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錥 선생의 大本未發時氣象體認 공부론(2012년 2월 27일, 이경룡)
이 글은 이충익 선생이 하곡학을 계승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동안에 심육 선생의 공부론을 찾은 것입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께서 심육 선생의 상황에 맞게 전수하신 글입니다.
이충익 선생이 가학 이외에서도 하곡학을 계승했다는 중요한 근거는 12세에 기장현에서 정제두 선생의 문인 沈錥 선생의 둘째 아들 沈悅之선생을 사사하였다고 한다.① 그러나 심열지 선생에 관한 문집 자료는 찾지 못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여러 아들 가운데 아버지 심육 선생의 학술을 가장 잘 계승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沈錥 선생(1685~1753)이 정제두 선생을 사사하여 깨닫는 悟道과정을 통하여 그의 공부방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심열지 선생을 거쳐 이충익 선생에게도 전수되었을 것이다.
심육 선생은 38세에 정제두 선생을 사사하면서 「鎭江問答」을 남겼으며, 52세(1736)에는 정제두 선생이 서울에 왔을 때에도 문답을 나누었고 곧이어 정제두 선생이 세상을 떠나서 제문을 지었다. 심육 선생은 정명도가 당시 유행하던 참선에 대한 韓持國의 물음에 대하여 “默而識之, 不言而信, 存乎德行”이라고 대답한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제두 선생에게 아뢰었다. 정제두는 대체로 긍정하였다. 정명도는 묵식하더라도 유가의 덕행을 지키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또한 밤에는 太極主靜에 관하여 논의하였으며 이튿날에는 정제두 선생이 「태극도설」의 “而主靜” 세 글자 뜻이 아주 좋으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일렀다. 심육 선생이 정제두 선생 행장을 쓰면서 이 대화를 실었으며 尹淳 선생이 볼 때 정제두 선생 문하에서 심육 선생을 첫째로 꼽을 수 있다는 평어도 실었다.②
심육 선생은 54세에 『맹자』 “先立其大者”라는 말에 감흥을 받아 주렴계와 이연평이 논하였던 主靜공부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였다. 뒤에 主靜의 靜이 動靜의 靜이 아니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主靜공부가 禪學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만 주자의 持敬가 차라리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존양공부로써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다시 「延平答問」을 읽고 수양공부를 하였더니 大本을 깨달은 것 같은 체험을 하였다. 그리하여 “大本未發時氣象體認”이 第一義諦라고 보고 자신의 종지로 삼았으며, 다시 『중용』과 『대학』의 ‘愼獨’을 解悟하고 認證하였다. 그는 이 종지를 炳然(李震炳)과 趙震彬 두 사람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수양공부 종지는 “大本을 미발 상태에서 체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퇴계보다는 율곡이 미발상태를 말한 것에 대하여 더 동의하였다.③
심육 선생은 開悟과정에서 動靜 문제에 계속 괴로워하였으나 52세에 정제두 선생이 지적한 ‘而主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延平答問」에서 主靜공부를 긍정하고 심체의 未發 상태에서 大本을 깨달았고 이를 후학들에게도 전수하였다. 그리하여 ‘大本未發時氣象體認’이라는 수양공부 관점에서 愼獨을 해석하였다. 심육 선생의 未發時體認大本이라는 공부방법이 심열지 선생을 거쳐 이충익 선생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이는 이충익 선생이 하곡학을 계승하였다는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담약수가 진헌장 문하에서 정좌하며서 정명도의 體認天理를 해오하고 隨處體認天理를 주장하였다. 수처라는 말은 동정을 불문하고 항상 禪定상태에서 천리를 깨닫는다는 수양공부이다. 심육 선생 역시 비록 미발의 주정공부에 치중하였으나 동정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大本未發時氣象體認 공부를 지나치게 주정에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우연히 두 학자의 수양공부론이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① 沈悅之 선생에 관한 자료는 이충익, 이시원 두 선생의 기록이 있다. 『椒園遺稿』, 冊2, 「沈先生叙述」. “樗村先生之門。學者多至。篤孝純至。皆推先生。……前後喪皆䟽素凡八九年。以論語近思錄自隨。又從縣人借易程朱傳義。日夕潛究。見道益明而自治益精。慥慥焉如新學生。而忘其身之陻阨也。……忠翊所生先考。同謫是縣。忠翊時甫成童。往來從先生。先生愛憐敎誨如子。數歲而先生沒。” 李是遠﹐ 『沙磯集』﹐ 第五冊﹐ 「先考妣合葬墓誌」。“椒園府君(李忠翊)﹐ 奔命於本養二親南北謫所。……椒園府君﹐ 師事沈先生﹐ 先生諱悅之﹐……大司憲樗村先生諱錥之子也。……與我本生曾祖府君, 同謫於領南之機張縣。椒園府君年十二﹐ 往來受學。”
②정제두 선생, 『하곡집』, 권10, 「行狀」(沈錥 撰). “記﹐ 丙辰﹐ 先生八都時﹐ 敢以‘默而識之﹐ 不言而信’一轉語﹐ 有所講稟﹐ 而即蒙許可。又於陽川侍行之夕﹐ 論太極主靜之說。翌朝先生將乘舟﹐ 立於岸上﹐ 遽以杖招某而進之﹐ 曰:‘而主靜’三字之意甚佳﹐ 更宜努力! 其時竊欲復以平日所思量者請教﹐ 而嚴不敢﹐ 至今以為恨也。前日﹐ 尹淳仲和嘗言: ‘他人之習於先生者﹐ 莫我如也。’”
③沈錥 선생﹐ 『樗村先生遺稿』﹐ 卷38﹐ 「日記(戊午﹐1738年)」。 “余讀『孟子』﹐ 得聞‘先立其大者’一語﹐ 始以濂溪﹑延平所論靜字﹐為反躬存養之地﹐(敬)非如靜之或從禪學中去也。” “晦翁深斥不與動對靜之為不是。……所以伊川之指出敬字﹐ 到朱子益發揮之。蓋敬之視靜﹐ 尤有把持而無弊也﹐ 然而以太極主靜言之﹐ 則周子之意﹐ 似不人靜相對說也。” “頃於求道而莫知所由之日﹐ 汎濫奔放﹐ 未領其要﹐ 偶見「延平答問」﹐ 以為入道之門在此﹐ 乃欲洗心從事﹐ 而先於大本處﹐窺覘彷彿﹐ 尤自妄度﹐ 敢生直截根源之計。……乃以‘大本未發時氣像體認’為第一義諦。……竊欲主張以為宗旨﹐ 亦或以是語人﹐ 而無與相契者﹐ 惟炳然不以為不可﹐ 區區愈益自信﹐ 他人之不與者﹐ 有所不恤也。……乃復取『庸』『學』‘慎獨’之旨﹐ 入心商量﹐ 各復究觀﹐ 則聖人之八字打開者﹐ 都在慎獨。……夫所謂動者﹐ 又非如他人所謂動靜之動也。日昨﹐ 飛卿(趙震彬)見謂: 欲於此用力﹐ 吾以此語略為之說﹐ 而近日見飛卿﹐ 辭氣之間﹐ 有異於前者。蓋知有用功處﹐ 雖不能無如吾前日之病﹐ 而向裡著功之實﹐ 亦有不可誣也。”
첫댓글 원장님의 귀한 논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의 지극하심과 정성이 하늘에 닿아, 하곡서원의
터가 반듯하게 강화에 자리하리라 기대됩니다.
부족한 자신의 예습, 복습을 깊이 반성하면서- - -