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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경술원년(1010), 송 대중상부3년ㆍ거란 통화28년
○ 11월 신미일에 지채문(智蔡文)이 도망해 서울로 돌아와서,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예봉을 피하여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해야 합니다"하고는 마침내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채문이 청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쟁이이지마는, 원컨대 좌우에서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제 이원(李元)과 최창(崔昌)이 도망해 돌아와서 스스로 호종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시 보이지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러할 수 있느냐? 그런데 지금 경은 이미 밖에서 노고했는데 또 나를 호종하고자 하니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하고 이내 주식(酒食)과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고삐를 내려 주었다.
이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등과 금군(禁軍) 50여명과 함께 서울을 나왔다.
계유일에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漣川))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말을 달려 이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도망하여 무너졌다가 다시 서남쪽 산에서 갑자기 나와서 길을 막았는데, 채문이 또 쏘아 이를 물리쳤다.
포시(晡時 오후 4시경)에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니,
아전[吏]이 아뢰기를,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하였으나 왕은 일부러 듣지못한 척하였다.
그러자 아전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하였다.
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오느냐?"하니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하자,
응인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등이 모두 도망하였다.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등만이 왕을 모시었다.
채문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못하였다.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곧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는데 국근이 말하기를,
“나의 의복과 행장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하였는데,
채문이 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충성하지 못했으니 목숨을 붙이고 산 것만도 다행이다"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行在)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이 침입한 변고를 자세히 말하고 또 그들에게 힐문하니 과연 공진이 한 짓은 아니었다.
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가 패전하여 남쪽으로 달아남을 보고 그를 데리고 함께 왔다.
이때 공진이 거느린 군사가 20여명이나 되므로 채문이 마침내 그 군사로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이 도적질해간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찾아내 왕께 돌아가려 하였는데, 채문이 공진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면 왕께서 반드시 놀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 뒤에 오기를 바란다"하고는 마침내 혼자 갔다.
충필(忠弼)이 절문에 있다가 이를 바라보고 들어가서,
“지장군(智將軍)이 왔습니다"하고 아뢰니,
왕이 기뻐하며 문밖에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채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적이 빼앗아간 장물(臟物)을 찾았는데 실상 공진(拱辰)이 한 짓은 아니오며, 또 공진과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하였다...147 - 174쪽
몽진을 갔던 임금은 2월 23일에 도성으로 돌아왔다....265쪽
전예부시랑 강감찬은 이제까지 몇몇 강조의 당류들이 아뢴 말을 통합해 보건대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가는 조짐을 발견했다. 이 국보간난한 시기에 이를 어찌 묵과할 수가 있겠는가?
강감찬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어떤 신하가 아뢰기를 국사를 그르치는 임금은 시(弑)함도 가능하다 하고, 가업을 망치는 남편은 버려도 무방하다 하였으나 이런 중대한 언사는 깊이 제고치 않을 수가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그 나라와 백성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정신의 대본인 줄 아옵는데, 만약 앞에 한 그 말을 그대로 용납한다면 우리나라의 신도와 부도는 근본부터 달라지지않을 수가 없는 일대 변혁을 생각하지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이를 어찌 경솔히 생각하오리까?'
'만약 국사를 그르치는 임금을 그 신하가 시할 수 있다면 아비의 과실을 그 아들이 벌할 수가 있사오리까? 가업을 망치는 남편은 버릴 수도 있다면 그 남편의 사이에 난 자식도 팽개치고 다른 남자에게로 개가를 가야 하오리까! 우리나라의 부녀자는 애정도 눈물도 없이 모두 자기 편한 대로자기 일신만을 생각해서 처신해도 좋다고 하오리까?'
'진시황이 그 모후의 음란함을 알고 노해서 죄를 물으려고 하매 신하들이 불가함을 말하니 시황은 불가하다는 신하들을 사정없이 죽여서 시체가 산적했사옵니다. 그런데도 모초라는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시황에게 불가함을 아뢰었사오니 옳은 일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오리까?'
'신은 모초의 심정으로 전하께 아뢰옵니다. 천추태후는 선왕의 모후일뿐만 아니라 전하께는 이모가 되는 왕실의 어른이오니, 설령 태후께서 원한을 품어 그로 해서 해국한 사실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태후를 문죄함은 부당한 일인 줄로 아뢰옵니다. 국난이 있기 전에 많은 백성들은 선왕을 시해한 것을 슬퍼하고 민심이 침체했사온데, 난을 겪은 이제 또 전하께서 태후를 문죄해 보옵소서. 민심이 소연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하의 처사에 얼굴을 돌리는 백성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수습하겠사옵니까?'
강조의 당류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반대의 논진을 펴려는 기세가 보였으나, 강감찬은 위엄으로 누르고 계속해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 지금은 태후를 논죄하고 있을 때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백성들과 더불어 이번에 몸소 난을 겪어보셨지 않사옵니까? 지금은 우리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흥망을 판가름할 중대한 시기인가 하옵니다. 글안이 옆에 있는 한에는 마음을 놓지 못하오리다. 외적은 일시 이 땅에서 물러갔사오나, 또 언제 어느 때 무엇을 트집잡아서 다시 침범해올지 조만을 기약할 수가 없는 일인가 하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외적에 맡기고 맡기지 않는 것과 국가와 민족을 중흥케 하고 못하는 것이 오로지 전하의 경륜에 달린 것이오니, 다시 욕됨을 거듭하시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군사를 기르고 성보를 구축하시어 외침에 대비하옵소서. 조신간의 파벌을 미연에 방지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시어 만민이 다함께 하나로 단결해서 적 앞에 적개심을 갖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오면 개중에 원한을 가지고 적을 끌어들이려는 자 있어도 전하께서 치죄하시기 전에 이 나라의 백성들이 먼저 그를 용인하지 않으오리다. 지엽을 가지고 일을 삼으시지 마시고 대본을 바로잡아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옵소서.'
강감찬의 말은 임금을 감동케 했다. 모두가 옳은 말이었다.
임금은 당일로 강감찬에게 국자감 제주(祭酒)의 직첩을 내렸다. 국자감의 제주 벼슬은 학생들을 교육하는 직책이니, 직접 국정을 관장하는 일에는 좀 사이가 뜬 벼슬이지만 강감찬은 솔선해서 국정에 참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않았다...269 - 270쪽.
국자감제주 강감찬은 군신이 열립해 있는 자리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 옥에 구치한 음녀들을 모두 무죄로 방면하옵소서. 신이 그동안 여인들의 성분을 조사해 보니 그들은 성중의 기녀가 아니면 미처 피란을 가지못한 궁녀들이오며 일부는 남편이 없는 과부들이옵니다...적장을 유인하여 적장과 동침을 할 때 남자의 근원을 뽑아놓고 도망을 했사오니 그 여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새파란 애국심은 찬양을 않고 음녀라는 죄목을 씌워서 목을 베는 것을 어찌 옳은 처사라고 하오리까?'
'...적과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공한 그들에게 응분의 포상을 내리옵소서. 신이 알기로 도순경사 양규, 별장 김숙홍 등은 퇴진하는 수만의 적군을 무찌르고 진중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대장군 채온겸, 신영한, 낭장 원태,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 태사승, 유인택 등이 모두 적을 무찌르다가 장렬한 전사를 했사오니 이런 충혼, 열사에게 어찌 응분의 보답이 없을 수가 있으리까? 이들의 전공을 포상하는 동시에 음녀로 지목된 옥중의 여인들은 자하동 맑은 물에 목욕이나 한번씩 시켜서 모두 무죄로 석방하심이 가하오리다. 아무쪼록 전하께오서는 신이 아뢰는 말을 깊이 통촉하옵소서.'
임금은 옥에 가둔 여인들을 방면하고, 그런 지 며칠 후에는 전몰 장병들에 대한 포상을 내렸다...
그리고 포상이 있은 다음 날에는 왕륜사에서 전몰 장병들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열어서 강감찬이 그 제주가 되어 영령들 앞에 향을 사르니 성 중의 사녀들은 향화를 가지고 와서 바치는 자가 줄을 지었다. 제주가 된 강감찬은 제단에 술을 부어놓고 여러 관민들이 참집한 앞에서 구슬픈 목소리로 자기가 쓴 제문을 읽었다.
'유세차 신해년 사월 정사에 조정을 대표한 국자감 제주 강감찬은 삼가 여러 영령들 앞에 고하노라. 장하다 그대들은 이 나라에 목숨을 받아 적의 내침으로 나라가 순식간에 위태롭게 되자 그 새파란 목숨을 나라위해 바쳤는가. 이제 적은 강을 넘어 물러갔으나 아주 간과의 화근이 끊어진 것 아니매 저들의 재침이 조만에 없지않으리라.
그대들은 우리들에 앞질러서 조국에 충성하는 도리를 몸으로 실천해 보였으니 살아남은 우리들이 어찌 그대들의 목숨을 값없이 더럽힐손가. 다시 적이 오는 때는 우리 또한 그대들의 본을 받아 나라위해 목숨바치기를 맹세하노니, 이 한 잔 술을 우리들의 정성으로 감응하시라.'...279 - 281쪽
강감찬은 오늘의 위령제가 자기 마음먹은대로 원만히 거행된 것을 만족히 생각했다.
수레를 탄 강감찬은 종자들에게 웅천 별서로 가자고 행방을 일러주었다.
이 별장 서재에는 강감찬이 때때로 자신의 수상을 적어 모으는 수상록이 있었다. 이름을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이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도를 즐기며 교외에 사는 사람의 글을 모은 것이란 뜻이 된다....284 - 285쪽
유월 초하룻날 임금은 국자감의 제주로 있는 강감찬의 벼슬을 올려 한림원의 학사승지로 임명했다.
임금은 강조의 잔당들이 다시금 태후에 관한 문제를 들고 일어나서 일이 번거롭게 되자 학사승지 강감찬을 내전으로 불렀다.
'신이 생각컨데 강조의 당류들이 태후를 논죄함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코자 함인 듯합니다. 설령 태후께서 좁은 생각에 원혐을 품고서 약간의 불쾌한 혐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난 후의 민심수습을 위해 그것은 불문에 붙이심이 전하의 덕치를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오리다. 만약 그렇지않고 태후의 죄를 물으신다면 하나를 얻고 다섯, 여섯가지를 잃는 것이 되오니 어찌 삼갈일이 아니오리까.'
'전에 전하께오서 유충하실 적에 태후는 전하를 절간으로 추방하였사오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전하를 모해코자 한 사실이 있었사오니, 태후를 문죄하면 전하께오서는 숙적을 쓰러뜨린 데 대한 쾌하신 마음을 느끼지않으오리까? 얻는 한가지는 바로 그것을 지적한 것이옵니다.'
'다음으로 잃는 다섯가지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서 선왕을 시역했을 때 이 나라의 민심은 강조에게 등을 돌린 동시에 강조가 옹립한 전하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과히 호감을 갖지 못했사옵니다. 하온데, 이제 또 전하께옵서 태후를 문죄하시면 백성들은 태후의 죄는 중히 여기지 않고 반드시 전하를 원망하오리다. 그것이 잃는 것의 첫째가 되오며, 민심이 군주를 이탈하면 국력을 배양하고 전비를 갖추는 데 지장을 초래하오니 그것이 잃는 것의 둘이 되옵니다. 차제에 전비를 갖추지 못하면 다시금 적침의 화를 입게되오니 그것이 잃는 것의 셋이 되며, 나라와 백성이 글안의 노예가 되면 그것이 잃는 것의 넷째이며, 전하께오서 이 나라의 대통을 이으시어 크게 중흥을 이룩하지 못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시는 결과가 된다면 그것이 잃는 것의 다섯 째가 되오리다.'
임금은 강감찬의 말을 쫓아 태후를 불문에 붙이고 다만 행궁을 범한 조용겸, 유승건 등 오륙명만 해도로 유배하는 처벌을 내렸다...295 - 297쪽
강조의 당류들은 강조를 훈일등으로 포상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학사승지 강감찬은 임금 앞에서 단호히 이들의 주장을 반대했다.
'강조는 적군에 사로잡히어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니 그 지조만은 높이 인정하나, 전공에 대해서는 하등 기록할 것이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뿐만아니라 강조는 정변을 일으켰을 당시에 선왕을 시역한 죄책을 면할 수가 없으니 비록 전공이 있다고 가정한 들 역신을 어떻게 논공을 하오니까?'
'신이 조정에 있음으로해서 백성들 앞에 또 한번 정변의 험한 꼴을 보여 민심에 실망을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이 물러나 묘당이 조용한 것이 덕이 되지않으오리이까?'
임금은 수미를 펴지못한 채 묵묵히 말이 없는 중에 강감찬은
'신 물러가옵니다.'하고 어전을 나와서 웅천 근방에 있는 별서로 돌아왔다...297 - 300쪽
임금은 ... 미리 탑상 곁에 마련해 놓았던 직첩을 손수 강감찬에게 내려주었다.
한림원의 학사승지에 문하성의 좌산기상시를 겸임케 한다는 직첩이었다. 좌산기상시는 임금에게 정책을 간하는 것이 그 직책이었다.
'국가가 당면한 시책 중에 반드시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무엇이 있소'
'먼저 국체를 바로 세워야 하오이다. 그런 다음에는 글안에 대한 대비책으로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먼저 선왕(목왕)을 예우하고, 낙향해 계시는 천추태후를 다시 궁으로 봉영해서 왕실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옵니다.'...315 - 316쪽
'신이 생각하옵건대, 글안 왕이 하공진을 죽인 것은 공진이 회유책을 듣지않고 글안왕에게 언행이 불손한 것을 이유로 들고있으나 그를 죽인 이유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듯하오며, 그를 죽임으로써 우리 고려에 대해 어떤 위협을 주자는 저의가 더 큰 이유인 듯하옵니다.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글안이 반드시 무슨 힘에 겨운 일을 제기해올 듯하오니, 당분간은 항의도 문책도 다 보류하시고 글안의 태도를 정관하심이 좋은 줄로 아뢰옵니다.'
신하들의 의견은 대체로 세 갈래로 갈렸는데, 임금은 그 중 강감찬의 의견을 제일 무던한 것으로 생각해서 회의를 끝마쳤다...332 - 333쪽
나이 육십을 넘은 강감찬은 대인접물에 평소에는 화기가 넘치곤 했지만 일단 국사에 대한 논쟁에 임했을 때는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일이 없어 별칭 그를 강고집이라고 일컬었다...
임금은...고발한 자(이인택)의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강감찬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체직을 했다. 당분간 변방의 군사사무에만 전념하고 국정의 참여에는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었다...336 - 338쪽
감찰어사 이인택를 파면한 후 임금은 병마사로 옮겼던 강감찬을 다시 내직으로 들게했다. 그에게 중추사의 관직을 맡긴 것이다.
임금은 연로하고 학식이 풍부한 강감찬을 측근으로 불러서 미해결인 친조의 문제를 협의코자 함이었다. 글안이 요구하는 이 중대한 일은 가부간에 빨리 대책를 세워야 하며 이제 더는 시일을 천추할 수가 없는 절박한 문제였다.
강감찬이 새로 임관된 중추원사는 임금의 측근에서 병기, 군정, 출납 등 사무와 숙위, 경비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중추적인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339쪽
천추태후 제4권, 최인욱, 1988년, (주)어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