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6장 일부 강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1-8 16-18
(우리의 주위에 돌아가는 하나님의 cctv)
제가 범죄학을 듣고 있습니다 범죄 예방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좋은 열쇠를 설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쇠는 아무리 잠가도 다 딸 수 있다고 합니다. 집 앞에 cctv를 하나 설치하는 것이 범죄 예방을 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선을 행하게 하는 좋은 방법도 tv 카메라를 돌려주고 전국에 생방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줄줄이 성금을 가지고 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cctv가 돌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번 일용할 양식에서 열왕기 상하를 마쳤습니다. 열왕기상하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여호와 보시기에입니다. 열왕기상에 이 말이 열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열왕기하에는 29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cctv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고 그곳에 녹화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cctv는 인간이 만든 cctv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든 cctv는 사람의 겉만 촬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cctv는 우리의 마음속까지도 촬영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은밀하게 악을 행하지 않고 은밀하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도 헛생각이나 죄악된 생각을 하지 않고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
독일의 나치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 중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존재적인 진공상태라는 말을 씁니다. 진공상태는 동물적인 욕구나 전통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결혼, 출세, 물질적인 부로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단은 잘 먹어도 많은 사랑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루어져도 내면의 진공 상태는 한 순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진공상태는 하나님과 만남의 상태에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들려올 때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항상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cctv가 마음에 돌아갈 때 채워집니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내가 하나님을 져버리고 산 사십년은 고아와 같은 삶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충족되지 않는 빈공간이 있습니다. .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흘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마음을 쓰면 밤하늘의 찬란한 불꽃놀이처럼 인정이 사라지면 허무해집니다. 고독해집니다 그래서 인기 연애인이 인기가 사라지면 우울증에 많이 걸립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사람 앞에서 살면 우리는 이중적이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신경을 쓰다보면 피곤해집니다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죄를 짓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임이사야 선교사님은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썩어서 냄새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한 으로 바꾸어준 적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살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크신 상급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의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의를 해야합니다. 본문에는 은밀히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밀히 숨어계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이사야 45:15-17) 우리는 숨어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해야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내면에 진공상태가 채워집니다. 마음에 참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제의 아름다움)
이전에 김밥 할머니가 찬바람을 맞으며 번 돈을 사회에 기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정심화 할머니는 30억원의 돈을 충남대에 기부하셨습니다. 다른 김밥할머니는 어린이 재단에 삼억원을 기부하였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일 년에도 몇 번씩 거지 잔치를 하였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는 거지 잔치를 일주일간 하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컴패선이나 월드비전 이나 굳네이버에 기부하고 선교사를 은밀하게 후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피땀흘려 번 돈을 기부하시는 분들은 아름답습니다. 서양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구제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안이숙 여사의 글을 잃어보면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후원해주신 분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에어컨도 없이 아주 허술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검손하게 사시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안이숙 여사가 미국에서 유학하는 데 후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구제 이야기를 들으면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이런 구제 문화가 활성화되어야합니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가 하는 구제를 기억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도르가라는 과부는 구제를 많이 하고 죽었는데 이것이 베드로에게 알려져 베드로는 죽은 그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제를 할 때 주의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하는 구제)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당시 구제 사업을 펼칠 때 나팔을 불며 사람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이리로 오세요!” 그러다보니 나팔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몰렸고 나팔 부는 사람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셔. 복 많이 받으세요!”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아예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존경을 받으려고 구제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구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제를 하며 사람들의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지 말아야합니다. 많은 돈을 기부하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신을 자랑하고 신문에 얼굴을 내고 이름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구제한 것이 녹화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모르신다고 하십니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구제가 선한 일이 됩니다. 은밀히 구제해야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대가를 바라는 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구제하는 도덕적 향락주의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나서 이름도 없이 사라지면 얼마나 멋 있습니까? 남한이 북한 사람들을 많이 돕습니다. 북한 사람이 남한의 기독교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보십니까? 성경에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도우며 감사패를 달라고 하고 영수증을 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주는 상은 불꽃놀이와 같습니다. 축제때 불꽃놀이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잠시 있다가 사라집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하다보면 구제한 것이 부풀려지기가 쉽습니다. 거짓되기 쉽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사단이 틈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소외됩니다. 하나님의 상을 잃게 됩니다. 구제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 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구제 받는 사람을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애들에게 용돈을 주어도 웃으면서 좋은 마음으로 주어야합니다. 던져주면 안 받습니다. 정성을 다해야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줄 때는 깨끗이 빨고 정성껏 싸서 주어야합니다. 받는 사람이 거지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은밀한 구제)
3,4절을 보십시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는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구제하고 다른 사람도 모르게 구제해야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상을 주신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비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갚아주십니다.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을 소자에게 주는 자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다는 듣기 위해서 하면 구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밀한 중에 구제해야합니다. 본문에는 ‘은밀이’라는 말이 네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내 생전에 갚아주실 수도 있고 자손에게 갚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물질로 갚아주시기도 하시고 마음 속에 영생의 기쁨으로 갚아주시기도 하십니다.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와 그의 몇몇 학자들이 공저로 내놓은 책 가운데에 "Are You Nobody? 당신은 하찮은 존재입니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인간성숙의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정신적 성숙함이 이러한 단계로 발전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첫째가 망설임의 단계가입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의 세계에 대한 단계를 말합니다. 말도 못하는 얘들이지만은 아이들 자라는 걸 가만히 보면은 얼마 동안 자라면서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 것을 챙깁니다. 어머니도 자기만 소유하려고 합니다. 자기만의 것을 몰래 뒤로 감추고 짜릿한 기쁨을 느끼면서 생글생글 웃습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숨는 숨바꼭질을 좋아합니다. 타인과의 구별된 자유롭고 독립한 자기존재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알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가지고 있는 내 것을 갖고자 합니다. 아이는 그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존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됩니다.
그리고 좀 크면 이 비밀을 공유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얘들은 어머니와 손가락을 걸고 어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그 비밀을 공유하면서 아주 짜릿한 행복을 즐깁니다. 이건 나와 너만이 가진 비밀이요. 비밀을 공유할 때 이것을 우정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흔히 신혼부부가 가는 여행을 밀월여행(蜜月旅行)이라고 합니다. 허니문(Honeymoon), 밀월 여행이라는 것은 둘만이 아는 비밀한 행복을 즐기는 시간을 말합니다. 오로지 둘만이 만나고 생각하고 가지고 또 그 어느 비밀한 장소에 있게 될 때 이것을 소위 행복의 극치라고 말하게 됩니다. 인격과 인격이 서로 만나는 관계에 있어서 비밀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정이 있고 사랑이 형성되고 상호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그만큼 나의 존재의 영역이 커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성장하게 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이 비밀은 헬라어로 무스페리온인데 영어로 미스터리(Mystery)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은 비밀이라고도 하고 신비라고도 합니다. 신비는 꼭 비밀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신비가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비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그런 관계, 그런 시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나를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될 때 무한한 신비로운 자기만이 가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은 폴투르니에가 말하는 높은 단계의 짜릿한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복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행에 대해서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한 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정혼하게 되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찾아와서 목자님이 내가 그 돈을 낼게요. 단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세요. 그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해주세요.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그분은 그때 삼십만원을 냈는데 그 후에 그분은 매달 오십만 원씩 일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몇배 이자를 쳐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갚아주는 것이 사람이 주는 것보다 휠씬 크고 좋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상을 보고 믿어야 은밀한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면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미 지불영수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 보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을 사라질 대 행복은 사라집니다. 이 비밀을 몰라서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하는 불평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으로 선을 포장하다가 두 내외가 다 죽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벌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 예배당을 짓고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보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우리는 선행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의무감으로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특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내가 구제할 때는 누구에게 주었는지 몰라야하고 내가 구제받을 때는 누구에게 받았는지 몰라야한다는 말합니다. 구제할 때 구제금을 등 뒤에 두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교학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나서 선교사가 떠내려갑니다. 한 청년이 구해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떠나가며 “성경을 똑바로 보십시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 보시고 갚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이렇게 은밀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기도)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종교지도자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 서서 하늘에 손을 펴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들리는 기도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잘못을 때리는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들을까봐 두려워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한 소년이 할머니에게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할머니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은 할머니 말씀대로 일주일 동안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주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전거 사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문을 열어놓고 아버지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아이는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전거를 사 주시도록 도와 주세요!” 할머니가 아이의 기도를 듣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크게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들어주신단다.” 아이는 말합니다. ”나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들으시고 아버지도 들으시면 더욱 좋잖아요?“ 어떤 기도원 가면 여러 명이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아도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도 기도하고 사람에게도 기도하는 것입니끼? 아니면 자신에게 췌면을 걸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은밀한 기도)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람들 들으라고 너무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들으라고 부르짖는 기도는 좋은 기도입니다.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만 의식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만 보이기 위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기도의 행복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은밀성 속에서 영성이 성장합니다. 세례요한이 영성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은밀 속에서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뢰에서 나오는 기도)
7,8절을 보십시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기도가 있고 남묘호렌겟쿄에서도 기도가 있습니다. 형수되는 분이 남묘호렌겟쿄를 하시는데 하루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벽을 보고 남묘호렌겟쿄를 말하며 소원을 아룁니다. 남묘호렌겟쿄를 많이 말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당시에 랍비는 길게 해야 기도 응답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바알 선지자들과 같이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리지르며 기도하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아데미 신상을 부르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를 천 번 하면 기도가 이루어지고 한 번 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기도해야할까요?
남대문 교회에 다니는 한 분이야깁니다.. 그분은 병원 원장의 부인입니다. 권사입니다. 그분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씀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마태복음 6장만 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므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에는 구해야 준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팔 남매를 두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계모를 얻었습니다. 계모가 아이에게 잘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안 합니다. 가족회의를 합니다. 어머니라고 말하기 전에는 양말도 없고 용돈도 없습니다. 다음부터는 도리가 없이 어머니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줄줄 아는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주십니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많이 기도하고 철야했으니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의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면 들으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을 때 한 마디의 기도가 응답됩니다. 그렇다고 반복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확신을 얻기까지 반복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기까지 반복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주기도문의 뜻을 생각하며 반복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유안진 선생님의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놀았습니다. 메뚜기가 낼 만나자고 하자 하루살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말하는 내일이 무슨 말이냐 메뚜기와 개구리가 놀았습니다. 개구리가 하는 말이 내년에 다시 만나자 하니 메뚜기는 내년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일이라는 말은 하루살이에게는, 내년이란 말은 메뚜기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일도 있고 내년도 있습니다. 확실한 사실이지만 자신이 모르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불신자들이 모르는 먼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시는 미래가 있고 하늘 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보며 기도해야합니다. 먼 미래에 하나님이 상주실 것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갚아주실 것을 바라보며 기도해야합니다. 차 운전할 때는 먼 앞을 보아야합니다. 백 킬로로 달릴 때는 삼백 미터 앞을 보아야합니다. 그 앞에 것이 내게 다가옵니다. 불가 몇 초 후에 내게 다가옵니다.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은 저 앞에 있어야합니다. 나는 현재에 살지만 앞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미래에 갚아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갚아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은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금식해야하는 때)
구약시대 때에 맨 처음 금식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기 전에 사십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안디옥 교회가 주님을 금식하며 섬긴 것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이 장로들을 임명할 때 금식하였습니다.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금식이란 내 육신의 욕망을 누르고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시입니다. 탐욕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기 싫은 금식을 억지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직 기쁨으로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마음으로 금식해야합니다. 금식은 단 하루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단 한 끼의 금식이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금식은 언제 할까요? 우리는 가능한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가능한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밥을 기쁘게 잘 먹어야 위대한 목자가 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예수님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금식해야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사라질 때 기도해야합니다. 밥 생각이 없으면 금식해야합니다. 능력을 받고자 할 때 또는 은사를 받고자 할 때 금식합니다. 질병을 고치고자 할 때, 그리고 크게 회개해야할 때도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위와 같은 때에도 자기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없이는 금식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은 절대로 즉흥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왕의 금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 가운데 악한 왕입니다. 그는 아내 이세벨의 충동을 받아서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집을 다 쓸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런 아합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서 잠을 자며 풀이 죽어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합의 금식 기도를 보시고 그가 겸비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는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하만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이스라엘 전체에게 삼일 금식을 하게 하고 자신도 삼일을 금식하고 왕에게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에스더와 이스라엘의 금식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사십일 후에 망할 것이라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왕으로부터 개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고 심판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거국적인 회개의 기도를 할 때도 금식하였습니다.
(외식하는 금식)
16절을 보십시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그런데 이런 금식도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금식을 잘 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금식도 안하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금식 투쟁을 하고 있다고 티를 내면서 사람 사이를 다녔습니다. 옷도 허름하게 입고 세수도 안하고 수염도 깍지 않았습니다. 밥을 안 먹어 배고프므로 자연히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사람은 금방 표가 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서서 자기가 지금 금식하고 있다며 사람들의 인정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는 간절함이나 죄에 대한 처절한 애통함 대신에 사람들의 인정함을 받고자 하는 처절한 투쟁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떤 부흥사님은 명함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분은 사십일 금식기도 두 번이라고 명함에 적었습니다. 이분은 금식기도하고 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다닙니다. 이런 금식기도는 진실한 기도는 아닙니다.
(은밀한 금식)
17,18절을 보십시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을 할 때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장막방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 안 먹느냐니까 무슨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사람이 너 금식하는구나라고 알아 맞췄습니다. 어떻게 알아맞춰지? 물으니 네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얼굴을 씻었잖아 라고 하였습니다. 금식할 때는 꼭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표시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해서는 안 됩니다. 욕심으로 금식 기도하여서는 안 됩니다. 남이 21일을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겠다. 또 누구는 40일을 했다니까, 나도 한번 40일을 하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욕심으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께서도 받지 않으십니다. 금식을 할 때는 금식에 대한 준비로 감식을 해야합니다. 면밀히 본다면 금식은 금식을 시작하는 날부터 금식이 아니고 준비할 때부터 금식입니다. 그 다음 금식이 끝나고 보호식까지 다 마쳐야 그 금식이 끝나는 것입니다. 준비가 없이 하는 금식기도가 있는데,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한 금식기도입니다. 회개기도를 하기 위하여는 곧바로 금식에 들어가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회개를 하기 위한 금식기도는 날 수를 정하지 않고 회개가 끝날 때까지 금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금식기도는 날 수를 정하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한 중에 보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cctv가 항상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구제, 은밀한 기도, 은밀한 금식에 짜릿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제 기도 금식을 아시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상급은 사람들이 주는 상급보다 휠씬 좋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사람들이 하는 심판보다 휠씬 무섭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의를 행하는 가운데 모두가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가 53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