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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21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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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의 순교자, 성(聖)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성모님의 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이십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헌신했던 사목터는 큰 본당이나 학교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양떼는 고관대작이나 부자들이 아니라 지하 감방 속에서 신음하던 동료 수감자들이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인 동시에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 창립자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한 동료 수감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한때 저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까운 죽음이다. 그렇게 훌륭한 수도자이자 탁월한 대 영성가였던 콜베 신부님께서 단 한 명의 동료 수감자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라도 죽음의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으셨다면 나중에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 내 지척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권이며 신앙이 철저히 유린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계곡 안에도,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가 순교하신 후 한참 뒤에 그의 어머니께서 동료 수도자들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년 콜베 앞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의 손에는 두 개의 관이 들려져있었습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붉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정한 음성으로 그에게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즉시 둘 다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성모님께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라지셨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흰색의 관은 순결을 의미하고 붉은 색 관은 순교를 뜻합니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한 송이 백합처럼 순결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아사 감방에서 그토록 원하던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명 한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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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경 공부의 목적>
일본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아들이 자라서 어떤 여자를 알게 되고 교제하다가 결혼까지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여자가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시간을 다투는 병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을 고치는 약은 매우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의 간(肝)을 먹어야 낫는다는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자기의 애인을 살리려는 욕심에 그만 어머니를 살해하여 어머니의 간을 꺼내 가지고 자기 애인이 있는 곳으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빨리 뛰어가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이 나타나 “얘야, 너무 빨리 뛰어가다가 넘어질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설입니다.
선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선물을 주는 당사자를 사랑해달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선물을 주고 있는 이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 팔찌를 선물했는데 여자가 그 팔찌에만 정신이 팔려 남자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될까요?
‘성경’은 무엇일까요? 성경도 ‘선물’일 것입니다.
성경도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주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선물로 주는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주신 것은 ‘성사’요, 그 성사를 거행하도록 당신이 세우고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 죄를 지으면 먼저 개인적으로 타이르고, 그 다음은 둘 이상이, 그 다음엔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으로 여겨버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에게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주셨듯이 교회에게 당신의 전권을 다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떨어져나가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것이 있는데 바로 ‘성경’입니다. 교회에서 떨어져나가는 대부분의 이유가 성경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선물이 아니라 교회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 적이 없으십니다.
소위 종교 개혁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종교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며 함께 모일 것을 권고하셨지만 오히려 성경을 통하여 함께 있는 사람들을 갈라놓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처음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하시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받는 이들이 성모님을 무시하고 예수님께만 감사를 드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성모님께서 사랑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혹은 만약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과 옷 등이 결국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으로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가 아버지만 사랑하려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무시한 채 아버지에게만 오려고 하는 아이를 아버지는 반길 수 없습니다.
성경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그렇게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면 성경을 통해 교회가 사랑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사랑은 무시한 채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에게만 가려 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기쁠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물려받은 진리의 눈으로 수많은 글들 가운데서 추려내어 엮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교회가 이해되고 사랑받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성경공부가 미사나 고해성사 등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먼저 사랑해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성경을 사랑해야 교회도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지 않는 성경공부는 아버지만 사랑하고 어머니는 무시하는 자녀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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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20 :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처를 못 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그의 곤경을 못 본 척 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 사람이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해 주질 않았다면 그는 파멸의 길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고 하신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속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사기와 거짓 맹세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의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는 것이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각의 일치이고 다음은 의지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주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그라니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형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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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일어난 모세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며 하느님 곁에서 열정적인 중재자였던 모세가 죽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지만, 신비로운 하느님의 징벌로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세는 여러 가지로 자격을 갖추었고 하느님께 은총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이집트 탈출로 시작된 큰 계획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는 중요한 일을 하였지만, 이제 여호수아에게 그 일을 마무리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주제이고, 어떤 일도 하느님 계획을 완전하게 성취하지 못하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조건을 알려 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바치는 곳에 당신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거처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인 공동체인 반면, 외형적인 건물은 부차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건물이 없어도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갈등에 대한 해결을 지시하십니다. 공동체의 분열은 주님의 현존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형제를 모욕할 때, 처음에는 단둘이, 그다음에는 둘이나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의 도움을 받아, 서로 간의 친교를 회복하고 주님의 현존을 맞이할 수 있도록 대단히 신중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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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여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잘못에 관한 상황처럼 보이는데, 전체 내용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짓는 상황이고, 그래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네가 보거든”으로 해석됩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라는 말씀에 대해서, 산상 설교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두 말씀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그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고, 그래서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너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다.”라고 단정 짓고 비난하는 일인데, 그런 행동은 형제애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도 형제애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되고, 형제를 타이르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얻은 것이다.’라는 말은, ‘되찾다.’, 또는 ‘구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죄 짓는 형제를 회개시키는 것은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이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형제를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오직 그를 위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기의 교리 지식을 과시하려고 하거나, 또는 자기는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조금이라도 그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 같은 행동을 하면, 그것은 타이르는 일도 아니고, 형제애 실천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고집이 세거나, 내 판단이 잘못되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는 일이 성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때에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다시 시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형제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타이르는 일을 함부로 하다가, 형제를 구하기는커녕 상처만 주고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고하다가 그게 지나쳐서 강요가 되고, 압박이 되어서,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감만 키워주고, 그래서 냉담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보는 고해성사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니 권고를 하든지 충고를 하든지 간에 신중하게,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에 알려라.”라는 말씀은, 종교재판에 넘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17절의 말씀은, 죄를 지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공동체의 권고를 고해성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명백하게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고해성사 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냥 죄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이고, 또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즉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마태 16,19) 다시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 말씀들도 죄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죄 속에서 살면서도 고해성사 보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용서받기를 거부한 사람은 죄에 갇힌 채로 죽어서 저쪽 세상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 세상에는, 즉 내세에는 고해성사가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겠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는 동안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보속한 사람은, 그 회개와 보속을 내세에서도 인정받게 될 것이고, 그만큼 연옥에서의 보속 기간이 짧아질 것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즉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서 어떤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1요한 5,16)
(여기서 ‘죽을죄’는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그래서 용서받는 것도 거부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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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흥주 베드로 몬시뇰]
스페인 유학시절 아우슈비츠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한 인간 집단이 다른 민족을 상대로 저질렀던 잔악한 죄악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소름끼치는 두려움과 참담한 분노를 느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아우슈비츠는 하느님께서 왜 침묵하셨으며 또 왜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셨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 지하 감방을 둘러보던 중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지하 감방 13호실은 아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갇혀 있던 곳인데, 바로 거기에 막시밀리아노 콜베라는 위대한 성인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천주교 사제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콜베 신부는 혹독한 중노동과 갖은 형벌에 시달리면서도 사제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치 병사들로부터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감방에서 한 사람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수용소 책임자는 같은 감방에 있던 열 사람을 골라 아사형을 내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기혼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콜베 신부가 그 사람 대신 아사형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용소 책임자도 콜베 신부의 뜻밖의 행동에 놀랐지만 결국 그 뜻을 받아들였고, 콜베 신부는 굶주림의 고통을 겪다가 독극물 주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불에 태워져 없어졌고, 지금은 그곳에 그를 기리는 꽃다발만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의 놀라운 희생정신과 위대한 사랑은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그 당시 수용소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콜베 성인을 통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들과 분명 함께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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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오늘 독서에서 마침내 모세가 길고도 힘들었던 그의 인생 여정을 마칩니다. 모세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삶을 반추하자면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혹사 당하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태어나는 모든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이 명령을 산파들이 거부하자 모든 사내아이들을 익사시키고 여자아이들만 살리는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는데 이 와중에 태어나게 된 것이 모세입니다.
어머니와 누나 미리암의 기지로 살아남았지만 결국 가족들은 아직 갓난아이였던 모세를 왕골상자에 넣어 떠나보냅니다. 그는 어머니의 손에 크지 못하고,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자라야만 했습니다. 올곧은 성격이었던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심한 노역을 당하는 것을 보고 감독을 죽인 뒤 피신하게 되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얼핏보면 이렇게 그의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되는 것 같지만 그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야기 하듯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그의 인생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홍해를 가른 기적을 비롯해 수없이 무수한 기적을 보였고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했지만 이스라엘 군중은 오히려 그로인해 이집트를 나와 고생하게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또한 우상 숭배를 행하는 잘못을 저질러 약속 받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랑생활은 길어지기만 합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쫒기는 삶이었고 하루하루 백성들이 행여나 잘못이라도 저지를까 전전긍긍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여정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와 신앙을 위해 온갖 고통과 시련을 견뎌온 그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다소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해야 할일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나안 입성은 아니었습니다. 후손들이 하느님을 앞으로 더욱 잘 믿을 수 있도록 돌보는 일,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세의 모습은 결코 굳세거나 리더쉽이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가지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연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의지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저마다 연약함을 가지고 있고 여러가지 일들에 쫒기며 전전긍긍합니다. 평탄한 삶이 이어지는 것 같다가도 여러 장애물들이 앞을 가로막아 쉽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교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약속하셨지만 직접 확인할 길은 없고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 와중에도 우직하게 주님을 따른 모세의 모습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의심하기도 했고 박해를 피해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이외에도 풍족하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하느님을 따랐으므로 오래오래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았다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모범으로 삼는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낀 이들, 그리고 간혹 의심하기도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결국 주님만을 따라 살아간 이들입니다. 그들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죄를 지은 형제들에게 주님의 말을 전하려 노력한 이들이며 결국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주님께 무엇이든 청한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미사 중에 우리들 역시 여러 장애물에 쉬이 넘어지지 않는 중심을 잡을 것을 다시금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방식은 아닐지라도 당신의 방식으로 모든 좋은 것을 주실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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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인다면>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인다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한다면
지금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서로 보듬는다면
시기 질투의 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생동한다면
죽음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나눔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탐욕의 더러움을 씻을 수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서로 받쳐준다면
짓밟음의 쾌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함께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묶인다면
분열의 손길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정의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부르짖는다면
불의의 유혹에 결연히 맞설 수 있습니다
평화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순결하다면
폭력의 거셈을 꺾을 수 있습니다
진실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투명하다면
거짓의 검붉음을 표백시킬 수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한걸음 내딛는다면
절망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 한다면
지금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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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는 암과 투병하시는 이해인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던 '날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라는 이 말을 묵상합니다. 암으로 투병하는 오늘 이 시간이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고,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이 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거룩해진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4가지 마음을 가졌답니다.
첫째,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둘째, 그 동안에 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들을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놀라워하고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넷째,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어질고 순한 마음을 지니고 애써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운님들 안에도 4가지 마음을 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으로 믿고 청하면 약속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다시 말하자면.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사랑으로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라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저 사람이 조금 실수했다고 해서 저 사람은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부족한 저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돌보아주시고 감싸주심을 늘 기도 손으로 잊지 않도록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운님들이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포도송이만 되지 않으면, 고운님들은 ‘할 수 있습니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포도송이만 되지 않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앞에 이해인 수녀님이 알려주신 4가지 마음을 품으시기를, 그래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포도송이가 되어 고운님들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지게, 그리고 회복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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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23)
♧♧ 시편 42편 10절….
"내 반석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렸네. ‘어찌하여 저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걸어가야 합니까?"
* 내 반석이신 하느님께...
심한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이미지를 지닌 ‘반석’은 종종 안전함(시편 61편 3절. 참조)과 견고함( 욥기 14장 18절. 참조)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절대적이 보호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시편 18편 3절, 31편 4절. 참조), 반석과 같은 하느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확신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 어찌하여 저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원수의 핍박 속에 슬피 걸어가야 합니까?...
이 구절은...오랜 고통에 대한 다윗의 절망적인 탄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먼저 ‘반석이신 하느님...’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다윗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아니라 반대로 구원에 대한 강한 호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시편 42편 11절….
"적들이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온종일 제게 빈정대면서 제 뼈들이 으스러지도록 저를 모욕합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하는 원수들의 조롱의 말이 야훼 하느님을 절대 신뢰하는 다윗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롱의 말처럼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영적 권위가 참됨은 물론 야훼 하느님을 향한 자기 신앙도 결코 거짓되지 않았음을 강하게 변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시편 42편 12절….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
이 구절은...6절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후렴구입니다. 이러한 구절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오직 하느니만 의지하고 바라보겠다는 다윗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시편 43편 1-2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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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소속감은 행복과 정서적 안녕에 필요하다고 합니다. 미국 과학 진흥회에서 발간하는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에 의하면, 사회 관계망은 면역력을 증가시켜 질병 저항력을 높이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풍부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불안과 우울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든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파생되는 자기 자신의 피해는 어떨지 떠올려 보십시오. 예전의 아픈 상처로 더는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하지만 사실 좋은 관계가 더 많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자식 때문에 집 안이 편안한 날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포기했다면서 마음은 아프지만 어떻게 살든 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동안의 아픔이 얼마나 컸었기에 이러한 다짐까지 하시게 되었을까 싶지만, 말처럼 포기가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또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죄를 지은 사람에게 충고했지만, 듣지 않는다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난 대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포기하면 결국 힘들어지는 것은 나 자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관계를 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끊음으로 인해서 나의 행복이 보장될 것 같지만, 관계가 깨짐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이 더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냥 포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나와 그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십니다. 곧 첫 번째는 혼자서, 두 번째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다음에는 교회에 알려서 타이르라고 이르십니다.
이러한 행동을 왜 하는 것일까요?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주님 안에서 모두가 노력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합을 실로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혼자 하는 기도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바치는 기도를 원하시기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함께 하기보다는 혼자 하는 것을 더 즐기면서,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혹시 함께 기도하더라도 나 자신만의 기도만을 드리고 있으며, 관계의 회복보다는 내게 어떤 이득이 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진정한 관계의 회복은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기둥처럼 세워져 있을 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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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의 원칙}
미국 워싱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존 고트먼 교수는 부부의 대화를 지켜보면 이 부부가 5년 안에 불행하게 이혼하게 될지, 아니면 행복한 부부생활을 유지할 것인지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적중률이 자그마치 95%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10년 동안 700쌍의 부부 대화를 조사하고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하나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칭찬과 비난이 5:1 이상일 경우 10년 뒤에도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이하는 5년 이내에 불행한 이혼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칭찬의 힘을 굳게 믿고, 한 번의 비난이 있었다면 다섯 번 이상의 칭찬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바로 이 ‘칭찬’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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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님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한용운 스님은 <복종>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몇 번을 읽어도 아름다운 시입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하나 바꾸면 세상이 고통의 바다로 보입니다. 시차가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곤 합니다. 잠 못 이루는 것을 걱정하면 밤이 더 길게만 느껴집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감사드리면 밤이 축복과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차는 걱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차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제1 독서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고, 40년 동안 미디안에서 살았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자신의 역할을 여호수아에게 맡겼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욕심도, 원망도, 걱정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걱정 때문에, 원망 때문에 눈을 감아도 눈을 감지 못하게 됩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도, 이별의 슬픔을 안고 쓸쓸히 죽어간 사람도, 불의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도, 피어나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처럼 세상을 떠난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지금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겸손은 하느님을 위해서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을 위해서 계명은 물론, 작은 사랑까지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의 겸손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것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죽음까지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길은 오랫동안 기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가능한 길입니다.
오늘은 콜베 신부님 축일입니다. 그분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남을 위해서 대신 목숨을 바친 신부님입니다. 말로 하기는 쉽고, 글로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그분의 희생과 그분의 나눔은 천상의 별이 되어 오래도록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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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다운 삶과 죽음>
-모세가, 콜베 사제가 그 모범이다-
요즘 저의 취미는 저절로 걷기와 카톡 사진 찍기가 되었습니다. 멀리 성지순례가 아니라 가까이 수도원 경내를 성지순례하듯 시간 나는 대로 걸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제도 10820보를 걸었습니다. 따로 휴가가 아니라 이렇게 틈틈이 수도원 하늘길, 배밭길을 걸으며 사진 찍는 것이 저에겐 휴가며 외출입니다. 아마 수도형제들중 이렇게 하는 사람은 저뿐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듯 걷습니다. 저에겐 걷는 것이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연장입니다. 주님의 집을 향해 주님과 함께 걷듯이 기쁘게 걷습니다. 기도, 묵상, 운동을 겸한 걷기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걸을 수 있는 것 역시 소원중 하나입니다.
산티야고 순례중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 빨라지던 기쁨이, 또 새벽 출발할 때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순례여정 중 가장 많이 되뇌었던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집에의 귀가가 가까워지는 죽음일수록, 기쁘게 살다 기쁘게 주님의 집에 귀가하는 죽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께서 주신 누구나의 공통적 영적감각입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곳곳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위로하고 치유하며 우리를 구원합니다. 아름다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카톡사진도 아름다운 하느님 추구의 방편임을 깨닫습니다.
하루에도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운 불암산 배경의 하늘이 아름다워 수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산책중에도 수없이 이런 저런 꽃이며 야생화를 찍습니다. 겨울 한 철만 빼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봄-여름-가을 끊임없이 피어나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하여 지인들에게 참 많이 보내는 꽃인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무궁화꽃 오후 인사 받으세요!” 어제 오후 전송한 꽃인사 내용입니다. 전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하게 하는 사랑의 꽃인사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발명이 아닌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사랑과 감사요 기쁨과 행복입니다. 살줄 알면 행복이요 살줄 모르면 불행입니다. 결국 아름다움의 추구는 하느님 추구이며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죽기 위한 참 좋은 영적수행입니다.
지상에서의 아름다움은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 지상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우니 천상의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클까 하는 설렘의 기쁨도 간간이 묵상하면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요즘 한주간은 세기 당번입니다. 저희는 언제나 공동기도에 공동식사이며 수도원의 중심을 이루는 두 장소가 성당과 식당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식사함으로 저절로 한 식구가 되고 수도가정 공동체의 형성과 일치입니다. 어제도 식사하며, 또 세기하며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25년전 40대 중반 제가 원장과 주방장을 수년간 겸임할 때는 2개의 식탁에 7-8명의 수도형제들이였는데 지금은 배로 불어나 4개의 식탁에 16명 수도형제들입니다. 또 참좋은 전문 요리사 출신의 형제가 함께 지내며 주방장으로 봉사하니 식탁은 참 다양하고 풍요로워 25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식탁은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할까 하고 연상하기도 합니다.
어제는 문득 세기하며 창밖을 바라보며 30년전 그 작았던 소나무들과 태산목이 울창한 거목이 된 것을 보며 과연 나의 내적성장과 성숙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는 죽음의 그날까지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끊임없이 내적으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삶의 유일한 의미와 목표는 이런 아름답고 풍요로운 영적성장일 것입니다.
결론하여 아름답게 잘 살다가 아름답게 잘 죽는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아름다운 선종은 없습니다. 우연한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아름답게 잘 산 결과의 필연이 선종의 죽음입니다. 삶도 죽음도 은총이지만 우리의 노력도 반드시 동반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충실히 깨어 아름답게 살 때 주님은 아름다운 선종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남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고 평화와 치유, 공동체의 일치도 선사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를 영원한 인류 유산의 선물로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신명기의 모세의 삶과 죽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또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 성 콜베 신부님의 치열한 삶과 불쌍한 이웃 형제를 대신한 순교의 죽음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인지요! 특히 모세의 삶과 죽음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오늘 모세의 죽음으로 신명기는 끝납니다.
모세의 해피엔딩의 죽음입니다. 오늘 말씀 전에 나오는 마지막 죽음을 앞둔 신명기 33장, 모세의 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세상 떠나기전 공동체에게 강복을 주고 공동체의 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다음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에는 들어가지는 못한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오늘날 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참 멋진 죽음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에녹에, 또 엘리야에 앞선 모세의 승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내적 상처도 컸을 법 합니다만 하느님은 약속의 땅 넘어 궁극의 하늘 나라로 승천시켰음을 깨닫습니다.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자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하니 릴레이 경주의 바톤은 성공적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어떻게 모세처럼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의 기도와 공동체가 답을 줍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기도할 때 공동체에 주님도 함께 계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회개와 화해를 통해 공동체와 깊이 결속되는 것이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끊임없는 회개와 화해를 통해 몸담고 있는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니 이런 삶의 여정을 통한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결국은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의 끊임없는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모세가 얼마나 공동체와 깊이 결속되었는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임종전 공동체에 대한 ‘모세의 축복’(신명 33장)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느님과 공동체를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참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다가 아름답고 멋진 죽음을 맞이한 모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분입니다. 바로 이런 모세에 이은 새 모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에 미사은총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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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성무일도 )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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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말씀들은 제게 관계 이야기로 들립니다. 복음에서는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독서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가능한 최고의 관계를 모세라는 한 인간을 특정해 열어줍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
오늘 말씀의 전제입니다. 서로 잘 맞을 때야 한없이 좋을 수 있는 게 인간관계지만,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말이 달라집니다. 상해의 정도와 형태는 달라도 당한 쪽에서는 서운함은 물론 배신감과 분노, 슬픔, 복수심까지도 치밀어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권유는 절차가 꽤 복잡합니다. 먼저 그를 직접 타이르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안 들으면 교회에 알리고, 마지막으로 교회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시네요. '취급하라, 대하라'가 아니라 '여겨라'입니다. 한 사람의 회심과 구원을 위한 절차는 최대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심정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누군가를 포기하거나 제외시키는 일은 가급적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혹여 부득이한 경우에라도 편중된 일부의 의견만이 작용해서는 안 되기에 더 마음을 써야 하지요.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그런데 이 최종 결론에 작은 반전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 채셨는지요? 사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를 사랑하고 포용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찾아가 함께하시는 건 이스라엘 백성들 저변에 깔린 배타적 민족주의와 율법주의를 향해 던지는 고요하고도 심지 굳은 도전장과 다른지 않습니다.
결국 끝까지 (징하게) 형제와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 이라도 아버지께서 품으시는 한 형제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예언서 갈피마다 온 세상에서 모여든 이민족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이 드러나 있고, 또 예수님께서도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예고하신 바 있으니까요. 그러니 참다 참다 못 참겠거든 마지막으로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에는, 인간적으로는 힘들겠지만 주님도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지 않으시니 함께 기다려 주자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이는 일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뒤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걸(마태 16,19)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때는 베드로에게만 국한해 하신 말씀을 오늘은 제자들 전부에게 전하시네요. 매고 푸는 권한, 즉 단죄와 용서, 해방의 권한이 제자단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 부활 이후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로 전격 확장될 것입니다.(요한 20,23) 바로 우리 모두의 권한이자 의무가 된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마태 18,19)
두 사람 이상이 모이기 시작하면 인간 관계에서는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걸 우리 모두는 체험으로 압니다. 나빠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기의 것과 타인의 것을 조율하다보면 긴장과 갈등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이 어려움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러면서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 실존을 또한 통찰하고 계시기에 꽤 매력적인 보상을 제시하십니다. "마음 모아 청하면 들어 주신다는 것, 당신이 함께 있겠다는 약속"(마태 18,19-20 참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단락의 내용은 모두, 본문 범위 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뒤에 이어질 용서의 주제(마태 18,21-22 참조)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곧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곧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위한 전주곡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라서, 함께 하는 삶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갖가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몰랐다면 다른 문제지만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 포용과 자비 외에 다른 해답은 주지 않으십니다.
부부건, 가족이건, 공동체건 불가능하기 짝이 없는 이상화된 관계만 꿈꾸다 보면 이상적 존재가 아닌 나와 그를 동시에 피곤하게 하고, 결국 요구와 실망으로 관계의 틈을 벌어지게 만들 뿐이지요. 그 속에 용서가 없다면 상처와 회피의 쳇바퀴가 계속 돌면서 눈두덩이처럼 커져갈 뿐 합치점은 점점 멀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이만한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희망과 행복을 주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이 묵상을 나누는 분들 안에도 이미 이렇게 주님과 살아가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요.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신명 34,5)
혹시 벗님에게는 이 말씀이 모세의 삶이 헛수고와 공허로 매듭지어진 실패로 느껴지십니까? 그토록 간난고초를 겪으며 도달한 약속의 땅에 결국 발조차 들여놓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말입니다. 이 조처가 마치 징벌처럼 내려졌으니(민수 20,12 참조) 그럴 만도 합니다. 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상황에서 모세 대신 주님께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시각에서 이 죽음을 관상하면 영 다른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는 신명기 저자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세는 이미 이 지상에서 하느님과 더할 수 없이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본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럽기 짝이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지요.
혹시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칩시다.
"모세야, 너 지금 하늘 나라에 와서 나와의 영원한 사랑 안으로 들어올래? 아니면 거기서 좀 더 머물며 약속의 땅 점령 싸움을 시작할래?"
벗님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모세가 억지로 질질 끌려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듯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허락만 하신다면 모세처럼 얼른 하느님 품으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이 지상에서 그처럼 일치의 은총을 누린 모세에게 천상의 초대 앞에서 지상의 땅 따먹기는 어쩌면 더이상 대수롭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약속의 땅은 사실 우리에게 약속된 천상 본향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모세는 살인죄까지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이 지상의 광야 길을 걷는 동안 하느님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친밀함을 희망으로 선사 받았습니다. 무수한 성인성녀들 역시 그 희망으로 더더욱 주님께 달아들었을 것이고요.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에게도 그처럼 겸손히 손을 내미시고 곁을 내주시고 속을 보여주시는데,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 오늘 말씀이 던지는 질문의 답은 우리 각자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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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말씀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에 기대를 거신다. 하느님은 늘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고뇌, 두려움,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의혹, 마음의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 개입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바깥에서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잠재력을 일깨워 일으켜 주시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편 기드온(판관 6-8장 참조)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낮은 자존감, 약함, 가족 내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경험한다.
매우 아름답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 활동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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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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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8,18)
오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로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큰 성인이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콜베 성인은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대신 희생제물이 된 분입니다.
성인께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셨는데, 그곳에서 다른 죄수가 받아야 할 형벌, 곧 굶어죽는 형벌인 아사(餓死) 형벌을 대신 받아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복음적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우리의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는데...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콜베 신부님께서도 너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는데...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내어놓고 있는가?
너의 구원을 위해, 너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19-20)
예수님처럼,
콜베 신부님처럼,
너의 구원을 위해 전부를 내어놓을 수 있는 참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처럼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며 사귀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한 가지 중요한 과제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이고 성실한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맺는 이 관계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끕니다."('복음의 기쁨', 9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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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진정한 형제>
"네 말을 들으면 형제 하나를 얻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자가 가장 불쌍하도다
고집이 쎄서 귀를 막고 그래도 자기가
옳다고 맘 속으로 굳히고 사는 사람,
스스로 족쇄를 풀지 않으면
답이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말은 무성하고 본인은 정작 모르고 있을 때
그냥 두었다가는 문제가 되겠다 싶으면
용기내어 말해주어야 합니다.
~ 위해서 해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겸손히 받아들이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고
무반응이면 답없는 사람입니다.
더 넘어지고 더 깨지다 보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진정한 형제가 누구였는지...
'충고를 받아들이면
고충을 그 만큼 겪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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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5)
아픈 역사를
온 삶으로
받아들이며 닫힌
역사를 치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인간의 삶을
짓밟고 더럽히는
것은 언제나
인간 자신이었습니다.
모두를
형제이게 한
콜베 사제의 숭고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사랑의 역사는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실패이 좌절이
없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생명의 참된
의미를 배웁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 역사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깊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서로를
살리기에 속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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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언제나 신앙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그 누구도 콜베신부님의 희망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희망은 계속하여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가장 간절한 사랑입니다.
희망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으로 드러나는 어머니의 모성애처럼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어머니처럼 콜베성인은 그렇게 성모님을 닮아갔습니다.
황폐해진 전장의 폐허 속에서도 어머니 같은 희망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희망의 빛은 가장 열악한 수용소 안에서도 눈부시게 뿌려지고 있습니다.
희망은 기도가 되어 우리 모두를 형제가 되게 합니다. 희망은 사랑이 되어 우리 모두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희망은 분명 존재합니다. 희망으로 살다간 콜베성인이 있습니다. 희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는 서로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소금처럼 스며들고 파고들고 있습니다. 희망을 믿는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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