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문간방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너무 외로웠다. 하루는 너무 외로웠고 하루는 고통스럽게 아팠고 또 하루는 너무 억울했다.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현실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더 못했고 전쟁 때문에 병이 들었다. 혼자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전쟁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전쟁 앞에서 그의 노력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자신만 전쟁과 가난의 폭풍을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보아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볼수록 허무하고 괴롭고 고달픈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어쩌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객지로 나간 것부터가 허황되고 헛된 마음이 아니었을까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죽기도 살기도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교회에 방 한 칸을 얻어 사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 종을 쳤다. 겨울이면 종 줄에 성에가 끼고 꼬장꼬장 얼어 손이 무척 시렸다. 그래도 그는 장갑을 끼지 않고 종을 쳤다. 맨손으로 종 줄을 조절해서 잡아당겨야 가장 좋은 종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을 치다 보면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권정생은 새벽마다 종을 치며 마음속 기도를 드리고 그 아름다운 종소리에 괴롭고 고달픈 마음을 날려 보냈다.
외롭고 힘겨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어느 한 목사가 “권 선생님의 생활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낸다. 목사는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왔다가 권정생을 보고 간 뒤였다. 목사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권정생은 이 편지를 읽고 ‘거지 나사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더 정확히는 ‘거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권정생은 세상에 비굴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거지 생활을 시작했고 거지로 떠돌며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 자신 속에 있는 알맹이만은 절대 굽히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부끄러움을 어쩌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거지였음을 밝히는 것을 꺼렸다. 그런 마음일 때 그는 ‘거지 나사로’ 같다는 편지를 받고 ‘거지’였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나는 부자의 문간에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이다.
분수를 지킬 줄 모르면 그 이상 불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고 지나친 욕심을 버린다면 타인에게 끼치는 해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나사로와 입장을 함께하며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거지로 떠돌던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 거지를 벗어나지 않고 거지 나사로와 “입장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거지처럼 살겠다는 말이요, 가난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비록 구걸을 하더라도 욕심 없이 가난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
권정생은 “갈릴리의 가난한 시골에 태어나서 33년의 생애를 통해 예수가 이루어놓은 삶의 정상은 바로 가난한 삶”이라 말한다. 예수는 “그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 지금 굶주려야 하고, 지금 울어야 하고, 미움을 사서 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고,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고, 철저한 아픔을 다 겪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했다. …
세상을 ‘거꾸로’ 보니 권정생은 싸움을 일으키는 부자보다 평화로운 거지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가 높은 보좌에 임금처럼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눈앞에 예쁘게 핀 꽃보다 거름이 되어준 똥에게로 눈길이 갔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는 것이다.
- 이기영, 「작은 사람 권정생」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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