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학교를 마치고 1941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떠난 유학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외투를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습니다. 눈물 콧물이 끊이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는 고아와 같은 내 나라를 두고 가는 마음이 처절했습니다. 그렇게 울다 창밖을 보니 우리의 산천이 나(문선명 총재)보다 더 섧게 울고 있었습니다. 산천초목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통곡하는 산천을 향해 약속했습니다.
“고국산천아, 울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조국광복을 안고 돌아오마.”
4월 1일 새벽 2시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밤바람이 거셌지만 갑판 위를 떠나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가는 부산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도쿄에 도착해서는 와세다대학교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현대 과학을 모르고는 새로운 종교이념을 세울 수 없다는 판단하에 전기과를 택한 것입니다.
입학하자마자 참석한 한인유학생회 신입생환영회에서 나(문선명 총재)는 조국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뜨거운 민족애를 과시했습니다. 일본경찰이 입회한 자리였음에도 당당하게 불러젖혔습니다. 그해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던 엄덕문은 그 노래에 반해 나(문선명 총재)와 평생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도쿄에서 유학생들로 구성된 지하 독립운동조직이 있었습니다. 조국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대동아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일본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한국학생들을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터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지하 독립운동도 점점 활발해졌습니다.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토론도 많이 했습니다. 나(문선명 총재)는 조직에서 도감 책임자가 되어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를 긴밀한 위치에서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였지만 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는 생각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와세다대학 오른편에 경찰서가 있었습니다. 나(문선명 총재)의 활동을 눈치챈 일본경찰은 늘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시했습니다. 방학 중에 고향에 다녀오려고 하면 경찰이 먼저 알고 부두나 기차역에 사복경찰을 보내 배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일본경찰에게 잡혀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유지장에 갇히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한 고문을 받아도 그들이 요구하는 걸 불지 않았고 오히려 맞으면 맞을수록 당당해졌습니다. 뒤쫓아 오는 경찰과 요스가와 다리 난간 위에서 기둥을 빼들고 싸운 적도 있습니다. 당시 나(문선명 총재)는 펄펄 끓는 불덩어리였습니다.
- 가정연합 문선명 총재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중 <펄펄 끓는 불덩어리처럼>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