고 공암서원을 만들어 배향했는데, 공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광해군 2년(1610) 고청의 제자들에 의해 중수되고 인조 2년(1624)에 충현서원으로 사액된다. 창설 당시의 공암서원은 주자를 주향으로 하고 공주의 향현인 이존오, 이목, 성제원을 배향했다. 사액된 후에도 조헌,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이 추배되었는데, 고청은 죽은 뒤에도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한계로 인하여 별사(別祠)에 머물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당대의 처사들과 교유하다.(송익필, 고청모의 명정을 쓰다)
고청은 토정의 가르침을 받고, 또한 10살 위인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자 서자출신인 박지화와 친분이 아주 깊었는바, 그는 화담학파의 제자백가류식의 박학풍을 이어받아 천문, 지리 등 다양한 학문에 해박하였고, 동양고대의 천문관측기구인 선기옥형(혼천의)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중봉 조헌 등과 함께 동방분야도를 고쳤다고도 한다. 조헌은 공주목 제독으로 와있을 때 고청과 구봉 송익필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
고청은 11살이나 아래인 미천한 집안 출신인 구봉 송익필과도 절친하게 지냈는바 구봉을 제갈량과 비유하기도 하였고,『화헌파수록』에 의하면 하루는 천기를 보고 당시 보은땅으로 귀향 온 송익필을 만나러 갔다 돌아와 제자들의 비난을 산일도 있었다고 한다.
구봉 송익필과 고청과는 재미있는 일화가 내려오는데, 어느날 ‘막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청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명정을 써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명정을 쓰긴 써야 하는데, 고청모가 노비출신이라 무슨 ‘정경부인’ 또는 ‘정부인’이라고 쓰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종이라고 쓰기도 그래서 주저주저 하고 있었다. 이때 고청은 "얼마 안있으면 명정 쓸 분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기달리라." 고 했다.
조금 있다가 송구봉이 오더니, "아직 명정을 안썼느냐?" 고 묻고 붓을 달라고 하더니 '私婢莫德之柩/사노비 막덕의 널‘ 이라고 내려 쓴 것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구봉이 그렇게 쓴 것이고 사실은 사실이라 고청도 역시 아무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우암 송시열로도 전해지고 있으나 송시열은 근 90년 뒤의 인물이라 송구봉이 잘못 전해진 듯 싶다.
○ 임진왜란을 예언하고 축지로 중국의 소상반죽을 가져오다.
설화에 따르면 고청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선조24년(1591) 임진왜란 관련 예언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인데, 내년에 왜란이 날 것이다 구재(鳩嶺:반포면 상신리에서 계룡면 경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피난하면 모두 죽을 것이니 고청봉 밑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다음해 구재로 피난 간 친척은 모두 죽고 고청봉 밑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만이 무사했다고 한다. 지금도 공암에는 고청의 후손인 이천 서씨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하도 세상이 빨리 변해서요..^^)
또 다른 설화에 따르면, 고청이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어떤 때는 저녁에 나가면 새벽에 들어오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날은 갓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앉아 일길래, 제자들이 “선생님 지난밤에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고청은 “너희들은 알것 없다.” 라고 애기했다.
자꾸 제자들이 어디갔다 오셨나고 묻자 고청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중국 소상강에 가서 소상반죽을 베어가지고 왔다” 고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 소상반죽은 어디에다 쓸려고 합니까?” 묻자, “다 낭중에 쓸일이 있어서 미리 준비하느라고 갔다 온 것이다.” 라고 애기했다.
제자들은 중국 소상강이라는 곳이 여기에서 1-2천리 떨어진 곳도 아닌 아주 먼 곳인데 말도 안 된다고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바로 고청이 축지를 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그 후 고청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아들 삼형제를 모아놓고 “너희들은 앞으로 난리가 나면 어디로 피난을 갈것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큰아들은 “저는 전라도 김제, 만경에 가서 피난을 하려고 합니다." 하자 너무 꼼지락대서 피난이 될 지 모르겠다. 라고 하였고, 둘째아들은 ”저는 갑사근방에 굴로 피난을 가겠습니다. 라고 하자, 거기는 연기 때문에 피난할까 모르겠다. 라고 했다. 셋째아들은 저는 청벽밑에 가서 움막 쳐놓고 피난하겠다고 하자 고청은 너는 공주 장깃대 가면 대단할꺼다. 라고 말했다.
고청이 죽고난 후 과연 임진왜란이 나자 큰아들은 전라도 근방으로 피난을 가서 죽고 둘째네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굴속으로 들어가 덤불로 가리고 숨었는데, 왜적들이 지나가다가 개가 짓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숨어있는 것을 알고 불을 질러서 모두 죽어버렸다. 셋째아들은 움박밑에서 피난을 하고 잇었는데, 지나가던 왜놈 장수가 발견하고 말에 매달아 공주 장깃대까지 끌고갔다.이때 다른 왜적장수가 오더니 한문으로 된 공문서를 가지고 읽지 못하여 고민중에 있는 것을 셋째 아들이 손짓 발짓으로 통역을 해주었다. 이에 장수는 고마워서 셋째아들 흰저고리 등어리에 어느 곳에 가든지 왜적을 만나더라도 살 수있는 도장을 콱찍어주었다. 이리하여 셋째아들 후손만 전해진다고 한다.
한편 고청이 죽기전에 아들에게 소상반죽을 물려주며 “나중에 이것이 중요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니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나라에서 찾는 어른이 있거던 갖다 바치거라” 했었다.그 후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조선으로 원군을 이끌고 오게되었는데,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과연 조선에도 인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고자 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그것을 집어먹을 소상반죽으로 만든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시험을 냈고, 이에 나라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에서 나와 죽은 용의 간을 구하고 방방곳곳에 수소문 하여 고청이 남긴 소상반죽을 구해서 이여송에게 갖다 바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로는 이여송이 천하제일미와 소상반죽을 요구해와 서애 류성룡이 소금 한그릇과 소상반죽을 구해 갖다 바치니 이여송은 이에 크게 놀라며 과연 조선에도 인재가 있구나 하고 조선을 깔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고청 서기는 노비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
고청은 충청도 지방에서 저명한 유학자로 이름을 드날렸고, 당대의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박지화, 중봉 조헌, 구봉 송익필 등의 단학인물과 교유하였다.『명신록』에도 서기는 선학을 좋아하였다고 나와있고, 축지나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보건대, 단학(선학) 수련에 대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
하지만 서기가 유학을 가장 근본으로 삼은 이유는 도가나 불가처럼 사회를 등지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속에서 당연히 나라와 사회,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효제충신의 인륜을 중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