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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037_최세라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책 소개
상식의 세계를 흩어버리는, 존재의 기술
〈시인동네 시인선〉 037.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얼룩말 보도」 외 4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세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를 읽는 순간 우리는 일상에 드리워져 있는 상식의 무대 커튼 뒤로 끌려들어간다. 이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언어들에 저항하는 그의 시가 엄마에게 배운 명징한 모어로 구축된 유한한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존재와 다르게’ 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시를 통해 사라지는 순간 속의 영원에 머물고자 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위태로운 믿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도약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얼굴들을 모래처럼 흩어버림으로써 존재의 비약을 기도하는 최세라 시인의 시를, 우리는 진정한 삶을 찾아가는 ‘존재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청동거울빛 나의 단추
단추 하나에 외투가 사라지는 이야기예요
몸에 맞춰 늘리고 줄이는 사이
내 거죽이 된 낡은 외투
위에서부터 몇 번째인지 말할 수 없지만
유난히 흔들리는 단추 하나 있어요
비끄러매고 아퀴 지을수록
팽팽한 실을 견디지 못하고 튈 것 같은
청동거울빛 나의 단추
동그라미 안으로 고인 물결무늬가
내 얼굴 비추다 가만히 흔들어 지워버려요
립스틱이 번진 채 거리를 활보하거나
잔고 없는 통장을 거듭 정리할 때 혹은
욕망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쇼핑몰을 헤매다
우연히 스친 누군가 이 단추 떨어뜨리면
내 오랜 외투 하나 옷장 깊숙이 사라질 테죠
벌어진 앞섶, 서서히 거죽이 열려
옷핀으로 여민 치마, 올 풀린 니트
드러나고 말 테니까요
거죽 벗겨진 나도 유야무야 개켜질 테죠
단추 하나에 내가 사라지는 이야기예요
[시인의 말]
창문 없는 고시원 벽에
침묵이 벽돌처럼 쌓이는 귓가에
각종 고지서가 빼곡히 들어찬 우편함 속에
조그만 환기창이 되어주었다, 시집을 읽을 때면
몰락의 세월도 숨구멍을 달고 잠시 물 위로 떠올랐다
[출판사 서평]
어떤 사소함에 우주를 매달았기에 끊임없이 가는 건지
이마의 주름이 무릎에 와요 당신은 근심 어린 눈으로 당신을 생각하죠 바지를 입는 날엔 왜 무릎 뒤가 구겨질까 모래가 강물의 뒤를 밟아 서서히 말려 죽이는 사라스바티 강, 살의가 빛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나나나무와 결혼한 인도 처녀는 잘 살고 있다 해도 기억할 수 있나요 롤 화장지의 나이테만큼 늙은 채 태어난 시각 화성과 금성 사이 몇 개의 혜성이 지나갔는지 나는 몇 시 몇 분이었는지 깨물린 자국 패랭이꽃으로 피어난 손목이 세 개의 주저흔을 숨겨준다 말한다면//약병 옆의 꽃들이 자꾸 수면제를 먹어요/벤치에 앉지 못하는 나무에게 무릎이 필요한 거죠//도시의 키가 여덟 뼘쯤 낮아졌어요 가로수에 일제히 무릎이 생기는 꿈, 쭈그려 앉아 손가락 그림 그렸죠 걸레질하던 무릎으로 기도하다 낭심을 가격한 죄로 파티마 성당까지 기어가야 했던 여자들을 꿈을//스프링처럼 일으켜 세우려는 엄마와 종일 싸웠어요/시간 서비스를 주지 않는 노래방 주인처럼/반향어가 난무하는 날에는/낭자하게 흐르고 싶어요 눈밭에 엎지른/토마토 주스, 무릎 없는 새들이 그저 뜀을 뛰네요/허공에 방점들이 박혔다가 그대로 멈춰요//명시하기 힘든 것을 선전하는 벽, 얼굴이 모래처럼 흩어지는 날엔 실물 크기 아이돌 가수의 스티로폼 손을 잡아요 나쁜 사건은 하나도 쓰지 않은 일기장처럼 당신이 떠나고 있어요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 전문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는 최세라 시인의 첫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에서 특히 눈에 띄는 시다. 마침표가 없는 이 시의 시구들은 마치 고대 한문 문헌들을 읽을 때처럼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불명확하다. 마침표와 쉼표를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혼동은 신화시대의 바벨탑을 상기시킨다. 개별 언어의 분절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바벨의 언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언어였을 것이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공유하던 하나의 언어에 대한 망각이 일어나면서 무수히 많은 방식의 분절이 무수히 많은 언어들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신화의 상상력이었다.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에서 발견되는 시 쓰기에 대한 메타적인 자의식은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 정지’라는 명제에 의해서 명징해진다. 위의 시는 “반향어가 난무하는 날” 쓰였다. ‘반향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저 자신은 망실되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마치 메아리처럼 ‘다른’ 언어의 틈새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의 ‘지층’이 되는 언어의 특성을 암시한다. 인간은 누구나 유아기에는 무한한 조음(articulation)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조음 능력을 상실하면서 혹은 옹알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언어사용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자신의 ‘엄마에게 배운’이 언어를 우리는 모[국]어라고 부른다. 모어 사용자들은 자신의 명료한 언어의 골짜기에서 메아리로 맴도는 유아기의 언어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추방이 언어의 진정한 고향이며, 언어를 망각할 때가 [오히려] 언어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라는 것을 눈치챈 시인들은 무너진 바벨의 잔해와 같은 개별 언어‘들’사이를 배회하는 존재다.
“반향어가 난무하는 날” 탄생하는 시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의 첫 행은 “이마의 주름이 무릎에 와요 당신은 근심 어린 눈으로 당신을 생각하죠”라는 관습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 언어적 혼란은 무너진 바벨탑의 잔해인 각자의 모어 사이에서 울리는 반향어(메아리어)를 연상시킨다. 첫 행의 “당신”은 시의 마지막 행 “당신이 떠나고 있어요”라는 속삭임에서 다시 출현한다. 이 시의 알파와 오메가인 ‘당신’을 우리는 모른다. 당신에 대한 철저한 망각 속에서 우리는 당신이 남겨놓은 메아리어만을 듣게 되는 셈이다.
당신은 숱한 문명에서 신화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바 위의 시에서 사라스바티 강은 인도의 여신으로서 강물처럼 유려하게 흘러간다고 하여 언어의 신이 된다. 하지만 사라스바티 여신은 처음부터 사멸할 운명에 처해 있다. “모래가 강물의 뒤를 밟아 서서히 말려 죽이는 사라스바티 강”의 이미지는 사멸하고 말 언어, 망각의 운명을 재현한다. 지금 아무리 많은 언중을 가진 자명한 언어도 예외 없이 망각될 운명인데 우리는 날마다 어제의 말을 망각한 언어의 잔해 위에 오늘의 말을 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화시대의 원초적 언어를 잊어버리고 나서 얻은 민족어, 유아기의 옹알이를 잊어버리고 나서 익힌 모어에서부터 있어온 언어의 운명이다.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는 우리에게 묻는다. 기원의 순간을 기억하느냐고. “롤 화장지의 나이테만큼 늙은 채 태어난 시각”에 “화성과 금성 사이 몇 개의 혜성이 지나갔는지 나는 몇 시 몇 분이었는지” 기억하느냐고. 이 기억은 명료한 모어로는 재현될 수 없다. “깨물린 자국 패랭이꽃으로 피어”나듯이 메아리어로 번져나갈 뿐이다.
메아리어를 따라가다 보면 무릎 뒤의 구겨진 흔적이나 손목에 새겨지는 “세 개의 주저흔”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시인은 “가로수에 일제히 무릎이 생기는 꿈”을 꾼다. 무릎은 나무를 벤치에 앉히고, 도시의 키를 여덟 뼘쯤 낮출 수도 있다. 시인의 꿈으로 오는 무릎이 세계를 낮은 곳으로 앉히고 있는 동안에 엄마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스프링처럼 일으켜 세우는” 엄마는 “시간 서비스를 주지 않”는 노래방 주인에 비견된다.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한 측면이다. 시간에 연루되어 있는 모든 존재는 유한한 만큼 그 순간을 간절하게 살아내야 한다. 엄마의 스프링처럼 일으켜 세우는 언어는 “무릎 없는 새들이 그저 뜀을 뛰”는 세계의 반영이다. 시인은 세계를 반영하는 언어에 충실하라고 요구하는 이 “엄마와 종일 싸”우며 “반향어가 난무하는 날에는/낭자하게 흐르고 싶어요”라고 호소한다. 이 “낭자”한 무릎의 상상력은 엄마의 무릎 없는 세계의 “낭심”을 걷어차는 “죄”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의 제목은 ‘뜀뛰기’와 ‘공중에서의 정지’를 ‘혹은’으로 연결하고 있다. 뜀뛰기를 통해서 공중으로 솟아오른 이후에야 ‘공중에서의 정지’가 일어난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뜀뛰기와 공중에서의 정지는 ‘운동과 정지’라는 대립물의 병치로 제시되는 걸까? 일견 “무릎 없는 새들”의 뜀뛰기와 대비되는 ‘공중에서의 정지’로서 무릎 뒤의 구겨진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시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둘은 하나일 것이다(不二一如). ‘시의 뜀뛰기’는 애초에 “허공에 방점들이 박혔다가 그대로 멈”추는 일이 아니던가. 시의 뜀뛰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얼굴들을 모래처럼 흩어버린다. 그래, 시를 쓰/읽는 일은 “당신이 떠나고 있”는 순간 속의 영원에 머무는 일이라는 걸 알겠다. 시란 “명시하기 힘든 것을 선전하는 벽”으로의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이리라.
시를 읽/쓰는 동안 세계의 얼굴은 흩어지고 있다. 시는 아이돌 가수의 스티로폼을 만지는 경험처럼 공허한 기쁨, 공허하기에 기쁜 일이다. “시집을 읽을 때면/몰락의 세월도 숨구멍을 달고 잠시 물 위로 떠올랐다”는 ‘시인의 말’이 주는 울림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창문 없는 고시원 벽의 조그만 환기창을 바라보는 시인은 엄마에게 배운 명징한 모어로 구축된 유한한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존재와 다르게’되려고 한다. 그 순간을 흩어지는 얼굴들에 다가가는 뜀뛰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는 시인의 첫 시집에 담긴 시론시로서 각별하게 읽힌다. 첫 시집에 실린 한 편의 시에서 세계의 비의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임을 안다. 하지만 시 읽기란 대저 산술적 평균을 초과하는 매혹인 것을 어찌하랴. 최세라 시인의 첫 시집『복화술사의 거리』는 저마다의 독자들에게 제각각의 메아리어로 읽혀야 마땅하다.
[시인의 산문]
새들은 자주 착지를 변경했다. 손바닥을 비껴 첫눈이 흩날렸다. 혀를 내밀어 쇳조각처럼 아린 도시의 눈을 받아 삼켰다. 울창한 그림자 밑으로 하루는 빠르게 저물었다. 어쩌다 문장이 떠오르면 받아 적을 때도 있었고 놓친 적은 더 많았다. 적어둔 문장은 사체처럼 뻣뻣했다. 놓친 문장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그게 중요했다. 포획한 문장을 계속 주무르다보면 마법처럼 근육이 풀리며 어떤 형태로든 변해갔다. 시가 얼추 꼴을 갖추면 그 한 편을 떠나보내기 전에 징하게 연애했다. 덜 갖춘 채로 뭔가 어색한 채로 떠돌아다니는 건 시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원고를 보내고 나면 다음 문장이 왔다. 받아 적지 못하고 놓칠 때가 점점 더 많아졌다. 문장은 늘 의식을 선행했다. 시를 쓰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보였다. 새들은 여전히 착지할 곳을 엿보며 물빛 포물선을 그었다. 새들이 무사히 내려 앉도록 새의 눈을 피해 그림자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저자 소개]
최세라
서울에서 태어나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얼룩말 보도」 외 4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아귀 손질법/왼쪽으로 돌아누우면/피아노 가온 다/전갈좌로부터/습관의 비/속초항에서/물수제비 뜨는 밤/뒤꿈치들/복약 시간/등/내향성 발톱/고양이 모양 반점/표본/거리에서 부르는 노래/테디베어에게/뜀뛰기 혹은 공중에서의 정지
제2부
각시투구꽃/승객들/동방전파사/아무래도 화요일/손목시계, 무한궤도의/새는 날개 위에서 운다/비는 주말에 온다/장마/생일/스팸을 써는 아침/그 여자 606호/하늘로 날아오르는 고래/치매 병동의 여름날/민트여인숙/새는 발목이 빨갛고/스크린도어/첫눈
제3부
크로노스카페/‘흐너짐’을 수정함/따뜻한 결별/꽃 아닌 것/커피와 탬버린이 식기 전에/브로콜리 금지령/10년 동안 터널/요凹요/복화술사의 거리/4월 대설주의보/딸기를 담았던 접시/우리 가운데 사이보그가 있다/핑키를 녹이는 아침/오늘 목요일 내일은 일요일/돌의 입술/클라우디/세 개의 상자/오늘
제4부
빨간 구두를 벗는 여자/얼룩말 보도/여자와 벤치 사이에 집이 있다/풀, 마음을 베는 것들/北으로 난 窓/파란 옷을 입은 남자/전지적 작가 시점의 CCTV/청동거울빛 나의 단추/양파, 움트는 회오리 지는/나비, 봄을 여는 세 개의 경첩/하구에 서다/탄생, 이름 없는 것들/소나무여 언제나 붉은/나의 사랑 클레멘타인/끝없는 이별/다시 사랑
해설 어떤 사소함에 우주를 매달았기에 끊임없이 가는 건지 / 김익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