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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영덕군 영해면 괴시리307
고택 속에 피어나는 고색창연한 옛 선비들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는 마을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대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탄생지로 알려진 괴시마을은 조선 후기 만들어진 양반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전통마을이다. 마을의 가장 높고 아늑한 땅을 잡아 이색의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었다.
괴시마을은 한옥과 부드러운 논밭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전통 마을이다. 특별한 볼거리 없는 마을이라 가볍게 지나칠 수 있지만 마을 뒷동산을 따라 산책을 즐겨보자. 부드러운 능선으로 감싸 안긴 마을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궁이의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민박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도시 생활에서와 같은 편리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사람의 향기가 배어 있는 마루에서 묵은 김치와 고추장 밥상에 질 좋은 쌀밥을 즐기면서 운치있는 고택의 푸근함을 느껴보자. 또한 괴시마을은 새로움의 물결에 무너져가는 전통의 마을과 정신을 지켜내는 소박한 아낙의 일생을 담담하게 적어낸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선택》의 실제 무대가 되는 마을이다. 200년이 넘은 고가를 둘러보는 느낌이 또 다른 잔잔한 즐거움을 준다.
① 지명 유래
경북 영덕군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00m쯤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마을 괴시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인데,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굳어졌다. 아직까지 호지골․호지마을․호지촌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② 정착 배경
1260년(고려 고종 46)경 함창(咸昌)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뒤 수안(遂安)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거주하다가 1630년(인조 8) 무렵 영양(英陽) 남씨가 정착하면서 영양남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 단독으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③ 주변 환경
마을은 주봉인 동쪽의 망월봉(望月峰) 아래 여덟 팔(八)자 형국으로 자리를 잡고 있고 자연 지형에 맞춰 가옥 구조가 대부분 서남형으로 되어있다. 전체 100여 호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30여 호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민 역시 100여 명이 영양남씨다. 마을 앞에는 동해안의 3대 평야 가운데 하나인 영해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이 마을이 예부터 세도가들의 터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④ 가옥 구조
마을의 전통 가옥들은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남아 있는 고택들은 모두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것들로, 'ㅁ'자형 구조인데 영남 반촌(班村)에서도 보기드문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뜰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30여 호의 가옥 가운데 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 국가 및 도 문화재 자료만도 14점이나 된다. 조선시대 후기 경북 지역 사대부가의 주택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학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⑤ 전통 행사
괴사전통마을은 조선후기 영남 사대부들의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어 조상의 멋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 체험의 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2003년부터는 2년마다 5월에 이곳에서 목은 문화제가 열리고, 2006년도부터는 매년 6월에 호지말 한마당 잔치와 10월 목은 이색 탐방로 걷기 행사가 펼쳐져 관광객들에게 소중한 지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행사 주요 내용은 군수님 가마타기 등 전통혼례체험과 한옥체험, 초교출발 ~ 괴시리 도착으로 마련되는 목은 등산로에서의 등산대회 등이 있고 즉석에서 문화관광해설과 궁중무용(무고), 월월이청청, 동해어부들의 소리 재현 등의 공연과 마당 한켠에서 펼쳐지는 전통 민속놀이(널뛰기, 투호놀이, 화살 꼽기 등)재현과 전통차(연잎차 등)시음도 실시하고 있다.
⑥ 영양남씨와 괴시전통마을
마을이 영양 남씨 괴시파 4백년의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은 영양관의 1세조 고려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영양군 홍보의 15세손이며, 영해부 입향조인 용담현령 송정공 남 수(1395~1477)의 8세손인 장사랑 사재감 참봉 남두원(1610~1674)公이 1630년경에 시거하면서부터이다. 남씨는 시조인 영의공 남 민(신라 경덕왕 조)이래, 고려 중기에 와서 영양․의령․고성 남씨로 분파되었다.
영양 남씨 괴시문중은 시거조(始居祖)두 원 공에 의해 비롯되었고, 公의 장남 붕익(1641~1687)이 현종 13년(1672년)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영산현령을 지낸 이후, 마을은 문한(文翰)이 이어져 영남 유림에서도 뛰어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문집, 저술, 일기, 유고, 서화 등과 판목들이 전한다.
근대에는 기미년(1919년) 영해 3.18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세혁(南世赫, 신돌석의병 적극후원, 협창학교 설립 항일사상 고취, 만주망명 독립군모집, 건국훈장 애국장), 남진두(南鎭斗,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 남효직(南孝直, 건국훈장 애족장), 남응하(南應夏, 독립유공자) 등이 구국과 항일운동에 이바지 하였다.
괴시 남문은 영해부 향교를 중심한 지역유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적 관혼상제의 예절이 근래에 까지 전승되어 온다. 학문을 위해 건립하였던 입천정, 괴정, 만루한, 침매정, 물소와서당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문중 선조들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제사(齊舍) 6곳(덕후제, 태창제, 추모제, 추원제, 영모제, 양걸제)에서 해마다 정해진 날에 제사를 모신다. 전통 민속놀이로서 윷놀이, 줄다리기 등과 농사과 관련한 세시풍속이 전래되어 왔으며, 유가의 규범과 행의를 엄수하는 문화와 예절이 이어지고 있다.
영덕군에서 괴시마을의 전통 유교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복원사업을 전개한 이후 옛 모습을 되찾아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전통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⑦ 주요 고택소개
1. 영양남씨 괴시파종택(민속자료 제75호)
종택은 약 300년전 남붕익 공이 건립한 가옥으로 “☐”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선후기 주택의 소박한 고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괴시마을 공간구성에서 핵심적인 가옥이다.
2. 대남댁(문화재자료 제197호)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 공이 건립하여 1911년에에 중수한 건물로 평면구성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통례칸과 사랑채의 내부공간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
3. 물소와고택(문화재자료 제198호)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 공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건립한 집으로 1864년에 중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 출입구에는 남, 여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담이 높게 쌓여 있으며, 관련 건물로 물소와서당이 있다.
4. 해촌고택(문화재자료 제199호)
영조 31년(1775)에 해촌 남극만 공이 건축하였으며 고종 15년(1878)에 보수한 고택이다. 정면 4칸, 측면 7칸의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채는 정침과 아랫방, 중문, 큰 사랑 및 작은 사랑이 배치되어 있어 주택의 평면과 공간구성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5. 천전댁(문화재자료 378호)
남유용 공이 광서 2년에 건립한 건물로 안채에 사랑채와 문간채에 연결된 “ㅗ"형태로 이어진 독특한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어 “날개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6. 주곡댁(문화재자료 제393호)
소유자의 7대조인 남경괄 공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그 현손인 남효순(1863~1942) 공이 중수하였다. 택호에는 남효순의 처가 소재지인 한양 조씨 집성촌인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를 딴 것이다.
7. 경주댁(문화재자료 제395호)
고택은 함창김씨, 수안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을 당시, 수안 김씨가 살았던 건물이라 전해지고, 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체가 있다.
8.구계댁(문화재자료 제396호)
남경악(1763~1821)공이 1805년경에 건립하였고, 그의 현손인 남경목이 1910년경에 중수한 ☐자형 가옥으로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나,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9. 영은고택(문화재자료 제459호)
고택은 남공수(1793~1875, 괴정 준형 공의 증손)공이 건립하였고, 마을 내 다른 가옥과 달리 전면 좌우측에 처마를 달아 팔작지붕의 박공부분이 보인다. 관련 정자로는 스무나골에 침수정이 있다.
10. 영감댁(문화재자료 제424호)
남흥수(1813~1899)공이 건립하였고, 1938년 증손 남대철이 중수하였다고 전하며 관련 정자로는 만서헌이 있다.
11. 사곡댁(문화재자료 제425호)
남용이 고종 27년(1890)에 건립한 것을 1942년 남응호가 매입하였으며, 택호는 증조부인 남조영의 처가 동명인 경주 사곡을 딴 것이라 한다.
12. 입천정(문화재자료 제392호)
남붕익(1641~1687)공이 1680년경에 건립하여 학문을 강도하였다고 하며 200여년이 지난 후 5대손 남흥수가 여러 친족과 힘을 모아 그 터에 입천정을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경사지형에 입천정과 마계정사, 고직사가 배치되어 있다.
13. 괴정(문화재자료 제397호)
조선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공이 고려 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부자의 유허지인 이곳에 괴정을 창건하여 경목재라 하고, 연못을 파고 괴류를 심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괴정 중건기에 의하면 순조 17년(1817)에 중건하였고 이후에 고종 13년(1876)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14. 물소와서당(문화재자료 제394호)
물소와 서당은 좌승지에 추증된 남택만(1729~1810) 공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축한 것으로, 한때는 사당으로 활용되었다고 전한다.
15.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
고려 말의 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 선생의 유적을 추모하는 비각이다. 가정 선생은 한산에서 산천경개를 찾다가 이곳 영해부 향교대현 김 택의 사위로 정착하여, 이곳 괴시(호지)마을에서 아들인 색 선생이 태어났다. 가정 목은 두 선생의 유허비는 원래 1796년에 세워졌으며,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떨어져나가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워져서 1971년 비를 다시 세웠다.
16. 목은기념관
고려시대 대학자이신 목은 이색 선생의 유적을 기리기 위하여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목은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7. 기타
상귀댁, 백회제고택, 구상댁, 자후제고택, 도평댁, 상포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