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명찰 표훈사 주지
수행자 외호, 전법 ‘최선’
불교정화 운동 적극 참여
일제강점기에 금강산 4대 사찰인 표훈사 주지를 역임한 원허(圓虛)스님은 복덕(福德)을 구족한 수행자였다. 1·4후퇴 당시 법홍(法弘)스님과 남으로 내려온 뒤에는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원허스님의 행장은 본지에 연재된 ‘우리 곁으로 다시 온 스님이야기(2004년)’와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2009년)’을 통해 상세히 전한 바 있다. 이번에 확인한 <불교시보(佛敎時報)(1935년)> 등의 내용을 새롭게 소개한다.
원허스님 모습을 담은 사실상 유일한 사진이다.
오른쪽 위 사진은 주지를 지낸 금강산 표훈사의 마하연 선원 모습.
한국전쟁 당시 피난와 머물던 부산 선암사.불교신문 자료사진
원허스님은 어려서 기독교인으로 신앙이 깊었다고 한다. 안성은 가톨릭 성지가 있는 고장이기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월 나온 <불교시보>는 “어려서부터 종교심이 풍부한 만큼 여러 신자 중에도 열렬하였으며 천국천당(天國天堂)은 독차지한 것 같이 선전하였다”고 원허스님의 출가이전 이력을 전하고 있다.
기독청년이 불연(佛緣)을 맺게 된 것은 안성 서운면에 있는 청룡사를 왕래하면서 부터다. 당시 청룡사에는 용허(龍虛)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계율을 엄히 지키는 율사(律師)였다. 우연한 기회에 절에 가서 용허스님을 만나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불교시보>에는 원허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실은 용허스님 기사가 실려있다. “이 율사는 보기만 해도 곧 생불(生佛)이 강천(降天)한 듯, 그 모양은 빙옥(氷玉)같고, 그 말소리는 자비가 흐르고, 그 품행은 엄여추상(嚴如秋霜)하여 추호도 범할 수 없는 도인이었다.” 용허스님에게 감화 받아 출가의 뜻을 밝혔지만 허락을 쉽게 받지는 못했다. 거절의 이유는 첫째 처자(妻子)가 있고, 둘째 이교인(異敎人)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원허스님은 출가 이전인 17세에 결혼해 부인이 있었다. 불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지극해졌지만 용허스님은 용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 불교로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가운데 병이 찾아왔다. 작은 병이 아니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 정도의 큰 병마였다. 인생의 무상을 깊이 절감하고 불도(佛道)를 구하겠다는 원력으로 고향을 나섰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지친 심신을 다잡기 위해 춘천 가래골약수터에 머물며 관음기도를 했다. 기도 회향일인 21일째 되는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약수를 떠주면서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나을 것이니, 어서 받아 마셔라. 병이 낫거든 착실하게 중노릇을 잘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꿈이 생생하고 신기해, 기도를 회향하고는 서둘러 금강산으로 갔다.
금강산 표훈사 산내 암자인 마하연에 도착해 한 스님에게 꿈 이야기를 전했다. 이에 그 스님은 “그것은 관세음보살이 감로수(甘露水)를 주어 병을 고치게 한 것”이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출가해 스님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표훈사의 어른이며 설법을 잘하기로 유명한 관허(貫虛)스님이 흔쾌히 허락했다. 관허스님 상좌로 불문에 들어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 수행하며 지내기를 6년이나 했다. 그동안 가족들에게는 일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보니 부인은 여전히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이에 스님은 불법의 진수를 전달하며 설복 받아 불교에 귀의하게 했다. 부인은 얼마 뒤 금강산으로 와서 수행과 기도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불교시보>는 기록하고 있다.
원허스님은 표훈사 주지 소임을 맡아 대중을 시봉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사찰 정재를 아끼고 아껴 도량정비와 대중외호에 만전을 기했다. “재물을 탐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상좌들에게는 “삼보정재를 부처님 대하듯 소중하게 생각하고, 재물이 꼭 필요한 대중에게는 머뭇거림 없이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표훈사를 비롯한 금강산에 있는 사찰들은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도량이었다. 특히 풍광이 뛰어나 사시사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육당 최남선은 “옛 스님네들이 법안(法眼)뿐 아니라 산수안(山水眼)도 갸륵하시다”고 높이 평했을 정도로 금강산은 명산 중의 명산이었다. 그 가운데 표훈사는 금강산 4대 사찰로 ‘최고의 명사(名寺)’였다.
원허스님은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불렸다. 말을 아끼고 늘 미소를 지었으며, 대중을 따뜻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는 물론 마을 사람들도 스님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금강산에 머물던 스님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초를 겪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핍박이 거듭되자 잠시 남쪽으로 피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스님과 같이 걸망을 꾸려 동행한 수좌가 법홍(法弘, 1914~2003)스님이었다. 인민군의 눈을 피해 표훈사를 떠나던 그날의 스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원허스님이 부산 범어사를 거쳐 선암사에 방부를 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스님들이 찾아왔다. 당시 선암사에는 서옹, 지월, 무불, 홍경, 석암, 월산, 성철, 향곡, 운문스님 등 수좌들이 정진에 여념이 없었다. 방이 비좁아 ‘칼잠’ 자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원허스님은 “자연스럽게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할 수 있으니, 오히려 공부하기 좋다”고 대중을 격려하고 웃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휴전이 됐지만 휴전선이 가로막아 금강산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불교정화운동이 본격화 됐다. 원허스님은 효봉, 동산스님 등과 함께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청정승단을 바로세우고자 노력했다. 월정사, 건봉사, 신흥사, 낙산사 등 강원도지역 사찰 정화에 대한 총책임을 맡았다. 또한 비구 5인대책위원으로 활동했고, 1962년 4월에는 불교재건비상종회 임시의장을 맡는 등 한국불교 정통성 회복에 최선을 다했다.
대중의 존경을 받으며 불교와 교단을 위해 일하며 서울 적조암에 머물던 스님은 1966년 12월29일 원적에 들었다. 원로의원 인환스님은 “은사 스님께서는 임종게뿐 아니라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다”면서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조용히 세상과 인연을 다하셨다”고 회고했다. 원허스님의 장례는 당시 총무원장 경산스님이 장의위원장을 맡아 ‘총무원장(總務院葬)’으로 성대하게 엄수했다.
■ 원허스님 발자취
1896년 10월 경기도 안성군(현재 안성시) 양성면 방축리 출생. 한학을 공부하고 기독교인이 됐으나, 안성 청룡사 용허스님 영향으로 불교와 인연. 20세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관허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3년간 행자 생활 마치고 유점사에서 비구계 수지. 안변 석왕사 불교전문강원 졸업. 1935년 10월 표훈사 주지. 불교잡지 <금강산> 발행.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불교정화운동 적극 참여. 불교재건비상종회 임시의장. 양양 낙산사 주지 역임. 1966년 12월29일 서울 적조암에서 원적. 세수 78세, 법납 60세.
■ 원허스님 어록
“오늘 큰절(금강산 표훈사)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구만. 큰절이 병화(兵禍)를 겪지 말아야 하는데…”
“절집에서 대중이 함께 사용하는 물이면 지위고하를 가리지 말고 (물 길어오는) 울력을 같이 해야 한다.”
“출가해 수행하는 이가 공부하는 ‘때’가 어찌 따로 있는가”
“(소임을 놓으면) 그대로 떠나면 그만이지, 짐이 무에 많으랴. 출가자에게 개인 소지품이 어디 있는가”
“내가 입은 것은 내가 빨아 입어야지, 어찌 너(상좌)에게 맡기겠냐. 너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진해 다른 사람을 불법(佛法)으로 인도해라”
“말로 표현한 그 자리에서는 당장 없어지고 마는 것이나, 그 언행이 누구의 귀에든 들어가기만 하면 악한 것은 악한대로 착한 것은 착한대로 만 사람의 입을 통해 흘러간다.”
“인생은 될 수 있는대로 좋은 언행을 후세에 남기며, 좋은 생각을 만대에 전하도록 힘써야 한다.”
[불교신문3187호/2016년3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