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복
무진당 조정육
‘지극히 잘 다스려진 뒤에는 반드시 큰 혼란이 있다. 큰 풍년 뒤에 반드시 심한 흉년이 든다. 그런 까닭에 음식은 너무 기름진 것을 찾지 말고, 복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을 택하지 말라.’
-성대중,『청성잡기(靑城雜記)』중에서. 정민,『성대중 처세어록』,(푸르메:2009), 32쪽에서 재인용-
사람이 가장 힘들 때가 언제일까? 아마 가진 것을 잃었을 때일 것이다. 풍족하게 누리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었다거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쫓겨났을 때, 건강하던 사람이 큰 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오랫동안 기다렸던 바램이 무산되었을 때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
원래부터 가져 본 적이 없었다면 상실감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예로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에서 선진국들을 제치고 세계 1위인 것으로 조사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가져본 사람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끈질긴 아쉬움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가진 자로 누렸던’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때론 병을 앓는 사람도 생긴다.
따지고 보면 원래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잃는다한들 아쉬울 게 없어야 한다.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잠시 남의 것을 빌려다 쓰고 갈 때는 곱게 되돌려줘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일단 손에 들어 온 것은 전부 내 것이 된다. 잃어서는 안되는 내 것이다. 너무 많이 움켜 쥐어 손가락사이로 술술 빠져 나가는 모래알이라 해도 일단 많이 쥐고 싶어한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어느 한 순간 부자가 되어도 그 순간부터 그의 손안에 들어온 부는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자신의 것이다. 그동안 남의 것이었다가 자기 것이 되었다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있는 세상 이치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벼락부자가 된 사람의 생각이 이러할 진대 하물며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사람이라면 오죽하겠는가. 김정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서양 속담 중에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희는 그야말로 번쩍거리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다. (He was born with a silver spoon in his mouth.)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김정희가 자식이 없는 큰 집에 양자로 갔을 때 양아버지 김노영은 형조참판이었다. 김노영의 할아버지는 영조대왕의 부마여서 그가 사는 집은 ‘월성위궁’으로 통했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머리도 좋고 부지런하기까지 한 김정희는 실학파의 거두인 박제가에게 교육을 받았다.
집안 좋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도 잘한 김정희. 그의 모습은 누구나 꿈에 그리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은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는 ‘엄친아’ 였다. 그의 영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4살 되던 해에는 사은부사인 친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에 가서 평생의 스승 두 사람을 만난다. 옹방강과 완원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중국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금석학과 고증학을 집대성한 거물이었다. 당시 78세인 옹방강은 아들뻘인 김정희의 열정과 해박한 지식에 탄복해서 아들과 의형제를 맺게 했고 평생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제자를 지도했다. 김정희의 스승 박제가한테 명민한 제자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던 완원은, 김정희가 집에 찾아오던 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달려 나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김정희는 중국에 있는 60여 일 동안 기라성같은 학자들과 만났다. 귀국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던 중국 친구들이 송별회를 열어 주었다. 송별회 장면은 주학년이란 학자의 그림으로 기록되었고 참석한 사람들의 이별시로 채워졌다. 그야말로 융숭한 환송이었고 위풍당당한 금의환향이었다.
조선으로 귀국한 김정희는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친다.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내는가하면 경주 무장사비의 조각을 찾아낸다. 조금 늦은 나이인 33세살에 문과에 급제한 것을 계기로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50살에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리고 54세 때인 1840년 6월에는 동지부사에 임명된다. 동지부사가 됐다는 말은 30여년 전 자신을 데리고 청국에 갔던 친아버지와 같은 자격으로 중국 사행을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30여 년동안 줄곧 편지로 인편으로 소식을 주고받던 중국 친구들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인생이 이렇게만 풀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획했던 대로 중국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 다시 한 번 옛날을 회상하며 불꽃 튀는 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흐뭇했을까.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김정희는 중국에 가는 대신 관직을 삭탈당하고 예산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당시 대사헌이라는 권력을 쥐고 있던 정적 김홍근의 상소문 때문이었다. 상소의 내용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10여년 전의 옥사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김정희를 엮어 넣으려 했던 것은 묵은 원한 때문이었다.
그 원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상소문을 올린 김홍근의 행동이 다분히 감정적이고 편견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김정희에게 있었다. 평소 그의 행동이 정적들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오만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없이 자란 ‘엄친아’로서 빠질 수 있는 위험이다.
물론 귀하게 자란 사람이 모두 오만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그러나 김정희의 까탈스런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결과다.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그 상처로 인해 아파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저지른다. 김정희도 그러했으리라. ‘큰 풍년 뒤에 심한 흉년이 들 듯’ 너무 화려하게만 살다보니 몰락할 때를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 기름진 음식을 찾지 말고 너무 지나친 복을 택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는 현재의 풍요로움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결국 그는 감옥에 끌려가 참혹한 수모와 고통을 당한 후 겨우 목숨만 건져서 제주도에 유배된다.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로 유배 가는 것은 거의 ‘죽음의 섬’으로 추방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은 물론이고 살아서 육지로 돌아가리라는 보장도 없는 길이었다. 결국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더 이상 ‘은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축복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일 뿐이었다. 그런 세월을 8년 3개월동안 견뎠다. 그 과정 속에서 한라산 고목같은 추사체가 탄생했다.
그 모진 세월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는 지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1840년 유배 가는 길에 써 준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은 글자의 획마다 힘이 넘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글씨다. 반면 유배 생활 6년만에 예산 화암사에 써서 보낸 <무량수각>에는 불필요한 살이 전부 빠지고 단단한 뼈만 남아 있다.
김정희, <무량수각>, 1840년, 해남 대흥사
김정희, <무량수각>, 1846년, 예산 화암사
진즉 화암사의 <무량수각>같은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삼가고 절제하며 살았더라면 제주도까지 다녀와야 하는 고통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주가 사람에게 생명을 줄 때는 어떤 깨달음을 주려고 내 보낸다. 그걸 알지 못할 때 우주는 온 힘을 다 해 그에게 깨닫게 해 주려고 애쓴다. 때론 그 방법이 두 손을 채워주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손 안에 든 것을 전부 빼앗아 버릴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가르침을 줄 뿐 해치는 법은 없다. 인간 스스로가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지레 겁 먹고 나가떨어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희의 유배시절은 우주의 축복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추사체는 탄생하지 못했을 테니까. 때론 저항하고 소리치고 분노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시간을 축복으로 전환시킨 김정희 또한 시간을 뛰어넘어 존경받을 만하다. 제주도 유배라는 경고등이 켜졌을 때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뒤따라 온 후배들도 그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경고등을 확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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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사 김정희 보살 ()()()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보시하고 있는 김정희 보살...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닉네임이 '제주'이신 것을 보니 추사의 유배지 제주도 대정에 갔던 때가 떠오릅니다. 곰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래님. 몇 날 몇 일을 '굽신'거리며 절하는 사람이 허리 아프겠어요. ㅎㅎㅎ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고맙습니다 ()()()
추사의 일생을 보면서 인생무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추사같은 사람도 결국 지수화풍으로 사라졌는데...싶구요. 감사합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의 내용 감사 합니다...()...
소개해주신 "하늘이 감춘 땅"과 "붓다의 마지막 여로" 주문해놨습니다. 책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