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31 서남산의 계곡(중)
서남산 계곡은 동남산이나 남남산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 경사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나 전체가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남산의 여느 계곡과 마찬가지로 계곡을 타고 오르면 절절이 느낄 수 있다. 서남산의 계곡은 비교적 넓게 형성돼 계곡이 많고 불적도 넓게 분포돼 있다. 특히 신라의 흥망성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여러 유적들이 있어 감회를 새롭게 한다.
또 경주 남산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접근하고 쉽게 오를 수 있는 삼릉코스도 서남산에 있다. 이번호에서는 용장계곡의 능선과 연결된 비파곡과 남산을 대표하는 삼릉코스로 이어지는 냉골과 포석계로 이어지는 선방골까지 소개한다. 전설과 문화재 소개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기록한다.
◆ 효소왕을 울린 비구니가 사라진 비파골
비파골은 이름만큼 아름다운 바위계곡이다. 마을 이름도 지금까지 앞비파, 뒤비파 등 비파마을로 불리고 있다. 비파골은 삼릉에서 울산방향으로 35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내남교도소를 지나 300여m 내려가 왼쪽 남산으로 난 좁은 길을 타고 오르면 된다.
남산 금오봉 정상에서 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인데 길이가 약 2km로 이어지는 계곡과 능선이 대부분 바위로 형성되었다. 이 계곡에는 네 곳의 절터가 있고 4기의 석탑재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할 뿐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더욱 흥미롭다.
신라 32대 효소왕 6년 서라벌 동쪽 교외에 망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이 친히 행차해 공양을 올렸다. 그때 몸차림이 누추한 못생긴 중이 와서 임금께 청하기를 “빈도도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청하였다. 임금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말석에 참석하라 하고 재를 마치자 그 중에게 조롱조로 “비구니는 어디에 사는가. 돌아가거던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비웃듯이 중을 바라보았다. 중도 웃으면서 “예 잘 알았습니다.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임금은 놀라고 부끄러워서 산에 올라가 그 날아간 방향을 향해 수없이 절하고 신하들을 보내어 진신석가를 모셔오도록 했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에서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식석가 부처님은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효소왕은 할 수 없이 비파암 아래 절을 짓고 석가사라 이름하여 진신석가 부처님께 사죄하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라는 절을 지어 없어진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연 스님이 이곳에 와보고 두 절은 있는데 바리때와 지팡이는 없어졌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신라시대의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작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라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비파곡을 따라 남산 속으로 길을 접어들면 풀무절터, 잠늠골 절터, 불무사터, 석가사터 등의 절터와 비파암 삼층석탑 등의 문화재와 예사롭지 않게 생긴 바위들을 만나게 된다.
◆내남교도소와 약수곡 목 없는 거인불상
약수곡은 삼릉으로 금오봉 정상까지 올랐다가 서남쪽 방향으로 타고 내려올 수도 있지만 내남교도소 남쪽 끝에서 산으로 시작되는 계곡을 타고 오르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약수곡은 처음 시작하는 곳이 농경지라 소나무숲을 지나면서 비교적 부드러운 흙길을 걸으면서 일반적인 산행에서 맛보는 흙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시간이 지나지 않아 왼편으로부터 뿌리 깊게 내린 바위산을 만나게 된다. 계곡을 타고 산으로 오르면서 여러 갈래의 등산길이 있지만 결국 금오봉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황할 필요도 없이 가고 싶은 방향을 잡아 위로 오르기만 하면 남산의 정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단지 약수곡으로 오르는 길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남남산처럼 경사가 급하게 심해진다.
처음 월성대군을 모신 사당을 지나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철근콘크리트 기둥에 철조망을 둘러 사진촬영 금지구역 표지와 접근을 금지하는 안내판을 만나 당황하게 된다. 내남교도소 경계구역을 애워싸고 있는 철조망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재 산실에 어울리지 않는 시설물로 눈총을 맞는 애물단지다.
약수곡은 원래 산호골 이었는데 눈병에 특효가 있는 약물이 샘솟았다고 계곡 이름이 약수골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약수곡도 비파골처럼 깊이 들어가면 기괴한 큰 바위들이 솟아 있어 신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비파골보다 넓고 바위들이 웅대하여 사람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처음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철가면을 눌러 쓴 장군 모습의 철면바위가 있고 바위들이 무덤을 형성하고 있는 무덤바위, 6부 능선에 멀리 계곡 입구를 바라보고 서 있는 어미 모습의 어미바위 등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기이한 형상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골짜기에는 여섯 곳에 절터가 있고 2체의 불상과 1기의 석탑이 있는데 그중 마애입불상은 남산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떨어져 나간 머리부분을 제외하고도 거의 9m에 이르는 거인불상이다. 또 그 아래 절터에는 목 없는 석불좌상이 석축에 기댄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서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곳곳에 절터 흔적과 연화대좌 등의 불적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듯 하게한다.
◆신라 재상이 스님 향해 절한 배리 절골
교도소 북쪽 끝에 배리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한 재상이 살았는데 그는 부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사람을 시켜 덕이 높은 스님을 모셔 오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는 덕이 높은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는 것이 효성을 나타내는 제일 큰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삿날이 되어 덕 높은 스님이라고 모시고 온 중의 행색이 초라하자 재상은 격노해 “덕이 높은 스님을 불러오랬지 거지같은 중을 데려오랬나?” 하며 초라한 스님을 문밖으로 쫓아 보냈다. 거절당한 스님이 더러운 옷 속에서 한 마리 짐승을 꺼내자 큰 사자로 변했다. 스님은 그 사자를 타고 사라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상은 중이 고승인 것을 깨닫고 사라산 쪽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으므로 이 마을을 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비파골 전설과도 비슷한 이야기인데 스님이 사라진 사라산은 어디인지 현재 아는 사람은 없다.
◆삿갓골과 경애왕릉
서남산 삼릉계곡에서 경애왕릉을 지나 남쪽으로 연결되는 첫 번째 계곡이 삿갓골이다. 삿갓골은 삼릉계의 지류로 삿갓처럼 생긴 삼각형 산봉우리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하여 삿갓골로 불린다.
35번국도 삿갓골 입구에서 계곡을 타고 평지길을 300여m 걸어들어가면 오른 쪽으로 완만한 경사로 시작되는 산길이 있다. 소나무숲으로 조성된 산길로 접어들어 200여m만 들어서면 가슴 높이에서 절단된 석불의 머리와 몸체, 석불의 대좌로 보이는 불적이 나란히 정리돼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입곡 석불두다. 일반적으로 삿갓골 석불입상으로 불리고 있어 문화재 자료만 들고 찾아가면 실패할 우려가 크다. 삿갓골 입구에는 여러 점의 불적이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듯 파편덩이처럼 누워있다.
계곡 입구에는 또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견훤의 칼에 유명을 달리해 화려한 신라 천년의 종지부를 찍게 된 55대 경애왕의 무덤이 고목에 둘러싸여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고 있다. 경애왕릉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남산 대표적인 탐방코스 삼릉 냉골과 선방골
남산의 대표적인 탐방코스는 냉골 삼릉계곡이다. 냉골은 여름에도 냉기가 감돈다고 불리는 계곡 이름이다. 경주 남산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곳이 서남산주차장에서 시작되는 이 코스다. 삼릉 북쪽에 이웃해 있는 선방골의 보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과 함께 많은 문화유적이 위치해 있고 비교적 오르기 쉬운 산행코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냉골이나 선방골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바둑바위에서 만나 금오산으로 이어지기 쉽다. 남산 정상까지 느린 걸음으로 어린이와 함께 올라도 2시간이면 넉넉해 문화역사 탐방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냉골과 선방골을 이용한 산행길은 충분한 소나무숲의 그늘도 있고 신우대나무숲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곳도 있다.
냉골과 선방골의 문화재는 보물로 지정된 이름난 문화재를 비롯해 선이 큰 문화재들이 많아 탐방객들이 쉽게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삼릉과 경애왕릉,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석조여래좌상, 미녀부처로 알려진 마애관음보살상, 못난이 부처로 알려진 선각여래좌상, 가장 큰 마애석가여래좌상, 선각육존불, 마애관음보살상 등등 신라인들의 예술성을 충분하게 감상할 수 있다. 다만 아직 아무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방치된 냉골 석불좌상의 돌방석이 내자리인듯해 보는이들이 모두 안타까워한다. 또 머리 부분은 입체로 두드러지게 조각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선각으로 조각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석가여래좌상의 주변 암반이 터지듯 갈라지면서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효율적인 보수가 진행되지 않아 걱정스럽다. 수년째 보수가 진행되고 있어 이곳 탐방은 출입금지 밧줄로 제한된지 몇 년이 지났다. 상선암과 금오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먼발치로 바라봐야 한다. 소개해야할 자료들이 많지만 지면의 제한으로 천년역사를 묵언으로 전하는 불상들과 같이 이번에도 여기에서 아쉬운 글쓰기를 접는다.
(2014.4.17)
첫댓글 경주 남산은 신라 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과 패망에 이르는 과정까지..........
또한 신라는 불국토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효서왕 ---> 효성왕
감사합니다.
이런... 오타를......ㅠㅠ
@강시일 다시 읽어보고 오타 수정하겠습니다 ㅎㅎ
효서왕, 효성왕.... 모두 효소왕으로 수정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