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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11장16~33절
제목 : 어리석은 자랑
바울은 육신을 따라 자랑하되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역설로,
대적들의 헛된 자랑을 꺾고,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십자가의 복음을 지켜냅니다.
1. 어리석은 자랑을 하는 이유(16~20절)
1)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16절)
“[16]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 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10:12;11:1).
*10:12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1: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사도직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도 자신의 정당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본절은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진술(1-6절)한 이후 잠시 다른 주제를 다루다가(7-15절) 다시 본절의 주제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일을 결코 쉽게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한 1절과 모순되게도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설득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자랑은 자랑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자기 자랑을 폭로하여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을지라도 그 자랑은 자신의 지혜와 권위를 스스로 과시(誇示)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 바울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여기지만 선한 목적을 위해 불가불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 차원에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2)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17절).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서 자랑을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도적인 것도 아님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이 어리석으며 그것에 현혹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것처럼 바울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서로 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어리석은 자와 동일하게 자랑을 하자면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업적이 있습니다(22-33절).
3)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18절)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본절은 혈통(22절), 업적(10:13-16), 외적인 권위의 표징(3:1)과 같은 것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어서 그동안 고린도 교회 앞에서 자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도가 취할 행동이 아니며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상황의 요청에 따라서 자신의 업적을 과장됨 없이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4)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19절)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 어떤 주석학자도 본절의 '지혜로운 자'라는 표현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풍자적 표현으로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간접적으로 꼬집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고린도 교인들은스스로를 지혜 있는 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20절)
(1) 종을 삼거나. - 이 표현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상전으로 행세하며 그들을 노예나 종으로 부렸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갈 2:4;5:1의 내용과 같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자유를 빼앗아 율법의 종 노릇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잡아 먹거나. (헬라어'카테스디에이')는'삼키다'(막 12:40)란 의미가 있는데 이는 마치 기생(寄生)하는 동물처럼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남의 피와 땀의 결과를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거짓사도들은 실제로 바울이 씨를 뿌려놓은 곳에 와서 그 결실을 가로채는 자들이었습니다.
(3) 사로잡거나. - 이 말은 미끼를 던져 함정에 빠뜨리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수사학적 달변(6절)으로 교인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3절).
(4)자고하다 하거나. - 이 말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가짜 복음을 가지고(4절)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행세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킨 것이 무시하는 행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좁은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때 무시당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5)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 이것이 은유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실제적으로 빰을 친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게도 거짓 사도들을 용납한 결과로써 그들에게 당한 무시와 수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플루머(Plummer)의 표현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을 짓밟고 착취하는 자들에게는 관대하고 인내와 동정심을 가지고 바울에게는 완고하게 하는 아이러니(irony)를 보여주었습니다.
2. 바울의 자랑 : 고난과 약함(21~33절)
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21절)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하며 비록 허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행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한 자였습니다.
그는 이 약함을 스스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 인간적 약함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12:9-10).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울은 오히려 강한 자입니다.
또한 누가 정말 강한 사도인가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언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23-27절).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수준에서 자랑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본문의 '누가'로 표현된 인물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혹자는 이들을 단지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들의 배후에서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해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거나(Barrett), 더 구체적으로 '지극히 큰 사도들' 즉 예루살렘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봅니다(Lowery).
그러나 여기서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2) 바울은 자기도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합니다(22절)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본문의 '히브리인'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血統)의 순수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혈통상으로 완전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언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모국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아니라 모국어인 아람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Bruce, Martin, Harris).
그런데 본절 전체가 혈통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 자신의 유대인 됨을 강조하므로 첫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합니다.
한편 '히브리인'이 인종적인 측면에서 진술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인'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Barrett).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서,
보호의 대상으로,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을 의미합니다(롬 9:4).
아브라함의 씨. - 바울은 태어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빌 3:5).
하나님의 백성이나 종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육의 혈통으로 나는 것은 아니
지만(롬 9:6-13) 유대인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기준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는 혈통상으로 순수한 언약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며,
또한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습니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유대인 됨을 강조적으로 반복한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 즉 거짓 사도들이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었음을 암시합니다.
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바울은 더욱 그러함을 나타냅니다(23절)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 여기서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공동번역)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말함에 있어서 거짓 사도들과 달리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한편 혹자는 본문이 적대자들의 사도됨을 긍정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들은 13절 이하의 거짓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라고 보기에 결국 바울은 이중의 적대자들과 싸웠다고 합니다(Barrett).
하지만 그러한 해석보다는 본절을, 적대자들과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을 백번 양보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바울 자신은 더욱 확실하고 뛰어난 사도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그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사도행전에도 충분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에 의하면 바울이 옥에 갇힌 횟수는 모두 일곱 번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클레멘트 1서 5:6)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투옥은 빌립보에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행 16:23-30).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매를 맞은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절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대해서는 1:8,9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이 열거하는 그의 업적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업적이 승리의 사례가 아니라 패배와 고난의 사례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道)와 일치하는 것이며 인간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과도 일치되는 것입니다(11:30;12:5, 9, 10).
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24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죄수에게 매를 때리되 사십대에 한해서 때리게 하는 형벌은 신 25:1-3에 의거한 유대인들의 태형집행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른 아홉대를 때린 것은 때린 횟수를 잘못 계산하여 사십을 넘기게 되는 잘못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25절)
세 번 태장. - 태장(笞杖)이란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로마식 태형으로 채찍 끝에 납을 매달아 치는 무서운 형벌이며 이 태장을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행 16:22, 37).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선교적 목적을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로마 관리들이 죄수된 자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행 16:37, 38).
한 번 돌로 맞고. - 이것은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되는 사실입니다(행 14:5, 19).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이 일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증거가 될 만한 구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행적이 그러했듯이 바울의 행적도 모두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 27:14-44에 바울이 탄 배가 파선(破船)한 사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그 사건은 본 서신을 기록한 후의 일이었습니다.
한편 본절에서 배가 파선되어 일주일을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은 살 소망마저 끊어진 상황을 회상했던 1:8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6) 여행 중에 여러 번 위험을 당하였습니다(26절).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여행에. - 여행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도이포리아이스'는 해상 여행과 구별되는 육로 여행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 바울의 육로 선교 여행은 때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당시 반쯤 말라있던 강물이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순식간에 급류로 변해 여행자에게 큰 위험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아마 이런 위험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당시의 헬라와 아시아의 산악 지방에는 산적들에 의한 약탈 행위가 있었는데 아무런 호위 병력도 없이 선교 여행을 하는 것은 이런 위협까지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 바울은 선교를 함에 있어서
유대인 동족들로부터는 배교자로 낙인 찍혀 죽음의 위협을 당했고(행 9:23, 29;14:19;18:12)
이방인의 토착 종교인들로부터는 훼방자로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행 16:16-40;19:23-41).
아마 바울은 이런 역경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4:8,9)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 - 시내의 위험이라 함은 에베소, 빌립보, 베뢰아 등의 도시에서 당한 환난과 핍박을 가리킵니다(행 16:21;19:27).
광야의 위험이라 함은 비시디아의 버가와 안디옥 사이에 있는 험악한 광야를 통과할 때 또는 안디옥에서 루스드라와 더베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지날 때 있을 수 있는 추위와 뜨거움과 배고픔등의 위험 그리고 갈라디아의 도시들에 이르기 위해 다루스산맥을 넘어가는 지역에서의 위험 등을 가리킵니다.
바다의 위험. - 이는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파선의 위험을 가리킵니다(25절).
거짓 형제 중의 위험. - 거짓 형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과도 구별되는 자들로 아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과도 연관이 있는 유대적 기독교인들이라고 봅니다(Barrett, Bruce, Harris).
그런데 혹자는 단순히 기독교내에 있는 배교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Tasker, Martin) 또 어떤 학자는 이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권위자들(가령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바울에 대해 나쁘게 고자질했을 것이라고 봅니다(Hering).
그러나 바울이 배교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갈 2:4을 참조해 볼 때 거짓 형제란 유대적 기독교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들에 의해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7절)
수고하며 애쓰고. - 이 두 단어는 중노동을 나타내는 말인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육체의 심한 노동으로도 몹시 피곤한 생활을 했습니다(살후 3:8).
여러 번 자지 못하고. - 육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 일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외부의 위험 때문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가 의도적으로 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고자 해도 잠을 잘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은 육신으로 감당하기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은 광야의 위험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그의 굶주림이 자발적인 금식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그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 권리로 얻을 수 있는 재정 보조를 마다했기 때문에 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굶주림에 처했을 것입니다.
춥고 헐벗었노라. - 이는 바울의 재정적인 빈약함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참으로 자신은 가난해지지만 다른 사람들은 부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었습니다.
8)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28절)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 늘 바울의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은 자신의 생(生)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목회적 관심, 즉 교회에 관한 염려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들려오는 분쟁과 타락의 소식을 들은 때마다 그것의 해결을 위해 고심했으며(행 20:29,30), 교회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애썼습니다(롬 14:1;고전 9:22).
9) 누가 약하면 같이 약했고,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였다(29절).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 바울이 당한 고난은 교회 밖에서 오는 것(23-27절)과 교회 안에서 오는 것의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1)교회 안에서 오는 고난은 근본적으로 그의 성도들이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거짓 사도의 가르침에 현혹된 것이나 바울 자신에 대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 등도 결국 이러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2)교회 밖에서 오는 고난은 23-27절에 언급된 것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본절에서의 핵심적인 단어는 '약해지다'(아스데네이)라는 말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Barrett).
① 이 말은 율법과 조문(條文)에 매여 믿음이나 양심이 약해진 사람에 대해서 사용됩니다(롬 4:19;14:1-2;고전 8:11,12).
② 이 말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힘이 약하고 허약한 사람을 가리킵니다(11:21;12:10;13:3,4,9;롬 8:3).
그런데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본문에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연관을 시키자면 전자와 관련될 수 있겠으나 본절의 약함은 율법이나 조문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신앙과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이 강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성도들에 대해서 결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하고 함께 아파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고전 8:13;9:22).
본절은 바울의 이런 기본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봅니다.
한편 바울의 이런 태도는 그의 유기체적(有機體的) 교회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엡 1:22,23).
즉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교회의 특징입니다.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 여기서 '실족'은 '죄에 빠진 것'(공동번역)이나 '걸려 넘어져 믿음을 잃게 된 것'(Barrett)을 가리킵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심정이 가장 안타까울 때 쓰는 말이 '속이 불타오른다'라는 표현임을 생각할 때(렘 20:9) 바울의 이 말은 그의 사도적 인격에 깊이 내재해 있는 목회자적 열정을 잘 나타내 준다고 봅니다.
1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
바울은 비록 자신에 대한 자랑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어 자랑했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자랑을 해야하는(16-27절) '어리석음'을 멈추고 다시 본질적인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함이란 육체의 풍모나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의 허약함,
세상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 약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여정을 걸어야했던 것 등이라고 봅니다(11:23-27;사 53:4).
그리고 이러한 연약함이 그에게 자랑거리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인간적인 면에서 약하면 약할수록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기에 그 연약함이 그에게 자랑거리라는 의미입니다(1:8-10;3:5;4:7,10,11;12:5,9,10).
11) 하나님은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십니다(31절)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주 예수의 아버지.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의심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고(1:12-14) 그가 한 말에 대해서 그들이 계속 의심하려고 한다면 별 도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경험한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의 말이나 행우에 대한 진실성을 호소하는 수단 중 가장 강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 - 이 말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유대교의 찬양문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그 하나님이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주 예수의 아버지와 동격으로 사용되어(갈 4:4)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엡 1:3;벧전 1:3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된 점을 미루어 보아 당시에 그러한 찬양문이 기독교인의 예배나 기도에서 너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Barrett).
12)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습니다(32절)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바데아(Nabataea)를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이 아레다 왕이 다메섹을 다스렸다는 표현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은 B.C 63년부터 A.D. 34년 까지 로마의 영토에 편입(編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Harris).
그러나 A.D. 34-62년 사이에 로마의 황제였던 갈리굴라(Galigula A.D. 37-41)와 클라우디오(Cludius A.D.41-54)의 동전이 다메섹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고고학적 결과를 가지고 아레다가 다메섹을 통치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추측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다메섹이 이중의 통치를 받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즉 '아레다'가 로마의 봉신(封臣)으로서 다메섹을 통치했다는 것입니다(Tommsan).
또 어떤 학자들은 다메섹이 여전히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으나 다메섹에는 나바데 아인들의 반자치 구역으로 허용된 영역이 있었고 바울이 당한 사건은 거기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잡으려고. - 이것은 행 9:23-25에 나오는 사건을 말하는데 본 구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단순히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행 9:24).
1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33절)
광주리를 타고 벗어났노라. -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로서는 그 사건이 그다지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체험을 고백하는 것은 이미 바울 자신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주리를 타고 들창 밖으로 몰래 도망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약함과 비천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어리석은 일인 줄 알지만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바울 역시 누구와 비교해도 모자람 없는 인간적인 자랑거리(22절)를 이야기 합니다(16~18,21a절).
자기 자랑에 인색한 바울이 어리석은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사도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 공동체,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의 주 되심과 자신이 성도들의 종’(4:5)임을 전하던 바울을 경계하고 자유와 물질을 탈취하며 자신들을 종처럼 다루고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19,20절).
십자가의 도(복음)를 모르니, 진정한 지도자는 천대하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는 환대한 것입니다.
자유에서 종속으로, 자녀에서 종으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을 역행하는 일이고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위협과 회유로 복음이 주는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속박하려는 공동체 안팎의 공격에 어떻게 맛서고 있습니까?
3) 바울도 거짓 교사처럼 육체적으로 자랑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21b~27절).
하지만 그리스도 일꾼으로 자처하느 이들이 도저히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가 죽음을 넘나들며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시간들입니다.
육신적인 자랑거리로 치장한 자보다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사는 이가 참 지도자가 아닐까요?
목회자에게 완전함만 요구하기보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눈물과 수고로 견뎌온 모습을 기억하는 성도가 됩시다.
4) 바울에게 복음을 위한 수고(23절)보다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욱 무겁습니다(28,29절).
약한 자를 생각하면 함께 아프고 넘지는 자를 보면 애탑니다.
고생과 고난은 시간이 가면 지나가지만 교회를 위한 염려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집니다.
내가 함께 통감해야 할 공동체와 지도자의 아픔은 무엇입니까?
5) 무용담이 아닌 약함을 자랑합니다(30~33절).
광주리를 타고 가까스로 도망했던 부끄러움까지 꺼내놓습니다.
하지만 약함을 자랑하다는 사도의 고백에 타협할 수 없는 강함이 묻어나고, 주님의 능력만을 높이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