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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 굴불사지, 백률사
* 청천일칠산우회/ 2018.11.25.
[ 돌아 본 코스 ]
* 포석정 → 나정(양산재, 월암재, 경덕사, 일성왕릉 포함) → 석탈해왕릉, 표암(경주 이씨), 굴불사지(백률사)-점심식사
* 불국사→ 석굴암 → 원성왕릉(괘릉) → 영지 - 저녁식사
탈해왕릉
1.
2. 탈해왕에 대하여
1) 출생 전설
태평양의 다파나국(용성국) 왕비가 잉태하여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불길하다고 궤짝에 넣어 배에 실어서 바다에 버렸다. 동해 아진포에 도착하고 할머니가 걷우워 키웠다.
2) 성명
* 석씨라는 성은, 까치가 배를 따라와 까치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빼고 석(昔)씨로 했다. 이름은, 아이가 궤짝을 풀고 나왔다고 탈해脫解
3) 호공의 집을 빼앗은 지혜
처음 토함산에서 굴을 파고 살다가, 호공의 집을 빼앗고자 술수를 썼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고 관가에 자기 집이라고 소송을 재기했다. 옛날 조상이 대장간을 했는데, 그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관리들이 조사해 보고 인정하여, 집을 빼앗을 수가 있었다. 사기에도 능했다.
4) 김해 수로왕과 둔갑술로 경쟁했으나, 밀려서 실패하였다.
5) 2대 남해 차차웅(딸 아효)의 사위가 되고, 남해의 장자 유리와 왕위계승 경합. 지혜로운 이는 이가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잇금을 보고 연장자를 결정하였다. 그 결과 남해왕의 아들 유리가 3대 왕이 되었다. 잇금은 임금의 어원이 됐다.
3. 탈해왕에 대하여 계속
6) 석탈해는 결국 4대 왕이 되었다. 62세에 즉위하고 23년간 재위(57~80)
* AD 65년, 탈해왕 9년에 김알지가 始林에서 태어났고, 이를 계림이라 하며, 탈해왕은 국호도 서라벌에서 <계림鷄林>으로 바꾸었다.(김알지의 후손 김미추가 13대 미추왕(262~268)이 되어 최초의 김씨 왕이 되었다.
* 신라에서 석씨 왕은 모두 8왕이다. 4대 석탈해, 그리고 미추왕 전의 네임금인, 9대~12대(벌휴,나해,조분,첨해왕), 미추왕 이후의 3임금(14,15,16대 ; 유례왕,기림왕,흘해왕)이다.
* 17대 내물왕 이후는 거의 김씨로 굳어졌다.
* 신라왕 56명중, 박씨왕 10명, 석씨왕 8명, 김씨왕 38명
4. 신라 국호 의미
5.
7) 탈해는 사후에 동악(토함산)의 수호신으로 숭배받았다. 동해를 지키려는 호국 의지가 강했던 왕은 탈해왕, 문무대왕을 꼽는다. 호국 사찰로는 황룡사, 사천왕사를 꼽는다.
6. 탈해왕릉 소나무
7. 탈해왕릉 소나무
8. 탈해왕릉 소나무
9. 탈해왕릉 소나무
10. 탈해왕릉 참배
11. 탈해왕릉 참배
12. 탈해왕릉 참배,신났어요.
숭신전(탈해왕릉 사당)
13. 탈해왕릉 숭신전
14. 탈해왕릉 숭신전, 1980년 현위치
15. 석탈해왕 숭신전
16. 숭신전 소나무
경주이씨 발상지, 표암
17. 경주이씨 조동문
18. 조동문
19. 악강묘
20, 경주이씨, 이알평공 어른이 하늘에서 여기 박바위에 내려와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운 원훈이 되셨다는 것이다.
21. 경주이씨 시조 알평 경모비
22. 경주이씨 시조 알평 경모비
<경주이씨 시조 휘 알평 경모비>
신라의 2천년 역사는 꿈같이 지나갔건만 월성(月城) 옛터에는 돌 한 덩이 플 한 포기마다 조상의 숨결이 배었고, 축복받은 자손들이 대대로 그 전통 그 문화 이어내려 오늘을 누리는 것 생각해보면, 어찌 *느껍지아니하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동경지와 가승(家乘) 등 옛 문헌을 상고하건데 新羅는 본시 진한(辰韓)의 땅으로서 거기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마을은 알천 양산촌이며 그 마을의 어른은 알평(謁平)이신데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 漢宣帝 地節 첫해 壬午 기원전 69년 삼월 초일일 알평을 비롯한 여섯 마을의 어른들은 자제들과 더불어 알천언덕위에 자리를 같이하고 앉아 여섯 마을 전체를 다스릴 거룩한 이를 받들어 모실 것을 의논했었다. (계속)
* 느껍다 ; 마음에 북받쳐 참거나 견뎌내기 어렵다.
* BC 69년; 박혁거세가 탄생한 해.
23. 경주이씨 시조 알평 경모비
그리고 모두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가에 상서론 빛이 땅에 드리우고 거기 흰 말 한 마리가 무릎꿇고 절하는 형상을 짓고 있으므로 달려가 보았더니, 자주빛 나는 큰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용모단정한 동자가 나와 뒷날 13세 되던 漢宣帝 五鳳 첫해 甲子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왕이라 알평 어른이야말로 신라 건국의 첫장을 꾸미신 원훈이거니와 다만 하늘에서 내려 오시고, 알에서 나오셨다는 것들은 우리 옛 조상들의 신성함을 말한 귀중한 기록이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제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여섯마을의 이름들을 고치고 성씨를 내릴적에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李氏로서 성을 삼아 비로소 경주를 본관으로 한 큰 집안이 열리게 되었고 무릇 이천여년을 거쳐오는 동안에 車城, 羽溪 ,陜川, 加平, 平昌, 牙山, 載寧, 原州, 興陽 등 많은 지종으로 나뉘어 가지와 줄기마다 꽃피고 열매맺듯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文武將相들이 헬수 없이 배출되었음을 보거니와 이 어찌 깊은 뿌리에서 솟아오르는 진액의 덕택이 아니며 또한 이 어찌 始祖의 끼치신 은혜가 아닐까보냐
그의 혈통을 받은 자손들이 거룩한 유적지를 그냥 보지못하여 * 순조 때 표암(瓢巖) 위에 시조의 자취임을 새겼고, 순종 때에는 바위 아래 표암재(瓢巖齋)를 세웠으며, 또 근래에 국가에서 거룩한 유적임을 찬양하여 묘우(廟宇)를 세우고 터전을 확장하여 장원과 송죽으로 경내를 미화하여 조상을 사모하는 자손들의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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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楊山)은 남산이며, 나정(蘿井)은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이다. 13세 때 BC 57년에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 제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6부족들에게 성씨를 하사함.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라 일컫고 李氏하사. 경주를 본관으로 한 이씨는 車城, 羽溪 ,陜川, 加平, 平昌, 牙山, 載寧, 原州, 興陽 등으로 갈라졌고, 이들이 모두 경주 이씨에서 파생된 같은 가문임을 알린다.
* 원래 <박바위> (밝음을 가져온 바위) 인데, 순조 때 시조의 자취를 새겼으므로 <표암> 이라고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4. 경주이씨 시조 알평 경모비
그러나 공의 사적은 결코 한 씨족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므로 나는 굳이 그 유적을 찾아 알천 동북쪽 금강산 내린 맥이 마지막 맺힌 표암(瓢巖) 위에 올라 눈을 감고 이천년 전 민족의 옛조상을 사모하며 다시 그 혈통의 큰 인물들이 대대로 겨레위해 큰 업적 끼친 것들을 헤아려 볼 때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명활산(明活山), 금오산(金鰲山), 선도산(仙桃山)이 에워둘렸고 문천(蚊川) 알천( 閼川)이 兄山江으로 흘러 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알평 어른 내리신 자취 이천년 묵은 역사 흐린듯 또렷도하다
옛조상 축복을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있으리.
1979년 11월 11일
* 후학 全州 李殷相 글 / 후학 東萊 鄭夏建 쓰다.
* 후예 秉喆, 제자, 후예 若雨 새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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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쓴 이은상은 경주이씨가 아니라, 역사학자인 전주이씨 이은상이고,
후예 병철은 삼성 참업자 이병철, 이약우는 경주이씨 가문이다.
병철 '제자' 는 한자가 없어서 이해하기 어려우나, 자제를 제공, 즉 이병철이 자금을 대고, 이약우가 세우는 노력을 하였다고 해석된다.
* 인터넷 상에는 이병철 가계가 이완용의 자손이라고 흠집을 내려 하지만, 이완용은 우봉(황해도 금천)이씨, 이병철은 경주이씨, 본관이 다르다.
25. 알천 양산촌 이알평공 사적
표암, 경주이씨 발상지, 석탈해왕릉옆. 화백회의 연원.
굴불사지 석불
26. 굴불사지 / 동쪽 ; 약사여래 좌상
* 이차돈과 관련있는 백률사의 바로 아래에 있는 유적
27. 굴불사지 / 서쪽 : 아미타여래 삼존불
28. 굴불사지
경덕왕 때, 땅 속에서 염불소리. 파보니 큰 바위, 바위 사면에 석불을 새김.
굴불, 즉 땅속에서 부처를 발굴했다는 의미다.
29. 굴불사지 ; 북쪽 십일면 관음보살입상
30. 굴불사지 ; 남쪽 이존입상
31. 굴불사지, 서쪽 아미타여래 삼존불
32. 굴불사지 동쪽 약사여래 좌상
33. 굴불사지 / 얼마나 굴렸으면 저렇게 둥글까? 신앙심이다.
34. 굴불사지, 동쪽 약사여래 좌상
35. 굴불사지, 서쪽 아미타여래 3존불
백률사
36. 백률사는 자추사 옛터다.
37. 규모는 작고 좁으나 나름대로 의미가 깊은 작은 암자다.
38. 이차돈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세운 절, 자추사의 옛터이다.
39. 백률사 송죽당
40. 가을 연등과 맨드라미의 조화
41. 이차돈 순교비가 나왔다.
42. 이 작은 백률사에서 이렇게 훌륭한 불상이 있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보 제28호, 국립 경주박물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